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스타 (2)
"백운 님 안녕하세요. 저는 백운님과 함께 싸웠던 가드 아미르의 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백운 님의 활약은 잘 들었습니다···."
"백운 님! 사랑합니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정말 고마워요."
헤르메스는 내게 사람들이 보내 준 감사 편지를 읽어 주겠다고 했다.
나도 처음엔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아져서 흔쾌히 승낙했지만.
그가 읽어 준 다섯 장의 편지가 전부 번역기를 돌린 '러브레터'라는 걸 안 이후론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보내 준 사람들에게 질렸다는 게 아니라, 내용이 다 똑같아서 그게 그거 같았다는 말이다.
"저, 인제 그만 읽읍시다."
"왜요? 전 무척 재미있는데요."
"지금 저 놀리려고 일부러 와서 이러셨던 겁니까?"
"하하, 그걸 이제 아시다니. 늘 치밀한 백운 님 답지 않군요."
"참 나. 그나저나 이렇게 제 부인을 하겠다는 분들이 많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백운 님, 그거 아십니까?. 여기 말레이시아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이라는 걸?"
"그렇군요. 가방끈이 짧아서 몰랐습니다."
"타국의 정책이니 모를 수도 있지요. 하여튼, 백운 님과 저 여성분들만 오케이 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어허. 무슨 큰일 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뒤에 있던 푹신한 베개를 가지고 헤르메스를 노리려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침한 표정의 청염이 내 병실로 들어왔다.
"잠은 잘 주무셨나요?"
"아, 예."
"저는 그것도 모르고, 백운 님께서 쓰러지셨다고 생각해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 너 많이 놀란 것 같긴 했어.'
그날 잠에서 깬 후.
내가 그저 잠에 들었단 걸 깨달은 청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헤르메스가 몰래, '정말 다행이라고 하시며 작게 웃으셨습니다. 속으로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에요.'라고 귀띔해 줬다.
정 많은 녀석 같으니라고.
"그러게요. 모양 빠지게 하필 그때 딱 잠이 오지 뭡니까."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이야길 하고 계신 건가요? 웃음소리가 병실 바깥까지 들리던데."
"아! 백운 님의 부인 후보가 많아서, 아예 그냥 다 부인으로 두면 어떨지에 대해서···."
"조용히!"
난 기어코 들고 있던 베개를 헤르메스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도 헌터인지라, 빠른 순발력으로 베개를 턱 잡아 버렸다.
"하, 이래서 고등급 헌터랑은 말싸움하기가 싫다니깐."
"이곳에서 부인을 두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부터 설명을···."
"아니, 그건 당연히 농담이죠. 청염 님!"
수북하게 쌓인 팬레터.
그리고 타이거를 소탕해 줘서 고맙다는 병원 밖 사람들.
이런 관심과 사랑이 나는 좀 낯설었다.
물론 과거 검신의 타이틀을 얻었을 때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그땐 워낙 암흑기라 이런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편지들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만찬이요?"
"예. 이제 어느 정도 회복하셨다는 보고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거기 참석하시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신지?"
"이곳에서 영향력 있는 분들은 다 오시죠. 일단 국왕께서 주최한 행사이니 그분은 당연히 계시고, 다른 정치 인사들도 오죠."
"흠, 그런 자리는 부담스러운데."
"전혀 그런 부담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타국의 헌터가 오염 지역을 싹 청소해 주셨는데, 이런 대접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드는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부담을 느낄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되겠나.
"와아아."
"헌터님!"
병원 밖을 나섰을 때, 난 입국할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우릴 기다리고 있던 인파로 인해 병원 밖이 인산인해였고.
이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까지 출동해 우리가 갈 길을 확보해 줬기 때문.
'오, 마치 한류스타 같군.'
내 나이가 아직 젊어서인지 날 보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층이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여자들이 많았다.
'역시, 젊은 게 좋긴 좋구나.'
***
"우리 오염 지역의 평화를 가져다주신 백운 헌터님께 박수를!!"
짝짝짝짝짝.
만찬은 처음부터 이런 축사로 시작했다.
거기다가.
"우리 말레이시아는 이제부터 백운 님을 최고 귀빈으로 평생 대우할 것을 약속하며, 오염 지역에 세계 최대의 별장을 지어 늘 편히 이곳으로 오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할 것을···."
이 말에, 옆에 있던 헤르메스가 작게 말했다.
"이야. 저거 완전 궁전 수준인데요? 좋으시겠습니다. 말레이시아에 궁전도 생겼겠다, 이제 부인을 여럿 둬도···."
"아 진짜. 이런 자리에서 행여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게다가."
난 건축가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위치가 딱 카마이라 본거지네. 저기서 살면 카마이라의 원혼이 나타나 틀림없이 가위에 눌릴 겁니다."
"하하. 그럼 얼른 가서 말하시죠. 이런 건 필요 없고,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비싼 땅의 펜트하우스나 내놓으라고."
"휴, 됐습니다.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다만, 저라면 그렇게 할 거라는 겁니다."
"너그러우시네요. 그래도 뱀굴 안이 아닌 게 어딥니까?"
"거기 집을 지어 준다면, 그건 거의 조롱 아닐까요?"
사실 이 만찬 이후에도 뭔 사인회니 또 다른 회의니 어쩌니 뭐가 많았지만.
청염,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싸웠던 가드 중 한 사람의 도움으로 다 쳐낼 수가 있었다.
그 사람, 몰랐는데 헌터일 뿐더러 이곳에서 꽤 높은 직위에 있는 것 같았다.
하여튼 이러한 인맥 덕에 남은 시간은 짐을 싸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리하면서 비교적 편하게 잘 보냈다.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1월 1일.
파견 헌터들은 새해를 이곳 병원 내 귀빈실에서 보냈다.
이번엔 치료 후 회복 중인 시부야와 히미코까지 함께였다.
"휠체어 졸업했네요?"
"네. 뼈가 잘 붙어서 전보다 더 튼튼해졌습니다."
"잘됐군요."
시부야와는 이런 간단한 인사를 했고.
"어머, 청염 님께선 피부가 엄청 좋으시네요? 혹시 화장품은 뭐 쓰세요?"
"화장품이요?"
"네. 저 조만간 한국에 관광을 갈 생각인데, 제품 추천 좀 해주세요!"
히미코는 그녀의 스타일대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특히 같은 여자인 청염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것인지 그녀에게 말을 많이 걸었다.
"저흰 가자마자 기자회견을 할 겁니다."
그렇게 작은 파티가 무르익을 때쯤.
시부야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리곤 진지하게 날 쳐다봤다.
"그러니 백운 님께선 제가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건 맞는 이야기라고 긍정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마음먹게 된 계기가 뭡니까? 전 나서서 이런 기자회견 같은 걸 해 달라고 먼저 부탁하지는 않았는데요."
"일단 목숨을 빚졌으니 백운 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게다가."
시부야가 의미심장하게 한 텀 쉬었다가 말했다.
"이대로 일본에 가면 저희는 틀림없이 징계를 받을 겁니다. 사쿠라 쪽에서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 징계를 받기 전에, 저희가 먼저 뒤통수를 칠 생각입니다."
그래.
엄밀히 말하면 사쿠라 쪽에서도 함께 나를 물 먹이려고 했으니, 시부야의 '너 죽고 나 죽자' 전략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기자회견 덕에 일본 녀석들의 얍실함이 드러나는 것 까지는 좋아. 하지만 그 뿐이라면, 내가 얻는 게 별로 없지 않아?'
고작 외교적인 '유감스러운 사과' 따위보다는, 물질적인 걸 받는 게 좋겠지.
차라리 이 상황을 가지고 사쿠라와 딜을 할 수는 없을까?
'못 먹어도 고' 아니겠어?
"저, 시부야 님. 기자회견 같은 것도 좋겠지만,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무슨 방법이요?"
"사쿠라의 관계자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방법입니다. 명예를 택할지, 아이템을 택할지요."
나는 일본의 헌터들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진지하게 듣더니, 그게 나에 대한 보답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럼, 그 '딜'을 위해 바로 사쿠라로 가실 겁니까?"
"아뇨. 일단 제가 한국에서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새해니까 부모님도 좀 뵈야 하고요."
"그럼, 저흰 도착하시기 전까지 가만히 있겠습니다."
"네. 출발할 때 연락 드리지요."
'일본 헌터 기관과의 딜이라.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나한테는 더 시급한 일이 있거든.'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면?
승급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지.
***
웅성웅성.
오늘도 역시 병원 밖에선 우리가 출국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빨리 지나가야지.'
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백운 님, 여기 다 백운 님 보러 온 분들이니,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세요."
"손이요?"
오글거리게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몸 안에 있는 오십 대 아저씨의 소울이 그건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 그러면 다들 여기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잖아요. 제가 들어 보니까, 다들 새벽부터 있었대요."
"새벽부터?"
그 말에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뭐라고, 새벽부터 잠깐 지나가는 걸 보러 온단 말인가?
'그럼 미친 척하고 한 번.'
씨익.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
살랑.
손을 흔들어 보였다.
"까야악!"
"고마워요!"
고맙다고 해주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두세 번 해드린 후,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 올라탔다.
"잘하셨습니다. 거봐요. 다들 좋아하셨잖아요."
"휴, 이런 걸 해 본 적이 없는지라. 지금 보니 연예인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보기에 어색하긴 했어요."
먼저 타 있던 청염이 나를 놀렸다.
"입꼬리는 왜 떠시는 거예요?"
"별로 웃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웃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과거엔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삐딱한 청년이었고.
나이 들어선 죄책감으로 범벅된 아저씨였어서 그랬고.
회귀 후에는 새로 받은 인생을 잘 보내기 위해 발버둥 치기 바빠서 그랬다.
'이번에 집에 가면 부모님 앞에서 한 번 활짝 웃는 연습을 해 보자.'
그렇게 기념품을 포함한 여러 좋은 소식들을 가득 실은 채.
우리는 부모님과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한국으로 향했다.
***
"야, 도착했다!"
"카메라 확인했지?"
"오케이!"
인천 국제공항.
그곳엔 기자들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누구 할리우드 배우라도 오나?"
"타이거 파견 헌터들이 온다잖아."
"아! 그 사람들. 이번에 중국하고 일본이 못한 걸 했다고 했지!"
"나도 구경하러 가고 싶은데, 우린 비행기 시간 때문에 안 되겠다."
그들은 말레이시아로 떠난 헌터들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었다.
이번에 간 인원들이 좀 화려한가?
청파랑의 부길드장, 그리고 한국에서 딱 한 번 발생한 S급 게이트를 공략한 헤르메스.
거기에다, 그 둘보다 인지도는 적었지만 요즘 SNS를 타고 입소문을 내고 있는 백운이라는 사연 있는 헌터까지.
그러니 이들의 행보에 대해 기자들이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와아아."
찰칵찰칵
그때,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세 분이서 거의 모든 게이트를 닫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몰려왔지만, 헌터들은 그저 미소를 지은 채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차를 타는 그 순간까지, 그들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 참, 아쉽네.'
그때, 베테랑 기자인 김정욱이 혀를 찼다.
남들 다 찍는 공항 입국 영상만 건지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헌터들이 탄 차를 가만히 주시하다, 후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헌터들이 어디로 가는지까지만 쫓아가 봐라. 너희 둘이 각각 청염과 헤르메스를 맡아. 나는, 백운을 맡겠다."
정욱은 사실 출국 때부터 줄곧 저 백운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상아리를 잡을 때부터 계속 내 예상을 빗나가는 행동을 하고 있어. 거기다 그 결과가 전부 엄청나게 좋았지. 저놈은 앞으로도 이슈를 계속 터트릴 놈이야.'
그렇게 남호의 차를 조용히 쫓던 정욱은, 그의 목적지를 알게 된 후 자신의 감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녀석, 헌터 협회로 왔잖아?'
남호가 새해가 되자마자 찾은 곳.
그곳은 바로 헌터의 급수를 측정하는 헌터 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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