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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최근연재일 :
2024.09.19 00:00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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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1,647

작성
2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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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나아가기 위한 이별

DUMMY

-결국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마넬리가 마당에서 칼과 AI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 마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다. 파토스는 늑대 3마리에 둘러싸여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고 한나는 AI를 부르며 잠꼬대한다. 맥스는 아픈 허리 때문에 소파 위에서 옆으로 누워 겨우 잠들었다. 그의 표정은 통증 때문에 한층 일그러져 있다.

칼과 함께 떠나는 루나는 칼의 품에 안겨 졸고 있다. 아이는 애써 눈을 뜨려 하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아 진작에 포기했다.

퓨리는 루나의 어깨에서 고개를 한 번 털고 칼의 어깨로 올라탄다. 그리고 칼의 옆에 붕 떠 있는 AI에게 달려든다. AI 위에 올라탄 퓨리는 기쁜 표정으로 몸을 턴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상관 쓰지 않는 AI다. 퓨리의 대충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빙그르르 한 바퀴 돈다.

-벌써 짐을 싸둔 거야?

마넬리는 칼의 배낭을 보며 말했다.

칼의 배낭은 그의 상체를 완전히 커버할 정도로 크기가 대단했다. 뒤에서 본다면 칼의 상체는 배낭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다.

-조금씩 미리 준비했습니다.

-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헤어지니 맘이 편하지 않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넬리가 칼에게 말했다. 칼은 마넬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와 그의 마을 사람들이 먼저 통나무집을 떠났을 때는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마넬리와 다른 이들이 서행 길에 오르기 전 미리 출발하는 선발대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발대를 자처한 것에는 당연히 그들이 마넬리의 마을 사람들보다 이 일에 특화되어 있었고 상황상 그들의 조건이 선발대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겨진 이유는 해리슨의 습격 이후로 칼에 대한 그들의 경계와 의심이 더욱 짙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먼저 통나무집을 떠나게 되었다.

다만 놀라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혜가 그들을 따라 선발대로 이미 떠났다는 것이다.

마넬리는 혜가 걱정스러웠긴 했지만, 그녀의 굳센 결심을 쉽게 꺾을 수 없어 혜를 그들에게 부탁했다.

-저는 아직 부족해요.

혜가 마넬리에게 호크와 함께 떠나기로 결심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낸 날, 마넬리가 혜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말이다.


그날은 유독 달이 크고 밝아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에 잠을 시달릴 정도였다. 서늘한 바람이 구름을 몰고 올 때면 잠시나마 그 빛을 가릴 수 있었다.

다들 잠이 든 깊은 밤, 혜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한 탓에 남몰래 집을 빠져나와 현관 계단에 걸터앉았다.

피곤하지만 도저히 내려앉을 기미가 없는 눈꺼풀을 연신내 비벼대며 달빛이 비치는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나비로 보이는 무언가가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다 꽃잎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달빛이 비치는 그 공간은 마치 반짝이는 보석으로 칠한 것처럼 모든 게 연한 보랏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나비가 꽃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때 혜의 옆으로 마넬리가 앉는다.

-잠이 오질 않니?

마넬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혜에게 물었다. 해리슨이 습격한 날 이후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던 혜를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직접 묻지 않아도 혜의 심적 상태는 그녀의 자신 없는 언행과 태도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마넬리는 그런 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았다.

마넬리는 밤에 잠을 뒤척이다 집 밖으로 나선 혜를 보았고 이때가 기회다 싶어 그녀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혜는 잠깐 마넬리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마넬리는 말없이 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포근히 앉아 주었다.

밤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꽃향기가 너무나 향기로워 그 꽃의 형태와 색상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매혹적일 정도로 향기가 좋은 꽃은 분명 아름다운 꽃일 것이다.

마넬리는 외투주머니에서 허름한 수첩을 꺼냈다. 얼마 전 칼에게 건네받았던 와그너의 수첩이다.

마넬리는 수첩을 펴서 종이를 넘기더니 어느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혜에게 건넨다.

혜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슬며시 들고는 그 수첩을 받아 읽기 시작한다.

-xx월 xx일

오늘 칼에게 마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전말을 들었다.

그런 괴물과 같은 마을에서 지냈다니···. 쉽게 믿을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과 그 괴물들이 생겨난 이유에 대해 역시 믿을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은 절대로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정녕 사실이라면 그 짓거리를 이미 오래전부터 해 왔다는 것이겠지. 아마도 파피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을에서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일 역시 파피의 탓이지 않을까?

근거가 없는 생각이지만 내 직감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역겹다. 사람의 이면이 참으로 역겹다.

내가 믿고 있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느낌이다.

이미 미쳐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딨느냐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집어삼켜져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그럴 것이라 확신한 이유는 이미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혜.


혜는 수첩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눈을 번뜩인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로 넘긴다.


그 아이에게 나 역시 그런 괴물로 보이지 않았을까?

나의 분노는 길을 잃고 방향을 잘못 틀었음이 분명하다.

그 사람들이 파피에게 매혹되어 홀려버린 것처럼 나도 홀린 게 아니었을까?

아니 나는 그저 내 억울함과 분노를 풀기 위한 대상이 필요했을 뿐인 것이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나 역시 괴물이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 그 아이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녕 그 아이를 위해선지 나를 위해선지···. 생각할수록 미쳐버릴 지경이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금 후회하는 나 자신이 한탄스럽다. 나의 추악한 이면이 나조차 역겹다.

오늘도 밤새 허덕이다 잠에 들 것이 틀림없다.


혜의 어깨 위로 다시 한번 마넬리의 손이 올라온다.

혜가 고개를 돌리자 슬픈 표정의 마넬리가 혜를 바라보고 있다. 울음이 터질까 봐 마넬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꼭 감았다 뜬다.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깨문 입술을 풀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말한다.

-와그너를 용서해 주겠니?

먹먹하게 젖어가는 마음에 혜는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지금 그간 와그너에게 들었던 모욕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연민인지 모를 감정이 차오른다.

수첩을 잡고 있는 혜의 손을 떨리기 시작한다.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어 흘리는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크게 부릅뜬 혜의 눈동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다. 울분과 해방, 와그너에 대한 분노 또는 용서. 그동안 그에게 들었던 치욕적인 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며 크고 동그란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떨어진다. 수첩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종이가 젖어 들어간다.

눈물이 번지며 뒷장에 무언가 쓰여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 아이가 지금껏 그렇게 애를 쓴 까닭도 내 탓이겠지.

정말 염치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는 그 아이가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그 아이에게 사과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기에

이렇게라도 그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사죄가 되길 바란다.


혜는 수첩을 떨어뜨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당당히 마주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동안 혜가 느꼈던 불안과 모욕을 생각하면 고작 끄적이는 몇 글자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혜는 약간의 해방감을 느낀다. 동생을 잃고 고생했던 나날, 아이를 잃은 다른 부모들에게 느꼈던 미안함. 마음속에 품고 평생 가져갈 줄 알았던 남들에게 풀어놓지 못할 나의 죄악.

내 마음에 꽁꽁 감겨 풀어지지 않는 사슬이 풀어져 후련함이 느껴진다.

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개운함이다.

혜는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고 마넬리를 바라보았다.

-마넬리, 그 사과는 지금 받지 않을게요.

혜의 대답에 마넬리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넬리 역시 혜가 와그너의 사죄를 쉽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넬리는 와그너 대신 마음의 짐을 짊어지기로 마음먹었다. 혜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 짐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와그너가 살아나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넬리가 혜에게 와그너의 글을 보여준 것에는 혜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짐을 이제는 내려놓길 바랐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마넬리의 생각은 맞는다.

혜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더라도 마을 일에 병적으로 달려들며 희생하는 혜의 태도만 보더라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마넬리 또한 이제 혜가 모든 걸 털어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지금 와그너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도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는 그녀의 모습이라고 마넬리는 받아들였다.

-제가 와그너의 말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사과를 받으러 오겠습니다.

말을 끝내고 혜는 마넬리를 한 번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마넬리의 등을 토닥여 주고 다시 얼굴을 마주하며 그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말을 꺼냈다.

-호크와 그 선발대가 떠날 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혜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담겨있다. 그 무엇도 절대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혜는 마음속으로 며칠 밤낮으로 혼자서 앓고 속 썩이며 생각하고 다짐했다. 혜의 의견은 단순히 그녀의 객기와 치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와그너의 글을 읽고 나서 혜는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의 곁을 떠날 생각이다. 조금씩 조금씩.

-저는 아직 부족해요.

혜는 지금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날 그에게 부렸던 투정은 해리슨에게 무력하게 굴복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칼 역시 나와 함께 다가오는 시련을 맞서기보다는 그것을 외면한 채 지금 현실에 같이 안주하길 바랐던 것이다. 괴물 같던 해리슨을 아무렇지 않게 대담하게 맞설 수 있던 그가 내심 부러웠다.

혜는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그와 함께 시련을 맞서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 그녀는 언제가 그의 옆에서 함께 앞을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그의 앞에 나타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그녀는 완전한 이별이라 생각하지만. 언젠가 이 이별이 다시 만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멀지 않아 깨달을 것이다.

깊은 밤 혜과 마넬리는 서로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슬픔이란 감정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지 않다.

저 너머 산에서 늑대의 울음이 들린다.

마넬리와 혜의 대화는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들만의 밀회는 늑대의 울음소리 아래 그들만의 비밀로 남을 수 있었다.


혜는 그 사실을 칼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혜가 떠난 날 그제야 알게 된 칼의 표정은 믿기지 않겠지만, 약간의 슬픔이 스쳐 지나간 간 것을 마넬리가 눈치챘다. 그러나 다시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보고 착각이라 여기고 넘겼다.

-이제 얼른 가봐.

마넬리는 마지막으로 칼의 어깨를 토닥이고 손 인사를 건넨다.

이제 칼도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자연스레 손을 흔들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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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샛별 24.06.20 2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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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파피(1) 24.06.13 29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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