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2부 프롤로그(2)
한순간 뭔가를 더 생각할 기분이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앞에 있는 이 순진한 아이한테 감정풀이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속을 한번 진정시키고 헤라클레스와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럴 때 가장 마음 편한 건 일단 화제를 돌리는 것이다.
“너도 조만간 직위를 하사받겠네.”
헤라클레스가 주신이 되는 건 당연했다. 본인 말로는 아직 헤스티아밖에 주신 칭호를 하사받지 못했다는 모양이지만 이 애가 조금 더 성숙해지면 제우스가 이 아이를 주신으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다. 뭐, 그런 생각에 던진 소리였는데, 헤라클레스는 의외로 시무룩한 반응을 보였다.
“저는······. 모르겠어요.”
“자신이 없어?”
헤라클레스는 당장에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다만 그 표정에선 여러가지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정들이 엿보였다.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순수한 모습, 네메시스의 아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뭘까나, 이 애를 이렇게 골치아프게 할 일이. 짚이는 거야 몇 개 있어도, 뭔가 그게 다일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짚이는 것들 중 하나를 집어 말했다.
“여전히 아폴론하고는 사이가 안 좋니?”
내 말에 반응하는 얼굴, 흠칫 하는 걸 보니 대답 안 들어도 알 것 같네. 헤라클레스는 그 반응 이후에 말을 고르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제가 더 잘 해 나가봐야 할 일이라는 건 알지만요······.”
“나는 내심 아폴론이 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아폴론은 제우스의 아들이다. 헤라클레스와는 배다른 형제, 크레타 섬의 왕녀에게서 태어난 아폴론은 왕족으로서, 그 중에서도 ‘신의 아이’로서 왕가 사람들에게 교육받아온 ‘의식’에 대한 자아가 상당히 강했다.
“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헤라클레스는 사려깊네.”
“그런 게 아니예요. 단지 아폴론의 말들 중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을 뿐입니다.”
아폴론과 헤라클레스는 사이가 좋지 않다. 정확히는 아폴론이 헤라클레스를 싫어한다. 자신이 수확당해 성장하지 못하는 동안에 성장한 헤라클레스가, 태어난 순서를 모두 재끼고 맏형이 된 헤라클레스가 아폴론의 ‘의식’적인 부분에 상당히 못 미쳤기 때문이다.
“아폴론이라면 분명, 자기가 너에게 심한 대우를 했다는 걸 깨달을 거야.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말이지.”
헤라클레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생각을 곱씹을 뿐이었다.
나는 몇 달 전, 아테네를 찾아온 아폴론의 입에서 자신이 헤라클레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 알았을 때엔 그 자식이 밉지 않았어요. 그저 조금 모자른 형이라고 생각했고 내심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그 자식을 잘 도와준다면 앞으로의 일들을 잘 해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래, 내가 아폴론이 언젠간 헤라클레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가 바로 저 말 때문이었다. 아폴론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니까.
‘어려서부터 저는 자리가 주는 의미와 그 책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머니인 3왕녀님과 다음 왕위를 이으실 1왕자님께서는 그 분의 다음 대 후계자가 될 절 지탱해줄 제 형제들에게 제가 배운 걸 실천해보자 하시면서 마음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죠. 저 또한 그게 좋았습니다. 형님들과 누님들은 저를 의지해주셨고 동생들은 저를 따랐죠. 그랬기에 올림포스에서는 제가 그자식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내심으로는 제가 제 능력으로 앞장서 활약하고 싶었지만요.’
아폴론의 이런 태도가 변했던 것은 헤라클레스가 수확당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였다고 한다.
‘억울했었어요. 부당하다고 느껴졌어요. 나는 뭐 때문에 그자식을 보좌하려고 생각한 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내가 앞장서 모두를 이끌었으면 좋았을텐데. 그 자식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자식이 저보다 나은 걸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수확당하지 않았더라면 저 자식보다 수십배는 잘 해냈겠죠. 저 자식은 제가 잃은 4년을 허투로 쓴 머저리예요. 도대체 왜 더 잘 해 보일 수 없는 거죠?!’
그 뜨거운 감정은, 그 아이가 얼마나 가문의 일에 열심이었는지 알 수 있는 감정이기도 한 그것은 분명 그 나름대로의 의지가 느껴지는,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폭력적인 감정으로 표출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어린 날의 치기 어린 반항이며, 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품은 어린 마음이다.
헤라클레스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얼마나 올림포스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아폴론이 자신을 부정하는 이상, 자신을 부정하는 아폴론의 말을 맞는 말이라고 느껴버린 지금, 자신의 그 노력을 자신이 알아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저 아이가 저 아이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 헤라클레스를 긍정해주려던 나는 이어진 헤라클레스의 말을 듣고 그런 말을 건넬 수가 없게 되었다.
“아폴론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최근 아폴론이 저를 더 경멸하게 된 건······. 제가 ‘주신’의 자리를 거절했기 때문이예요.”
“어?”
“주신의 자리를 거절했어요. 물론 제가 아직 권능을 각성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예요.”
이윽고 헤라클레스는 입에 담았다. 헤라클레스가 저런 얼굴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저 어리고 불행한 아이가 무엇을 그토록 고민했었는지를.
“저는······. 어머니를 찾고 싶어요!”
너무 얕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는 올림포스의 핏줄을 이은 ‘주신’후보이기 이전에 한명의 어린 ‘아이’라는 것을, 왕가에서 태어나 강인한 ‘의식’을 지니고 있던 아폴론과는 다르게 아버지 없이 자라와 어머니에게 버려진 연약한 ‘아이’라는 것을.
나는 순간 이 이야기를 더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해버리고 말았다.
“괜찮아! 분명!”
그래서 나는 조금 과장되게, 의도적으로 텐션을 올리려는 티를 잔뜩 내며 대답했다. 그런 내 모습에 살짝 놀란듯한 헤라클레스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미소지었다.
“분명 다 잘 될 거니까!”
나는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응접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님들아! 오늘은 기분이야! 아침부터 술판 좀 벌여보자고! 창고에 있는 걸 좀 무료로 풀 테니까 사람들 좀 모아줄래?!”
“오오오!!”
나는 그렇게 다짜고짜 술판을 선언하고 뒤돌아선 뒤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헤라클레스를 향해 윙크했다. 헤라클레스는 내가 기운을 복돋아주려고 했던 걸 눈치 챈 건지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그거면 된다. 내가 여기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끊은 진짜 이유를 저 아이가 알아서는 안 되니까.
내 추측이 맞다면 저 아이의 어머니, 네메시스의 이야기를 저 아이와 깊게 나누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네메시스는 지금 분명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저 아이가 그 사실을 눈치채는 날엔 상당히 골치아픈 뒷일이 기다릴 게 분명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해는 저물었고 일찍이 시작한 술판에 반나절 넘게 어울렸던 나와 헤라클레스는 잔뜩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돌아오자마자 한층 더 올라오는 술기운에 폭소를 터트리며 바닥에 엎어지자 마찬가지로 잔뜩 열이 올랐던 헤라클레스 역시 재밌다는 듯 웃다가 내 옆에 쓰러져 누웠다.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좀 놀랐다?”
“어지러워요~”
술판이 열린 뒤 헤라클레스는 처음에 낮을 가렸다. 말투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대로의 반응이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 술집에 처음 들어온 날이 생각나는 반응을 보였었다. 다만 그 무렵의 나와 달랐던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같은 테이블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 게다가 그 사람은 이 가게의 주인이자 술판을 연 장본인인 나. 내 존재로 인해서 헤라클레스는 열기 가득한 분위기 속에 빠르게 녹아 들었다.
“그렇게나 마실 줄은 솔직히 몰랐는데.”
“누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헤라클레스가 과음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성에 면역이 없던 이 아이가 마을 여성진들에게 둘러쌓였을 때 선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가 술을 들이켜는 것밖에 없었던 것.
“하하하! 네가 웃어주기만 했어도 좋아 죽었을 걸?”
뭐, 어쩔 줄 몰라하던 이 아이가 머뭇거리며 술을 마시는 모습도 재미있게 구경하던 모양이었지만.
“저한텐 무리예요 그런 거······.”
오늘 하루, 나는 이 아이를 관찰하는 데 신경을 크게 기울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겁게 즐겨줬으면 좋았으니까다. 그랬던 내가 보기에 이 아이는 오늘 분명히 즐거워했다. 헤라클레스가 말은 저렇게 했어도 그는 오늘 제법 많이 웃었다. 자신이 어렵다고 말하는 의도하고 지은 웃음이 아닌, 자연스레 흘러나온 웃음을 오늘 몇 번이고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저 아이의 자존감이 얼마나 바닥인 상태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네 아버지가 네 자리에 있었으면 아마 좋다고 놀았을 걸?”
나는 여전히 가볍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에이~ 아버지를 뭐로 보시는 거예요.”
“니 아빠? 그 인간은 한 마리의 짐승이지. 처음 본 여자한테 자기 애를 낳아달라 하는 사람이야.”
“에이, 아피 님도 참, 거짓말도 짓궂으시네.”
“후후, 인간에겐 누구나 사악한 면이 있기 마련이거든.”
“아피 님에게도 있어요?”
“그럼!”
내 사악한 면이라, 너무 많아서 다 읊기도 어렵지만, 이 아이에게 와닿을 이야기라면 몇 가지 있다. 내가 주신의 자리를 맡지 않았던 이유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놀고 싶어서였다는 것과 어머니를 찾고 싶다는 이 아이의 앞에서 네메시스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기려 한 것이려나.
“뭔데요?”
“사람은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말하지 않는 법이지.”
다만 나는 그 치부를 이 아이 앞에선 말할 수 없다.
“뭐예요, 진짜.”
헤라클레스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뭔가 말하기 부끄럽지 않은 얘기는 없어요?”
“말하기 부끄럽지 않은 얘기라······.”
나와 헤라클레스는 여전히 현관 앞에 나자빠져서 창 틈새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을 이불삼아 누운 채 고개만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 편안하다는 듯 나긋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렇게 물어온 헤라클레스에게 나는 해줄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말하기 한 줌 부끄럽지 않은 나의 사악한 면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조금 생각한 나는 딱 맞는 화두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천장을 올려다본 채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남들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하는 사람이라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런 질문이 돌아온 건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고개를 다시 돌려 헤라클레스를 보았는데 그는 내 말이 정말로 의문이라는 듯 순수한 얼굴로 그런 말을 건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야기해줘야 하겠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그렇게 긴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과음했다고 해서 듣다가 자면 안 된다?”
“그럴 일 없어요.”
너무나도 단호하게 대답하는 이 아이를 보고 있자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기분이 편안해진 나는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눈을 감았다. 추억을 그리듯 지난 일들을 되짚었고 가라앉아 있던 한 척의 한 척의 침몰선을 기억의 바다 속에서 찾아, 그 파편들을 하나 둘 끌어올려내기 시작했다.
“작년 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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