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지워버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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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a96
작품등록일 :
2024.05.1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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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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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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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바벨 002. 그 날의 기억

DUMMY

가브리엘의 말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에덴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이미 네메시스를 통해 알고 있었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가브리엘이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녀가 말하는 몇 가지 추측들은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가브리엘의 입에서 상세한 일들을 전해들었을 때, 나는 이 일이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게 돼, 머릿속이 다소 복잡해졌다. 가브리엘 역시 이미 깨달아버린 모양이지만 지금 현재, 가브 언니를 비롯한 우리엘, 미카엘, 메타트론, 즉 천사들의 생사여탈권은 모두 루시퍼가 쥐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언니 생각이 맞아. 천사들, 아니 루시퍼를 제외한 천사들은 이브 에데니아의 ‘피조물’이야.”

“역시, 그랬구나. 그렇다면 루시퍼는······.”

“그 여자의 피를 이은 유일한 인간, 단 하나뿐인 친자식이야.”

“그랬던······. 거였구나······.”

“그 쪽에서 언니나 다른 천사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퍼가 이브 에데니아를 지배했다면 루시퍼의 명령 하나만으로 이브 에데니아는 천사들을 모두 재로 만들 수 있어.”

에데니아의 천사들은 이브가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재’가 될 수 있는 ‘피조물’, 그리고 그런 이브의 의사를 조종할 수 있는 루시퍼, 천사들의 목숨은 루시퍼에게 달린 것과 마찬가지다.

크로노스와의 결전 때 우리엘의 안부를 걱정했던 이유도 역시 이것이다. 우리엘이 이브를 배신했었다는 걸 이브가 눈치채게 된다면 우리엘에게 내려질 형벌을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내 말을 들은 가브리엘의 표정은 얼핏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그녀 스스로 아직 체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이겨내 봐야 하겠지. 그 외엔 선택지가 없으니까.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성녀님이 직접 내린 사형 선고가 아닌 걸, 난 그걸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확실히, 내가 가브 언니를 도와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아니, 이유가 없다 해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지금,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궁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한가지 맹점, 어쩌면······. 이건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내가 이 일을 마냥 남 일처럼 바라볼 수 없는 커다란 이유가 가브리엘의 이야기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맹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나는,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되짚어 가며 생각을 이어간 나는, 내가 이 이야기에서 ‘위험’을 느꼈던 이유를 결국 특정 짓는 것에 성공했다. 생각만 해도 숨 막히는 그 이유에 나는 양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숨을 골랐고, 한 차례 마음을 가다듬고는 가브리엘을 향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날의 기억을.

“언니, 어쩌면, 이 일, 생각보다 더 어려울지도 몰라.”

“응?”

”루시퍼가 숨통을 쥐고 있는 사람이, 이브 에데니아나 천사들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나까지, 내 숨통 역시 루시퍼에게 쥐어져 있을 지도 모르거든.”

내 분위기에서 심각함을 읽은 가브리엘은 눈매를 예리하게 좁히며 내 말의 뜻을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야?”

“루시퍼가 어떻게 이브 에데니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인지, 왠지 알 것만 같아.”


***


언니가 추측했던 루시퍼의 찬탈 시기, 그거 아마도 정확할 거야. 언니는 확증을 잡지 못해 추측만 할 뿐이었지만 언니가 말했던 대로, 나는 알고 있으니까. 내가 루시퍼를 조심하라고 했던 이유, 그 이유와 이어지는 이야기야.

언니는 ‘권능’에 ‘조건’이 붙는다는 것, 상상할 수 있어? 그치, 언니의 입장에선 ‘의아한 발상’일 게 분명해, 언니와 같은 계열의 능력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뿐이지, 능력 자체를 발동하는 데 ‘조건’이 필요하다는 상황을 겪어본 적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달라. 내 권능, ‘기억’의 권능은 사용할 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 그리고 조건이랄까, 조건과는 다르지만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최대한 표현해보자면 ‘법칙’이라고 하는 게 좋겠네. 내 권능은, 상대하는 사람의 상태나 내가 권능을 쓰려고 하는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규칙이 있어서 나름 일관적인. 그러니까 ‘법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현돼. 앞서 말한 ‘조건’들도 어떻게 따지면 이 ‘법칙’안에 속한다고 봐도 좋겠네.

응, 역시 언니야. 언니의 예상대로 내가 말하려던 건 내 권능의 규칙 따위가 아니야. 루시퍼가 가진 권능에 법칙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야. 루시퍼가 어떤 계획을 세웠던, 그걸 실행할 수 있었던 게 최근 일일 수밖에 없던 것 역시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어.

루시퍼의 권능이 정말로 사람을 지배하는 능력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권능에 조건이 없다면 이브 에데니아는 지금보다 훨씬 이전,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루시퍼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또, 라파엘이 살해당했다는 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야. 루시퍼의 ‘지배’에 조건이 없었다면 라파엘을 죽이는 것보다 지배하는 쪽이 유리할 테니. 마지막으로, 그런 능력을 가진 루시퍼를 이브, 그 교활한 여자가 자신 곁에 두고 있었던 이유도 그걸로 설명이 가능해.

언니가 루시퍼의 권능을 몰랐던 것처럼 이브 역시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아, 언니도 말하면서 이상한 걸 눈치챘지? 그래, 그게 맞을 거야. 정체 불명의 능력을 가진 인간을 이브 에데니아가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

이브는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해. 루시퍼가 사람을 지배하는 권능을 쓸 수 있다는 걸, 그럼에도 곁에 두었다는 건 알고 있었던 거야. 루시퍼가 자신에게 권능을 쓸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최근에 루시퍼는 이브 에데니아를 지배할 수 있는 ‘조건’을 만족했고 이브는 자신의 인식에 발등을 찍힌 형태가 된 것이지. 그리고 나는 그 조건, ‘법칙’에 대해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있어.

어떻게 알았나면, 그 조건을 만족시켜준 사람이 아마도 ‘나’.

그래,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어쩌면 이 일은 내가 발단이 돼서 벌어진 일일지도 몰라.

이야기하자면 우선, 내가 에덴을 떠났을 무렵 제우스를 회유하라는 임무를 마치고 귀환해, 배웅 나왔던 언니와 이야기한 바로 다음 일부터 이야기해야겠네.

언니가 그 때 그랬지? 내가 제우스와 많이 친해진 것처럼 보였다고. 언니가 우리엘에게 들었으면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미 그 시점에 내 진짜 신분을 깨달은 상태였어. 제우스가 내 가족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지. 언니가 그렇게 느꼈던 건 아마 그래서였을거야.

이브에게 임무 보고를 하던 내가, 그 제우스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던 와중, 내가 이브 에데니아의 목적을 가늠하기 위해 그 사람의 기억을 엿봤던 것에서부터 이 일이 시작돼.

내 권능의 ‘규칙’그것들 중 한가지는 ‘권능’을 각성한 ‘마인’에게 권능을 사용했을 때, 그 대상은 자신이 권능에 당했다는 걸 자각할 수 있다는 거야. 그것 때문에 이브에게 반기를 돈 꼴이 되었던 나는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었지. 우리엘에게 들은 적 없는 얘기라고? 당연해. 우리엘에겐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루시퍼를 대면했던 것, 내가 루시퍼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던 일이 바로 이 감옥에서의 일이야. 감옥에서 눈을 뜬 내 눈 앞에 루시퍼가 서 있었던 거야. 나를 감옥에서 빼내주겠다는 루시퍼, 거역하면 좋은 꼴 못 볼 것이라고 말하던 그 남자의 말을 나는 거스를 수가 없었지. 그리고 내가 무슨 연유로 수감된 것인지 내게 자백을 받아낸 루시퍼, 내 권능이 기억을 엿보는 권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루시퍼가 내게 요구했던 건 두 가지였어.

‘기억’, ‘나’의 기억과 ‘이브 에데니아’의 기억.

루시퍼는 나와 이브 에데니아가 무엇을 계기로 각성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를 캐물어왔어. 지금에 와서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나는 아마도 그 ‘기억’이 루시퍼가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야.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가 않아.

왜냐하면 최초에, 루시퍼의 말을 곱게 따를 생각이 없었던 내가 내 기억에 거짓을 섞어 말했을 때, 그 남자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단번에 간파하고 말았으니까야. 그 때 그건 의심의 수준이 아니었어. 그냥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는 말투였어. 당시에는 어떻게 그걸 간파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루시퍼의 권능이 그런 종류, 나와 같이 ‘조건’이 붙는 권능이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지게 돼.

거짓말로는 안 됐던 거야. ‘조건’의 만족 여부, 루시퍼는 내 말을 듣고 그걸 통해 권능을 사용하는 조건의 만족 여부를 확인했을 거야. 그리고 그걸 가지고서 내 말의 진위를 구분했어. 응, 어쩌면 나 역시 루시퍼에게 당할 수 있다는 건 이런 예기야. 내 이런 추측이 맞다면 루시퍼는 이미 나를 ‘지배’할 수 있는 조건을 만족하고 있어.

걱정 마. 당장에 위험하지는 않을 거니까. 아마도 그것 말고 다른 조건이 있는 거겠지. 이것 역시 쉽게 예상이 가능해. ‘사정거리’ 나는 루시퍼가 권능을 사용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 아니 두 번째 조건이라기보단 ‘공통 조건’이라 보는 게 타당하려나. 나 같은 경우엔 상대가 ‘마인’이던지 일반인이던지 관계없이 ‘사정거리’의 영향을 받으니까. 물론 내가 그렇다고 저쪽도 그럴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 때 내 기억을 들은 루시퍼는 이후에 이브 에데니아의 기억을 요구했어. 지금까지의 추측이 맞다면 바로 그게 루시퍼가 이브 에데니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조건이 분명해. 당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루시퍼가 그걸 확인해보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게 루시퍼의 권능에도 사정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이유야. 단순히 첫 번째 조건만으로 지배가 가능했다면 그걸 확인하러 움직일 필요는 없었겠지.

내가 우리엘에게 루시퍼를 조심하라고 했었던 이유는 그 일 때문이었어. 당시엔 이브의 기억을 왜 요구했는진 몰랐어도 이브가 가둬 놨던 나를 풀어줬다는 것 자체로 우리엘의 입장에서 위험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으니까.

정리하면 지금 우리들은 상당히 절벽에 몰려있어. 천사들의 생사여탈권은 이브를 지배한 루시퍼의 손에 달려있고 그걸 막기 위해 움직였다가 자칫하면 나까지 루시퍼에게 당할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기억’을 듣는 게 루시퍼의 ‘조건’이라면 내게도 수단이 남아있으니까. 무슨 운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그럴 힘을 얻었어. ‘기억을 지우는 힘’ 내 첫 번째 초월, 이걸 사용해서 루시퍼의 기억에 간섭할 수 있다면 그 날의 기억을 루시퍼의 기억속에서 지울 수 있어. 그렇다면 이브 에데니아에게 걸린 지배도, 내게 뻗친 마수 역시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추측일 뿐이야. 성공할지 말지 확신할 수 없는 도박일 뿐이야. 그래도 걸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비록 우리들이 절벽 끝에 몰려있다고 해도, 살아날 길은 있다고 믿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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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63화. 바벨 006. 마인의 행방 24.09.09 4 0 14쪽
63 62화. 바벨 005. 정산(2) 24.09.06 8 0 12쪽
62 61화. 바벨 005. 정산(1) 24.09.02 7 0 13쪽
61 60화. 바벨 004. 시련(4) 24.08.30 13 0 12쪽
60 59화. 바벨 004. 시련(3) 24.08.26 10 0 13쪽
59 58화. 바벨 004. 시련(2) 24.08.23 12 0 16쪽
58 57화. 바벨 004. 시련(1) 24.08.19 9 0 13쪽
57 56화. 바벨 003. 잠입 준비(3) 24.08.16 12 0 15쪽
56 55화. 바벨 003. 잠입 준비(2) 24.08.12 12 0 12쪽
55 54화. 바벨 003. 잠입 준비(1) 24.08.09 12 0 12쪽
» 53화. 바벨 002. 그 날의 기억 24.08.05 12 0 12쪽
53 52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3) 24.08.02 11 0 12쪽
52 51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2) 24.07.30 12 0 11쪽
51 50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1) 24.07.25 12 0 12쪽
50 49화. 2부 프롤로그(4) 24.07.22 14 0 13쪽
49 48화. 2부 프롤로그(3) 24.07.19 10 0 12쪽
48 47화. 2부 프롤로그(2) 24.07.15 11 0 12쪽
47 46화. 2부 프롤로그(1) 24.07.12 11 0 12쪽
46 45화. 2부 프롤로그(0) + 짧은 공지 24.07.08 14 0 15쪽
45 44화. 1부 마지막화 24.07.06 12 0 11쪽
44 43화. 1부 에필로그 (3) 24.07.04 12 0 12쪽
43 42화. 1부 에필로그 (2) 24.07.03 14 0 15쪽
42 41화. 1부 에필로그 (1) 24.07.02 12 0 13쪽
41 40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마지막(투지) 24.07.01 13 0 14쪽
40 39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일곱째(최종 국면) 24.06.28 12 0 15쪽
39 38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여섯째(역습의 전조) 24.06.27 12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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