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영제국에 괴식은 없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새글

낑깡깽
그림/삽화
매일 저녁 8시
작품등록일 :
2024.07.24 05:06
최근연재일 :
2024.09.16 19:50
연재수 :
58 회
조회수 :
586,283
추천수 :
18,850
글자수 :
361,066

작성
24.08.13 21:00
조회
10,533
추천
327
글자
18쪽

힌트

DUMMY

난장판이 된 주방. 그러나 이젠 익숙한 풍경이었다.


에디스 아가씨에게 요리 연습은 내 주방을 자유롭게 쓰라고 허락해줬거든. 어쨌든 그녀는 지금 내 제자 비슷한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 후로 에디스는 틈만 나면 주방에서 책을 읽거나, 이 식당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곤 했다. 가끔은 혼자서 끙끙대며 요리 연습을 반복하기도 하고.


특히 내가 소환한 조미료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노트에 필기까지 하더라고. 심지어 MSG의 미묘한 맛까지도 정확히 분간하던데!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도 그런 노력 덕분이었겠지.


이상한 쪽은 냄새. 강렬하게 풍겨오는 간장의 냄새! 그녀가 만들고 있던 건 내가 봉인한 갈비찜이었다!


하지만 난 에디스에게 간장을 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포인트로 소환한 간장은 완전범죄(?)를 위해 남은 걸 모조리 하수구에 쏟아버렸는데?


냄비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에 말문이 막힌 나를 보며, 에디스가 먼저 고백했다.


"아··· 저번에 요리하시는 걸 보면서 대충 비슷한 레시피가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여러 번 조합법을 바꿔가며 연습해 봤는데··· 이번이 가장 잘 된 것 같아요. 한 번 맛보실래요?"

"겉모습은 비슷한데요··· 허어?"


꿀꺽.


맛이 거의 똑같았다. 90% 이상 똑같아! 뭐야, 이거 절대미각이라도 있는 거야? 나도 절대미각은 아닌데?


당연하지만 절대미각 따위가 현실에 존재할 리 없다. 만화도 아니고. 어떻게 한번 본 걸 이렇게 완벽히 재현한 거지? 눈썰미가 대단한데?


"소스는 도대체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제가 비율을 알려드린 적이 없잖아요."

"아, 그냥 이 주방에 있는 재료들로 추측했어요. 꿀이랑 우스터소스, 보리시럽에 다진 마늘이랑 생강을 조금씩 섞어서 여러 번 테스트해 봤죠. 다행히 비슷한 맛을 찾았어요."

"하지만 중요한 게 하나 빠졌는데요?"


그녀가 뒤로 숨긴 병. 그것의 정체ㅡ


"죄송해요. 쓰레기통에 버리신 병을 몰래 주워다가 거기에 쓰여 있던 글씨를 읽었어요. 소이 소스(Soy Sauce)?"


뭐? 그거 한글인데? 아니, 잠깐만, 라벨지 하단에 영어가 조그맣게 써 있었나? 이런 망할 세계화 시대 같으니!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죄송할 건 없어요, 하지만... 간장은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저도 간신히 구한 건데요."


간신히 구했지. 포인트 상점에서. 애초에 간장은 1901년의 런던에서 구할 수 없잖아? 그래서 시식단만 한 번 돌리고 바로 봉인했었다고.


치킨 앤 칩스의 재료는 런던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 시즈닝도 마찬가지다. 배합법만 알면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으니까.


조미료만 현대에서 가져온 걸 썼을 뿐, 사실 이 요리는 염지한 닭을 두 번 튀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레시피. 그걸 최고 수준의 퀄리티로 구현해낸 게 바로 이 식당의 주방이고.


그러니 레시피가 유출되도 난 떳떳하다. 결국 맛있게 하려면 이곳이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베이커 가에서 파는 것보다 여기서 먹는 게 훨씬 맛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간장, 고추장, 된장 같은 한국식 발효식품은 아직 이 땅에서 완벽하게 낯선 재료. 그래서 발효식품을 활용한 한식을 런던에서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것 또한 아직은 시기상조.


물론 계획은 있었다. 발효식품을 영국땅에 자연스레 들여올 계획이. 나비효과가 좀 생기겠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고. 하지만 아직 계획만 있고 실행을 못했다. 아직 모아둔 돈이 모잘라서!


그래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갈비찜을 내 식당 한정으로 내놓아볼까 싶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시식단의 반응이 너무 열렬해서 후폭풍이 무서워 봉인한 거다.


더비 백작님이야 그렇다 치고, 나중에 후작, 공작, 심지어 황제까지 나서서 레시피를 추궁한다면 대응할 방법이 없겠더라고. 뭐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 싶다만.


"할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아 죄송해요, 이미 갈비찜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해 버렸어요. 어쨌든 할아버님이 여기저기 수소문하시다가 결국 중국 대사관을 통해 알아내셨어요. 리머 가(*Limehouse, 런던 차이나타운)의 상점에서 간장을 판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경악해서 입을 떡 벌렸다.


리머 가? 거기 항만 아니야? 차이나타운이 있었던가? 거기서 간장도 살 수 있다고? 뭐 중국인들이 모여 살면 그럴 수도 있겠네.


내 초능력이 들통날까 봐 혼자서 얼마나 조바심을 냈는데, 그런 방법이 있었단 말야?


그렇다면 갈비찜을 내 식당에서 내놓아도 문제가 없겠는데···?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나는 에디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털어놓고, 급하게 헬프 버튼을 연타했다.


그러자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승낙한 에디스.


[에밀리 에디스 스탠리: 또 새로운 레시피를 보여 주시려나? 너무 기대돼! / 감정: 행복 / 만족도: - ]


아무래도 나는 요리에 미친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것 같다!




###




채식이 어려운 이유는 고기의 풍미와 질감을 야채로 완벽하게 대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콩고기나 밀고기를 써도, 고기의 식감을 완전히 따라잡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영양소의 문제. 고기, 생선, 계란, 유제품은 단백질의 중요한 공급원인데, 채식만으로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콩, 견과류, 퀴노아나 귀리 같은 일부 곡물류, 미역과 다시마 같은 해조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걸로도 충분치 않다.


비타민 B12도 문제. 이건 식물성 식품엔 거의 없지. 게다가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철분도 흡수율이 낮아서, 채식주의자들은 철분 결핍에 시달리는게 일상이다. 결국 보충제가 없으면 안 된다고.


이런 과학적 사실들은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영양학이 발전하면서 밝혀진 것들. 지금 시대의 채식주의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내가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고.


하지만 나는 테슬라 씨를 비롯해 에디슨 씨와 크룩스 경의 입맛까지 채식으로 사로잡아야 한다. 컨셉은 정해졌다. 두부로 만든 퓨전 한식. 문제는 식감이다. 1900년대에 밀고기나 콩고기라니, 그건 너무 오버 테크놀로지잖아.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노려야 할 것은 강렬한 맛.


두부 자체는 부드럽고 연한 식감이지만, 풍미를 자극하는 강렬한 소스로 덮어버리고 수분을 날리는 조리법으로 탄탄한 식감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괜찮은 아이디어 아니야?


혹시 어렸을 때 과학 시간에 배웠던 혀의 맛 지도를 기억하나 모르겠다. 혀의 특정 부위에서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을 느끼고, 추가로 통각의 매운맛과 압각의 떫은맛의 6가지 맛이 있다는 이론.


하지만 그 가설은 2000년대 이후 폐기되었다. 혀의 모든 부위에서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최신 연구결과로 밝혀졌으니까. 도리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추가된 7번째 맛이 있다.


감칠맛(Umami).


고기, 토마토, 치즈, 간장 같은 발효식품, 그리고 다시마 같은 해조류에서 많이 발견되는 '글루탐산'이 만들어내는 맛.


20세기 중반부터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과학적 근거가 부족해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2002년에 감칠맛 수용체가 발견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지. 교과서에도 반영되었나? 그건 모르겠고.


매운맛과 떫은맛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매운맛은 통각을 자극해 고통을 주고, 떫은맛은 압각을 통해 불편함을 만든다. 그러니 매운맛과 떫은맛은 제외. 마이너스 요소는 배제하는 게 좋다.


쓴맛은 거의 불호의 영역이다. 쓴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남은 건 단맛, 짠맛, 신맛. 여기에 감칠맛을 강렬히 버무린다면?


채식주의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풍미의 완성. 이것이 바로 퓨전 한식의 진정한 매력이지, 음음.


한식에서 채식 요리는 비빔밥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밥에 딸려오는 반찬 개념이다. 두부조림이나 두부구이, 두부전, 두부찌개 같은 거. 그런데 쌀맛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비빔밥이나 반찬을 내놓을 순 없잖아.


결국 이걸 메인 디쉬로 승격하려면 다른 나라의 일품 요리법을 결합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지.


스테이크, 라자냐, 피자, 토마토 티카 마살라 커리, 탕수육.


이 요리들은 모두 감칠맛이 강렬한 토마토, 치즈, 간장을 베이스로 한다.


이걸 두부와 결합한다면?


두부 스테이크, 두부 라자냐, 두부 피자, 두부 마살라, 두부 버섯 탕수. 현대에서도 채식주의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퓨전 한식 레시피.


하지만 두부 피자는 제외. 이건 아무리 혁신적인 미국인이라도 지금 시대에는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마살라? 난 커리 만들 줄 모른다. 이것도 제외.


결정됐네. 바로 이거다! 두부 스테이크, 두부 라자냐, 두부 버섯 탕수!


각각 굽기, 베이킹, 튀김으로 조리법마저 다르다. 이 정도면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먹히겠지! 현대 한국인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요리들!


다른 요리가 더 있지 않겠냐고? 아, 몰라 몰라, 대충이라도 조리법이 기억나는 건 이 정도밖에 없다고.


두부 스테이크. 두부와 야채를 다져서 반죽한 뒤 구워서 스테이크 소스를 얹는다. 단단한 식감과 담백함으로 요리의 중심을 잡기에 딱 좋다.


두부 라자냐. 치즈와 토마토가 상큼함과 고소함을 더해준다. 묵직한 식사를 원하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이다.


두부 버섯 탕수. 바삭한 식감과 달콤한 소스로 전체적인 구성에 변주를 준다. 두껍게 썰어낸 쫄깃한 양송이버섯은 고기의 식감과도 유사하지.


나는 이걸 대충 열심히 손 발 섞어가며 에디스에게 설명했다. 에디스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메뉴가 많지 않아요? 이번에도 아뮤즈 부쉬로 쓰실 건가요?"

"아니요, 이번엔 전체적으로 양을 줄일 거예요. 다양한 맛이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도록 골고루 밸런스를 잡고, 아쉬워서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게 포인트거든요."


굳이 내가 저 사람들을 전부 배불리 먹일 필요는 없지. 공짜 손님인데.


"아하, 그렇군요! 스테이크랑 라자냐까진 알겠어요. 그런데 탕수육? 그건 뭔가요? 어느 나라 음식인가요?"

"모르십니까? 글쎄요, 좋아하실 겁니다. 고기를 튀겨서 달콤하고 새콤한 소스를 입힌 중국 요리인데, 이번엔 채식주의자들도 먹을 수 있게 고기 대신 콩을 갈아 만든 '두부'로 해볼 생각입니다."


요새 하도 날아다녀서 천재 요리사인 줄 알았더니, 역시 배우지 않은 건 모르는구나. 세상 참 넓다! 어쨌든 나는 탕수육을 중국 요리라고 설명했다. 사실 프라이드 치킨처럼 한국에서 화교들에 의해 변형된 요리에 가깝지만, 이 시대의 '조선 다이너스티'에는 탕수육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미안해, 대한민국!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도움받아야 할 건 퓨전 두부 한식이 아니었다.


이 조합의 단점. 두부 베이스라서 식감의 조화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


너무 이국적인 음식만 내놓으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맞지 않으니, 에피타이저나 메인 디쉬 하나쯤은 익숙한 전통 채식을 더하는 게 좋겠지.


전체 구성에 상큼함을 채워줄 견과류 토핑 샐러드. 그녀의 전문 분야인 월도프 샐러드라면 테슬라 씨도 충분히 만족할 것 같은데? 월도프 샐러드 자체가 원래 미국에서 파생된 요리니까.


그러고도 아직 부족한 맛이 있다. 그건 바로 신맛. 하지만 복잡한 메인 디쉬를 더 만들 시간도 없고, 필요한 재료도 부족하다. 다행히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면서 신맛을 더해줄 채식 요리가 하나 떠올랐다.


"더비 백작님, 레몬 파스타 좋아하신다고 했죠? 만들 줄 아시나요?"

"네! 그럼 제가 그걸 준비할까요? 디저트도 필요하신가요? 트라이플로?"

"정말 고마워요! 큰 도움이 됐어요!"


좋았어, 이걸로 완벽한 코스 구성이 됐다!


나는 에디스를 부족한 재료를 사오라는 핑계로 주방에서 쫓아내고, 남 몰래 포인트 상점에서 두부를 잔뜩 소환했다. 어차피 두부만 빼면 전부 런던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니까. 왜? 뭐? 문제있어?


변명거리는 에디스가 줬잖아? 누가 캐물으면 이것도 리머 가에서 사왔다고 하면 되지! 난 단지 왔다 갔다 할 시간이 아까웠을 뿐이라고!


하지만 문득 드는 걱정.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야 하나? 그냥 치킨 앤 칩스를 냅다 입에 쑤셔 박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거면 채식주의자도 맛있게 먹을 텐데.


"···괜찮겠지? 다들 맛있다고 해 주겠지? 뭐, 내기에서 져도 어차피 난 손해 안 보니까! 크룩스 경 혼자 덤터기 쓰는 거지. 그러길래 누가 동의도 안 받고 내기를 걸래?"


다행히 아직도 오후 5시가 되지 않았다. 영국식으로 디너는 오후 7시부터 시작.


준비할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




윌리엄 크룩스. 대영제국의 왕립 학술원장이자, 영국 과학진흥협회 회장, 학사원 회장이며, 주간 저널 '화학'의 창간인.


그에게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신분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요크 공작, 조지 프레드릭 어니스트 앨버트, 에드워드 리차드 씨의 편지 친구라는 사실이다.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왕세손이었던 프린스 조지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영국의 기술혁명에 큰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르치던 가정교사들은 전부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예절 교육에만 신경 썼을 뿐, 과학기술에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만이 고용되었으니까.


영국 정부의 실권을 쥐고 있던 젠트리들은 왕실 자제들이 과학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들은 과거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시대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왕권은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브루주아들이 쥐고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프린스 조지가 선택한 것은, 이미 명망 있는 과학자였던 크룩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호기심을 푸는 것.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나이차를 뛰어넘어 깊은 친분을 쌓아갔다.


어찌 보면 ‘비밀 대부’라고도 할 수 있는 관계랄까. 그래서 크룩스 경도 최근 공작에게 벌어진 사건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치킨 앤 칩스. 우연히 자동차로 런던 시내를 지나가다, 그 매혹적인 냄새에 이끌려 먹게 된 음식.


그때 그는 엄청난 영감을 받았다. 이 훌륭한 길거리 음식을 왕자님께도 진상해야겠다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왕자님은 정치인들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은둔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으니까.


이 맛있는 음식이 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 껍질 속에 갇혀 있던 조지가, 드디어 그 알을 깨고 나오기 시작했다.


'쟝 폴 뒤랑.'


젊은 나이답지 않게 대단히 창의적인 요리사다. 크룩스 경도 이 식당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이 인테리어에는 훌륭한 과학자인 자신만이 알아챌 수 있는 여러 위험한 개념들이 숨어 있었다.


논문으로 작성한다면, 당장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런데 갈비찜? 돈까스? 나도 그걸 한번 맛보고 싶은걸. 혹시 이번에 그걸 내놓으려나?'


게다가 공작님도 고백하지 않았던가. 이 친구는 치킨 앤 칩스뿐만 아니라, 영국 런던 전체를 뒤흔들 또 다른 엄청난 무기들을 가지고 있다고!


"아니, 에디슨 씨! 축음기를 백화점에 틀어놓겠다니, 제정신이십니까? 저한텐 그저 소음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아주 불쾌해요!"

"자네의 그 무선 전송 기술인가 하는 아이디어는 또 어떻고? 에너지를 많이 보낼수록 손실률은? 내 DC를 깎아내린 친구답지 않은 비효율성이군!"


크룩스 경은 눈앞에서 멱살을 잡을 기세로 싸우고 있는 두 발명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처음 이 장소에 압도당해 놀랐지만, 천재답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영감을 받은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말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뭐, 한 30분이면 되겠지. 일단 가만히 두고 볼까.’


크룩스 경은 이들의 논쟁이 단순한 말다툼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이들이 열띤 토론을 벌일 때마다 언제나 혁신적인 결과가 나왔으니까.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장소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력했다.


과학자로서의 창의적 영감이, 괴팍한 성격의 두 발명가마저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그럼 축음기의 소리를 개선해 보시죠. 저는 예전부터 축음기 바늘이 나무 대신 다이아몬드 같은 강한 금속이라면 어떨까 생각해 왔습니다. 아니면 본체에 고무 패드를 달아 진동을 줄이면 노이즈를 없앨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자네 기술의 문제는 인프라야. 규모를 더 작게 설정하고, 아니면 무선 전력 전송 대상을 아주 작은 모터 같은 것으로 제한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전선 없는 세상에서 살 수도 있지 않겠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다툼을 벌이던 두 사람이 이제는 의기투합해 서로의 아이디어를 검토해 주기 시작했다.


···물론 멱살은 여전히 잡고 있었지만.


‘이제 기막힌 전류 전쟁도 완전히 끝이로군.’


그저 순간의 변덕이었다. 이 두 사람과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세상은 이 뛰어난 발명가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에디슨은 J.P. 모건이라는 간악한 금융인에게 회사를 빼앗긴 뒤로 광적으로 DC 시스템에 집착하게 되었고, 테슬라는 J.P. 모건이 자금줄을 죄어 무선 전송 기술의 연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왔다. 쟝 폴 뒤랑이라면, 공작님을 알에서 깨우듯 끄집어낸 그 유능한 청년이라면, 이 두 사람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요리 내기? 그저 이들을 이곳까지 데려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이 두 사람을 어떻게든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내기마저 아무래도 성공한 모양이다.


저 멀리서 서빙 카트가 다가오고, 그 위에서 풍겨오는 압도적인 향기!


윌리엄 크룩스 경은 멋지게 기른 턱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던 침을 급히 훔쳤다.


작가의말

1. 어떻게 하면 간장을 자연스럽게 가져올까 고민을 하다가, 당시에도 이미 중국과 영국이 수교를 했고 수많은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만 노동자들에 의해 초기 형태의 차이나타운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리머하우스라는 곳인데요, 현대의 공식적인 차이나타운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항구 노동자들에 의해 꽤 커다란 중국인 커뮤니티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정도 지역이면 간장도 팔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두부, 간장 같은 동아시아 발효식품은 20세기 초반에도 이민자나 노동자들의 폐쇄 커뮤니티에서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백인들만 몰랐을 뿐이죠.

2. 저는 가끔 두부 라자냐를 만들어 먹는데요, 솔직히 진짜 맛있습니다. 건강식인데 건강식이 아닌 맛입니다. 어차피 맛은 치즈와 토마토소스가 다 해 주는 거니까요. 버섯 탕수육은 워낙 급식 단골 메뉴니까 익숙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달달한 탕수육 소스가 전부죠. 원래 표고버섯으로 해야 맛있는데, 백선생님께서 양송이버섯으로도 레시피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데뷔 결정! 1900년 영국에서는 양송이버섯은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표고버섯은 불가능했거든요. 두부 스테이크는 맞춰 주신 분이 계시네요. 두부에 야채를 섞고 패티를 만든 후에 굽는 요리입니다. 사실 이것도 소스가 하드캐리하는 음식이죠. 전통 스테이크 소스를 써도 되고 토마토 소스를 써도 맛있어요.

3. 다음화로 이번 에피소드도 끝나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 갑니다. 1권 정도 빌드업을 쌓았으니 슬슬 전개에 속도를 붙일 생각입니다. 주인공도 요식업으로 세상을 한번 바꿔 봐야죠. 제가 진짜 없애버리고 싶은 영국 요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4. 또 다시 분량 조절 실패입니다. 작가는 아무래도 분량 조절에 재능이 없나 봅니다. ㅠ 또 다시 1.5화 분량입니다. 조회수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는데 아직 이 소설이 미식은 아닌가 봅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연재시간은 매일 오후 9시로 고정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내 대영제국에 괴식은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간은 저녁 8시입니다. 24.08.12 10,035 0 -
58 난제 NEW +42 18시간 전 2,962 180 12쪽
57 야망 +21 24.09.15 4,332 207 14쪽
56 발판 +27 24.09.14 4,887 227 13쪽
55 인연 +27 24.09.13 5,365 249 15쪽
54 인생의 전환점 (수정) +36 24.09.12 5,823 255 14쪽
53 악역 +22 24.09.11 5,870 244 15쪽
52 찐사랑 +35 24.09.10 6,284 256 13쪽
51 퀘스트 +19 24.09.09 6,507 267 13쪽
50 그림자 골목 +17 24.09.08 6,717 269 16쪽
49 묘수 +49 24.09.07 6,891 276 13쪽
48 기억의 잔향 +61 24.09.06 7,144 307 14쪽
47 수색 (2) +62 24.09.05 7,184 301 14쪽
46 수색 +33 24.09.04 7,330 287 15쪽
45 왕실 다과회 +15 24.09.03 7,729 296 15쪽
44 불청객 +20 24.09.02 7,721 310 13쪽
43 왕실의 말 +27 24.09.01 8,002 327 15쪽
42 만남 +33 24.08.31 8,275 334 14쪽
41 여행 +23 24.08.30 8,461 334 14쪽
40 뜻밖의 보상 +36 24.08.29 8,614 353 14쪽
39 폭탄 선언 +42 24.08.28 8,618 325 15쪽
38 과거 회상 +28 24.08.27 8,671 320 14쪽
37 유혹 +28 24.08.26 8,740 312 13쪽
36 완벽한 탈출구 +24 24.08.25 8,834 317 13쪽
35 의문의 소환 +12 24.08.24 8,804 317 14쪽
34 성공의 대가 +17 24.08.23 8,956 329 13쪽
33 마지막 한 수 +16 24.08.22 8,985 325 16쪽
32 맛의 미로 +26 24.08.21 9,093 330 14쪽
31 추리 게임 +29 24.08.20 9,042 292 15쪽
30 뜻밖의 방문 +10 24.08.19 9,192 302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