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지워버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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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ra96
작품등록일 :
2024.05.1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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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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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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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2)

DUMMY

우선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게. 지금부터 3개월 전에 맡은 임무에서 겪었던 일, 나는 그 일 덕에 지금의 이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어. 연달은 일에 심적 여유가 크게 없었던 시기였지만 4년이라는 시간동안 끊임없이 일을 한다는 것은 여유가 없던 내게도 한가지 인식의 변화를 주기 충분했었지.

끊임없는 격무가 힘든 일인 것 이전에, 나는 실제로 4년 동안이나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에, 그 원인과 의미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어. 성녀님을 의심하지 않고 성녀님의 말씀에 맹목적으로 충성해왔던, 사실상 성녀님의 충직한 노예나 다름없던 우리 천사들에게 마저도 의심을 싹 틔울 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지. 루시퍼의 시간 끌기가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는 말이야.

바꿔 말하면 우리들이 성녀님의 노예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 의심을 싹틔우는 데 4년이나 걸렸던 것일지도 몰라. 우리같은 천사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이 의구심을 떠올렸을지도 몰라.

이 상황에 처했던 게 내가 아니라 아피, 너였다면 분명 1년도 안 지나서 의구심을 품을 수 있었겠지. 예전부터 너는 성녀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성녀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어?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네가 에덴에 있었을 때, 네게서 그런 분위기를 자주 읽었어. 나는 나름 널 유심히 봤거든. 아끼는 동생이잖니?

어쨌든, 이런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게 된 내가 했던 일은 내가 받았던 임무에 ‘어딘가 작위적인 점’이 있었는지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야. 4년동안 격무가 연속된다는 일,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이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증거를 잡고 싶었던 것이지.

그리고 그 증거를 잡으면, 그 증거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역추적해본다면 이 일이 누구의 손을 탄 것인지 그 윤곽을 알 수 있게 돼. 내가 노렸던 건 그거였어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증거를 찾는 난이도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거야.

무슨 생각이었냐고?

우선 우리들의 격무가 끊기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각 지역 구석구석에서 말썽을 끊임없이 피워야만 해. 자연 발생되는 트러블 사이사이의 공백을 그것들로 매꿔줘야만 해. 그것도 나 혼자만 해결할 일이 아니라 미카엘과 라파엘, 우리엘. 총4인의 천사가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할 만큼 일을 만들어야만 해.

이건 간단히 생각해봐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어느 한 명이 저질렀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일이야. 무언가 거대한 이해세력이 얽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조직적인 활동으로 인한 광범위한 문제 발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해. 그러니 그 꼬리를 잡아서 그 흑막이 누구인지 특정해낼 수 있어야지 우리가 겪었던 격무가 누구의 의도였는지. 그자의 목적이 뭐였는지. 즉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게 돼.

그런데 여기서 그 증거, 즉 꼬리를 잡기 쉬울 것 같았다는 건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거대한 이해세력이 얽혀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야. 어떤 사건을 벌이는 사람, 공범이라고 해야 하나? 일의 인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인과를 수사하기가 편해지거든. 단서를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거야. 당연히 그만큼 꼬리를 잡기도 쉬워지기 마련이지.

세력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관련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관련자들을 하나 둘 붙잡아 추궁해내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거야.

당시엔 흑막이 루시퍼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말한 것처럼 세력이 존재한다는 생각 쪽으로 우선 인식이 기울었었어. 그랬기 때문에 증거를 잡아보려는 활동 역시, 그걸 전제로 하고 있었는데, 쉽지가 않았지. 아니, 아예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가 않았어. 내 상정대로라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

이 일의 배후 세력이 뭐하는 세력인지 모르겠어도, 제 아무리 그 배후세력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도, 흑막의 목적을 모르는 만큼 임무에서 타의의 흔적을 찾아보려 할 때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꼬리가 잡히지 않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한 달 정도 헛발질을 하고 있었을 때야. 내 인식에 의심을 품기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 현재의 상황을 다시 분석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이 채우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생각을 비우기로 했어. 완전 처음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했어. 내가 세웠던 가정들을 모두 폐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만들기로 한 거야.

지금까지 일과 관련된 현상부터 뜯어봤었던 나는 그렇게 머리를 비우고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지.

기존의 관념을 부수고 기본으로 돌아가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현상을 다시 보려 했었을 때, 나는 드디어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아니, 발견해버리고 말았어. 그래서 깨달을 수 있었어. 이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결국 찾을 수 있었던 거야.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일과는 상관이 없어 보였지만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의미없이 반복하던 한 명의 사람을. 이 일에 얽혀있는 ‘특이점’과도 같은 사람을.

당시 내가 맡았던 임무는 우르크 북서쪽 취락에서 유행한 돌림병을 구제하는 임무였어. 내가 전문 의사는 아니라 병에 걸린 사람들의 치료를 해 주는 것은 무리였지만 우리 같은 마인들은 병에 걸리지 않으니까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직접 찾아가 살피며 적절한 대처를 요청하는 것이 내 상세한 임무였지.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갈 정도로 심각한 병은 아니었지만 마을 사람 대부분은 이 병 때문에 상당히 고통받고 있었어. 증상이 심한 몇 명은 세상을 떠나기도 했었고. 몇일간 조사한 끝에 나는 이 일의 원인으로 마을 식수의 오염을 지목할 수 있었어. 마을의 식수원이었던 지류, 그 지류를 거점으로 삼은 야생동물들 중에 거대한 무리를 가진 초식동물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수많은 동물들이 코를 박고 물을 마시고 몸을 씻기도 하는 지류, 주변에서 배변 활동을 하며 수없이 들락날락 거리던 지류, 그 지류로부터 공급받던 물을 여과없이 마셨던 마을 사람들. 같은 식수를 공유한 집단에서 단체로 발병했기에 전염병인줄로만 알았던 이 병은 사실 전염병까지는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급조치로 내가 권능으로 만든 식수를 마을 사람들에게 공급했고 이러한 병들에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파견을 요청해 마을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

마을 사람들의 상태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기운을 차릴 무렵에 나는 더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에 정수 과정을 거쳐 물을 마시라는 당부를 했어.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쭉 여과되지 않은 물을 마셨던 사람들이 왜 이제서야 병을 얻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쩌면 이 일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된 일’이라는 가능성을 염두 해 두었던 것도 있어서 그 임무를 시작하기 전에 작심했었던 대로 모든 고정관념을 놓아 주변 모든 것들을 살폈고, 결국 발견해버리고 만 거야.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의미없이 반복하던 한 사람을.

그 사람은 매일같이 지류 아래쪽으로 내려가 나무를 베고 풀을 자르는 사람이었어. 마을에 병이 돌았을 때, 자신 역시 병에 걸려 그 일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병이 낫고 난 뒤부터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곤 했어. 그 남자가 그 일을 해왔던 일대의 상황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나는 그 남자가 마을의 역병이 돌기 훨씬 전부터 그 일을 지속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런데 나는 그 남자의 목적을 알 수가 없었어. 남자는 딱히 벌목한 나무를 판매하는 것도 아니었고 목재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어. 땅을 개간해 농업에 이용하려던 것도 아니야. 이미 마을엔 자급자족하기 충분한 농경지가 있었기에 농지를 더 늘릴 이유도 없었어. 자신에게 득이 없어보이는 일, 게다가 딱히 남을 위한 일 같지도 않았던 일.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는 일을 계속 하는 사람을 보니까 신경이 안 쓰일 래야 안 쓰일 수가 없더라고.

나는 남자에게 직접 물었어.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 그렇게 시작된 대화. 나는 이 대화에서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위화감을 하나 발견하게 돼.

이 남자에겐 정말로 이 행동을 하는 목적이 없었던 거야. 자의도 타의도 아니고 그저 정말로 아무런 의미없이 이 행동을 하고 있었던 거야. 분명 다른 곳에서 평범한 이야기를 했었을 때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인상이 들었었던 남자는 그 곳에서 내게 ‘사람이 아닌 것’과 대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어. 분명 나를 보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눈빛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어. 마치 정해진 대답을 정해진 곳에서 할 뿐인, 그런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

처음 보는 형태의 이상 상황. 내 직감이 이걸 그냥 넘기지 말라고 소리치는 게 들리는 것만 같았지. 나는 남자의 행동을 예의주시했고 그 남자가 벌인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에 초점을 맞춰 상황을 바라봤어. 그리고 결국에 나는 저 남자가 했던 그 행동이 지류 아래쪽 생태에 변화를 주어 지류 아래쪽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동물들의 거점을 지류 위쪽으로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지.

지금까지 여과하지 않은 물을 쭉 마셔왔던 마을 사람들이 이제서야 병에 걸리게 된 이유도 그것으로 설명이 가능해. 얼마 전까지는 물이 맑았던 거야. 저 남자가 한 행동. 지류 아랫쪽의 나무를 베고 풀을 깎는 그 행동이 쌓이고 쌓여 어느 임계점을 돌파했을 때, 그 임계점으로 인해 지류 아랫쪽 생태에 한가지 변화가 생겼을 때, 그 변화는 다른 변화를 줄줄이 몰고 왔고 지류 아랫쪽과 위쪽의 생태를 같이 바꿔버렸던 것이지. 그 시점부터 마을로 흘러들어오는 수질에 변화가 생겼고 마을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시작한 거야.

남자가 이걸 노리고 그런 일을 했을까? 아니, 그 남자와 대화해본 난 그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어. 애초에 자신이 하는 행동이 그런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만약 알았다고 해도, 자신까지 병에 걸리게 만든 상황을 자신의 손으로 초래했던 이유가 있을까?

핵심은 남자의 ‘태도’야. 누구에게도 지시받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자아가 없던 것처럼 행동했던 그 남자의 태도. 이걸 문제삼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할 수 있었어.

이 세상엔 말이 안되는 일,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실존한다는 것.

그래, ‘마인’의 개입이야.



작가의말

20240829수정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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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63화. 바벨 006. 마인의 행방 24.09.09 4 0 14쪽
63 62화. 바벨 005. 정산(2) 24.09.06 8 0 12쪽
62 61화. 바벨 005. 정산(1) 24.09.02 7 0 13쪽
61 60화. 바벨 004. 시련(4) 24.08.30 13 0 12쪽
60 59화. 바벨 004. 시련(3) 24.08.26 10 0 13쪽
59 58화. 바벨 004. 시련(2) 24.08.23 12 0 16쪽
58 57화. 바벨 004. 시련(1) 24.08.19 8 0 13쪽
57 56화. 바벨 003. 잠입 준비(3) 24.08.16 12 0 15쪽
56 55화. 바벨 003. 잠입 준비(2) 24.08.12 11 0 12쪽
55 54화. 바벨 003. 잠입 준비(1) 24.08.09 11 0 12쪽
54 53화. 바벨 002. 그 날의 기억 24.08.05 11 0 12쪽
53 52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3) 24.08.02 11 0 12쪽
» 51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2) 24.07.30 12 0 11쪽
51 50화. 바벨 001. 폭풍의 전조(1) 24.07.25 12 0 12쪽
50 49화. 2부 프롤로그(4) 24.07.22 14 0 13쪽
49 48화. 2부 프롤로그(3) 24.07.19 10 0 12쪽
48 47화. 2부 프롤로그(2) 24.07.15 11 0 12쪽
47 46화. 2부 프롤로그(1) 24.07.12 11 0 12쪽
46 45화. 2부 프롤로그(0) + 짧은 공지 24.07.08 14 0 15쪽
45 44화. 1부 마지막화 24.07.06 12 0 11쪽
44 43화. 1부 에필로그 (3) 24.07.04 12 0 12쪽
43 42화. 1부 에필로그 (2) 24.07.03 14 0 15쪽
42 41화. 1부 에필로그 (1) 24.07.02 12 0 13쪽
41 40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마지막(투지) 24.07.01 13 0 14쪽
40 39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일곱째(최종 국면) 24.06.28 12 0 15쪽
39 38화. 올림포스 015. 최종장 여섯째(역습의 전조) 24.06.27 11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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