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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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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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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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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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전방과 후방(4)

DUMMY

달력에 적힌 연도가 2024년이든 1769년이든 돈이란 결국 좋고 좋은 것이다. 세상 만사에 화가 치밀어오르는 직장인조차 잠시나마 웃게 만드는 날이 월급날인 것처럼.


하지만 보급이란 건? 모르긴 몰라도 돈과 정반대에 놓여있을 것이 틀림없다.


"전하, 키예프 거래소와 주지사의 보고입니다. 골리친 사령관과 메뎀 소장의 요청에 보관중이던 곡물 약 3, 724푸드어치를 반출되었습니다."


"3,724 푸드... 음, 키예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생각하면 시간이 촉박한가. 우선 골리친 사령관 쪽에서 추가 반출 요청이 있을 수 있으니 차리차롭스크 쪽에 비축해둔 밀과 호밀 포대를 인출하게. 명령서는 뒤이어 내려보내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하일, 폐하께 이걸 보여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돌고루고프 공작 대리인을 데려오도록 해."


대답들을 틈도 없이 휘갈겨쓴 쪽지를 예카테리나가 붙여준 시종에게 떠맡긴 후에도 쉼없는 문답에 내 입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양배추? 아아, 그래. 순무와 양파랑 일단 감자도 각각 3,293 푸드를 종자와 함께 보내. 어디로? 당연히 전선마다겠지?"


"폴즈 상회? 주문한 게 늦지 않게 와줬군. 추려서 아조프 해와 호틴 쪽에 보내고, 호틴에 조금 더 중점을 두도록 해. 올리츠 장군의 이동경로와 골리친 사령관 편으로 온 보고서대로라면 쓸 양이 많을 테니."


"소금과 설탕을 빼돌려? 당장 잡아와라! 안 그래도 부족해서 내수용으로 돌릴 판에 아주 뼈마디를 조각조각내줄 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나니 뒷목이 당겼다. 입은 마르고 목은 쉴만큼 아프니 담배 한대가 그리웠다. 젠장, 이 나이에 피울 수도 없고.


곡물, 채소, 화약과 소금, 그리고 설탕까지. 하나씩 떼어놓고 본다면 생필품이나 모두 합쳐본다면 짜잔, 군수품 목록이 된다.

그러면서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황태자인 내가 왜 소리를 질러가면서 이러고 있는가 하면 당연히 예카테리나 때문이다. 이 양반을 빼놓으면 내 삶이 설명되지 않지.


'허면 은행일에 대해선 너와 더 깊이 상의해볼 필요가 있겠다. 하는 김에 경험도 쌓을 겸 보급 쪽도 맡아보면 좋겠지. 잘됐구나.'


'황공하옵니-. 예?'


'파블로프 제당공장이랬던가? 그 외에 네가 꾸리고 있는 상회에서 소금과 염장고기를 취급한다는 걸 짐도 안단다. 모두 전쟁시에 군수품으로 꼽히는 물자이기도 해.'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장사일 뿐이라. 군납 같은 거대한 건 좀.'


'그렇대도 판매와 운반을 지휘해본 경험은 귀중한 것이야. 더욱이 네가 상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 좀 더 수월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지 않겠느냐? 황실의 면도 설 것이고, 짐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던 건 허언이 아닐 테지.'


괴테의 희곡에 나오는 악마의 혓바닥이 이랬을까. 물론 파우스트가 나오려면 한참 남았을 테지만, 어째 걔보다 예카테리나가 더 악마 같았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쳐먹으려던 파우스트는 성인이기라도 했지, 나? 이제 열네살이다.


하지만 사나이 대장부가 한 번 꺼낸 말을 쪽팔리게 주워담을 순 없지. 울며겨자먹기로 위원직에 오른지 반나절도 안되어 내가 본 것만 서른 개인 입에서 말말말이 쏟아지지 뭔가. 역시 월급쟁이답게 사표의 결단을....!


"전하, 코피가."


"안드레이, 아무거나 막을 것 좀 줘."


어쩐지 숨쉴 때마다 콧물과 다른 짭짤함이 느껴지더라니, 안드레이가 건네준 수건인지 헝겊인지 모를 걸로 코를 틀어막으면서도 내 눈은 서류를 훑었다. 다행히 피는 안 묻었네.


이 보급이란 게 얼마나 엿먹을 것이냐면 잘하면 당연한 거고, 못하면? 얼굴도 모르는 조상까지 싸잡혀 욕먹을 수 있다.

어떻게 아냐고? 그런 건 지성을 갖춘 문명인이 해선 안될 질문입니다, 신사분들.


"저기, 이바노프 위원."


"예, 전하. 괜찮으십니까? 헝겊을 새로운 걸로 교체하셔야할 듯합니다."


"그럴 필요 없이 이만 들어가보면 안될-."


"안됩니다. 고작 코피로 어딜 들어가신답니까!"


"이바노프 위원 말이 맞습니다. ...전하! 어딜 가십니까, 뭐하는가 얼른 잡아, 아니 모셔오게!"


미래 사람들 가라사대, 살기 위한 탈출은 허용되는 게 세상의 이치.

월급 없는 미성년자 착취엔 도망이 상책이었다.


***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황태자와 관료들이 전쟁 자금 마련과 보급 소요에 치여 서로의 탈주와 포획을 반복하고 있던 그 무렵.


"알라시여, 당신의 종에게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의 관저에서 대재상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새벽부터 서류와 씨름하며 알라에게 기원하고 있었다.


인도 대사를 역임할 정도로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지금껏 삶이란 탄탄대로였다.

풍족한 삶과 위엄있는 부친의 뒤를 이어 직물 사업에 몸담아 머나먼 인도를 다녀오고, 무슬림의 숙원인 메카와 메디나 순례를 마쳐 엘 하지란 칭호를 얻었다.

세르칼리파에서 해군성 사령관에 아이딘 주지사까지 그야말로 궁정과 군무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파디샤의 딸 샤 술탄과 약혼하는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건 명망있는 무신자데 파샤와 실라다르 파샤가 해임된 후 그에게 대재상 자리가 주어졌던 10월 무렵.

원치 않던 대재상 임명을 받아 파디샤께 감사인사를 올리러 간 날을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어깨를 짓누르던 막대한 부담감과 더불어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대재상으로 보게 되어 무척 기쁘구려, 메흐메트 에민 파샤. 짐은 그대에게 기대가 몹시 크오."


무스타파 3세.

무슬림의 지도자(칼리파)이자 두 개의 신성한 모스크의 종, 충실한 신도들의 사령관(에미르 알 무미닌)이자 로마 황제.

뒤로는 예니체리에게 무시당한다해도 영민한 면을 갖추고 신민들에게 사랑받는 파디샤에게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넙죽 엎드렸다.


"파디샤의 은혜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겸손하기는. 짐의 사위가 되려면 좀 내세울 줄도 알아야하지 않겠소. 모쪼록 이전의 두 대재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고 있다네."


톱카프 궁전의 제3중정에 자리한 알현실 왕좌에서 무스타파 3세는 차갑게 말했다.


"짐의 대재상이라면 저 북방의 불신자들을 쳐부술 방편을 찾는 것에 손을 거들어야함이지."


파디샤의 단언에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잠시 눈을 질끈 감고서 영원히 고개를 들지 않길 바랐다.

황제의 제일가는 충복이자 선대 대재상 코카 메흐메트 라지프 파샤 이래 줄곧 오스만의 대러시아 정책 기조는 평화였고, 메흐메트 에민 파샤 역시 선대 대재상들의 의견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하오나 파디샤. 송구스럽게도 저들 또한 이전의 저들이 아님을 확인할 여러 정황이 있었사옵니다."


전임자 무신자데 메흐메트 파샤는 유럽의 소식에 언제나 귀를 기울였다.

여러 지역의 주지사를 역임할 만큼 현명한 대재상은 전쟁 자체를 두려워하진 않았으나 신중한 정치적 계산과 철저한 준비 없이 군을 일으키는 걸 경계해왔다.


"알라께서 가호하시는 파디샤의 군대에 감히 누구 하나 대적할 자가 없으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옵니다. 허나 제국에게 손을 내민 폴란드 또한 불신자임은 틀림없는 사신인 줄 아룁니다."


그의 조국 오스만은 분명 강성했으나 그들의 적 또한 만만찮았다.

특히나 러시아, 오랜 북방의 숙적이 보이고 있는 최근 모습은 제국이 무릎 꿇려왔을 때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지 않던가.


"개는 짖고 카라반은 움직이는 법이듯 불신자들끼리 서로를 상잔하는 걸 제국은 지켜보거나 혹은 변방의 체르케스나 크림 칸국을 전면에 내세움이 이롭지 않을런지요."


뒷통수에는 어떤 말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법한 침묵에도 대재상은 샤쉬카 뽑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에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고 골라냈다.

하지만, 파디샤 무스타파 3세는 입꼬리를 비틀며 이어 하문했다.


"허면 저들이 짐의 백성들을 무참히 도륙한 것도 대재상은 눈 감고 넘어가라 말할 것인가?"


선대 아흐메트 3세의 아들로서 무스타파 3세는 분명 평화를 좋아했다. 전쟁이란 신민의 고혈을 빨며 무스타파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번영한 오스만 제국을 한순간에 흩어놓을 이블리스와 같은 것.


"둑에 난 구멍을 방치하면 한해 농사를 망치는 건 당연하지 않겠소, 메흐메트 파샤."


허나 옛 시대 로마의 현인이 말했듯 평화를 원하는 자에겐 전쟁을 준비해야하는 법이다.


"불신자란 족속들은 아무리 무릎 꿇려도 끝끝내 고개를 쳐들어 제국에 반기를 들어온 손가락의 가시와 같지. 짐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이기 전에 무슬림 밀레트의 칼리파로서 칼을 뽑고자 함이다.

대재상은 짐의 뜻을 헤아려 더는 부언하지 말라."


인자한 목소리에 숨긴 시퍼런 비수는 경고였다. 전임 대재상들처럼 물러나게 될지, 아니면 목숨마저 영영 빼앗길지. 주어지지도 않은 선택지를 마지못해 골라야했던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비서관의 말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대재상 각하?"


"....그래, 디반을 열 시각인가?"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에게 주어진 업무 중 제일은 국무회의 격인 디반의 개최다. 신성한 톱카프 궁전의 제2중정에 있는 쿠베알티에 대재상을 중심으로 재정과 사법 대신들, 총독, 예니체리와 해군 사령관, 그리고 총무 비서관이 모여 국정을 논하는 자리였다.


"아직은 괜찮나이다. 다만 흑해와 호틴 요새에 파견할 지휘관과 보급 관련하여 확인하셔야할 부분이 있사온데."


"대재상 각하."


비서관의 말을 자르듯 문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대재상은 고개를 들자 파디샤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환관장(키즈라르 아가)이 고개를 깊숙히 숙여보였다.


"환관장, 어쩐 일인가?"


환관장은 파디샤의 명령을 대재상에게 전달하는 자이니 왜 왔는지 물을 이유는 없다. 다만, 메흐메트 파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디반에 파디샤의 뜻이 반영되게 하거나 아니면 디반 회의의 방향성을 정할 중대할 상황을 전하거나, 하렘 밖으로 나온 환관장의 존재는 그런 의미였기에.


"미천한 파디샤의 종이 바흐시치라이에서 폐하께 보내온 서한을 전하러 왔나이다."


오스만 제국의 제일가는 번국의 수도 이름이 언급되자 대재상은 손에 쥐었던 철필을 놓쳤다. 낚아채듯 편지의 봉인을 뜯은 메흐메트 에민 파샤의 눈에 익숙한 문자가 유리조각처럼 뼈아프게 박혀들었다.


"키림 기라이 칸이...죽었다고."


러시아의 변방을 습격했던 크림 칸국의 수장이 사망했다. 그 연유조차 적군이 쏜 화살에 찢긴 상처가 덧나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서한을 받아든 대재상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우물이며 술, 음식과 장신구에까지 이상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걸 타고 발라놨다는 얘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좋다. 걱정되는 건 오로지 변방의 야기될 분쟁이었다.


'칸위를 두고 과연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충실한 번국의 수장 자리가 빈 지금, 젊은 그의 아들이 채울 수 있을까.

아니면 숙부와 그 일가가 칸위를 갖겠다며 내분을 일으키진 않을까.

향후에 있을 전투에 크림칸국을 배제할지 참여케할지를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고민하고 결정해야할 상황에 놓였다.


잠시간 전임 대재상 실라다르 파샤를 원망했다. 그가 러시아 대사 오블레스코프를 투옥하지 않았더라면. 파디샤의 소매를 붙들고서라도 끝끝내 전쟁을 막아세웠더라면.


'부질 없다.'


모든 건 그들의 주군이자 파디샤 무스타파 3세가 내린 결정, 문서 위에 선명하게 적힌 투으라가 이끈 결과였으니까.


"이브라힘 비서관. 디반을 조금 더 앞당기게."


"...알겠습니다."


이미 물러가고 없는 환관장이 있던 문을 향해 대재상은 걸어나갔다.

꽃 한 송이가 피었다고 봄이 오진 않듯, 제국이 무릎 꿇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 메흐메트 에민 파샤는 믿어야했다.


***


전쟁이 발발한 이래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맞부딪힌 국경 지대에선 연일 국지전이 한창이었다.


"감히 로마를 참칭하는 튀르크에 맞설 때까지 설탕과 물을 충분히 먹고 마셔라. 키예프(키이우)를 등진 우리에게 허락된 건 오로지 전진뿐이다."


"성 게오르기우스와 성 소피아의 가호가 우리가 함께 한다!"


전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의 명령에 따라 제국군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번째는 포돌리아로 진군한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골리친 총사령관.

명문 골리친 가문의 일원으로서 전하라는 칭호로 불리는 그는 숙련된 군인답게 키예프(키이우)를 거쳐 호틴으로 행군하는 동안 6만 명의 병력을 온존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전군, 엉덩이에 힘 바짝 주고 버텨라! 타타르 놈들에게 내줄 것은 먼지 한 톨조차 없다!"


"우라, 우라아!"


두 번째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루먄체프 2군 사령관.

느릿한 골리친과 달리 시원시원한 일처리로 황제의 신임을 받는 루먄체프는 폴타바와 바흐무트에서 아조프 해로 이어지는 일대에서 지쳐드는 오스만 제국군의 머리를 3만 여명의 병력과 함께 말그대로 수집하는 중이었다.


"자비로우신 차리차께서 명하셨다. 간악한 오스만의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우리가 분연히 떨쳐일어날 때라고. 자,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딘가!"


"서쪽, 이교도를 벌하러 서쪽으로 향하는 우리 앞에는 오직 승리뿐이다!"


세 번째는 표트르 이바노비치 올리츠 3군 사령관.

차리차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과 신앙심으로 무장한 그는 만오천 명을 이끌고 루츠크 방면으로 우회하여 뱀파이어 전설의 유래지, 왈라키아 동쪽을 파고들었다.

폴란드 방면에 파견된 오토 아돌프 폰 바이센슈타인 대령과 흑해 북동부에 주둔한 요한 프리드리히 폰 메뎀 소장에 이르기까지 어림잡아 12만 5천에 달하는 대군에 맞선 오스만 제국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알라후 아크바르! 저 북쪽에서 불신자들이 내려올 것이다. 허나 두려움을 거두고 앞을 보아라."


"저들의 아비와 조부는 우리 선조들에게 도망치던 자들이었으니 겁먹을 거 없이 나아가라. 알라께서 저들을 파디샤의 발치에 무릎 꿇리길 바라신다!"


"알함둘릴라히(알라를 찬미할지어다)!"


결코 전쟁을 원치 않았던 대재상 메흐메트 에민 파샤의 망설임에도 오스만 제국군은 적국에 맞설 준비를 갖춰갔다.

비록 그들의 총은 총신이 길고 무거웠고 규율은 허술했으며 불복종과 탈영은 예사로 일어났다. 그러나 백여년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이들답게 기병에 한해선 러시아보다 명백히 앞섰다.

더욱이 멀리서 원정을 온 러시아에 비해 전역의 대부분은 그들이 살던 땅. 거주지의 이점에 러시아군은 기껏 빼앗은 요새와 땅에서 후퇴하거나 물러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호틴 요새와 인접하면서 드니스테르 강이 멀지 않은 진지를 친 러시아 제국군의 총사령관 겸 1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골리친은 그들이 물러나온 호틴 요새 방향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승전을 거두셨는데 마음에 안 차신다니, 폐하께서 들으셨다면 크게 마음 아파하실 겁니다."


그의 등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골리친은 몸을 뒤로 틀었다. 팔자주름이 진 양 뺨을 당기듯 웃으며 사령관은 손을 내밀어 악수한 후 막사 내로 친히 앞장섰다.


"올리츠 소장, 원로에 노고가 많네."


"과찬이십니다. 전하. 늦었지만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호틴 요새를 지키려 오던 4만여 가량의 오스만 군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골리친 사령관의 군대에 크게 피해를 입은 채 후퇴했다.

요새 점령은 시도하지 못했더라도 나름 충분한 전과이지만, 그는 씁쓸히 웃으며 휘하 하급병이 가져온 자리를 올리츠 소장에게 권하며 앉았다.


"승전이랄 게 있나. 폐하께서 만족하지 못하신 이상 그건 이겨도 이긴 게 아니지. 오히려 소장이 왈라키아에서 거둔 것이 승전 아니겠소. 성 안드레이 훈장의 수훈자가 될 날이 머지않은 듯 하던데."


"과분한 말씀입니다. 소장은 그저 폐하와 사령관 각하의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비슷한 연배에도 뼈대있는 명문 골리친 가문인 알렉산드르와 달리 독일계 출신인 표트르 올리츠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골리친이 따라준 술을 들이켜면 실룩이던 입꼬리가 내심 뿌듯함을 드러냈다.


"하온데 소장을 부르신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만."


"들었는지 모르지만 타타르 놈들의 우두머리가 죽었다더군. 플라토프였나 돈 카자크 소속 하사 아니 진급해서 중사로군. 그이가 쏜 화살에 찢긴 곳이 덧났다더군."


"허참, 그거 꽤나 운 없는 일입니다. 이해했습니다. 빈 수장 자리를 두고 저들끼리 싸울 테니 소장까지 거기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


"그렇지. 루먄체프 사령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의 주전장은 이곳이지."


예카테리나 2세에게 하사받은 지휘봉으로 골리친 사령관은 막사에 내건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호틴 요새, 키예프 루스의 명군 블라디미르 1세 스뱌토슬라비치가 세운 국경 요새 중 하나.

얼핏 허허벌판뿐이라 볼 수 있는 지형과 달리 이곳은 키예프를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연결하던 중요한 무역로였고, 더 나아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와 흑해를 연결할 요충지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잊을 만하면 질책이 들려온다오. 내가 꾸물거리고 겁쟁이처럼 후퇴만을 거듭한다고 말이지."


설탕을 듬뿍 넣은 간식을 입가심 삼아 삼키며 골리친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토란 게 그저 점령만 한다고 전부가 아니건만."


썩어도 청어란 말처럼 오스만 제국군은 약하지 않았다. 더욱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하여 키예프를 거쳐오는 동안 전쟁준비가 막 끝난 초병들이 낙오되는 걸 막는데 골리친은 온 힘을 쏟아야했다.

병력을 보충하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영토만 넓히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전열이 얇아져 적의 공세에 취약해질 일을 자초하는 짓. 지키지 못할 땅에 병사를 쏟아붓는다니, 그 무슨 낭비인가.


물론 그것은 현장의 사정일 뿐, 수도에서 보기에 그들이 게으름피우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입꼬리를 비틀듯 웃으며 골리친은 근처에 놓아둔 편지를 집어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도에서도 오스만의 등 뒤를 찌를 계획을 궁리중인 모양인 듯 하네. 펠레폰네소스 반도 쪽에서 그리스인들을 봉기시켜 적의 주의를 우리에게서 분산시킬 생각이겠지."


건네받은 편지를 읽으며 올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적의 분산되는 시선은 필연적으로 병력의 분할을 야기한다. 그걸 위한 미끼로 내걸 대상이 러시아 백성이 아닌 타국 신앙의 형제로 한다는 것이라면 반대할 이유마저 사라진다.


"거기에 몰도바 교구에서 도움 요청을 하셨군요."


"완전한 정복을 원한다면 첫 교전 상황에선 무리였네. 적을 가늠해볼 목적으로 움직이자니 수중에 있는 공성병기도 조금 모자랐고 적의 수도 상당했지. 어차피 쥐새끼를 집 밖으로 몰아낼 거라면, 가능한 많이 모였을 때 한데 모아 불태워버림이 옳지 않겠나."


그들의 목표인 호틴 요새의 주둔 병력은 대략 삼만 남짓. 무릇 공성은 방어측에 유리하기 마련이니 골리친이 생각할 가장 좋은 수는 완전한 포위, 쥐새끼 한 마리 나갈 수 없게 꽁꽁 싸매어 굶겨죽이는 방식이었다.

허나 수도에선 속전을 요구하니 얕잡혀보여서 적들의 목덜미를 끌어내는 것을 골리친은 다음 수로 골랐다.


"화약이야 여전히 모자란 감이 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화약이 썩어넘치는 건 인도를 한입에 삼킨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뿐이었다. 그 점을 알기에 골리친은 입맛만 다셨지만, 올리츠 소장은 문득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전하. 그 건에 대하여 소장이 한 가지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부름을 받고 오는 길에 파블로프 교역소에서 전달받은 품목 중에 포탄이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황태자 전하의 지시로 잉글랜드에서 개별적으로 사온 거라 하는데, 많지는 않으나 사령관들께 도움이 될 것일 거라 전언하셨답니다."


그 말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골리친은 두툼한 눈두덩을 힘주어 들어올렸다. 마치 부활절을 지새우고 만찬을 즐길 때처럼 그의 나이든 얼굴에 즐거움이 떠올랐다.


"그럼 어디 확인하러 가보세. 적에게 생길 변수란 언제나 아군에게 이로운 법이니."


육중한 몸집이 무색하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골리친 사령관이 막사를 나서자 올리츠 사령관이 뒤를 따랐다. 성실한 하급병들이 무기 보관처로 옮겨놓은 화약을 두 사령관은 제드마로스에게 선물받은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살펴보았다.


호틴 요새가 사람이었다면 기나긴 싸움에 진절머리를 쳤을 공성전이 불과 사흘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작가의말
  •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 1.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골리친의 가문은 옛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가문 게디미노비치에서 갈라져나온 분파로 작중 파벨의 말벗 알렉산드르 쿠라킨의 가문과 뿌리가 같습니다. 그렇기에 작중 작위명은 골리친 공작이지만 경칭은 전하(Serene Highness)로 불리는데 이건 현재 모나코 공이나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공실 가문에서 쓰이는 경칭이기도 하며 뉘앙스는 왕자 전하와 공작 각하의 중간 지점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2. 18세기 러시아제국군의 식사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당연하게도 뒤떨어졌습니다. 호밀빵이나 신 양배추, 양파나 죽, 오트밀 정도로 보시다시피 빈약한데 보통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의 평균 필요 칼로리인 4200~4500kcal에 비해 이당시의 식단은 3100kcal에 불과했습니다. 19세기 전까지 쭉 이상태라 한참 모자란 식사량이 러시아군의 전쟁수행능력을 소모시켰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표트르 1세 시기를 거치며 마침내 식단에 고기가 포함됐지만 반대로 채소류가 부족했고, 건조한 빵가루를 식단에 포함시키다보니 괴혈병과 빵가루 설사 등이 흔해져버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보급에 소홀한 면도 있었지만, 그만큼 낙후됐던 러시아 제국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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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1 착한 사람도 가끔 사기를 친다(1) NEW 3시간 전 32 3 11쪽
30 전쟁과 평화의 레가토(2) NEW +3 22시간 전 221 9 14쪽
29 (제목수정)전쟁과 평화의 레가토(1) +1 24.09.18 274 11 12쪽
28 전쟁의 전방과 후방(5) +1 24.09.17 302 11 15쪽
» 전쟁의 전방과 후방(4) +3 24.09.15 313 11 21쪽
26 전쟁의 전방과 후방(3) +2 24.09.11 372 16 11쪽
25 전쟁의 전방과 후방(2) +3 24.09.08 420 16 15쪽
24 전쟁의 전방과 후방(1) +4 24.09.07 441 14 12쪽
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32 22 14쪽
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67 20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95 23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34 18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69 21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94 18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502 17 14쪽
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510 14 14쪽
15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82 14 20쪽
14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42 22 20쪽
13 왕좌를 비워라(3) +9 24.08.22 644 24 16쪽
12 왕좌를 비워라(2) +4 24.08.22 595 20 19쪽
11 왕좌를 비워라(1) +5 24.08.20 660 23 17쪽
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96 22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44 25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81 24 15쪽
7 세 황제의 해(4) +4 24.08.12 730 19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819 27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906 22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922 26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61 22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142 2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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