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141)
가늠할 수 없는 전장
제이미는 사력을 다해 마르테스를 휘둘렀다.
죽지 않기 위해?
복수의 일념으로?
아무리 전술이라고 하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수천 명이 메테오에 희생될 만한 값어치가 있을까?
그러한 목숨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희생 돼야 했었나?
그 답은 더 차원이 높은 곳에 있었다.
마족의 무서움을 너무 몰랐다. 하긴 전설 속에서나 회자하는 마족을 실제 경험할 일도 없었고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에서도 없는 일이다.
단지 신화 속에서나 가끔 등장하는 종족.
인간의 사고는 인간의 범주에 국한되어 있다. 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섣불리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솔직히 깨놓고 말해서 반신 이백 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학살 대상을 인간으로 삼고 때려 부수는 간단한 내용으로 귀결된다는 소리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희생 운운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곳의 인간은 반신들에게 모조리 도살될 운명이었을 뿐. 먼저 죽는다고 억울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이미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그건 희생이 아니었다. 단지 미리 학살 된 것일 뿐.
비명이 너무나 많이 들려와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성문을 열지 말라는 고함이 있었지만 이미 비명은 성문 안에서 들여왔다.
성문 밖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그것이 기사도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보다 더 높은 고결한 것이기에.
그들의 임무는 제이미 백작을 위해 활로를 뚫는 것. 달리 말해 자신의 몸이 절단되고 꿰뚫려 짐을 알면서도 마족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투지도 없고 투혼도 없다. 오직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임무와 동료의 죽음뿐.
거대한 오염이 군단을 휘감았다. 죽음의 사슬. 전염병처럼 죽음이 번져 나갔다.
"빨리 뒤로 피신하십시오. 물러나셔야 합니다."
첸 부관은 그놈 장군의 가슴을 밀치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메이스와 방패를 쥔 그놈은 입술을 깨물었고 터진 입술에서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군과 뒤섞인 저 괴물은 상처 하나 없이 설쳐 댄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부하들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숨은 끊어졌지만, 근육의 경기가 남아 있어 덜덜덜 떨리는 팔다리를 보면서 그놈은 눈에 불똥이 튀었다.
자신의 메테오에 아군기사 수백 어쩌면 천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죄를 짊어지고 살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물러나지 마라. 한 놈이라도 저승길 동료로 삼아라."
그 말에 부관이 고함쳤다.
"익스플로전."
"안 됏!"
첸 부관은 한 마리의 마족을 껴안고 자신이 품고 있던 모든 마나를 일시에 방출했다.
성벽이 흔들리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몸이 산화될 것을 각오하고 익스플로전을 방출시킨 것이다.
폭발에 휘말린 그놈 장군의 몸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는 첸 부관의 익스플로전이라는 고함을 듣자마자 보호막을 쳤기에 폭발의 충격을 감쇄시킬 수 있었지만 떠오른 몸은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폭발의 연기 속에서 한 마리의 마족이 모습을 보였다. 폭발에 쓰고 있던 인간의 가죽이 타 버리고 마족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파충류의 얼굴에 온몸에 비닐이 덮인 추한 괴물이었다. 첸 부관의 희생이 있었지만, 놈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폭발에 아군도 휩쓸렸고 다수가 희생되었다. 이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한 놈이라도 반드시 죽인다."
한쪽 팔이 뜯긴 베틀 워락 한명이 마족에게 달려드는 순간 그의 몸이 밝은 빛을 냈다.
-쾅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과 함께 다시 성벽이 무너졌고 마족은 무너지는 돌무더기에 깔렸다.
"성문을 열어. 열란 말이야."
노르딕이 고함을 쳤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성벽 위에서 베틀 워락의 자폭 공격으로 성문을 여는 개폐기가 무너진 돌무더기에 깔려 버렸던 거였다.
몇몇 병사들이 달려들었으나 거대한 돌덩이를 빠르게 치울 수 없었다. 노르딕은 제이미를 성안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만이 마족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사령관님 놈들이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얀샨 백작의 말에 노르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선두조의 보고에 의하면 목책에서 살아 나온 마족은 백여 명 정도로 추측한다고 합니다."
"그럼 반은 잡은 거냐?"
"그런 듯 보입니다."
"그런가? 좋아 헛된 죽음은 아니었다는 말이지?"
"상황을 잘 판단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마리씩 차근차근 제거해 나가는 방법뿐입니다."
"성문, 성문을 열어야 해."
후오란 백작이 성벽을 향해 뛰어가며 고함을 쳤다.
"누가 메테오 남은 사람이 있으면 성문을 부숴 주시오."
그 소리에 베틀 워락 한 명이 성문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닿기 직전 그의 몸에서 빛이 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제이미는 뒤쪽에서 뜨거운 바람의 폭풍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 천마행공으로 바닥을 차고 뛰쳐나갔다.
-쉬이이이이
매서운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마족 한 명이 제이미를 노리고 달려왔다.
제이미는 마족 중에서 유별나게 빠르게 달리는 마족을 몇 명 보았다.
메흘린 군사가 보낸 마족의 특징 중 하나를 가진 마족이 분명했다.
제이미는 메흘린 군사가 보낸 마족의 정보를 대충 한번 훑어본 자신을 힐책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전투의 향방을 가눌 수 있는 소중한 정보였다.
메흘린은 마족의 특성과 그에 따른 전투 방법을 세밀하게 기술해 놓았다. 어디 가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정보였다.
제이미는 테츠가 전수해준 무공에 더 심취하며 그 정보를 등한시했다.
'빠른 놈이다. 대신 방어가 약하다고 했지?'
반사신경이 극에 달한 마족으로 스피드 하나만큼은 마족 중에 최고였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공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인간의 움직임 정도는 농락 수준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였다.
제이미는 구유참인도법에서 변화가 심한 구화마검으로 바꾸었다.
마족은 인간을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무기 따위는 귀찮은 건지 거의 맨주먹으로 덤볐다.
아무리 스피드가 빨라도 내공이 가미된 검법에는···.
달려드는 마족을 향해 구화마검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마족은 검의 사거리를 확인하고 정확히 멈췄다. 놈은 이미 제이미가 수 명의 마족을 베는 것을 봤었고 제이미가 쥐고 있는 검이 특별한 거란걸 파악한 상태였다.
제이미의 검이 지나간 틈을 노리고 재빨리 왼손을 옆구리 쪽으로 뻗어왔다. 그러나!
제이미의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닌 내공을 겸비한 구화마검이다. 검의 변화는 마족조차 집어내지 못했다.
-사각
단번에 잘린 왼팔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놈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슈우우우웅
긴 휘파람 같은 소리를 듣고 제이미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하고 팔이 잘린 마족을 쫓지 않고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올린 것이다.
거대한 통나무 하나가 미친 듯한 속도로 날아왔다. 이건 무조건 피해야 한다. 목책을 엮을 때 사용한 아름드리 통나무였다.
제이미는 급히 허리를 뒤로 꺾어 통나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다시 허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제이미는 기겁하며 검을 휘두르려 했다.
눈앞에 은빛 갑옷의 기사 한명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통나무를 피하는 데 집중하여 이 기사가 코앞까지 다가온 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퍽
"크으윽"
제이미의 입술을 뚫고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이미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성안으로 날아가 버렸다.
가공할 한 방이다.
그 마족을 향해 주변의 기사가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찢어진 시체와 내장, 뜨거운 연기를 뿜어 올리는 피뿐이었다.
놈은 수도로 인간의 몸통을 그대로 쪼개 버리는 가공할 무위를 펼쳤다. 그런 그 마족 뒤로 임페리얼 나이트의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날아내렸다.
오판.
얀샨 백작이 메테오에 죽었다고 판단한 나머지 백 명의 기사, 아니 진마족이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들은 손에 검을 쥐고 있었고 그 검의 사거리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쪼개 버렸다.
성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성벽 위에서 베틀 워락이 원소 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갑옷 표면에 하얀 서리가 서려도, 갑옷이 벌겋게 달아올라도 그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묵묵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어 나갔다.
"병력을 뒤로 빼. 상대가 안 된다."
얀샨 백작은 치를 떨었다. 메테오로 죽었어야 할 놈들이 버젓이 정문으로 기어들어 왔으니.
이제야 진정한 마족의 공포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저들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존재가 아니었다.
죽음의 사신들은 공포 그 이상의 존재들이다. 모든 기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무장된 자들은 이미 선두에서 쓰러졌고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반 병졸들만이 남아 있다. 이들은 사기에 고무되고 사기가 떨어지면 그만큼 두려움도 느끼는 평범한 기사들이다.
-뿌우우웅
후퇴를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성안을 가득 맴돌았다. 좁은 입구로 병사들이 몰려들어 혼잡을 빚었다.
제이미는 한 모금의 피를 울컥 토해내고 몸을 일으켰다. 가슴 부위의 갑옷에 선명한 주먹 자국이 나 있었고 갑옷은 심하게 찌그러졌다.
제이미는 속이 뒤틀리고 기혈이 날뛰는 것을 느꼈지만 이런 경험이 없어 무엇인지 몰랐다.
무공으로 따지면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였고 심지어 내공도 모이지 않았다.
마르테스를 지팡이 삼아 힘겹게 서 있을 수가 있었다.
"쿨럭, 쿨럭."
제이미의 발아래 심각한 중상을 입은 이가 깔려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성벽에서 추락한 그놈 장군이다.
"으, 손이 부러져 움직일 수가 없네. 자네. 내 품 안에 포션을 꺼내 주게나 어서."
제이미는 그놈 장군의 품속을 뒤져 포션을 꺼내 반을 마시고 나머지 반은 그놈 장군의 입에 부어 넣었다.
장군 정도의 직위가 가질 수 있는 최상급의 포션이라 그런지 단번에 온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어지럽던 내공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놈 장군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상 이상의 괴물이구나 저놈들."
"놈들이 저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더욱 어려운 싸움이 될 겁니다."
제이미는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몰랐다. 일개 잔버크 깡촌 출신이 자신이 어떻게 이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팬텀 가드너의 부마가 될 수 있었는지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제이도 나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오크를 피해 도망치다가 미치란 사내를 줍고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제이미는 이제 말똥이나 치우던 시골의 한심한 청년이 아니었다. 손에 쥔 검은 책임감을 종용했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자신은 솔라리스 왕국의 부마다.
죽음의 공포도, 아그니스의 공주의 얼굴도, 오렌시아의 얼굴도, 나브의 얼굴도 마치 주마등처럼 제이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조심햇!"
제이미의 뒤를 따르던 그놈 장군의 고함이 들려왔다. 제이미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점프를 했다. 바로 그의 뒷덜미 위로 예리한 것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말라키의 피를 이은 자냐?"
제이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쳐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찬란한 은빛 갑옷에 선명한 팬텀 가드너의 문양. 검은 수염이 잘 어울리는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투핸드 소드가 들려 있었는데 방금 자신의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저 검이었다.
"말라기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이곳에서 죽을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지."
투핸드 소드를 든 상대에는 구유참인도법이 먹힌다. 내공을 쥐어 짜내 마르테스를 사내에게 겨눴다.
하지만 내상은 포션으로 금방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다. 속이 아직 울렁거렸고 가슴은 답답한 고통을 호소해 왔다.
"하압"
천마행공으로 쏘아져 나간 제이미는 구유참인도법을 펼쳐냈다.
문제는···. 상당히 많았다.
제이미의 검법은 메모라이즈 된 기억을 통해 익힌 단순 지식이다. 검법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치기에는 수련 기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심지어 내공의 운용법도 간간히 익힌 복마기공이 다인 상태라 매끄럽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고수와의 대결 경험은 아예 없었다.
마교의 제자들은 매일 장로나 당주와 겨루기를 해 고수와의 대결을 하루도 빠짐없이 경험한다. 제이미는 혼자 허공을 대상으로 검로에 따라 검을 움직인 것이 다인 상태다.
지금까지 마족을 베었던 것은 마족이 그만큼 방심했던 것이 가장 컸지 제이미의 무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턱
제이미는 급히 심호흡했다. 검법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도 전에 검을 쥔 오른 팔목을 상대가 움켜쥐어 버린 것이다. 마치 손이 바위 속에 묻혀 버린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너도 별거 아니다. 이렇게 움직임을 봉쇄하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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