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에서 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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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초이
작품등록일 :
2024.07.2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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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기연

DUMMY

"죽여 주시옵소서."


수완은 바짝 엎드렸다. 솔직히 살 떨렸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한다고 노력했으나, 진왕은 그 정도로 아둔하지 않았다.


상선에 말처럼, 바른 조언이라고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군왕도 사람인지라 '너 못했어. 병신이야.'라고 한다면 정말 병신이라 할지라도 화가 끓어오른다.


그 정도면 그래도 성군이다. 대부분의 군왕은 역정을 내며, 작게는 좌천, 크게는 목을 날린다. 그래서 최대한 에둘러 조심히 말해야 한다.


수완은 거의 땅에 붙을 듯 몸을 낮추었다.


"성심을 어지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나이다. 전하께 승리를 안겨드리겠다는 약조를 지키려 했을 뿐이옵니다." 


진왕은 수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교위가 과인을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봤구나."

"죽여-"

"과인은 충언을 기분 나쁘게 들을 만큼 소인배가 아닐세."


수완은 눈을 부릅떠 촉촉한 눈망울로 만들고 진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크게 감동했다는 듯.


"...전하."


"일어나거라."

"아니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한 번 더 쇼를 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동양의 법도는 기본 삼세번, 약속 대련를 거친 후 마지못해 수락 하는 것이 도리이다.


"어허, 자꾸 그러면 과인을 욕보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노라."


그제야 수완은 몸을 일으켰다.


"고생들 많았다. 최 교위는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내일 보자."

"예, 전하."



37화. 기연


진왕의 거처,

둥그런 탁상에 청화백자에 담긴 향긋한 차내음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들거라. 서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수완은 목을 축였다.


'홍차로구먼.'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이 가져온 모양이었다.


"호기롭게 과인을 기만했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 지나 이야기해보거라."


수완은 궁금증부터 풀기로 했다. 망가진 물건을 계속해서 사용하는데는 이유가 있을테니.


"현재 전술을 채택하신 연유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진왕은 눈을 감고 말했다.


"병법에 기본은 눈앞에 적을 완전히 분쇄하고 나아가는 것이네. 그래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지. "


그랬다. 축국은 전장에 축소판.

통상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모든 성을 공략하며 나아가는 게 정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야 보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적이 성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지나쳤다가는 뒷빵을 맞거나 보급이 끊겨 쫄쫄 굶게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뒤에 적을 남겨두는 건 자살행위와 다름없다고 병법에서 가르쳤다.


수완은 칭찬부터 늘어놓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하.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소신은 그저 놀이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가."


수완은 입 안으로 남은 홍차를 털어 넣고 잔을 엎어 구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적당히 둥근 무언가를 골라, 그 안에 쏙 집어넣으며 말했다.


"하나, 승리를 위해서는 구문 안에 공을 많이 차넣어야 한다고 소인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 진왕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까 언덕에서 보여준 공간을 말하기 위함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소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축국은 전면전보다는 기동 침투전에 가깝다고 사료되옵니다."

"비겁한 북적 놈들처럼?"


진왕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물론 천자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잘근잘근 밟아 주셨습니다. 덕분에 태평성대가 찾아왔습니다."

"그렇지. 이 모든 게 황상 폐하의 은덕이다."

"하나, 북적 놈들의 기마전이 훌륭한 건 사실이옵니다. 적에게라도 배울 점이 있다면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왕은 고민에 잠겼다. 원래 기본을 깨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중원인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할 만큼 자존심이 세지 않던가. 수완은 기대 반, 불안 반인 마음으로 숨죽이며 기다렸다. 


다행히 진왕은 꽉 막힌 인물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막혔다면 져야지 뭐.


진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근엄하게 말했다.


"좋다. 정리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전하. 하나 더 있사옵니다."

"또?"


진왕이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지금 말해야 한다. 다시 이런 허심탄회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앞에 어려운 안건도 승낙하지 않았던가.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이미 눈치채고 있지는 않을까.


"축국단 내부에 파벌이 크게 형성된 듯합니다."


진왕은 그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는 듯, 흐흐흐 웃었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퇴청하는데 화산파 후기지수 중 으뜸인 화웅이 어쩐 일로 친한척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수완은 이 양반이 대체 무슨 꿍꿍인가 싶었으나, 친해져 나쁠 게 없다는 마음에 그를 따라갔다.


그랬더니 객잔으로 데려가, 밤늦도록 종남파 도인들을 씹어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은근슬쩍 한다는 소리가 '우리 쪽으로 안 붙으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거였다.


이런 일이 화산파 도인에게서만 일어났느냐? 같이 술 한잔 걸쳤다는 사실을 종남파 도인이 알게되자, 그날 훈련에서 같은 편으로 묶였음에도 위험천만한 행동을 일삼았다. 분풀이를 한 것이다. 그러고는 저녁에는 미안하다며 객잔으로 불러내 똑같은 짓거리를 했다.


화산파와 종남파. 서로 다른 듯 닮은 그들. 서안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식탁에 올려두고 다툰, 두 문파의 오랜 감정골이 깊어 보였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 바보도 아니고 그 일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네. 교위가 가져온 서신도 그 일에 관한 거였네. 하 대감, 그 양반이 양쪽 세력을 붙이는 데는 도가 텄거든."

"효과는 못 보셨나 보군요."

"그랬으면 교위가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구먼. 이번 일로 과인도 느낀 바가 많다네. 가까운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수완은 고개를 저었다.


“원교근공이라 했습니다. 삼십육계에 나오죠. 멀리 있는 자와는 친해질 수 있으나, 제 옆집 사는 자와는 이익이 겹치니 친목을 도모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병법도 익혔는가?"

"그럴 리가요. 소인이 발 담그고 있는 이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았던가. 쥐구멍만 한 치킨집 죽이겠다고 친구라는 놈이 남에 레시피를 훔쳐다가 박물관까지 차렸다. 아주 다른 분야라면 협력할 수 있으나, 같은 먹거리를 바라보면 평생 친구도 금수로 변하는게 인간인 듯 했다.


"이 또한 대비책이 있겠지? 내 교위의 말을 귀담아들을 것이다."


수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왕은 환하게 웃었다.


"최수완 교위를 주장으로 임명하고 백호로 승차한다."


수완은 그날 밤 퇴청하지 못했다. 밤새 상소를 써야만 했다.


「 臣(신) 최수완, 주상께 아뢰옵니다. 하늘에 명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리는 천자와 전하께 감히 글을 올리옵니다. 듣건대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듣고, 늘 백성을 굽어살피시며....(중략) 」 


*


다음 날부터는 완벽히 바뀌었다. 진왕은 이제 직접 경기는 뛰지 않고, 연무장 2층 난간에 올라 수완이 올린 전술을 시험해 보는 일에 집중했다. 


결국 선택하고 결과를 책임지는 건 군왕의 몫이니 말이다.


수완은 주장을 상징하는 완장을 팔뚝에 두르고 선수들을 가르쳤다.


“전하께서 직접 고안하신 전술을 따르거라. 꼭 전면전만이 답이라는 생각을 버려.”

“연무장이 넓은데 왜 그쪽에만 목을 매는 것이냐?”

“종남파!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셋이 한공간에 겹치니 낭비가 발생하잖아. 계속 동료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란 말이야!”


갑작스레 수완이 승차하자, 도인들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천금장 무인들과는 다르게 모두 새롭게 바뀐 체제에 잘 순응했다. 원래 모범생이 선생님 말씀을 가장 잘 듣는 법이다.


게다가 수완의 뱀처럼 타고 들어 오는 듣도보도 못한 무예와 신기에 가까운 발재간이, 그들로 하여금 감히 드러내고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진왕은 이전과 다른 선수 기용을 단행했다.


“오늘은 화산파가 주장과 같은 팀이다.”


기존에는 실력이 좋은 사람 대 부족한 사람으로 나눠 연습했다. 이제는 문파끼리 묶었다. 수백 년 이어온 다툼을 단기간에 끝내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으르렁댔다. 진왕은 패드립도 서슴없이 날렸다.


“종남파! 정신 똑바로 안 차리나. 이러다가 화산파가 경기에 나가겠다. 느그 장문인이 그리 갈키디?”


그러던 어느 날, 상선이 쪼르르 달려왔다.

 

“전하, 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였나이다.”

“어딘가?”

 

진왕은 2층 전각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마침 태자가 보였다.


닮은 듯 다른 두형제. 진왕도 풍채가 큰 편인데 태자 역시 못지않았다. 큰 바위만 한 머리가 오백년 묵은 굵은 소나무 위에 붙어 있는 듯하다.


수완과 도인들은 한쪽에 도열했다.


진왕은 예법도 무시한 채 태자를 와락 껴안았다. 진심인지는 모른다. 보이는 걸로는 우애 깊은 형제인 듯 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태자 전하. 너무 반가운 마음에 몸이 나가버렸습니다.”

“아니다. 아우가 이리도 환대해 주니, 과인 또한 기쁘구나. 하하하”


태자가 수완을 쳐다봤다.


“연습하고 있던 모양이구나?”


진왕이 불렀다.


“주장을 맞긴 최수완 백호입니다.”


수완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전하 배옵니다.”

“오호, 생긴 건 곱상한데 공 좀 차나 보지? 양 내관 우리도 주장을 불러오게.”


잠시 후, 밖에서 대기하던 태자 측 주장이 뛰어왔다.


‘?’


박하 향이 스쳤다.


또 너라고?


"진왕 전하를 베옵니다. 남궁가의 장남 진청이라 하옵니다."


진왕이 화산파와 종남파를 불러 들였듯, 다른 왕들도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하북에 연왕은 팽가를, 산서에 평왕은 항산파를. 태자 또한 남경 바로 옆, 안휘성에서 남궁세가를 데려왔다.


진왕이 말했다.


"남궁가는 대대로 검술에는 따라올 문파가 없다고 들었네. 기대가 크다."


수완은 진왕이 상대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올라간 입꼬리, 오래 지켜보지는 않았으나 거짓을 말할 때 보이는 행동이다.


"과찬이십니다. 최선을 다하여 황상 폐하와 태자 전하께 승리로 보은할 것입니다."

"하하하, 패기가 마음에 드는구나. 하나, 그렇게 진지할거 없다. 어차피 놀이다, 놀이!"


​진왕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태자와 안으로 들어갔다. 


진왕과 태자가 떠나가자 수완과 진청만이 남게 되었다. 진청은 정말 반가워했다.


"문웅,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구먼. 우리 인연이 참으로 대단해. 엌엌엌"


그 날 이후, 진청은 깊은 호감을 보였다. 그리고 별호도 붙여줬는데, 미친 놈이 글쎄 문학의 영웅, 문웅이란다.


반면, 수완은 머릿골이 아파왔다. 의심이 맞는다면 저 녀석 역시 축구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수완이 미드필더를, 그가 골잡이가 되었다. 이름하여, 다이나믹 듀오. 조기축구 아저씨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저 자식과 진짜 뭐가 있나? 사사건건. 징글징글하네. 지금 와서 전술을 바꿀 수도 없고···.'


생각지도 않은 장애물이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커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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