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된 의심
"저 쪽에 보면, 궁에서 나온 우마차들 사이에 이마에 흰점이 찍힌 검은 말 보이시죠. 그 말에 메어진 마차예요."
"흰 점은 네가 그려 넣은 것이야?"
"네,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표식이 있어야죠! "
노 상추가 머리를 설레 흔들어 댔다.
" 공륭이가 명마라고 골라준 말인데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니, 궁에 들어가면 잔소리는 좀 들을 것 같아요"
"그래, 나라님 타는 명마로 도적질이나 하는데 쓰다니, 말도 참 딱하구나!
그나저나 궁 밖으로 나올 때마다, 매번 백 선을 양순이와 약초 뜯으러 보낼 수도 없으니, 한동안은 궁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라!"
"... 이번엔 누가 마차를 끌고 가기로 했어요 사부님?"
이제는 습관처럼 동문서답을 해 대는 제자에게 딱 밤이라도 한대 주고 싶었지만, 그것 까지는 무리인 듯 했다.
"송이 아범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수레에 오십 석만 먼저 실리면 송이 아범이 바로 마차를 끌고 달릴 것이야!
그때 우리가 주변을 어수선 하게 만들고, 군졸의 말들이 마차 뒤를 따르지 못하게 쇠 구슬을 가지런히 뿌리면 된다."
"사부님, 쇠구슬 때문에 말들이 미끄러져서 군졸들이 낙마라도 하게 되면 어찌 합니까? 그들도 다쳐서는 아니 됩니다!"
"이건 작고 날카로운 마름쇠와 달라서 달리던 말이 쉽게 밟아서 다치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야.
이번 쇠 구슬은 바닥에 떨어질 때, 그 충격으로 구의 모양이 깨지면서 길고 뾰족한 침이 밖으로 돌출 되지.
하지만 침은 밟히게 되면 부러지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놀란 말이 제자리에 서게 되니, 말들이 미끄러지거나 군졸들이 낙마하는 사고는 좀 줄일 수가 있을 것이야."
"네, 참 괜찮은 무기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완위각에서 만들어 준 것인가요?"
"그래, 아니면 어디서 나겠느냐? 그리고..!"
" 그리고 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올해에는 너무 심한 가뭄 탓에, 화전에서 나온 곡식들이 쓸 만한 게 없었지. 산채 식구들을 위해서,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힘을 합하지만 ... 이 일도 더 이상 길면 안 된다!"
"그런데 오십 석으로 산채의 식구들이 겨울을 날 분량이 될 까요. 사부님?"
또다시 원범이 말끝을 돌리고 있었다.
"물론 내년 보릿고개까지 넘길 만한 양으로는 많이 부족할 것이야.
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을 때는 배부르고자 함이 아니지 않느냐. 노인과 아이까지 굶길 수가 없으니, 최소한의 양만을 먼저 얻도록 해야지."
"네 맞는 말씀이세요. 사부님."
나지막한 웅얼거림이 한동안 이어질 무렵, 누군가가 배가 들어 온 것을 먼저 알아 본 모양이었다.
"세곡선이 도착했다!"
구석으로 앉아있던 하역부들이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일어나, 배가 닿이는 곳으로 느적느적 움직이고 있었다.
"자, 부지런히 움직이거라! 금위영의 군졸들도 빨리 나서서 도우도록 하게.
저 하역부들만 믿고 있다간, 오늘 해가 다 지도록 해도 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야!"
군졸들의 입이 들썩거리고 있었지만 조선 땅에 강상의 도는 지엄했다.
마지못해 그들도 창검을 옆에 세우고, 소맷자락을 걷어 올린 후 세곡선 곁으로 다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런 걸 왜 우리한테 하라고 하는 거야! 우리는 궁까지 보초만 서면 되는 일인데."
하지만 군졸들의 투덜대는 힘이라도 보탠 덕에,
배에 실린 이천 섬의 쌀이, 우마가 매어진 수레위로 제법 많이 쌓여가고 있었다.
"자자, 한 수레에 백 섬씩 순서대로 쌓도록 하고, 쌓여진 수레는 미리 끈을 동여매어 뒤쪽으로 빼 두도록 하라!"
흥선군의 지시대로 쌓아가던 볏 섬의 개수가 다섯 대의 수레위로 나뉘어 오백 섬이 다 되어 갈 동안,
원범과 노 상추가 따로 쌓아올린 수레에 실린 벼 섬의 개수도, 오십 석이 거의 다 채워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쌓아가던 수레가 아닌 것을 본 한 군졸이, 괜 시리 쌓인 불만을 원범과 상추를 향해 쏟아내고 있었다.
"등신들이냐! 눈은 둿 다 뭐할 거야! 순서도 안 보이는 게야? 왜 이것부터 쌓아 올리고 지랄이야!
그거 두고 빨리 앞으로 가서 순서대로 쌓기나 해라! 에이 퉤-"
"아 네, 알겠습니다요. 나리!"
상추가 굽신거리며 원범을 재촉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재빨리 이 수레부터 끈을 동여매어 놓아야 했다. 이제 곧 송이 아범이 그들의 신호를 보면 다가올 것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재빠르게 수레의 끈을 동여맨 원범과 상추가 조심스럽게 수레에 매인 검은 말 옆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나루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송이 아범과의 약속대로,
준비가 다 되고 나면, 그들만의 신호로 하얀 끈을 꺼내어 머리에 동여 매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머리끈을 질끈 매어 갈 무렵,
먼 곳에서 다가오는 말발굽 떼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여지없이 마포나루, 이 곳으로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 ... 변수?'
당황한 원범과 노 상추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흙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말을 타고 나타난 십여 명의 사내가, 하역을 하던 수레 주변으로 사납게 빙 둘러 서기 시작했다.
말 위에는 검은 두건으로 얼굴까지 다 가린 사내들이 둘씩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중 한명씩은 날듯이 가볍게 몸을 날려, 말에서 아래로 뛰어 내리기 시작했다.
땅으로 내린 두건의 사내들은, 또다시 신기할 만큼 빠른 속도로 볏섬이 실린 수레를 하나씩 잡아타고 있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다음 순서로 이어지는 빠른 몸놀림 속에서도,
그들은 용케 백 섬씩 매어진 수레만 잘 골라서 타는 것 같았다.
이미 창검을 저 만치 따로 두고 볏섬을 지고 있던 군졸들도,
이런 날렵하고 위협적인 자객들 앞에서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도 잃은 모양이었다.
그저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은 채 검은 두건의 자객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두건의 한 사내가 수레를 잘못 찾은 것 같았다.
흥선군이 미리 준비해서 매듭까지 묶어둔 수레를 두고, 하필이면 오십 석밖에 싣지 않은 원범과 상추의 수레위로 올라앉는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그들의 기세에 놀란 원범과 상추도, 다른 사람들처럼 구석으로 몰려 놀란 눈만 뜨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적들이 그들의 수레를 점찍은 순간,
원범은 더 이상 남의 일을 보듯이 얼어붙고 있기만 할 짬이 없었다.
그의 수레에, 산채 식구들의 올 겨울 생명이 오락가락할 수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나선 원범이 힘찬 발돋움과 함께, 일단은 잽싸게 그들의 볏섬 더미위로 올라서 버렸다.
잰걸음으로 볏 더미 위를 몇 걸음 내달린 후, 수레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두건의 남자를 향해 몇 차례 발길질을 올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에 겨워하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끝을 질끈 동여맨 허수룩한 차림의 더벅머리 총각이, 무모할 만큼 용맹한 의지로 이 약탈범의 무리들을 홀로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원범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군졸들도 하나 둘 창 검을 찾아 들고, 자객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그들 사이로 다급하게 달려온 상추와 함께 원범이 지켜낸 수레를 다독이며, 주변에 있을 송이 아범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탕 – 탕-!'
이번엔 조총 소리였다.
놀라기는 자객만이 아니라, 마포나루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흥선군도 마찬가지였다.
'김좌근이 이 정도까지의 힘을 쓴다고?'
흥선군이 한발 물러나 이 아수라장이 된 마포나루터 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다섯 대의 수레는 군졸들의 방어를 뚫고 저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편 조총소리가 울리던 다른 방향에서는, 내금위장을 앞세우고 말을 탄 이십 여명의 내금위 군이 또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달리고 있던 수레의 뒤를 쫒으려는 기색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오히려 그들이 오는 방향과 엇비슷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도적떼를, 그냥 바라보며 마포나루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도적떼들은, 요란한 말소리와 함께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군졸들을 향해 하나 둘 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색한 몸짓이었다.
군졸들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고, 그냥 쭉 가버렸다.
'적도 아니고 편도 아니다'
원범도 노 상추도 한동안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흥선군이 이 젊은 사내를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
허수룩하지만, 천해 보이지는 않은 몸짓이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늘어진 왼손에 솜씨 좋게 감긴 천 자락을 쳐다보았다.
몸을 많이 놀린 탓에, 아무리 솜씨 좋게 다잡아 매었다 하더라도 천 조각은 힘없이 흐트러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늘어져 내린 천조각 안으로 빼꼼이 드러난 상처는, 아마도 불에 댄 듯 붉게 달아오른 피부에 껍질이 조금 벗겨져 있었다.
'비단천이...'
흥선군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조총은 허공을 향해서 한 발, 그게 다였다.
내금위장이 데려온 군졸들은 볏섬이 실린 수레를 끌고 가는 도적떼를 쫒지도 않았고, 더 이상 탈취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도망간, 딱 거기 까지 만이었다.
말에서 내린 내금위장이 흥선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총관 께서는. 무탈하십니까?"
"내금위장은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
"대비마마의 급한 명을 받들고 바로 오는 길입니다."
"아, 네. 역시 대비마마의 혜안은 대단하십니다!"
"그러면 어찌, 수레의 뒤를 따르지 않으신 것입니까? 내금위장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잡아서 도륙을 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대비 마마의 전언으로는 대낮에 공물을 잃는다는 일이 참 부끄러운 일이니, 일을 더 크게 키우지 말라고 하셨습이다.
만약 몇몇 놓친 분량이 있다면 그것은 두고, 나머지를 잘 정리해서 함께 궁까지 호위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분명 대비 전에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을 테니, 끝까지 도적들을 따라가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잡아들이라 함이 옳았을 터였다.
어쩌면 이 일을 알고, 늦지 않게 이 정도라도 대처하게 해준 혜안에 탄복을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와 긴 이야기를 섞는 것에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던 내금위장이,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듯이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쓴 입맛을 다시던 흥선군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는 포구에 , 다시 볏섬을 하역하려는 일꾼들이 줄을 서서 뱃전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또한 조금 전의 청년을 찾는 눈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그를 찾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청년이 머물고 서있던 수레의 윗 쪽에서 햇살에 반짝이며 유별난 빛을 띠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끌리듯이 수레로 다가서서 보니, 쌓여진 볏섬 위에 커다란 황소 눈깔 같은 크기의 쇠구슬 두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 녀석이 뭔가 흘리고 갔군!'
구슬 앞으로 손을 뻗치자, 위태롭게 놓여있던 구슬하나가 아래로 또르르 구르더니, 붙잡을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투둑-팍!'
그의 발 바로 앞에서 뭔가가 터졌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흥선군의 두 발이 소리와 함께 화들짝 튀어 올랐다.
볏섬 끝자락을 타고 내려오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작은 간장독하나가 깨어지는 소리가 쇠구슬에서 터져 나왔다.
껍질들은 질서 있게 깨어진 후, 몇 개씩의 기다란 바늘모양이 돋아났고, 이내 커다란 성게 한마리가 속에서 튀어나온 모양새로 땅위에 툭하고 불거져 나와 있었다.
우단으로 만들어진 그의 검은 목화에, 하마터면 기다란 가시가 틀어 박혀버릴 뻔 했다.
이런 아찔한 순간은 머리털나고는 처음인 것 같았다.
한걸음을 얼른 떼는 순간 가시를 피할 수 있었지만,
놀란 마음은 저기 하나 남은 구슬을 잡기에는 다소 겁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집게손가락을 뻗쳐 구슬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침 한 모금이 목을 간질며 타고 내려갔다.
이번에는 손바닥을 뻗쳐 구슬을 손안으로 쏘옥 잡아보았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다행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이다.'
긴장된 표정이 지나간 얼굴에 야릇한 미소기가 번졌다.
구슬을 움켜잡은 흥선군이 옷소매 안으로 구슬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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