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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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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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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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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

DUMMY

어두운 숲길, 두 마리의 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차를 끌고 있다. 사람 여럿을 태운 육중한 마차는 겨우 말 두 마리가 끌기엔 아주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말들도 털들이 삐쭉 설 정도로 뒤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본능이 멈추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 내내 달리던 마차는 길가에 돋아난 돌부리에 바퀴가 부딪칠 때마다 위아래로 들썩이며 타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파토스는 허리가 거의 나갈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지만, 두 손에 꽉 쥔 줄을 놓지 않고 충혈된 눈으로 매섭게 앞만 노려볼 뿐이다.

AI가 말의 앞에서 날아오르며 어둠을 밝혔고 그 백색의 빛을 따라 말들은 내달렸다.

마차에 탄 사람들은 마차의 뒤편에서 거대한 화염에 휩싸인 마을을 지켜본다. 거대한 입을 벌린 화염은 한입에 마을을 삼키며 그 세를 불리고 있다. 어두운 하늘로 그것보다 더 검고 시커먼 연기가 타오르며 하늘을 덮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탄 냄새가 마차 안을 통해 마부석에 있는 파토스에게 날아왔다.

그 탄내는 그저 퀴퀴할 뿐만 아니라 단내가 느껴진다. 덜컹거리는 마차 속 아직 진정되지 않은 아이들은 서로 달라붙어 그 불길을 또렷이 바라보며 그 단내를 맡는다. 혜도 칸나도 마넬리, 와그너, 한나, 맥스까지 말이다.

-파토스 잠시 말을 멈춰보세요.

AI가 여전히 앞을 비추며 말했다. 파토스가 말을 세운다. 입가에 침을 잔뜩 흘리고 있는 말들이 속도를 줄이며 터벅터벅 걷다가 쓰러진다. 파토스는 마부석에서 내려 곧장 말의 굴레와 고삐를 벗긴다. 뜨거운 숨을 내뱉는 말은 거의 죽을 지경이다.

-무슨 일이에요?

혜가 마부석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물었다.

-칼이 부탁한 게 있거든요. 이쯤이면 될 거예요.

AI는 하늘 위로 섬광탄을 쏘아 올린다.


칼과 파피의 주변으로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후안의 작업실에서 일어났던 폭발이 온통 나무로 만들어진 집들로 번지면서 어느새 마을 전체를 태운다. 어느새 그들이 있던 공터는 사방이 불의 벽으로 막혔다.

후안을 죽인 괴물도 괴물이 되어버린 마르크의 잔해도 희생자들의 시체도 지금은 불의 먹잇감이 되어 게걸스럽게 먹힌다.

불의 크기와 세기에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이 달마저 가려버렸다. 하늘을 채우던 반짝이는 별들도 불에 닿을까 조심하며 사라져 버렸다.

-사실은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말이야. 그 사람들의 아내의 모습으로 가지 않았어···.

파피가 갑자기 수줍어하며 말한다.

-당연히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들키기 십상이거든.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이코 그 아줌마가 있었지!

파피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후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있잖아. 남자들이란···. 자기 씨 뿌리는 것 말고는 관심 없는 것들이거든.

그리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들을까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며 말을 잇는다.

-이미 애 낳고 될 대로 몸이 부어버린 아내가 눈에 들어오겠어? 응?

칼은 전신을 뒤덮는 무기력함에 파피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칼의 모습이 내심 맘에 들지 않았지만, 파피는 한편으로 칼을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무대장치 및 효과라 여기며 내색하지 않았다.

-칼.

그 목소리에 칼은 연신내 바닥을 향하던 고개를 든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파피가 혜의 모습과 목소리로 칼의 앞에 서 있다.

-칼. 있잖아. 노아가 나한테···.

파피가 혜의 모습으로 그녀를 희롱한다. 그녀가 혜의 얼굴로 그녀의 몸을 희롱하고 추행한다.

-마르코 아저씨가 나한테 이렇게···.그 몸을 더듬으며 혜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정도는 점점 더 심해지며 혜의 얼굴과 몸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남자들이란 젊은 여자한테 사족을 못 쓴다니깐.

혜의 얼굴은 다시 파피의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혜의 모습으로 바뀌며

-누구의 모습으로 갔을까? 후훗

다시 파피의 모습으로 바뀐다.

-이 모습이랑~

다시 혜의 모습으로 바뀐다.

-이 모습이랑.

파피가 칼의 앞에서 경련을 일으키며 웃기 시작한다. 어느새 흥분이 몸을 장악해 버렸다.

-이러니까 다들 미친개처럼 달려들던데···. 칼 너는 어때?

파피를 본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슬픔도 그 어떤 좌절도.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있다. 칼의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무언가. 그것이 칼의 심장에서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파피는 그의 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앗아가는 그 화염과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치는 그의 회색빛 눈동자. 다른 이는 알 수 없어도 파피는 알 수 있다.

그 옛날 아름답고 청초하던 나를 파괴하고 부숴버린 그 사람. 생각하면 온몸이 떨릴 정도로 혐오스럽고 꺼림칙하며 속이 메스꺼워지는 그 사람. 꿈속에서 나의 목을 조르며 팔과 다리를 잘라버리고 살을 후벼파던 그 사람. 한없이 차가우며 나를 매몰차게 버린 그 사람. 칼의 눈동자는 그 사람과 닮았다. 그 역시 칼과 같았다.

순간 그 사람의 모습이 칼에게 투영되어 보인다. 잠시 떠오르는 과거에 파피는 잠깐 원망과 열화가 타올랐지만 좌절하고 있는 상황의 칼을 보면 기분이 좋다. 비뚤어진 심성의 그녀는 묘한 승리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희열과 기쁨이 그녀의 머릿속을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충동이 그녀의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으며 그녀의 이성을 놓게 만든다.

갑자기 불길 속에서 파피는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선보였다. 어설픈 초보가 따라 하는 춤사위가 아니었다. 한, 두 번 쳐본 솜씨가 아닌 모양인지 파피의 움직임은 동작 하나하나가 끊어짐이 없었고 유려하게 이어지며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파피는 불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흔들었다. 그 춤은 불의 거동에 따라 좌우로 때론 위아래로 움직인다. 어떤 규칙이나 반복 없이 이어지는 동작은 한없이 이어지는 화마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파피는 춤을 추며 자신의 손짓, 발짓에 만족감을 느꼈고 불의 세기가 더욱 거세짐에 따라 더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유려했던 동작들은 점차 괴기스럽게 변하게 된다. 그녀의 표정은 물론 관절의 비틀림과 꺾임. 심지어 불의 열기에 그 파란 몸에 달라붙었던 가죽들이 늘어지며 파피의 형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아직 가죽을 쓰고 있는 얼굴이 괴이한 표정을 지을 때는 본연의 파란 얼굴보다 더 끔찍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파피는 이상한 자세로 멈춘 다음 자세를 똑바로 잡지 않고 고개만 칼을 향한 채 말을 했다.

-유다가 죽은 것도, 노아가 변해버린 것도, 마을이 이렇게 불타버린 것도, 이 모든 것이 다 너 하나 때문이야.

칼의 뒤편에서 레아의 사체가 타고 있다.

-후안의 작업실에서 벌어진 폭발. 자기를 단숨에 죽여 버릴 작정이었는데 자기 대신 그 아줌마가 불에 타는 거야. 모든 게! 다 너 때문이라고.

파피의 가죽은 그 몸에서 벗겨지며 다시 머플러의 형태로 목에 모여들었다. 파피가 머리에 쓰인 가죽을 뒤로 홱 젖히며 다시 파란 얼굴이 드러났다. 파피는 다시 불경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마을 사람들은 큰 사고 없이 넘어갔을 거야. 그저 조용하게 영원히 마을에서 가축의 삶을 누리겠지.

파피는 그 얼굴로 잇몸을 드러내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다시 혜의 모습으로 변하며 말한다.

-아 안타까워라~ 즐기기도 했는데~.

파피는 혜의 모습으로 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한다. 빛을 반짝이던 그 눈동자는 시들어버려 생기를 잃어버렸다. 쉴 틈 없이 타오르는 불길의 모습도 파피의 모습도 더 이상 그 눈동자에 담기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것이 그 사람이었다면, 그이였다면. 파피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사람에 대한 복수를 칼을 통해 이루려고 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 비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파피는 칼을 무너뜨림으로써 대리 만족을 느낀다. 세상이 자신을 매몰차게 내칠 때 그 어느 때라도 옆에서 함께 있어 줄 거라 여기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말의 그 고통을 칼이 느꼈으면 했다.

-이제 끝이야.

파피의 주변으로 아직 불에 타지 않은 괴물들의 잔해가 속속들이 모여든다. 그 잔해들은 일정한 형태 없이 서로 뭉쳐지기 시작한다. 없어진 신체 부위를 수복하려는 듯 떨어져 나간 팔다리 대신 다른 잔해를 몸에 붙이는 것들도 있었고 잔해를 머리가 있던 자리에 끼우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저 떨어져 나간 신체를 이어 붙인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그 작업은 괴상망측한 결과물들을 두루 내놓았다.

혜의 모습으로 파피는 그 괴물들과 몸을 섞으며 뒤로 물러갔다. 괴물들의 품속에 녹아들며 미끄러지듯 움직인 파피는 칼을 둘러싸인 괴물들의 뒤쪽에서 잔해로 만들어진 옥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칼을 지켜보았다.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괴물들은 하나같이 칼에게 달려들었다. 칼에게 찢기고 부서지고 뚫리고 뭉개지고 짓눌리고 터져버린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듯 괴물들은 환호하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칼을 공격한다.

칼의 몸은 세차게 바닥에 내팽개친다. 동시에 그의 머리는 공처럼 땅에 튀기며 튀어 올랐다. 괴물들은 그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찌르거나 짓밟거나 때린다. 살을 후벼 파고 관절을 뒤틀며 사정없이 그의 몸을 거칠게 다루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칼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지만, 점점 그의 몸은 피부가 벗겨지며 뼈가 드러난다.

상처 부위로 녹색섬광이 나타나며 몸을 복구시키지만, 괴물 때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결국의 팔 하나가 뜯겨 나갔다. 괴물들은 그 전리품을 들고 난리를 떨었다. 더욱이 자신도 그 전리품을 갖겠다며 달려드는 괴물들은 광분한다. 결국 그 팔은 서로 만져보겠다며 다투던 괴물들에 의해 불 속에 내던져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칼의 공허한 눈은 그저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어 보는 것이 아닌 그저 시선이 닿는 곳에 하늘이 있었기에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하늘은 불이 닿지 않았다. 그 하늘에 후안의 눈물 속에서 보였던 별이 보인다. 괜스레 칼은 그 별이 눈에 들어왔다. 더 격렬하게 집요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괴물들이 그의 얼굴을 내리칠 때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부어가고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지만, 그 눈은 여전히 그 별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고독하게 반짝이고 있는 별.

칼은 그 별을 향해 남아있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 별에 닿기 위해 더, 더 손을 뻗었다. 결국 그는 그 별을 향해 뻗은 손을 쥐었다. 말도 되지 않지만, 순간 그는 그 별에 손에 닿을 것이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바람이 너무 컸던 탓일까? 그는 손에 무언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칼은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칼도 손에 느껴지는 감각을 믿지 않았지만, 손에 쥔 무언가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자 하는 마음은 매우 강력했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인도 하기 전에 남은 팔마저 뜯겨 나갔다.

그리고 손으로 가리고 있던 그 별의 모습도 사라졌다.

거대한 백색의 섬광이 하늘을 뒤덮는다.

괴물들 속에서 녹색섬광이 하늘을 향해 포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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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마넬리와 와그너 24.07.08 24 0 15쪽
28 발각 24.07.04 25 0 14쪽
27 집으로 24.07.01 2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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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지켜야 할 사람들 24.06.24 25 1 13쪽
» 샛별 24.06.20 26 0 12쪽
23 파피(2) 24.06.17 25 0 16쪽
22 살아남은 자들 24.06.13 28 0 14쪽
21 파피(1) 24.06.13 2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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