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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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기리른
작품등록일 :
2024.07.11 23:08
최근연재일 :
2024.08.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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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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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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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람

DUMMY

띵동-.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깼다.


“이 시간에 누구야···.”


찌뿌둥한 몸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24분.

해가 머리 위로 높게 떠올라가는 시간이지만, 나에겐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밍기적거리다 겨우 이불을 걷어내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 사이 초인종이 다시 울렸는지 아닌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혹시나 택배 같은 걸까 싶었는데 딱히 최근에 시킨 물건도 없었다.


철컥.

문을 열고 나가니 문 옆에 정강이 정도까지 오는 택배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운송장을 확인해 보니 동호수는 우리 집이 맞는데, 중간에 별표로 한 글자 가려진 이름은 나와 겹치는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유*리? 이게 누군데.”


잘못 보내진 택배인 모양이다.

주인을 찾아줘야 하나, 귀찮음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람과 만나거나 전화를 해본 적이 얼마나 됐을까. 대충 3년은 넘었나.


내용물은 카페인이 잔뜩 들어간 에너지 음료였다.

자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나.


“뭐, 내 것도 아니니까. 그냥 두고 잠이나 더 자고 나서 생각하자.”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별 일도 아닌 걸로 잠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짜증이 몰려오는 걸 애써 참으며 잠들어 있던 시간을 세어봤다.

여덟 시에 잠들었으니까, 세 시간 좀 더 잤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포근하고 따듯함을 느끼자 마음이 편안해지며 다시 잠이 쏟아져왔다.

아마도 곧 잠들 것 같다. 4시까지는 자야지.


띵동-.


“아니! 뭔데 또.”


겨우 다시 잠들 것 같았는데.

피로는 가득한데 잠이 다 달아난 것 같아 불쾌한 기분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화가 나 깊게 숨을 들이쉬며 문 앞을 비추는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엔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피로에 찌든 것 같은 몰골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무슨 일이죠.”


화가 난 걸 숨길 생각도 없이 퉁명스럽게 인터폰 버튼을 눌러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아···. 저 위층, 901호 사람인데요. 제가 택배를 시켰는데, 호수를 잘못 적어서 여기로 시켰더라고요.”

“네. 문 앞에 있지 않아요? 그거 가져가면 되잖아요.”


그러자 인터폰 너머 여자는 바닥을 한 번 훑어보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저기. 여기 아무것도 없어서요. 혹시 집에 넣어서 보관 중이신가 해서···.”

“네? 무슨 소리예요. 거기 있는 거 아까 확인했는데?”


몽롱한 정신에 내 기억도 조작된 건가 싶었는데 호수와 이름까지 적힌 걸 봤으니, 그건 현실이 분명했다.

곧장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어? 뭐야. 진짜 없네···.”


정말 방금까지 있던 택배가 사라져버렸다.

택배를 확인하고 기껏해야 5분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괜히 나를 도둑으로 의심하지는 않을까, 불안감도 생겨났다.

아니면 내가 진짜 잘못 본 건가.


“혹시 이름이 ‘유’로 시작하고 ‘리’로 끝나요?”

“네. 유나리라고 합니다.”

“어? 그러면 분명 아까 확인했는데. 5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있었어요.”


꿈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때, 비상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싸한 느낌이 들어 곧장 비상문을 열었다.


“헉!”

“어! 저 택배! 저기요, 잠시만요!”


비상계단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택배 상자를 들고 혼자 얼음땡이라도 하는 듯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었다.

방금 봐서 기억난다.

저 크기와 상자의 로고.

문 앞에서 봤던 상자다.


쿵!

택배를 눈치채고 말을 거니까 그 여자는 곧장 택배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도둑으로 몰릴 뻔하게 하기도 했고, 누군가 도망을 가니까 본능적으로 나는 그 뒤를 쫓았다.

두 층 정도 내려왔는데, 대충 다 떨어져 가는 슬리퍼만 신고 나와 범인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잠깐만. 굳이 계단으로 쫓을 필요 없잖아?’


엘리베이터를 확인하니 9층에 서있었다.

곧장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일 층입니다.]


이 아파트는 층과 층 사이가 높아 계단이 상당히 많다.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따라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쿵, 쿵, 쿵!

예상대로 비상구 안에서 점점 다급히 뛰어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커져갔다.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


가본 적은 없지만, 클럽 가드마냥 팔짱을 끼고 출입문 앞에 서서 비상문 안쪽에서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잠깐이었지만 검은 모자에 어깨 아래까지 오는 생머리,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인상착의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철컥.

비상문 문고리가 돌아가고 이어 문이 열렸다.

그 앞엔 방금 본 인상착의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날 보고는 당황한 듯 멈칫, 하다가 이내 문을 닫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기요. 잠깐 이야기 좀 해봐요. 얼굴도 다 확인했으니까, 도망간다고 끝날 거라 생각 말고요.”


내 잠을 제대로 달아나게 만든 원흉.

제대로 화가 나 이런 일을 벌인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다, 닥쳐.”


얼굴을 숨기려는 듯 계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미친 것 같이 빛을 잃은 안광이 느껴졌다.

아까 본 사람처럼 무척이나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다.

그 사이, 이 미친 여자는 등 뒤에서 자그마한 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 잠깐! 잠시만요!”


안 그래도 집에 삼 년이나 넘게 처박혀 운동이고 뭐고 담쌓고 살아온 사람에게, 칼을 든 상대는 거의 신과 아이 정도의 차이가 느껴졌다.


[문이 열립니다.]


두려움에 뒷걸음을 치자 동작 감지 센서에 감지되어 출입문이 열렸다.

나는 그대로 이 여자와 대치 상태를 지속하며 뒷걸음쳤다.


‘경찰서···. 경찰서가 어디에 있더라? 어디로 달려가야 하지?’


동네 지리를 떠올리려 애쓰다 겨우 경찰서 위치가 기억났다.


“가만히 있어요! 저, 저 지금 곧바로 경찰서로 뛰어갈 겁니다. 허튼짓 말고 무기 버리고 사라지세요. 그러면 신고 안 할게요···.”


물론 거짓말이다.

칼까지 들고 다니며 위협하는 사람을 어떻게 그냥 둘 수가 있겠나.

다만 지금 저 여자를 자극하면 안 될 것 같아 안심하도록 유도했다.


“경찰? 안 돼···. 가만 안 둘 거야. 그러기만 해봐!”


생각이 복잡해진 듯, 경찰 얘기에 동요하는 듯했다.

나는 아파트 밖에서, 여자는 안쪽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자, 잠깐. 그러면 어쩔 수 없어···. 내 세계로 만들어야 하는데···.”


헛소리를 지껄이던 여자는 갑자기 뒤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댔다.

저기 무슨 짓일까, 하다 깨달았다.


‘애초에 저 여자가 여기 찾아온 건 내가 아니라 그 위층 여자잖아.’


저 여자를 쫓아가야 할까,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 경찰을 불러와야 할까.

핸드폰만 있었다면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는 닫히는 문 사이로 끔찍한 미소를 보였다.


‘안 돼.’


피곤함에 절었지만, 희미하게 웃으며 예의 넘치게 내게 미소를 보여준 위층 여자 유나리의 얼굴이 순간 겹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비록 오늘 처음 봤지만, 또다시 누군가 내 앞에서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가 안내음을 내뱉고 문을 닫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몇 걸음 남지 않았다.

오랜만에 차오르는 숨과, 바닥을 내딛는 충격에 달아오른 다리의 근육 때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두 걸음, 한 걸음···.


“제발!”

“문이 열립니다.”


겨우 뻗은 손이 엘리베이터 양쪽 문 사이에 끼어 이물질을 감지해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이, 이거 내려놔!”


문이 열리고 나는 곧바로 미친 여자의 손에 들린 칼로 향했다.

어떻게든 저것만 없으면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거의 날아가듯 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절대 안 돼!”


여자는 칼을 몸쪽으로 끌어당겨 너무나 쉽게 나의 손길을 피해 칼을 지켜냈다.

그대로 나는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 얼굴을 박치기하리라 에상해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고요한 적막만이 주위를 감쌌다.


‘아···. 맞다. 이 적막. 시간이 멈췄구나.’


어느샌가 내게 능력이 하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위험 상황이 되면 시간이 멈추는 능력.

몇 년 동안 위험이 생길만한 일이 없어 까먹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면 움직일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내 주변 사람이 다칠 걸 미리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절망과 무력감만 느꼈던 그때가 떠올라 괴로웠다.


‘그나마 이번엔 풀리자마자 빨리 두 손을 들어 올리면 턱이나 코가 깨지는 일은 피할 수도 있겠다.’


멈춘 시간이 돌아올 때를 판단하는 건 주로 ‘소리’에 의지한다.

시간이 멈추면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모든 게 멈추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적막이 순식간에 나를 덮쳐온다.

처음에 이 고요함은 엄청난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돌아올 때도 파도가, 아니 해일이 다가오듯 한꺼번에 귀를 때려 박는 여러 소리에 쇼크를 받는다.


‘정신을 잃지 말고 바로 손을 올리자.’


그리고 이내 조그마한 진동이 느껴지며 멈춘 시간이 풀릴 거라는 전조 증상이 나타났다.


‘지금!’


퍽-!

실패했다.

잠깐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정신을 잃어 팔을 올려 얼굴로 떨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콧등이 아려오며 원치 않게 눈물이 흘렀다.

코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죽어어어!”


이 끔찍한 고통을 참아낼 시간도 없이 미친 여자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오고 다시 시간이 멈췄다.

얼굴로 바닥에 떨어져 뒤에서 이 여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다.


‘저 칼로 나를 찌르려 하고 있겠지.’


등일지, 머리일지, 어디를 찌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본 행동과 눈빛을 보자면 사람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그런 눈빛이다.


‘이번엔 기절 안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시간 정지가 풀릴 때의 충격은 상당하네. 그래도 이번엔 진짜 안 돼···.’


아쉬움과 함께 공포가 몰려왔다.

작은 칼이라 급소에 제대로 찔러넣지 않는다면 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몇 번이고 찔리면 죽게 될 건 마찬가지다.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스- 하는 소리가 들리며 시간이 돌아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솨아아-

이번에도 폭풍처럼 여러 소리가 섞여 귀로 박혀왔다.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간신히 기절하진 않았다.


‘몸만 어떻게 빼내면···!’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등 뒤로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쑤욱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내 그 부위 주변이 뜨거워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다음 공격이라도 어떻게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비틀려고 했는데, 그 위로 미친 여자가 쓰러져 누웠다.


“으아아악!”


여자 체중에 눌려 칼은 더 깊숙이 들어왔다.


[8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베이터는 자신의 목적지인 8층에 도착해 문을 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바깥, 그러니까 우리 집이 옆으로 보이는 복도엔 위층 여자 유나리가 쓰러져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도대체가···.”


아파트 전체를 오가며 벌어진 이 상황을 누군가는 본 모양이다.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다시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1층을 향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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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짜 친구(2) 24.08.01 10 0 12쪽
12 가짜 친구 24.07.31 1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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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친구를 찾아서(4) 24.07.29 14 0 12쪽
9 친구를 찾아서(3) 24.07.26 11 0 12쪽
8 친구를 찾아서(2) 24.07.25 12 0 13쪽
7 친구를 찾아서 24.07.24 15 0 12쪽
6 살인범 24.07.23 1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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