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실세
"대왕 대비마마 이조 판서 댁의 부인께서 드셨사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대왕 대비마마, 이..."
"안으로 드시옵소서."
대비의 언성대신, 고개를 내민 엄 상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동생의 부인이라고는 하나, 기생출신의 후실을 명경대비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돈이 많은 양인이나 사대부들은 나라에서 만들어 내는 공명첩보다도, 그들의 관직을 직접 살 수 있는 이 여인의 허락을 더욱 절실히 바라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두고, '나합 부인' 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주출신의 정승' 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대비마마, 그동안 강녕하셨나이까?"
"사가에서 궁궐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있나! 무슨 일인가?"
명경대비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속 좋은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어넘기고만 있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대비 마마..."
"..."
대비의 홀대에 이미 익숙해진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저 세간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비와 자주 만나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는 친한 사이라는 입소문만 나면 그만 이었다.
"대감이 연세를 잡수시면서 한해가 다르게 기운도 쇠해 지시는데, 아직 저희 사이에는 아이도 없지 않습니까..."
곁에 서있던 엄상궁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답을 구하러 온 것이더냐?"
"아이쿠 대비 마마, 어찌 그게 마음이 있다하여 인력으로 되는 일이겠사옵니까!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알아보니, 공덕을 쌓아서 원을 성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얄궂은 이야기를 이어갈 지,
목전까지 올라온 한숨을 내리 누르던 명경대비의 얼굴색이 많이 탁해진 것 같았다.
"점꾀가 뛰어난 애기 보살이라고 하던데, 우리가 쌀 삼백 섬을 보내어주면 아마 답이 보일 것 같지 뭡니까요."
" ... 쌀, 삼백 섬...?"
"네, 마마! 쌀알에 공덕을 심는 제를 올린 후에 찐 쌀로 만들어 한강에 뿌려서, 강 속의 물고기들에게 한 때를 배부르게 먹이면 된다고 합니다. "
"하여튼...!"
대비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러면 물의 용왕님이 기뻐하여, 그 공덕이 제 사주까지 바꾸어 아들이 점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쩔 것이야? 그 애기 보살을 죽이기라도 할 텐가?"
"아유, 아니 됩니다요. 대비 마마!
그래서 그 이유 때문에, 제가 오늘 대비 마마를 이렇게 급히 찾아오게 된 게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린가?"
"그러니까, 그 큰 공덕을 지었어도 용왕님이 아들을 점지해 주시지 않는 건,
아무리 제 사주를 바꾸어 보아도, 이생에서 저와 맞는 인연이 없어서라는 뜻이지 않겠습니까요.
그러면 그때엔, 억지로 기다리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릴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애기인지 뭔지가, 퇴로까지 만들어 뒀군."
"...?"
오늘 이야기는 좀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두 번 생각지 아니하고, 대비 마마에게로 공덕을 돌리기로 하였지요.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말고 뜸을 들이는 눈매가 요염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 ... 하지만 제가 못 받은 공덕을 대비마마에게 대신 드린다고 한다니, 어찌 또 그런 불충한 생각을 할 수가 있겠나 하는 것이지요."
"...엉?"
"그래서 차라리, 아들 점지는 제 인연대로 제쳐두고라도
이번의 공덕은 처음부터 대비 마마의 것이 되시기를 염원 하기로 하였나이다!"
하지만 명경대비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 하면 네 집 창고에 곡식이 많이 줄겠구나!"
"아유 대비마마, 이런 치성을 드리는데 어찌 창고에 재여 있던 묵은 쌀을 사용할 수가 있겠나이까!"
"그럼 그만한 양의 햅쌀이 어디서 그리 빨리 준비가 된다 더냐?"
"대감의 수완이 얼마나 좋은지, 제가 좋다하는 것은 한 번도 늦추는 일 없이 바로 준비를 해 주고 있사옵니다.
세상에 저를 이토록 귀하게 여기는 분이 어디 있겠나이까!
제 뼈를 깎아서라도 가문에 보탬이 되도록 애쓰겠나이다!"
"수완이 어떻다고?"
"네, 마마. 아마 쌀도, 오늘 중으로 넉넉하게 창고로 들어온다고 하니,
하루빨리 치성을 드리고 공덕을 쌓을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요. 호호!"
어둡게 일그러져 있던 명경대비의 표정이 갑자기 풀어졌다.
미소기 마저 지으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자네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심청이가 눈 먼 아비를 위해 바친 쌀도 삼백 석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 수만큼이 가장 성취가 잘 되는 수라고들 하더군."
대비의 농담에 여인이 간드러진 웃음을 한 바탕 쏟아내고 있었다.
"아유, 대비 마마도 참... 농하시는 일은, 대감과 참 많이 닮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애기 보살이 왜 자네에게는 그 얘기를 하지 않던가?"
"무슨... 말씀, 이옵니까, 대비 마마?"
"고기에게 찐쌀을 준 건 덕을 베푼 일이고, 그리고 그 베푼 덕을 거둬들여야 하지 않나? "
"네, 그렇지요. 대비 마마."
"그러니, 찐쌀을 먹은 물고기들을 모두 잡아서 사람들에게 다시 먹여야지! "
"... 아, 그러하옵니까?"
"그래야 물고기들도 배가 불렀지만, 인간들도 그 배부른 물고기를 먹고 배가 부르면
몇 갑절이나 효과가 좋아지게 된다고들 얘기 하지 않던가!
쯧 쯧- 점꾀좋은 애기 보살이라고 하면서, 그걸 모른다고?"
명경대비를 가만히 마주보던 여인이, 입술을 반 쯤 벌려놓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네... 대비 마마. 그게 그러 하옵니까 ...? "
"그래, 이 왕 나를 위해 애를 쓴다고 하니, 끝까지 수고를 해 주게.
이왕 효과가 좋으려면, 배가고픈 사람들에게 고기를 나눠주면 되겠구만 그래."
"말씀 듣고보니, 그게 좋은 방법 인 것 같습니다. 마마!"
"내게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겠구만!"
"아, 네 네 대왕 대비마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치성을 드리겠나이다!"
"그래, 이제 그만 나가 보시게."
"네. 마마. 하오면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나이다. 강녕하시옵소서!"
여인이 나간 후 엄상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비 마마, 부인의 말대로 대비 마마를 위한 공양을 세간에서 행하여도 괜찮겠사옵니까!
대비 마마께서는 이판 댁의 정부인도 아닌, 저 부인과 얽히는 것을 싫어하시는데..."
"어리숙해 보이는 듯하지만, 영악한 아이지. 이판을 후려잡고 정부인 행세까지, 지 가 하는 여자야."
"네, 마마. 그러합니다."
"저 아이는 지금 세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쫒을 수 있는 계산을 나름 한 것이야!
내게는, 본인보다도 나를 더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거짓 충심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세간에는 그렇게 많은 곡식을 공양할 수 있는 자신의 재력과 힘을 과시한 것이지.
그리고 넌지시 왕실의 평안에, 지가 손을 얹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야.
참으로 요망하지 않으냐!"
"엄 상군, 지금 속히 오늘 한양으로 오는 세곡선 일지를 챙겨서 내금위장을 들라하게!"
"알겠사옵니다. 대왕대비 마마!"
****
이 경응의 집 담장 안으로 약초 달이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담을 넘어 몰래 들어와 앉은 원범과 상추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백 선은 오늘도 양순이와 뜯어온 약초를 달이느라 부엌에서 부채질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네, 사부님. 백 선 형님은 조선 제일 검 이라고 하기엔 너무 순수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그래, 하지만 백선도 너의 행동에 뭔가 냄새를 맡았을지도 몰라.
아마 모른 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 일이지."
"그보다 사부님, 오늘 마포나루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적들이 너무 겁 없이 설쳐대는 것 같습니다.
나라의 세곡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도적질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요?
더구나 내금위장도 그들을 쫓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뻔한 것 아니더냐!
궁 안으로 들어온 세곡을 명분 없이 받아내는 것보다, 차라리 중간에서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쓸데없이 눈치 볼 필요도 없는 방법인 게지.
서로를 위해서도 더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
"더 이상 대신들의 사욕을 위해서 백성들의 노고를 헛되이 할 수는 없습니다!
세곡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아서라! 아직은 그들과 맞설 때가 아니다. 내실을 먼저 다져야지, 모든 것이 안정되고 정리되는 법이다."
노 상추를 바라보는 원범의 표정이 제법 뾰로퉁해 보였다.
"사부님, 그 얘기는 조회 때 대신들이 저더러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항상 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실이 다져질 동안 가만히 기다리다가는, 더 큰일 날 때라는 생각은 듭니다!"
원범의 이야기에 오히려 상추가 많이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 조금씩 왕이 되어가는 모습이 비춰지는 것 같았다.
"어, 그래. 오늘 송이 아범이 급한 대로 도적놈들의 수레를 따라가 보았다고는 하던데,
속도가 빨라서 중간에 놓치고는 말았지만, 아마도 양주관아 쪽으로 가는 방향 인 것 같다고 하더구나!"
"네, 그럼 일단 그 곳으로 한번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연하죠. 사부님. 어서 일어나세요!"
"안 된다. 궁으로 곧 들어가 보아야 하는데,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간다는 게야!"
"궁에서 한 번 나오기가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데, 나온 김에 얼른 일을 보아야지요.
눈으로 확인부터 해야 다음 일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넌 아직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오히려 임금인 네가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다가 얼굴이라도 들키는 날에는,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모르는 일이야.
이제 이 조선은 임금과 백성의 나라가 아니고, 권력과 돈 빨 센 놈의 나라라는 말이다!
그것부터 먼저 바로 잡아야 한다.
그건 몸을 쓰는 게 아니라, 머리를 써야 하는 게야! 궁궐로 들어가서 말이지."
원범의 표정이 주춤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하지만 이번만 알아보고 갈게요."
'저 고집을 누가 말려!'
해시로 접어든 도성의 거리는 제법 인적이 뜸해져 있었다.
인정이 되어 순라꾼들에게 애꿎게 당하기 전에,
양반들은 일찌감치 몸을 사리고 집안으로 들어가 앉은 모양이었다.
어두운 담벼락 밑으로만 다니던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야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드디어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부님, 안 되겠습니다. 지붕위로 움직여야 겠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한성부의 지붕은 대부분 높고 넓은 팔작지붕이 많은 탓에, 낮은 담 위로 두세 번의 뜀박질을 딛고서야 그들은 지붕위로 오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붕위로 올라 선 그들의 모습을 감추기에, 어둠속의 넓은 지붕의 위용은 그지없이 안성맞춤이었고,
몸을 세운 채로 자유롭게 지붕을 타고 관아 쪽으로 이동을 하기에도, 더 없이 편안하기만 했다.
잠시 후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가 끝날 무렵,
저 아래로 조족등을 손에든 순라꾼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큰 길은 두고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구석진 길로 들어서더니, 이내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길을 쫒듯 이어 나타난 건, 조용한 그림자더미처럼 나타난 어둡고 기다란 행렬이었다.
분주하지만 조심스런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양주 관아가 있는 방향에서부터 오는 모양이었다.
수레의 주변을 살피는 이들은, 관아의 포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골격이 다부지게 잡힌 자객처럼 보이는 그들이 운반하는 것은, 오늘 마포나루에서 사라졌던 세곡들이 실린 수레인 것 같았다.
"사부님, 분명히 순라꾼들이 저 행렬을 못 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저 순라꾼들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저들을 도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도적질이 아니고 세도가의 횡포인 것 같습니다!"
"음... "
"빨리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로 향하는 지만 보면 다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위험 하... "
또다시 상추의 대답이 이어지기도 전에, 원범은 벌써 저 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공명첩- 성명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 국가의 재정이 궁핍할 때 국고를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
*인정 – 밤에 통행을 금지하기 위하여 종을 치던 일
*조족등- 야간순찰을 돌던 순라군들의 등기구
*해시- 밤 9시에서 11시사이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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