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세계의 초월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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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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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DUMMY

누리는 생애 처음, 눈으로 상대 주먹을 보고 피했다.

싸움이 익숙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상대는 힘만 가득 담은, 그렇다고 세지도 않은 주먹을 마구 날렸고 누리는 가볍게 회피했다.


‘벌써 지친 것 같네.’


시작한 지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상대는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택지 따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누리는 그에게 자비를 선사했다.

고통 없이 일격에 죽을 수 있는 행운을.


“미안해...”


누리는 피 묻은 오른 주먹과 머리통이 사라진 상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투기장은 거대한 환호와 야유로 가득 찼지만, 누리는 침묵과 어둠에 잠겼다.

경기가 끝나자 곧장 방으로 끌려갔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몸을 웅크린 채 절망감에 젖어 있었으니까.


‘이따위 짓을 왜 해야 하지. 시발.’


하지만 뭘 고를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인은 일상처럼 반복되었다.

상대는 조그마한 아이부터 나이 든 여성, 뚱뚱한 남자 등 매우 다양했다.


누리는 매일 같이 살인을 저질렀다.

오함마란 이름에 걸맞게 그의 주먹은 상대의 머리통을 일격에 부수었다.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고 누리는 점차 말이 없어졌다.


“흐. 이제 대꾸도 안 하나. 상관없어. 난 네가 잘 싸우기만 하면 되니.”

“슬슬 정식으로 내 식구로 넣어주지. 확실히 처음에 널 잘못 판단한 것 같다.”


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술자리에도 끼워줬다.

거의 매일, 경기가 끝나면 매번 다른 주점에서 자리를 만들었는데, 창관이 제일 잦았다.

처음에 좀 마시고 놀다가 각자 할 일 하러 가는 것이다.


“난 생각이 없어요. 다가오면 머리통을 날릴 테니, 그렇게 알아요.”


누리는 자기 몸을 더듬는 창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솔직히 욕구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살인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불결한 이곳의 위생 상태는 그걸 사라지게 만들곤 했다.


쥐가 들끓는 곳에, 이상한 체취가 나는 여자랑 관계하려니, 영.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 로우힐 사람들은 냄새가 심했다.

프리덴의 노예들도 그렇긴 했지만, 이곳은 더했다.

지구에서 가장 비슷한 걸 꼽자면 음식물 쓰레기를 오래 놔두었을 때, 하수구에서 역한 게 확 올라올 때, 버스 안의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향수를 뿌리고 나왔을 때, 그리고 머리를 하도 안 감아 스멀스멀 나는 정수리 향이랄까, 이런 것들이 모두 합쳐진 냄새였다.


‘도시라서 그런 걸까. 너무 더러워.’


누리는 회식에 끼고 싶지 않았다.

주점으로 가는 길엔 사람 똥, 말똥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말려져서 널브러져 있었고 종종 맨발로 그런 걸 밟았으니.


딘은 이런 누리를 의아하게, 그리고 분노를 섞어서 이상하게 보았다.


“너 고자냐? 여자를 마다하고. 술도 안 먹고. 시발놈이. 감히 날 무시해?”


딘은 단검으로 허벅지를 긋는 등, 협박도 자주 했지만 누리는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됐다. 시발. 쓸모는 있으니 살려둔다.”


딘이 떠나갈 때면 누리는 그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았다.

살인부터 먹는 것까지.

뭐 하나 인간 취급해 주지 않는 그를.


누리는 이제 딘이 없어지면 팔굽혀펴기, 플랭크, 물구나무서기 등 알고 있던 지식을 모두 동원해 맨몸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있을, 딘을 죽이기 위해서도, 딘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을 벗어나게 해줄 것이 필요해서라도.

그는 어디건 힘을 쏟아부을 곳이 필요했다.


“오늘부턴 상대 급이 좀 올라간다. 처음에 싸운 블랙독 만큼은 아니지만 좀 치는 놈들이야.”

“그리고 개네는 널 아니까 블랙독처럼 어이없게 당해주지 않을 거다.”


또 밤이 되어 돌아온 딘이 누리에게 말했다.

이곳 불법 투기장은 나름 붙이는 규칙 같은 게 있었다.

따끈따끈 한 신인, 그러니까 누군가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서나 혹은 분위기를 달구려 피를 뿌리는 제물이 아니면 나름 룰을 정해놓고 붙였다.

지구처럼 체급이나 랭킹으로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진 않았지만.


“다 자기 주인 밑에서 전문적으로 훈련한 놈들이란 말이지.”

“급전에 필요해 그냥 몸뚱어리 하나만 오던 새끼들하곤 달라.”


소유주들은 메인 경기를 계약하고 그의 선수들은 그날 싸운다.

딘은 누리의 소유주로서 전문 훈련을 시키는 놈들의 주인과 경기 계약을 맺는 것이다.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주는데 고개라도 좀 끄덕여.”

“아무튼 잘하라고. 못하면 뒤지니까.”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던 누리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슬슬 이곳의 지리도 파악했고 딘의 부하들 동선도 어느 정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딘이 무서워. 다들 차고 있는 칼도.’


너클, 가시 방어구 같은 것들 덕에 날이 선 무기에도 좀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딘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칼도.


이곳을 벗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딘하고는 멀어지고 싶은 누리는 매일 같이 생각했다.

어떻게 나갈지.


운동과 고민으로 점철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싸움터로 끌려가야 할 시간이 왔다.

누리는 여전히 맨몸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강력한 주먹도 주먹이지만, 그의 몸은 나날이 커지고 다부져지고 있었으니까.


“오함마! 오함마!”

“머리통을 날려버려!”

“시발 놈아! 너한테 다 걸었다!”


이젠 그의 등장만으로 투기장 안이 거대한 소음이 일었다.

물론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꽤 인지도 있는지, 오함마 만큼이나 큰 환호가 이어졌으니까.


“살가죽을 다 벗겨버려!”

“클로가 뭔지 보여줘라. 좃밥하고만 싸운 새끼한테 진짜 싸움이 뭔지 알려주라고!”

“아이언 클로! 너한테 전부 걸었어!”


응원과 배당률은 거의 반반으로 5대5로 나온 듯했다.

상대는 길쭉한 칼날이 달린 클로를 착용한, 큰 키에 날렵한 몸매를 지닌 중성적인 사람이었다.

맵시 있는 얼굴과 긴 머리, 가녀린 팔다리와 몸은 여성을 연상케 했지만, 다리 사이에 뭉툭하게 튀어나온 그것은 그가 남자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발. 저건 그냥 칼 아냐? 맨몸 싸움이라며. 왜 자꾸 무기를 들고나오지?’


오함마, 아니 누리는 반짝이는 클로에 몸이 굳었다.

저건 딘이 쓰던 단검보다도 날이 길어 보였다.

거기에 한 손에 달린 칼날이 4개, 양손 합치면 8개였다.


워낙 베이는 것을 무서워하는 터라 더더욱 몸에 힘이 들어갔다.


‘좆같은 세계야. 인간이 아니라 짐승 새끼들만 모아놨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누리는 몸을 약간 웅크렸고 동시에 경기는 시작되었다.

아이언 클로는 앞으로 크게 뛰어들며 오른쪽 손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누리는 허리를 젖히며 그것을 피해냈지만, 반격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놈의 길쭉한 팔이 긴 칼날과 합쳐져 공격하는 거리가 길기도 했고, 몸이 굳어 재빠르게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오함마! 저놈 힘은 약하다! 베여봤자 금방 낫잖아. 그냥 한 번 베이고 머리통을 날려!”


뒤에서 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처음으로 세컨까지 봐주는 거였지만, 전혀 고맙지 않았다.


‘개새끼. 지가 경기에 뛰었어도 그 말이 나왔을까.’


아이언 클로는 쉬지 않고 양팔을 번갈아 가며 휘둘렀다.

조금씩 전진하면서.


누리는 오른발, 왼발 한 번씩 나눠가며 땅을 차고, 허리를 젖히며 그것을 피했다.

가능한 좌우로도 크게 뛰면서 거리를 멀게 하려 했고.


둘의 공방은 원을 그리며 이어졌다.

아이언 클로가 끝내 누리의 얼굴을 조금 베어내긴 했지만, 경기를 끝내기엔 무언가 모자랐다.

누리는 굉장히 민첩했고 긴 칼날은 번번이 빗나갔으니까.


“나만큼이나 재빠른 놈은 처음인데. 그래. 좋아. 다시 간다.”


아이언 클로는 중성적인 목소리로 누리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겨우 숨을 돌린 누리에게 보인 놈의 기괴하게 움직였다.

녀석은 클로를 쇠창살에 걸더니 팔로 강하게 당겼다.

발은 바닥을 찼고.

그렇게 뛰어오른 쇠창살 위에서 몸을 웅크리더니 다시 강하게 발로 내지르며 공중에서 아래로, 누리에게 돌진했다.


쿵 -


작은 충돌음과 함께 아이언 클로가 바닥을 디뎠다.

누리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인 탓에.


공격이 빗나간 아이언 클로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두 번 클로를 휘두르더니 다시 빠져선 쇠창살을 밟고 가로로 뛰어 칼을 또 휘둘렀다.


“이 시발! 정신없게!”


누리는 위아래, 좌우 여러 곳을 마구 찔러오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피하기에 급급했고 주먹 한 번 내지르지 못했다.

놈은 더 긴 리치에 공수 전환도 빨라서 자기 공격이 끝나면 뒤로 빠졌다가 기상천외한 움직임으로 다시 들어왔으니까.


“이 새끼야! 그냥 한번 베이라고! 저놈 뼈까지 끊을 힘은 없다니까!”

“그냥 적당히 어깨 같은데 내주고 붙잡아서 머리통을 날리라니까!”


딘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따라가기 벅차하는 누리는, 머리로 이해했지만, 도저히 이행할 수가 없었다.

저 예리한 칼날에 그냥 베이라니?

자살 행위 아닌가?


‘방법이 없긴 한데. 나만 다치고 있어.’


잘 피해냈다고 하지만 살갗을 좀 긁히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누리의 팔다리, 얼굴과 몸통 곳곳에 일자로 그어진 자상이 여러 개 생겼고 출혈은 지속되었다.


작은 상처라 피가 크게 흐르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데다, 앞으로 더 다칠 걸 생각하면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아이언 클로는 여전히 빨랐고 방향 예측 역시 쉽지 않았다.

달려오면서 오른쪽 클로를 내뻗는 것 같더니 강하게 뛰어 누리의 머리를 넘질 않나.

벽을 타고 달리다가 휘두르질 않나.

쇠창살 거의 끝까지 올라가 공중에서 폭격하듯 뛰어들질 않나.

지금까지 붙어온 놈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발. 나도 뭐 하나 주고 붙이던가.”


누리는 이마에서 떨어지는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이 돌대가리야! 니 몸뚱어리 자체가 살인 병기다! 그냥 저 칼날 맨손으로 잡아도 된다고! 한쪽 손 없다고 죽냐?”


딘은 여전히 무모한 소리만 질렀다.

별개로 관중들에게선 야유가 커지고 있었다.


“시발! 언제 끝나! 왜 도망만 다니냐고!”

“싸워! 싸우라고!”

“이딴 경기 보려고 내가 돈 거는 줄 알아!”

“우우우 -”


투기장 관리인 역시 고심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무장한 사람 몇이 손을 칼집으로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개좆같은 거. 시발. 복싱도 10라운드까지 뛰는데. 5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시발 새끼들.”


여기 인간들은 극단적으로 빠른 싸움을 원했다.

특히나 피가 흐르는 타격을 선호했고, 레슬링이나 회피, 카운터를 노리는 싸움은 좋아하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경기는 주로 짧은 시간에 빠르게 치고받는 게 주가 되었고, 지금처럼 이렇다 할 공방 없이 도망만 다니는 건 야유의 대상이었다.


“시발! 겁쟁이 새끼야! 싸우라고!”

“오함마가 아니라 토끼 새끼였어.”

“시발 놈아! 우리 애새끼가 너보단 잘 싸우겠다!”


특히나 누리가 조롱의 중심이었다.

아무래도 아이언 클로가 적극적인 것에 반해, 그는 도망만 다녔으니까.


‘시발. 떠드는 지가 올라와서 싸워보던지. 칼날이 저리도 번쩍거리는 데, 어떻게 싸우라고.’


누리의 생각과는 관계 없이 싸움이 길어지자, 투기장 관리인과 딘, 그리고 상대 선수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회의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판정으로 승패를 정하고 누리를 죽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쌩 초짜의 경우 양쪽 다 죽이지만, 그래도 급이 되는 놈들이 싸움이 길어지면 판정으로 승부를 결정하고 한쪽만 죽일 때도 있다고 들었으니까.


‘딘이 날 보호해 줄리 없지.’


누리는 딘을 믿지 않았다.

자기 선수의 가치를 믿는 주인들은 대개 다른 노예를 올려보내 대신 죽음의 값을 치르거나 협상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싸움을 지속하게 했다.


‘딘은 분명 날 넘길 거야. 판정패 인정하고 대신 돈을 조금 더 요구하겠지.’


누리는 다시금 달려오는 아이언 클로를 보았다.

이제는 자신이건, 저놈이건 끝을 내야 할 때란 것을 직감하면서.


작가의말

재밌게 봐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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