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 - 신의 기억.
과거가 눈앞에 펼쳐진다.
첫 번째 해금 때에 보았던 기억과 두 번째 해금 때 보았던 기억이 하나가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난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아니 질리도록 보았던 과거의 풍경. 다소 기분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이젠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던 과거가 또 다시 펼쳐지는 것일까? 아니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보여준 과거는 단순히 사고의 순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흘러흘러 뒷이야기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이건?”
율하는 신음과 함께 자신이 서 있는 어두운 경계의 저편, 밝은 빛을 배경으로 하여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사고의 직후에 있었던 일들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사고의 당일 무엇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버지, 그리고 친구네 부모님들은 그 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했고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며 엄마만이 살았지만 머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고 오직 나만이 거의 멀쩡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와 같은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치러진 아빠의 처소는 자신이 혼자 지키고 있었고 보험회사의 사람, 경찰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은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보험회사에서 보내 준 상조회사 쪽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은 그냥 울고만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울었다. 아주 많이 울었고 떼도 썼다. 엄마가 입원한 병실까지 올라가서 얼른 일어나라고 떼도 써 보고 싶었지만 중환자실이었기에 그럴 수도 없이 나 혼자만 차가운 병원, 장례식장에 버려진 입장. 아마 그 때 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세상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은 말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시간은 흘러갔다.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잘 모르는 어른들이 하는 대로 염, 입관을 하고 화장터에 갔다가 작은 함 같은 것을 대신 받아 납골당에 안장이라는 것을 하는 과정 까지 마친 이후 내게 남겨진 것은 여전히 혼자라는 감정과...너무나도 차가운 우리 집 뿐이었다.
엄마는 그 때까지 여전히 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몇 번이고 보험회사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다. 그 사람들 말로는 보통 그런 경우에는 할머니나 고모, 삼촌 같은 친척들이 있어 대신 연락을 취하고 대리로 일을 하게 마련인데 우리 집에는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것이 너무 이상하다는 말도 있었다.
확실히 그러고 보면 나는 엄마 아빠 외에 다른 친척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이 할머니 댁이나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사촌들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거기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좋은 답을 듣지는 못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을 뿐 자세한 것은 지금까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그런 일들이 끝난 다음에 내게 남은 것은 혼자라는 감정과 무서움뿐이었다. 아빠는 하늘나라로 떠났고 엄마도 계속 차갑고 하얀 병실에 누워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항상 혼자였다. 심지어는 그 날 이후 받은 충격 때문인지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내 곁에서 친구들조차 멀어지고 학교에서조차 나는 혼자가 되어 버렸다.
가끔 가다가 상담이라는 명목으로 선생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조차도 내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언제나 듣는 엄마는 곧 괜찮아지실 것이라는 이야기 외에 달리 인상 깊은 이야기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차 세상이 나를 대하듯 차가워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동네 형들이나 애들이 때리고 괴롭혀도 그냥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돈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닐 리 없던 내게 뺏을 것도 없이 그냥 실컷 때리다가 지치면 돌아가고는 했다. 그렇게 1년인가...자세한 시간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흘러가는 영상으로도 빨리 감기를 하는 것 처럼 흘러갔고 기억속의 내가 초등하교 6학년 거의 말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학교 배정이 끝났는지, 끝나지 않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눈이 쌓여 있는 겨울의 하교길. 이제는 날 괴롭히는 것도 재미없는지 그런 저런 목적으로 따라 붙는 애들도 많아 사라졌기에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그 영상이 앞을 스쳐지나가자 율하는 눈을 지끈 감았다.
무엇인지, 앞으로 펼쳐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왔다. 아마 이제부터 펼쳐질 광경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대의 실수라고 해도 좋을 일. 그것은 아마도-
“잠깐, 이야기를 물어도 되겠니?”
학교에서 나와 큰 길을 건너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든 순간 뒤쪽에서 어린 자신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 뒤를 돌아본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부른 것은 자신 보다 거의 2배나 더 커 보이는 외국인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잘못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는 있다는 생각 정도는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것을 알려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 준비를 한 다음에 엄마 병원에도 한 번 가 봐야 하는데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기울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 자신은 자연스레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등을 돌렸다.
“네가, 네가 혹시 이율하니.”
하지만 그 직후 그 외국인이 자신에게 다시 건넨 그 한 마디에 자신은 그대로 굳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안다고? 하지만 자신은 저런 외국인은 알지 못한다. 저런 거대한 덩치의 금발 백인 남자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시죠?”
“하하, 그렇게 경계 할 건 없단다. 다만 말했던 것 처럼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죠? 그리고 아저씨는 누구죠?”
“그렇게 수상한 사람은 아니란다...어, 어이. 잠깐.”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자신에게 웃으면서 다가왔지만 오히려 그게 더 무섭게 느껴졌던 나는 계단의 언덕을 있는 힘껏 올라 도망을 쳤다. 아마도 그 때는 TV에서 보았던 몇 가지 이야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바로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에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껏 도망쳤다. 그렇지 않아도 꽤나 복잡하고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골목을 돌아돌아 일부로 10분 정도를 외곽으로 돌다가 집으로 돌아온 자신.
“헉, 헉...”
언덕과 계단을 있는 힘껏 뛰었기 때문에 숨이 턱 아래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크게 들썩 거렸다. 분명 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뒤를 따라오는 듯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던 외국인의 모습. 그렇다면 따돌리는데 성공을 한 것인가? 그 때는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전 날에도 TV에서 보았던 인신매매단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만약 정상적인 집이었다면 이런 나를 맞아주는 엄마가 있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시건, 빨래를 하시건 집에서 자신을 맞아주고 학교에 대한 이야기, 방금 전에 있던 무서웠던 이야기를 칭얼거리는 자신을 따듯하게 감싸 주었을 것이다. 아니...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알게 된 과거를 떠올려 보면 꼭 그럴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그 때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어쩐지 서러운 기분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창문을 통해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자신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고는 자리에서 일으켜 집에 불을 켜고 저녁식사를 간단하게 차릴 준비를 하려고 하였다.
“호오, 이제는 조금 가라앉은 거니?”
“...!? 힉?”
정말 오랜만에 튀어나오는 격한 반응.
하지만 정말 그런 비명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불을 켤 때 까지는 아무도 없던 차갑고 싸늘한 거실의 한 가운데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아까 전의 외국인. 그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도 전부 잠가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 자신을 향해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리 놀랄 건 없단다. 나는 네 부모님하고 아는 사이란다. 네 이야기도 꽤나 많이 들었지. 이렇게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말이야.”
“그걸 어떻게 믿죠?”
“글쎄, 가능하면 부모님과 만나뵈었으면 오해가 풀리겠지만 알아본 바로는 많이 힘들어 보이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가져와서 보여주면 조금 낫겠지만 이럴 거라고는 나도 생각을 하지 못해서..흠. 아무튼 네 어머니는 XXX, 네 아버지는 XXY 맞으시지?”
“그건...”
“정 의심스럽다면 다른 걸 물어봐도 좋단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넉살 좋게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는 그 남자. 당시의 자신은 너무나도 수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믿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그 남자에게 더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런 것 보다는 무서웠기에, 덩치도 나이도 다른 무엇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그 사람 앞에서 함부로 굴 수 없었던 것이 더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전 분명히...”
“아까 전에 도망친 것 말이니? 확실히 놓칠뻔 하기는 했지. 하지만 그런 건 내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단다.”
“네?”
“네가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것에 대한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마자 다시 그 자리에서 순간 사라진 다음에 오른쪽, 왼쪽에 번쩍 번쩍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뒤쪽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그 남자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속임수라고 생각하니?”
“그, 그런 게 진짜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 있다. 아주 조금의 재능, 그리고 노력만 한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란다.”
“재능이요?”
“그래. 재능. 선천적으로 눈을 못 뜨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 봐야 앞을 못 보는 것 처럼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리한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너는 다르단다.”
“저는 다르다고요?”
“하하, 아, 그 전에 우선 소개가 늦었구나. 나는 파고...스. 파고스 프레데터라고 한다.”
“프레...데터요?”
“그래.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그 외계인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 걱정할 건 없단다. 그나저나 혼자 사는 거지?”
“......”
“그렇게 경계할 건 없단다. 하긴, 어쩔 수 없는 반응인가? 어찌 보면 무단으로 가택에 침입한 건 나니까. 하하.”
“아시네요.”
“경찰에 이야기 할 생각이니?”
“그래봐야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 거 할 수 있는데.”
“그래. 그렇단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해도 경찰은 우리에게 어찌 할 수 없단다. 그러니까 서로 피곤한 일은 가급적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뭐, 하고 싶으면 하고. 피곤한 건 네가 더 할텐데?”
“으으.”
“그 보다는 우선 미안하다고 하고 싶구나. 전혀 우리도 연락이 없어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단다. 만약 알았다고 하면 즉시 달려와서 도와주었을 텐데 네 엄마도 아빠도 연락이 갑자기 끊어지는 바람에 우리 쪽에서도 고생을 조금 했단다.”
“우리요?”
“혹시 들어본 적은 없니? 엄마나 아빠한테? 전혀 아무것도?”
눈을 크게 뜨고 아무것도 모르냐는 듯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파고스. 지금까지의 광경을 지켜본 경계 바깥쪽의 율하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손을 탁 쳐서 치우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엄밀히 말해 자신의 잘못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이끈 것은 바로 눈 앞의 외국인 [파고스]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요.”
“이런, 이러면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지나? 하긴, 그 때는 어린 나이였고 또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
“아저씨는 엄마 아빠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나요?”
“응? 당연하지. 이 아저씨는 네 부모님의 친구였고 또 함께 일을 하는 사이였으니까.”
“함께 일을 했다고요?”
“그래. 그리고 네가 아는지는 모르지만 네 부모님들 역시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힘을 쓸 수 있었단다.”
명백한 거짓말이다. 부모님들은 그런 힘 따위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고 하면 그 사고 당시에 그렇게 무력하게 당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 사실을 확인할 길이 당시에는 없었고...그런 거짓말 조차 간단하게 믿고 싶을 정도로 저때의 자신은 위태로웠다.
지끈.
단지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의 한켠이 지끈하고 울리기 시작한다. 막고 싶었다. 부모님의 사고도 사고였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이건 말 그대로 악마의 속삭임.
“우리, 엄마 아빠가요?”
“그래. 그래서 말하지 않았니? 네게도 재능이 있다고. 아, 말 한 적이 없구나. 미안하다.”
“저, 저는.”
“원래라면 네 엄마 아빠가 네게 거기에 대해 알려주는 게 맞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그럴 수 없게 되었지.”
“하지만 제가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파고스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재차 과시하듯 이번에는 손에서 아무런 장치도 없이 불같은 것을 만들어 보이거나 허공에 얼음 같은 것을 만들어 보이는 등 마치 TV속 만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이제는 조금 믿을 수 있겠니? 어쩌면 네 부모님이 네게 지금까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은 건 너를 이쪽 세계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나.”
“그건 대체 뭐죠?”
“일다는 뭐,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겠지.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성법(星法)]이라 부른다.”
“성법...그건 마법 같은 건가요?”
“비슷하지. 힘의 근원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니까. 그리고 네 부모들이 쓰는 건 확실히 그쪽에 가깝고 네 재능 역시 그 쪽에 좀 더 특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단다.”
두근거렸다.
그 때는 분명히 그랬다.
너무나도 달콤하고 치명적인 유혹.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 봐도 저건 너무나도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파고스.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로는 파고스다라는 이름이 본명인 존재.
영왕의 말에 의하면 그는 원계의 시절부터 존재했던 고대의 존재라고 했다. 그런 자에게 있어 그 정도의 능력은 장난에도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대체 왜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나타나서 저런 장난질을 치는가에 대한 것. 그것만큼은 아직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요?”
“그래. 가능하다.”
아니, 저것 역시 거짓이다.
만약 사실이었다고 하면 그 뒤로 자신이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 따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순간이동, 불, 얼음 같은 마법들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여주는 마법사 같은 자가 자신에게 해 주는 그런 말에 취해 몽롱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저도, 아저씨처럼 될 수 있나요?”
“하하, 그건 하기 나름이지. 음...하지만 나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네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가르쳐 줄 수는 없단다. 하지만 너 정도의 소질이라면 혼자서도 어떻게 될 지도 모르겠구나.”
“혼자서요?”
“그래. 너 말이다. 혹시 아빠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니? 엄마가 빨리 깨어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니?”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보고 싶다.
다시 한 번 같이 함께 지내고 싶었다.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다시 한 번 엄마, 아빠와 같이 지낼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한 번...해 보지 않겠니?”
아무도 보지 않을 집 안이었지만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파고스.
그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어 두르고는 입고 있는 코트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 듯 하며 그 안쪽에 한 권의 책자를 만들어 보였다.
“이건 책인가요?”
“그래. 혹시 읽을 수 있겠니?”
책을 받아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우리나라 글자는 아는 것 같은 제목. 아니, 우리나라 글자는 고사하고 그나마 익숙한 영어나 그래도 알아는 볼 수 있는 일본어, 중국어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아랍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꼬부라져 있는 글자들.
“이, 이건 무슨 글자에요?”
“하하, 글자는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건 뜻이지. 자아...어떠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무슨 글자인지 알아 볼 수는 없었어도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상한 말이었지만 그 책이, 그 글자가 직접 머릿속에 들어와서 그 내용을 속삭이고 있었다.
“혼을 움직이는 자?”
자신도 모르게 글자의 속삭임을 그대로 우리나라 말로 바꾸어 내 뱉는다. 그러자 파고스의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감돌았고 자신을 향해 꽤나 무서운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책에 푹 빠져 있던 당시의 자신은 알지 못했던 이야기.
“그렇게 말을 하니?”
“네. 호, 혹시 제가 잘못 읽은 건가요?”
“잘못 읽는 건 없단다. 하지만...음. 아니다. 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소질이 있는 것 같구나.”
“그런가요?”
“그래. 지금은 오래 머무는 것도 실례가 될 테고 하니 이쯤에서 난 돌아가 보겠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기별을 넣고 찾아올 테니 그 때는 아까처럼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하.”
파고스는 그 말을 남긴 채 자신이 인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치 무언가에 쫒기는 듯 서두르는 모습. 마치 꿈과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그게 꿈이 아니었음을, 자신만의 상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마치 이야기의 끝을 알리듯 흐려지는 경계 안쪽의 풍경. 하지만 그 순간 율하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당시의 자신이 받아든 그 책에 적혀 있는 그 알 수 없는 문자를.
“저건...영언?”
완전히 멈추어 버린 세계.
그 세계의 끝에서 유독 빛나는 책 표지의 문자.
그것은 분명히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영계의 문자인 [영언]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 영언을 통해 읽어낸 제목의 뜻은 자신이 읽었던 [혼을 움직이는 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 보다는...
“소질의 서?”
율하 자신이 그 제목을 다시 한 번 되 읊음과 함께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두 번째 해금 때와는 달리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볼 필요는 없다는 듯 한 번으로 끝나는 과거의 체험.
“어때?”
“파고스...”
“지금도 그의 제안이 매력적이야?”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어.”
뒤쪽에서 들려오는 게이져의 목소리.
거기에 율하는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 그랬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것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마지막 유혹.
-다시 엄마와 아빠를 보고 싶지 않느냐-
보다 과거의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은 그런 감상이 조금 적은 편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했을 바람이었다. 아빠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하다못해 아직은 살아 계시는 엄마라도 병원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파고스는 자신 혼자서 열심히 하기만 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유혹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수행한 결과는...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니까.”
그렇게 혼자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린 다음에 뒤를 돌아보는 율하.
그리고 거기에는...
“후후, 그렇구나.”
아까 보다는 선명하지만 그 뚜렷한 인상은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
단지 일렁거리는 형상으로만 존재했을 뿐인 아까와는 달리 분명 거기에 누군가가 있고 여인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 외형이 뚜렷하게 고정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말은 아직은 멀었다는 것일까? 아직 그녀의 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일까?
“내가 틀렸어?”
“틀리고 맞는 건 없어. 만약 절차만 제대로 밟았다고 하면 율하의 꿈도 단지 꿈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지.”
“그건...무슨 소리야?”
“비밀 가운데 하나지만 과거에 전례가 있었다고 하거든. 하지만 아마 율하의 상황으로는 힘들었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런 의도로 율하에게 접근했던 것도 아니고.”
“파고스의 의도?”
“마지막에 보았지? 네가 읽은 책의 진짜 이름.”
“소질의 서 말이야?”
“그래. 소질의 서. 그 소질의 서가 속삭인 네 재능은 네가 읽은 그대로인 [혼을 움직이는 자]. 그것을 확인한 파고스의 표정도 너는 확인했을 거야. 원계의 머언 과거부터 존재했던 그를 흥분시킬 정도의 소질. 그렇기 때문에 그는...너를 타락시키려 했지.”
“타락...이라고?”
“칼은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율하의 능력도 마찬가지야.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쓰일 수 있지.”
“무기.”
“기억하기는 싫겠지만 율하가 그 힘을 바탕으로 했던 그 사건을 말하는 거야. 다행히 그의 의도대로는 아니었지만. 율하는 혼을 움직이는 힘으로 [문]을 한 번 열었어. 하지만 그건 그가 의도하던 문은 아니었고 율하의 힘으로는 너무나도 벅찬 문 바깥의 존재에 의해 율하의 모든 것은 망가져 버렸지. 응. 난 알고 있어. 전부 보고 있었어. 하지만 개입 할 수 없었어.”
“....신이라서?”
“응. 그 때는 [신]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게이져도 율하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에 빠졌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 걸까. 자신들은 어디에서 부터 어떻게 어긋난 걸까?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게이져.”
“응?”
“넌 나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거야? 파고스와 너는 다르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어. 아니, 사실 난 파고스의 진정한 목적을 몰라. 그런데 네 말을 들어보면 넌 그걸 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응. 난 알고 있어. 왜냐하면 한 번 더 그는 이빨을 들이밀었으니까.”
“이빨?”
“그래.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 없어. 왜냐하면 그건 다음에 받아들여 할 이야기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 할 수 있어. 난 율하에게 해가 될 짓은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 한 번 율하를 감싸는 여신의 푸른 빛.
하지만 그 때였다.
우르르르.
“음?”
“시작된 모양이네.”
“무엇이 시작되었다고?”
“침략.”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했지만 이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끊임없는 진동.
그리고 이어지는 게이져의 침략이라는 말에 율하는 지금까지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두고 있던 북방의 교룡족들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 작가의말
곧 설이군요.
으으으...제대로 연재할 시간이 없군요. 지금은...
아, 여러분 ‘네크로세이지 전기’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절찬(?) E-book 판매중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정산은 4월이나 되겠지 그전까지는 그냥 죽은 목숨입니다. 전.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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