난(蘭)쟁이 흥선군
"뭐예요. 사부님?"
"그래도 지금은 좀 깨끗하게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전에 입던 옷은 쿰쿰한 땀 냄새도 나고 더러워서 말이지.
돈도 좀 생기고 해서, 자객 복으로 한 벌씩 준비했다."
"와, 멋있습니다. 사부님. 협객 같은 모양새가 납니다."
"협객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이번 한번만 입고, 버려!"
원범의 입술이 삐죽거리고 있었다.
몸에 착-하고 기분 좋게 달라붙는 자객 복을 점잖은 도포 안으로 겹쳐 입고,
상추가 미리 준비해둔 말을 사이좋게 나눠 타고 성문 밖에 나가서 일을 치기로 하였다.
며칠 전 흥선군이 얘기해 준 건이었다.
진상품이 올라오는 한적한 길목을 골라잡아,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위로 걸터앉아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잠시 후 먼 곳에서 바람을 타고 오는 유별난 새소리가 그들의 가까이로 느껴지자,
원범이 머리를 쭉 빼서 길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섬이 아범이 보내는 소리예요. 진상행렬이 가까이 오나 봐요 ... 이런!"
길목을 살피던 원범이 조용해 졌다.
"왜."
"사부님, 큰일 났어요. 너무 길어요!"
"뭐가."
노 상추가 원범의 어깨를 누르고, 길목을 향해 고개를 빼어 들었다.
"이런! 역시 지방에서 관아로 향하는 행렬과는 비교도 안 되는구나. 이러면... 어찌 해야 한다?!"
섬이 아범이 보내던 새소리도 잦아 들고, 그들도 잠시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오늘... 은 하지말자!"
"네? 사부님, 그러면 이곳까지 와서 음식을 챙겨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섬이 아범과 다른 아재들에게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저렇게 큰 행렬을 우리 둘이서 어찌 한다는 게야. 게다가 원범이 넌, 이 나라 임금인걸 잊고 있는 게냐?
저들에게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모두가 다 곤란해진다.
또 그놈의 역적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저들이... 사부님. 그냥 맨 마지막 수레 하나만 털어요. 어...?"
원범이 옷 위를 이리저리 더듬고 있었다.
"네 옷엔, 예전 무기들 안 챙겨 넣었어."
"네? 그러면 어떻게 싸워요?"
"어차피 이번엔 그냥 미혼약만 쓰려고 했다."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미혼약을 다 뿌려요?"
"우리는 산채 식구들이 먹을 음식만 조금 챙기면 되니, 네 말대로 마지막 수레만 은밀히 접수한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공물 행렬이, 그들이 올라앉은 나무 아래로 하나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우마에 매단 수레 열대 쯤이, 인적이 드문 좁은 길을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이어오고 있었다.
"사부님. 저기 흥선군 입니다! 성 안에서 물품을 전해 받는다고 하던데, 오늘은 물건이 많아서인지, 이곳까지 마중을 나온 것 같습니다."
행렬의 중간쯤, 남색 철릭을 멋스럽게 입은 흥선군이 짙은 갈색의 말 등 위에 올라앉아 우아한 자태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 이걸 쓰거라!"
얼굴까지 다 가릴 수 있는 두건이었다.
"촘촘하고 가벼운 견사로 만든 두건이니, 잠시 동안은 미혼약에서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도 이 곳에서 함께 잠들어 버릴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수레와 말의 방향을 돌리도록 하거라!"
"한대만 몰래 돌린다고, 앞서 가는 이들이 계속 모르고 가지는 않을 텐데요.
차라리 저 정도의 오합지졸의 무리라면, 우리가 충분히 해치울 수 있습니다!"
"쓰-읍! 그냥 말 듣고 미혼약이 뿌려지면 바로 내려가 수레를 돌리도록 하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사부님."
마지막 수레가 그들의 앞으로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자 던져라!"
노 상추의 말이 떨어지자, 마지막 수레위로 원범이 미혼 약 가루를 가득 채운 돼지 오줌보를 살며시 던져 올렸다.
동시에 작게 개량한 '수노기'를 조준하고 있던 노 상추가, 은밀하게 퉁- 하고 튕기는 소리와 함께 작은 화살을 정확하게 오줌보를 향해 내리 꽂았다.
'완위각'의 문규가 만들어준 작은 '수노기'는, 작은 소리와 날렵한 작동으로 이런 은밀한 공격에는 더 없이 안성맞춤이었다.
낮은 허공위에서 바람을 타고 내리 퍼진 미혼약 가루는 순식간에 수레 하나를 둘러싸고 있던 포졸들을 쓰러뜨리며 잠재워버렸다.
나뭇가지에서 가볍게 땅으로 내려앉은 원범이 조심스럽게 말의 고삐를 잡아 방향을 틀고 있을 때였다.
"도적이다!"
앞의 수레를 끌고 가던 포졸하나가 어색한 기척에 뒤를 돌아 본 모양이었다.
원범이 수레의 방향을 거의 반대로 돌려놓은 순간이었지만, 포졸의 외침 소리를 들은 다른 앞서 가던 포졸들도 줄줄이 모두 상황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검을 빼어들고 마지막 수레 쪽으로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수레와 함께 얼마를 내달리던 원범의 바로 뒤로, 역시 흥선군이 탄 말과 금위영의 군사 몇 명이 다급하게 먼저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원범이 내달리던 수레의 말을 멈추며 순식간에 수레위로 올라섰다.
"에-힉!"
기침은 참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거의 가까이 다가와 선 흥선군이 기침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수레위에 올라섰던 원범이 날듯이 가볍게 허공으로 뛰어 올라 먼 거리까지 내달은 후,
길 어귀에 세워 두었던 말위로, 또 한 번 가볍게 뛰어 올라타고 있었다.
"경공의 경지다!"
함께 달려왔던 군사들과 포졸들도,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복면의 사내를 향해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저렇게 기침하는 인간들도 꽤 있나보군!'
흥선군이 맹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였다.
"대감, 큰일 났습니다!"
저만치 떨어진 행렬에서 뛰어오던 포졸이 외치고 있었다.
"맨 앞의 수레가! 맨 앞의 수레가 사라졌습니다!
****
"자 한잔 하게."
"아이쿠 형님, 뭐가 이렇게 맛좋은 술이 다 있답니까?"
술 한 잔에 호들갑을 떨고 있는 흥선군을 향해, 김 좌근이 탐탁찮은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옹원에서 만들어낸 술도 이 맛에는 발끝도 못 따라 오겠습니다."
"됐네. 임금이 드시는 술이 우리 집 술보다도 못하다는 말이나 할 거면,
술잔 내려놓고 가져온 난 그림 값이나 얼른 챙겨서 가도록 하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이미 세상 기운이 형님에게로 기울어진 것은 조선 천지에 모를 사람도 없는데,
술 맛 뿐만 아니라 그 뭣도 형님 것이 최고라고 한들, 무슨 말이라도 할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할라 구요!"
"허허 참, 그래 두 이 사람이!"
"그리고 이렇게 말도 꺼내기 전에 항상 그림 값을 후하게 챙겨 주시니, 제가 어떻게 형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 하!"
싫지는 않은 듯 한 표정을 띠던 김 좌근이 드디어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흥선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궁으로 들어오는 진상품을 보호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지."
"네, 그렇습니다 형님. 그것도 참 일이라고... 도둑도 좀 맞고 빼앗기기도 좀 하는 것이 세상일인 것을요!"
"그래, 그렇지. 자네도 그리 생각을 하는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를 바라보던 김 좌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얼마 후 자네 형수가 치성을 드릴 일이 좀 있다고 하는 군.
그게 한강의 물고기들이 하루 정도는 넉넉하게 배가 부르도록 적선을 해야, 효험이 있다고 극성을 부리니 말이야.
곳간에 넘쳐 나는 게 쌀인데, 다 써도 좋다고 얘길 해도 그러는 게 아니라고 또 날뛰더군."
김 좌근의 이야기에 흥선군이 의아한 표정을 띠었다.
"그게 그러니까, 얼마 전 수확한 햅쌀을 사용해야, 정성에 감읍한 용신이 잘 살펴 주실 거라고 믿고 있으니 말이야!
어쩌겠나. 한성부 안에는 농사를 짓는 곳도 없는 터에, 지금 당장 급하게 어디서 그 많은 양의 쌀을 사 올 데도 없는 것 같고."
"아 하, 좋은 일을 하려는 데 형수님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겠습니다!"
흥선군이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 이제 각 지방에서 진상하는 햅쌀이 여러 곳에서 올라올 터이니, 내 미리 셈을 좀 치르고 급한 대로 먼저 좀 가져다 써도 괜찮겠는가?"
"아유, 형님도 참, 잘 아시면서! 궁으로 오는 물건을 따로 떼서 셈을 하다니요. 누구 목이라도 떼이는 걸 보려고 그러십니까!"
김 좌근의 얼굴에 노기가 스물 올라오고 있었다.
"세상 온갖 잡것들도 나라님 먹을 음식에 손을 대는 판에, 이판 대감께서 좋은 일에 쓰실 물건을 따로 떼서 좀 챙겨 간다고 한들, 무슨 문제라도 되겠습니까!"
"... 응?"
김 좌근이 의아한 표정으로 흥선군을 바라보았다.
"급하지 않으시면, 이제 보름 후쯤이면 마포나루 앞으로 도착하는 세곡선이 있습니다."
김 좌근의 조금 더 맹한 눈길이, 흥선군의 주름진 입술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전라도에서 보내온 이 천 섬의 햅쌀이 도착할 예정이지요.
번거롭게 다른 사람들에게 내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얼마쯤 따로 떼서 실어 놓을 테니, 칼부림 몇 번 보여 주시고 먼저 가져가시면 되실 일이지요."
"어허 거 참! 자네도 이제 보니, 제법 시원시원한 사람일세!"
무릎까지 탁 쳐올리며, 김 좌근이 제법 흥이 난 모양이었다.
"난(蘭) 값은 무거워서 자네가 직접 들고 가기가 힘들지 않겠나.
말 한필 준비해서 난 값과 술 한 동이 실어 놓으라고 아랫것들에게 얘기해 둘 터이니, 너무 취하지 말고 말이나 잘 끌고 가시게."
"아이고 형님, 뭘 이렇게 까지 챙겨 주십니까!
그리고 소인이 진상물품 장계를 보아하니 말입니다 ... 진상품이란 것이 참 희한하고 진귀한 것들이 많은 것 같습디다.
이것도 나라일인데, 이판 대감께서도 두루두루 함께 알고 계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 번 씩 물품 장계도 보내 드리도록 할 테니, 살펴보세요. "
"그러시게. 죄다 보낼 필요 없이 특별하거나 귀한 것들이 생기면, 한 번 씩 구경삼아 보내 보시게."
"예 형님,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저..."
"무언가?"
"제게 '공기첩'을 하나 써 주시겠습니까?"
"공기첩? 무슨 그런 말이 다 있는가?"
"그게... 후에, 형님이 이 나라 조선에 유일무이한 실세가 되셨을 때, 저 같은 소인배를 어디 기억이라도 하겠습니까?
저도 제 요량을 좀 해야 하니, 지금 제가 형님을 위해 예쁜 짓 좀 했던 거라도 직접 기록해 주시면,
후일 잊지 않고 저도 형님 덕을 좀 볼 수 있지 않겠나 ... 하는 것이지요. 하하!"
듣기에 싫지 않은지, 또다시 김 좌근이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사람 참, 애 같기는 여전하구만. 그래 알았네! 모일 모시에 무얼 얻었는지 적어 줄 테니, 잘 간직하고 있다가 아쉬울 때 지전처럼 쓰게나."
"아유 형님, 마음도 넓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보름 후의 것부터 ..."
미리 준비해온 작은 책 뭉치를 소맷자락에서 꺼내어 김 좌근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공기첩'이라면, 자네의 공을 기록해 놓은 책이라... 이거인거지. 하하!
그렇다고 이것저것 너무 많은 장계들을 보내지는 말 어! 눈도 있고 하니, 크지 않고 귀한 것으로만 정리해서 보내게."
"형님 그렇다면, 얼마 전에 경상도에서 올라오던 건어물과 산나물들이 실린 수레는...?"
"무슨 소린가! 내가 건어물이 왜 필요해. 구린내 나게. 그런 것 도 털렸단 말인가?
어허 참, 일을 어찌 하는 겐가. 정신 좀 바짝 차리지 않고!
자꾸 그렇게 털리고 하면, 진상을 다시 해야 하는 백성들 원성을 어찌 다 감당하려고 하는가. 쯧쯧..."
"형님이 아니셨어요? 그럼 이 한성부에 형님 말고 할 사람이, 또 있단 말이에요?"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게야, 사람을 뭘 로 보고!
쌀도 부피만 가득한 것이 번거로워서 안하려고 했지만,
하도 집에서 햅쌀 햅쌀 하는 통에 손을 좀 대는 것이지.
먹는 거 이런 거는 나는 관심도 없으니, 아예 장계도 그 쪽으로는 보내지도 말게."
"아 예... 형님. 그럼 ... 그, 그때 그 날렵한 사람들이 형님 편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
"이런 모자란 사람하고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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