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시간 속에서

마지막 화: 마지막 대결, 새로운 시작

출입구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와 네시스의 오른팔에 박혔다.

덕분에 능력이 해제되어 죽을 위기를 넘겼다.

문 쪽을 바라보니 여자 한 명이 서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딘가 얼굴이 눈에 익었다.

“···호오. 이거 예상치 못한 손님이 또 찾아왔군요.”

“쳇. 머리를 노렸는데, 거리가 너무 멀었나 보네.”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채린 양. 그때의 교육이 부족했었나요?”

“하루도 너에게 복수하는 일을 잊은 적이 없어. 내가 포기할 줄 알았니!”

얘기를 들어 보니 예전에 찾아왔다는 사람인 것 같다.

“거기, 너.”

“저, 저요?”

“어. 덕분에 쉽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고마워.”

나에게 가볍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얘기를 해보니 그녀의 얼굴을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이 났다.

이상한 이름의 카페에서 일하던 점원이었다.

네시스는 조금은 당황한 듯, 채린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죠? 위에는 제 부하들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너만 힘을 키워온 게 아니야. 그동안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러 왔길래, 너흴 싫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동료들이 길을 터줘서 여기까지 왔지.”

“이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군요. 그럼 제 블러드··· 그녀는 어떻게 된 거죠? 빼앗아 간 건가요?”

“빼앗기는 무슨. 되찾은 거지. 이미 그 형사랑 같이 이 건물 밖으로 나갔어. 어때. 이제 좀 현실을 알겠어?”

우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얘기를 하며 시간을 끌고 그가 뒤로 숨긴 왼손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흠···. 난감하긴 하군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저도 부하 한 명을 불렀어요.” “뭐라고? 쳇, 그 왼손이냐!”

채린이 쇠구슬 하나를 손에 쥐고 날렸지만, 이번에는 간단히 막혀버렸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는데 서로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다.

지금은 두 명이 같이 싸우고 있었기에 공격을 해올 때, 네시스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겨우 넘기고 있다.

여기에 적이 한 명이라도 늘어 공격 중인 네시스를 막을 수 없게 된다면 끝난다.

“리더! 호출 받고 왔습···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방이 난장판이잖아.”

“비피, 왔군요. 염치없지만 도움 좀 받으려고 합니다. 당신이 저 여자를 좀 상대해 주세요.”

“좋아요. 이런 싸움 나쁘지 않네요. 난장판 같은 싸움, 끓어오르네.”

채린은 나에게 붙어 속삭였다.

“저 여자는 손에 닿는 액체의 온도를 높일 수 있어. 붙어서 싸우는 얜데··· 나랑 상성이 좀 안 좋아.”

“그러면 제가 저 사람의 공격을 막을게요.”

“가능하겠어?”

“무조건이요. 그리고 작전이 하나 생각났는데···.”

우리가 모여 속삭이는 걸 마냥 기다리고 있진 않았다.

비피라는 여자는 바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손바닥만 닿지 않으면 되는 것 같다.

저런 능력이라면 나에게 절대 해를 끼칠 수 없다.

예전이었다면 조금 위험했겠지만, 멈춘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에 맞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리면 그만이다.

네시스의 공격이 최악의 상성일 뿐이다.

지시한 대로 비피는 그대로 채린만 노려왔다.

나는 몸을 날려 그녀의 손으로 몸을 날렸다.

시간이 멈추고, 나는 주변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았다.

작은 선반 위에 놓인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와 챙겨 비피의 손 앞에 가져다 놓았다.

시간이 돌아오며 그녀의 손이 내 몸에 닿았지만, 그 사이엔 종이가 껴있었다.

“응? 이 종이 뭐야! 무슨 짓을 벌인 거지?”

“그대로 맞으면 죽잖아요.”

“맞고 죽으라고!”

그녀가 다른 쪽 손을 내 몸에 가져다 대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멈춰진 시간 속에서 뜯어진 종이를 손바닥에 놓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래서 리더가 저 여자를 부탁한 거구나?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이제 저리 가줄래?”

“싫은데요. 아줌마는 저랑 싸워요. 무서운 건 아니죠?”

“뭐, 이 새끼가···!”

계속 신경을 긁으며 채린을 노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와 비피, 채린과 네시스의 공방이 이어졌다.

두 쪽 모두 쉽사리 결판은 나지 않았다.

나는 도망가고 공격을 막는 건 쉬운데 딱히 공격할 수단이 없다.

강하진 형사가 준 총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단 한 발밖에 남지 않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지금 이 여자한테 총알을 박아 넣게 되면 공격 수단이 완전히 사라져 버려서 결국 아까와 같은 2대 1 대치가 되어도 네시스를 죽일 수가 없다.

채린은 자성을 다루는 초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수많은 구슬을 같은 극으로 만들어 네시스에게 쏟아내 공격한다.

그의 공격에 묶였을 땐 다른 극으로 만들어 바닥에 떨어진 구슬들을 자신에게 모은다.

그러면 사방에 뿌려진, 떨어진 구슬이 그녀에게 돌아가며 빠르게 움직여 네시스는 쇠구슬을 피해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를 펼쳐야 한다.

이런 서로의 대치 상황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선 완벽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비피의 공격으로 시간이 정지했을 때, 나는 계속 그 틈을 노렸다.

그리고 수많은 공방이 오고 가던 끝에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시간이 멈추고 네시스를 바라봤는데, 그는 손을 뻗어 채린을 공격하고 있다.

마침 떨어진 쇠구슬들도 그에게 닿지 않는 상황이다.

자신의 뒤에 쇠구슬이 떨어져 있다면, 아무리 내가 그의 뒤에서 시간이 풀리길 기다린다고 해도 대비하고 있기에 공격을 막아낼 것이다.

지금은 오랜 대치로 채린의 체력도 떨어지고 자신의 우의를 점점 확신하고 있다.

이런 방심이 필요했다.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이어도 공격을 방어로 돌리는 판단을 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비피의 공격을 막는 건 종이를 손바닥에 가져다 대는 걸로 충분했지만, 사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녀의 공격과 시선을 모두 막을 수 있는 건 바로 이불이다.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네시스의 등 뒤로 이동해 총을 꺼내 조준했다.

물체를 움직일 수는 있지만, 시간이 멈추기 전 상태로 위치만 옮길 수 있는 것이기에 지금 총을 발사할 수는 없다.

시간이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방아쇠를 당겨 총알을 날려야 한다.

“이제 곧이야···.”

심호흡하며 시간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탕-!

총알이 네시스의 머리를 관통했다.

“리, 리더···!”

충격을 받은 비피가 달려와 쓰러지는 네시스를 잡았다.

하지만 머리를 관통당한 사람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

방금까지 여유를 부리던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을 맞이했다.

우두머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하들은 모두 금방 투항했고, 채린이 데려온 수많은 초능력자와 비능력자 일행은 그들을 제압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사람들에게 초능력자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많은 사람이 놀랐지만, 최근 들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금방 사람들은 수긍했다.

온갖 범죄나 비도덕적 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많은 목소리가 일어났다.

여러 사회 문제와 혼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여러 집단의 극단적인 행동에 점점 통제가 힘들어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나에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부모님을 죽게 만든 모든 사건의 원흉인 네시스를 죽였고, 이후 모스파우더 공장들이 파괴되고 사라졌다.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느껴지는 건 오히려 공허함이었다.

사람을 죽인 죄책감이나 복수를 이뤘다는 기쁨.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이제 뭘 해야하지···.”

잠시나마 목적을 가지고 삶을 불태웠지만, 결국 다 타버린 다음에 남는 건 시커먼 재뿐이다.

부모님이 돌아올 리도 없다.

그리고 사람을 죽였기에 나에겐 법의 심판이 이어졌다.

여러 상황에 대한 설명과 증언으로 금세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몇 년 동안 사람들에게서 격리되어 공허하게 살았다.

겨우 집에 돌아왔을 땐, 그동안 날 지켜준 이 공간이 너무나 반가웠다.

몇 년 동안 올 수가 없어 먼지가 잔뜩 쌓여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깨끗했다.

침대에 늡자 숨어 살던 삼 년의 시간이 떠올랐다.

다시금 나는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띵동-.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누구세요?”

“누구겠냐. 나 말고 친구 더 있어?”

“오빠! 저도 왔어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나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감옥에 있을 때도 면회 같은 건 전혀 없었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초능력 범죄자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 모든 접근을 차단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야, 나 같은 거랑 같이 있어 봐야 좋을 거 없어. 그러니까 무리해서 안 와도 돼.”

바닥을 보며 하던 내 말이 끝나자, 소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에잇! 이 사람 왜 이렇게 우울해졌어? 우리가 오빠를 어떻게 버려요. 그리고, 이 집 매번 청소해 준 게 누구인지 알고!”

“야.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부정적인 생각 하지 마. 우리는 언제나 네 친구이고, 함께니까.”

“고마워···.”

몇 년 동안 혼자 격리되어 있었더니 마음이 너무 약해진 모양이다.

사실은 너무 외로웠고, 이 친구들이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다시금 던져진 사회에 적응하느라 바쁜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강하진 형사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핸드폰을 열어 주소록을 확인하니 아직 그의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가 남아있었다.

“한 번 전화 해볼까···.”

사실 전화를 받으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가 행복해졌을지가 정말 궁금했다.

“여보세요.”

“어···? 이거 강하진 씨 번호 아닌가요?”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년이 지났으니, 번호를 바꿨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아빠! 빨리 나와서 전화 받아. 누구냐고? 이름이 주재윤이라고 뜨는데?”

핸드폰에서 멀어져 작게 들렸지만 분명하게 그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이었다.

이 여성의 목소리는 다름이 아닌 그녀의 딸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누군가 전화기를 잡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재윤 씨. 잘 지내셨나요?”

“뭐···. 어디 좀 들어갔다가··· 몇 개월 전에 나와서 다시 열심히 살고 있어요. 형사님은 잘 지내셨나요? 딸은 건강해진 거죠?”

“저번에 그만뒀다고 얘기를 안 했었습니까? 이제 형사라고 하면 어디서 혼나요.”

“맞다. 잠깐 깜빡했네요.”

“딸아이는··· 다행히 조금씩 회복하고 있어요. 이제 집에서는 말도 잘한답니다. 밖에 나가면 얼어버리지만.”

“다행이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잠깐이나마 같은 목표를 위해 목숨도 내버리고 달렸던 동료니까.

“종종 보죠. 그리고 그만두고 지금 식당을 하고 있는데, 언제 한 번 들려요. 같이 술 한 잔 하죠.”

“좋아요. 이따가 문자로 식당 알려주세요. 친구들이랑 한 번 갈게요.”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결승선에 도달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번엔 더 길고 힘든 여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난 끝까지 달릴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

작가의말

부족한 제 첫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준히 노력해 다음엔 더 재밌는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