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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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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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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정리

DUMMY

-카~알

몇 개월 사이 글을 깨친 루나가 칼의 이름을 연습 삼아 나뭇가지로 바닥에 적고 있다. 이미 바닥에는 루나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여럿 적혀있다.

마당은 루나의 훌륭한 연습장이 되어준다. 아직 손의 힘이 약한 탓에 글씨가 비뚤지만, 용을 써가며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루나가 이토록 글을 배울 수 있던 것에는 칸나의 노력이 매우 컸다.

칼이 통나무집에 만들어둔 책장에는 그가 이곳저곳 다니며 모은 책들이 꽂혀있다. 그중에는 아이들이 학습할 수 있는 책들이나 교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넬리와 칸나는 아이들의 학습 차원에서 그 책을 이용해 아이들을 가르쳤고 루나도 역시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처음 글자를 모르던 루나는 글자를 읽을 수 없으니 직관적인 숫자가 오히려 더 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글자를 쓰는 방법보다 숫자를 쓰는 법이 훨씬 더 간단하고 외우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단어 체계를 이해하고 글쓰기가 재밌어진 루나는 숫자보다 글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나이가 아직 어리니 언어 발달 및 학습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말이 트인 이후 쉬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루나의 말하기 실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때로는 너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말을 끊임없이 내뱉어 사람들이 일부러 루나를 피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루나의 친구가 되어준 퓨리가 말상대를 해주기도 했다.

-루나! 얼른 들어와. 밥 먹자.

파토스가 그릇 4개를 들고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루나는 파토스를 보고 눈웃음을 치며 말한다.

-네 아저씨!

-아저씨라니? 참, 삼촌이라니까···.

파토스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루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루나의 밝은 미소를 보면 뭐라 탓하기도 어렵다.

파토스는 그릇을 나무로 만든 길쭉한 탁자 위에 올린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익히지 않은 토끼 고기가 담긴 양동이를 가지고 나온다. 고기는 잘 손질되어 조각나있다. 파토스는 고기 조각을 그릇 위에 올린다. 그리고 그 옆의 냇가로 내려가 손을 씻고 두 손 모아 외친다.

-얘들아! 밥 먹자!

저 멀리 풀숲에서 무언가 풀을 스치며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저 산비탈 너머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늑대의 울음소리다.

늑대 새끼들은 몇 개월 사이 금방 자라나 성인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자라난 녀석들은 아이들은 친구로 여기고 파토스를 아버지나 어머니로 여기며 자라났다. 아이들보다 훨씬 컸을 때 녀석들은 제 등에 아이들을 앉히고 산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한 마리가 파토스에게 달려들며 그의 얼굴과 혓바닥을 핥는다. 파토스는 크게 웃으며 그 녀석의 털을 긁어주었다.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씩 나타난다.

한 녀석은 함께 놀고 있던 아이들과 나타났고 다른 녀석은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채 나타났다. 하지만 마지막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 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들아~ 얼른 들어가자.

파토스는 늑대들을 밥그릇 앞에 앉히고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마지막 한 녀석이 나타난다. 그 녀석은 항상 인기척이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 어느 순간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 파토스는 내심 그 녀석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집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식탁 주위로 마련된 의자에 앉는다. 이미 사람들은 식탁에 모여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앉기엔 식탁이 부족했기에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과 원형 테이블에 나누어 앉아 있다.

긴 직사각형의 식탁에는 마넬리와 칸나 그리고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자리가 있었고 원형 테이블에는 호크네 일행들이 자리 잡았다.

원형 테이블에 앉은 호크는 힐끔힐끔 칼을 쳐다보며 경계한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는 마넬리가 자리하고 있고 그녀의 오른쪽에는 칸나가 앉아 있다. 그날 이후로 식음을 전폐한 마넬리는 날마다 야위어 갔다. 결국 특단의 조치로 칸나가 마넬리의 옆에서 그녀를 옆에 붙어서 같이 식사하게 된 것이다.

칸나를 마주 보는 자리와 그 옆자리는 마을 아이들의 자리다. 역시 아이들의 편식을 막기 위해 그렇게 자리가 배치되었다. 파토스와 함께 들어온 아이들은 자신의 식기가 있는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루나의 자리는 항상 칼의 옆자리다. 루나가 뭐든 잘 먹었기에 굳이 터치하지 않아도 되어 칸나가 내버려둔다.

칼의 옆으로 파토스, 맞은 편에는 한나와 맥스가 앉는다. 맥스는 그때 거친 돌풍에 날아가 허리를 다쳤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앉지 못한다. 그래도 맥스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바람에 날아가지 않았다면 더욱 거센 돌풍에 쓰러진 나무에···. 맥스는 상상하다 그만둔다.

마지막으로 혜. 혜는···. 혜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피하는 듯 자취를 감춘다. 특히 일부러 칼을 피해 다니는 것이 확연하다. 혜는 가끔 식사를 위해 얼굴을 비칠 때면 항상 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일부러 한나가 칼의 맞은편 자리를 비워놓고 다른 자리에서 식사하고 있으면 혜는 그 의자를 끌고 다른 곳으로 가 식사를 한다.

그 둘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골치 아픈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혜가 칼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는 듯한데 뭐라고 표현하지도 않으니, 눈치만 볼 뿐이다.

-칼, 도대체 둘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한나가 칼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인다. 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칼을 그렇게 대답할 뿐이다.

-뭐~ 보나 마나죠.

그 사이로 AI가 날아들며 대화에 끼어든다.

퓨리의 입에서 뱉어진 AI는 그 사단이 일어나는 도중에도 땅에 처박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퓨리가 냄새로 AI를 찾아냈을 당시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칼과 AI에 대해 알고 있는 마넬리는 AI에게 해리슨에 관해 물었지만, AI는 어떻게 그가 칼의 은신처를 찾아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다.

-아마 제가 업데이트하기 전 세대의 AI가 은신처의 위치와 정보를 지하도시로 전달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마넬리가 말하길 해리슨은 칼이 루나와 함께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칼 역시 해리슨과 조우하여 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루나가 여기에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보아 AI의 의심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내심 칼은 AI에 대해 작은 의심을 품고 있다.

AI는 파견자를 번견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단어는 통상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닌 은어임이 틀림없다.

번견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리슨의 반응을 보니 파견자를 낮잡아 부르는 용어인 듯하다. 그런데 그 단어를 AI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AI에 대한 생각에 빠진 칼 앞에서 AI가 디스플레이로 물음표를 비추며 말한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말하고 나서 칼은 음식을 한 입 먹는다.

AI는 칼의 귓가로 다가가 조심스레 묻는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든 거예요?

칼은 잠시 멈춘다. 슬픈 얼굴로 칼에게 말하던 혜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칼은 긴말하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우연히 혜와 눈이 마주쳤다. 혜는 이미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이 내뱉은 말을 혜는 들었음이 틀림없다. 혜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AI는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한 척 칼에게서 멀어진다. 루나의 어깨 위에서 AI를 노리고 있던 퓨리가 뛰어올라 AI에 타오른다.

-악! 이 도마뱀 녀석!

퓨리는 샥~ 샥~ 소리를 낸다. 루나는 그 소리를 듣고 음식이 가득한 입으로 우물거리며 말한다.

-퓨리가 재밌데.

-짜식! 이거 놔! 떨어지란 말이야.

AI는 위아래로 요동치며 식탁에서 멀어진다.

루나는 칼을 쳐다보며 그를 향해 씩 미소를 짓는다. 칼 역시 퓨리와 AI의 소소한 실랑이가 재밌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칼은 그들이 아닌 어딘가를 똑바로 바라본 채 루나를 바라봐 주지 않는다. 루나는 칼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았다. 혜다.

루나는 시무룩해진다. 어린 루나가 보기에도 둘이 싸웠음이 틀림없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지내며 다툼을 겪어본 루나는 알 수 있었다.

루나는 혜와 칼이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데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루나는 셋이 함께 앉아 물고기를 뜯어 먹던 때를 생각한다. 그리고 칼에게 소곤소곤 말한다.

-이럴 땐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루나의 말을 들은 칼은 자신의 시선을 인지하고 혜에게 향하고 있던 시선을 다시 음식으로 돌렸다. 그리고 루나를 바라보며 루나의 머리를 한껏 흩트려 놓고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혜는 루나와 칼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고 다시 음식을 먹는다.


-그래, 이제 떠난다고?

마넬리가 칼에게 물었다.

-네, 이젠 떠날 겁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해리슨과 사투를 벌였던 장소다. 칼이 쓰러진 나무들과 바위를 치우니 멀끔한 공터가 되었다.

따스하게 햇살이 내려 풀과 꽃들이 자라나 다시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공터 한구석에는 물이 흘러들어오는 웅덩이가 생겨 물고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 공터 가운데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꽂힌 무덤이 있다. 그 무덤 위로 자라난 풀이 바람에 나부끼며 흔들린다.

-사실 얼마 전에 이것을 주었습니다. 아마 그날 거센 바람 때문에 멀리 날아간 모양이더군요.

칼은 마넬리에게 한 수첩을 보여주었다. 와그너의 것이다. 바람에 날아가 버린 그의 외투에서 발견한 수첩이다.

칼은 그 공터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마넬리는 칼로부터 수첩을 건네받는다. 곧바로 마넬리는 수첩을 펴보았다.

-그 속에 제가 찾고자 하는 게 있더군요. 저에게 로봇을 보여주신 적 있지 않습니까?

칼은 그 문양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보았던 문양. 그 문양이 로봇에 그려져 있던 문양이 확실할 것이다.

그 문양이 와그너의 수첩에 온전하게 그려져 있고 로봇이 발견된 위치 또한 적혀있었다.

그곳은 이곳으로부터 머나먼 남쪽. 핵전쟁 이전 시대에서 몽골과 중국이라 불리던 국가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저희는 남쪽으로 갈 겁니다.

칼의 말을 들으며 수첩을 넘기던 마넬리는 한 페이지에서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그리고 수첩을 덮고 안주머니에 챙긴 후 칼에게 물었다.

-그럼, 루나는?

-루나는 저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마넬리는 칼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묻는다.

-자네 혼자서 아이를 돌볼 수 있겠나?

-괜찮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구들과 추억도 쌓고 기본적인 글자도 익혔으니까요.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된다면 말이 통하지 않던 그때보다 수월하게 루나를 돌볼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끝낸 칼은 마넬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마넬리와 다른 사람들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사람치곤 칼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마넬리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에 의심하지 않는다.

마넬리는 그런 칼을 보고 피식 웃는다. 아마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은 칼의 변화를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루나를 위험한 곳에 데려가도 되겠어?

-네 괜찮습니다. 퓨리와 함께 가기로 했기에 그 녀석이 루나의 곁에서 지켜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루나도 저와 같은 부류인 듯합니다.

칼은 해리슨에게 들었던 루나에 대한 이야기와 루나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말해주었다. 오염된 비를 맞고도 멀쩡히 살아있었던 그날이다. 거대한 멧돼지마저 무너뜨린 그 비를 맞고도 루나는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듣는 마넬리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다. 특히나 해리슨이 루나의 어머니를 죽인 사실에 마넬리는 다시 한번 그 쓰레기 자식에 대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보다 어린아이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생각하며 조금이나마 루나에게 공감하고 동정한다. 지금이라도 밝게 웃을 수 있는 루나가 정말 고맙다.

사실 칼도 루나를 사람들에게 맡기고 길을 떠날 계획이었다. 루나가 칼처럼 방사능으로 넘쳐나는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아이를 그런 곳에 데려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사람들이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실례를 무릅쓰고 아이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루나가 퓨리를 데려와 칼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퓨리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러 숲을 떠나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칼과 루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숲에서만 지내던 퓨리는 거친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칼의 지식과 노련함이 필요했고 그와 대화하기 위해선 루나가 필요하다.

게다가 해리슨처럼 루나를 찾는 파견자들이 있다면 칼의 곁에서 지켜주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기에 결국 루나와 함께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다면야.

마넬리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떠올라 칼에게 말한다.

-그 ‘퓨리’ 말이야? 아무래도 ‘영물’인 모양이야.

-‘영물’이요?

마넬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칼에게 말한다.

-‘영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때 해리슨의 몸에서 났던 빛 기억나? 그 녀석들의 몸에 영물의 피가 들어가면 그렇게 빛이 난다고 들었어.

아저씨에게 들었던 말을 조금씩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며 말을 이어갔다.

-영물의 핏속에 있는 ‘브림드 하이드아웃 I’ (Brimmed Hideout I). 그 물질 때문이라고 하더군. 이제 와서 떠오르는 기억을 헤집어도 그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아. 아무튼 그날 그 개자식의 몸에서 빛이 났던 건 그 영물의 피가 어떻게든 그 몸으로 들어갔기 때문이겠지. 그 상황에서 ‘영물’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건 ‘퓨리’ 뿐이었어.

칼은 마넬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 저번에 와그너가 말한 ‘아저씨’라는 인물 덕분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어떻게 파견자들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영물이 이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마치 누군가 이곳에 파견자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혹시 퓨리가 찾는 그 사람에 의해 짜맞추어진 연극이지 않을까?

칼은 머릿속으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잘 맞아떨어지고 누군가의 계획이라고 하기엔 너무 변수가 컸다. 이 숲이 만들어지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 옛날의 사람이 지금 일어날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칼은 머릿속으로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직접 퓨리에게 묻는다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믿고, 다른 주제를 이어갔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우리는 서쪽으로 갈 거야. 거기에도 우리와 협력하는 마을이 있거든.

-그 마을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번견들이 호크의 마을에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마을에도 손길을 뻗쳤을 수도 있다.

칼의 물음에 마넬리는 가볍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너를 만나기 전에도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었어.

그 말에 칼은 멍해진다. 마넬리의 말이 정곡을 찌른 듯하다.

-왜? 우리가 자네 도움 없이 못 살 줄 알았나? 걱정하지 마.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렇지 여보?

마넬리는 무덤을 내려보며 말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칼! 우리는 우리대로 너는 너대로 그렇게 살아가 언젠가 다시 만나는 거야.

마넬리는 칼의 어깨를 툭 치고 옆으로 지나간다.

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오만과 편견이 부끄러워서. 자신이 없으면 그들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그들은 약하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매우 약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비록 살아남지 못한다고 해도 그 뒤를 잇는 자들이 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 뜻을 이어 살아간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인간들은 살아남는다.

칼은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내린다. 다시 구름이 빛을 막아서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내 곧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의 의지도 그러했다. 구름이 그들을 막아선다고 해서 그 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그 빛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빛을 낸다.

칼은 와그너에게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떠난다.


작가의말

가을이라 하늘이 높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한가위가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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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집으로 24.07.01 26 0 12쪽
26 아침. 24.06.27 26 0 14쪽
25 지켜야 할 사람들 24.06.24 26 1 13쪽
24 샛별 24.06.20 2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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