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지워버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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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a96
작품등록일 :
2024.05.1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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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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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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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1)

DUMMY

느닷없는 가브리엘의 방문에 마음졸이며 당황했던 것도 찰나, 살면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녀의 연약한 모습에 내 무의식속에서부터 긴장의 끈이 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배신자의 입장에서 징벌자를 상대하는 시선이 아니라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의 시선으로 그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 사람, 이런 면도 보여주는 사람이었구나 싶었을 때, 나는 한때 내가 의지하기만 했었던 사람을, 헌데 지금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기만 하는 사람을, 감정이 복받치기라도 한 것인지 눈시울마저 붉어져 있던 가브리엘을 응접실로 부축하고 있었다.

에덴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가브리엘이 이런 곳까지 와서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틀림없이 그 일이 연관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가브 언니는 분명 에덴의 일을 이야기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헤라클레스를 이 자리에 동석시킬 수 없다. 저 아이가 에덴의 일에 흥미를 가지게 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위험한 일에 얽혀 있는 또 한명의 사람이, 다름아닌 저 아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리고 아마도 제우스에게 ‘바벨 탑’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 사람이 다름아닌 저 아이의 어머니인 네메시스였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아마도 아직 그 일에 엮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어머니를 찾고 싶다는 아이를 사지에 보낼 생각은 없다.

“아피 님, 그 분은······?”

조심스레 물어오는 헤라클레스에게 차갑게 대답했다.

“미안한데 헤라클레스, 집에 돌아가 있을래?”

“네?”

내 태도가 너무 날카로웠나? 헤라클라스는 순간 당황해 되물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기운 없는 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나는 그런 헤라클레스를 지나쳐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


응접실 자리에 앉은 가브리엘은 붉어진 눈시울을 달래느라 소매로 눈을 훔치며 한두 차례 훌쩍였다. 한차례 한숨을 돌리며 호흡을 가다듬은 가브리엘은 아직은 조금 퀭한 눈으로, 하지만 내가 잘 알고 있던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가브리엘을 향해 나는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언니, 에덴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라파엘이 죽었어.”

“뭐?!”

라파엘, 이브 에데니아의 혈육이자 내 이복언니였었기도 했던, 에덴의 천사. ‘바람의 천사’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에덴에서 벌어진 ‘어떤 일’, 나는 필시 그 어떤 일의 중심이기도 한 ‘바벨 탑’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가브 언니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런 내 예상을 뒤엎었고 그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었기에 나는 잠시간 그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말로 잠시.

“어떻게?”

분명 충격적인 일이지만 가브 언니가 눈물까지 보이며 날 찾아올 이유가 그것이냐고 물으면 내 생각엔 아무리 봐도 아니다. 순간 떠오른 직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내 과거 일들을 통해 떠오른 직감. 그것을 논리로 표현하기도 전에 나는 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역시나, 내가 그렇게 물어올 걸 예상이라도 했듯이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라파엘은 ‘재’가 되었어.”

그리고 가브리엘은 손바닥을 펼쳐 보여 손바닥 위에 권능으로 밤톨만한 물방울을 하나 만들었다. 만든 것을 보여준 뒤 곧바로 소멸시켰다. 물방울이 재가 되어 흩날린다니,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것이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마치, 이렇게.”

가브리엘은 보여준 것이다. 라파엘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한 라파엘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는 건 단 한 명. 가브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라파엘의 죽음을 재현했다는 건, 이 사람은 역시 이 해답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성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그래, 내가 알고 있는 한, 라파엘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브 에데니아’ 한 사람뿐이다.

“머지않아 나도, 미카엘도, 우리엘도 전부 이렇게 될 게 분명해.”

가브리엘의 이야기는 간결하면서 담담했다.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를 이야기하는 태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아니, 오히려 어울렸다. 가브리엘 같은 인종의 인간, 아마도 우리엘도, 제우스도, 그 네메시스나 이브 에데니아조차도 자신에게 그런 문제가 닥쳐온다면 저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감상이 문득 들었다. 그 가브리엘은 마치 모든 걸 알고 왔다는 듯, 확신에 찬 말투로 내게 이야기해왔다.

“도와줘, 아피. 지금 우리들을 살릴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밖에 없어.”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얼추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미 가브리엘은 우리엘을 통해 그 날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이브 에데니아의 기억을 보았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언니.”

“응.”

나는 이 일에 진지하게 응할 수밖에 없다. 진지하게 임해야만 한다. 진지하게 임하고 싶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줘.”

그야 눈 앞에 있는 내 언니, 에덴에 있을 우리엘, 그리고 미카엘. 내가 그곳에 있었을 무렵 내 가족과 다름없던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가브리엘은, 내가 알던 침착하고 차분한 가브리엘로 다시금 완전하게 돌아온 호수의 천사는 마치 남 일을 이야기하듯이 천천히,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성녀님의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 있어. 아마도 누군가의 ‘간섭’, 혹은 ‘지배’. 비슷한 무언가에 의해서 성녀님이 자신의 의지와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어. 그리고 그 범인은 ‘루시퍼’, 루시퍼 에데니아.

루시퍼를 범인으로 지목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야. 이변을 눈치챈 우리들이 루시퍼를 용의선상에 올렸을 때, 확증을 갖기 위해 앞서나갔던 라파엘이 죽었기 때문이지. 뭔가를 알아낸 듯했던 라파엘은, 우리들에게 돌아온 순간, 경악을 숨기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하려 했었는데 자신이 본 것을 말 할 틈도 없이 재가 되어버렸어.

그럼, 다음은 그 루시퍼를 용의선상으로 올렸었던 이유야. 애당초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어. 성녀님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려면 애당초 ‘마인’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니까. 그걸 전제로 생각해 보았을 때, 외부 자객일 가능성은 배제하는 게 맞아. 공적 행사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성녀님을 알현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인간들뿐인데, 마지막으로 행해진 행사가 ‘내가 추측했던 범행 시점’을 기준, 꽤나 예전 일이었거든. 외부자가 성녀님을 어떻게 할 여건이 안 됐지. 너도 알다시피 평소 ‘에덴’ 안에 계신 성녀님과 외부자가 접촉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그렇다면 내부자, 내부자 중 ‘마인’, 즉 권능을 지닌 우리 천사들 중, 용의선상에 올릴 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밖에 남지 않게 돼. 가장 오래 산 천사지만 그 누구도 그 권능을 모르는 천사, 그리고 네가 우리엘에게 했었던 말. ‘루시퍼를 조심해’라는 전언.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님의 기억을 봤었던 네 전언이야. 고려할 가치는 충분했어. 이 두가지 이유만으로도 루시퍼를 용의선상에 올리기 충분했었지.

루시퍼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랬기에 성녀님을 통해 라파엘을 죽였을 거야. 변명을 할 필요가 없지. 변명을 할 수도 없어. 방금 말한대로 용의선상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루시퍼도 그 점은 인지하고 있었을테니까. 애당초 루시퍼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최대한 이 일을 늦게 눈치채게 되는 방법’을 사용했었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이야기할게.

루시퍼가 라파엘을 죽이는 타이밍을 계산한 건지, 아니면 우연인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라파엘의 죽음을 목격했던 건 아마 우연일 게 분명해. 루시퍼가 그런 일을 지시했다면 라파엘을 죽이는 장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걸 보여주게 되면 우리들에게 너무 많은 걸 알려주게 되니까. 내가 널 찾을 생각을 한 것도, 어떻게 보면 그 일 때문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루시퍼였다면 라파엘을 죽이는 장면을 들켰을 때, 분명 그걸 목격한 다른 천사들도 죽였을 거야. 루시퍼의 시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라파엘의 죽음이 드러났다는 걸 일단 루시퍼는 모르고 있다는 거겠지.

응.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우리들 역시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야.

루시퍼는 아마도 꽤나 오래 전부터 성녀님의 정신에 간섭하고 있었을 거야. 아무도 몰랐던 루시퍼의 권능이 그런 종류의 권능이었을 게 분명해.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순서대로 이야기해줄게.

아마도 너를 감옥에 구속시켰던 순간까지는 성녀님은 분명 정상이었을 거야. 그건 당시 성녀님의 기억을 본 네가 이미 증명한 사실이지. 내 생각이 맞다면 네가 에덴을 떠나고 일주일 이내. 루시퍼는 그 일주일 사이에 모종의 방법으로 성녀님을 지배했고, 성녀님을 조종했어. 내가 루시퍼가 찬탈을 성공한 시점을 그 시기로 잡았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그 날부터 지금까지 4년간, 쭉. 나나 우리엘, 라파엘과 미카엘. 이렇게 네 명에게 ‘파견 임무’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야.

물론 파견 임무가 이어진다는 게,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실제로 우리들 역시 그렇게 느꼈기에 당시 별다른 위화감 없이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했으니까. 단지 그렇게 각자 자신의 임무를 계속해서 처리하는 동안 우리들은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고 성녀님과 말을 섞을 기회가 없어졌어. 우린 그 일을 통해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어.

즉, 끊임없는 업무는 사람의 신경을 잡아먹고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생각을 쓸 수 없도록 해. 우리들은 ‘일’이라는 장벽에 둘러 쌓여 고립되었고 그 장벽 밖에 시야를 둘 수 없었던 것이지. 그래, 이것이 좀 전에 말한 루시퍼가 썼다는 ‘우리들이 최대한 이 일을 늦게 눈치채게 되는 방법’이야.

우리들은 너무나도 바빴던 나머지 성녀님의 안부를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성녀님이 우르크에 ‘바벨 탑’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도, 우리들에게 임무를 끊임없이 전달하셨을 때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거야. 아마도 ‘어떤 일’이 아니었다면, 나를 포함한 다른 천사들은 아직까지 이 일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라파엘은 루시퍼를 쫓지 않았을테니 아직 살아있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이렇게 널 찾아오는 일도 아마 없었을 거야.

하지만 과연, 라파엘이 살아있는 그런 미래가 있었다고 해도, 분명 그 미래가 잘 된 미래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어. 그건 분명히, 다가올 재앙을 모른 채 마음 편히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니까. 그대로 있었다 해도, 언젠간 나도 라파엘도 우리엘도 미카엘도. 모두 그 재앙에 휘말렸을 게 분명해.

그래서 널 찾아온 거야, 아피. 지금 우리에겐 네 도움이 꼭 필요하거든. 네가 루시퍼를 조심하라고 했던 전언, 그 전언을 건네준 이유가 지금 우리들에게 꼭 필요하니까. 그걸 알고 있는 너라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 역시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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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63화. 바벨 006. 마인의 행방 24.09.09 4 0 14쪽
63 62화. 바벨 005. 정산(2) 24.09.06 8 0 12쪽
62 61화. 바벨 005. 정산(1) 24.09.02 7 0 13쪽
61 60화. 바벨 004. 시련(4) 24.08.30 13 0 12쪽
60 59화. 바벨 004. 시련(3) 24.08.26 10 0 13쪽
59 58화. 바벨 004. 시련(2) 24.08.23 12 0 16쪽
58 57화. 바벨 004. 시련(1) 24.08.19 8 0 13쪽
57 56화. 바벨 003. 잠입 준비(3) 24.08.16 12 0 15쪽
56 55화. 바벨 003. 잠입 준비(2) 24.08.12 11 0 12쪽
55 54화. 바벨 003. 잠입 준비(1) 24.08.09 11 0 12쪽
54 53화. 바벨 002. 그 날의 기억 24.08.05 11 0 12쪽
53 52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3) 24.08.02 11 0 12쪽
52 51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2) 24.07.30 11 0 11쪽
» 50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1) 24.07.25 12 0 12쪽
50 49화. 2부 프롤로그(4) 24.07.22 13 0 13쪽
49 48화. 2부 프롤로그(3) 24.07.19 10 0 12쪽
48 47화. 2부 프롤로그(2) 24.07.15 11 0 12쪽
47 46화. 2부 프롤로그(1) 24.07.12 11 0 12쪽
46 45화. 2부 프롤로그(0) + 짧은 공지 24.07.08 14 0 15쪽
45 44화. 1부 마지막화 24.07.06 12 0 11쪽
44 43화. 1부 에필로그 (3) 24.07.04 12 0 12쪽
43 42화. 1부 에필로그 (2) 24.07.03 14 0 15쪽
42 41화. 1부 에필로그 (1) 24.07.02 11 0 13쪽
41 40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마지막(투지) 24.07.01 13 0 14쪽
40 39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일곱째(최종 국면) 24.06.28 12 0 15쪽
39 38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여섯째(역습의 전조) 24.06.27 11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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