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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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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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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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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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DUMMY

유명한 해적 만화 속 어떤 남자는 자신이 숨겨놓은 보물, 이 세상 전부와 같은 그것을 찾아내보라는 선언 하나로 한순간 시대를 뒤흔들었다.

물론 현실은 단 한 명의 영웅이나 악당에 의해 정의되기엔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복잡미묘하다. 그럼에도 때때로 단 한 명의 선택이 누군가의 세상을 뒤집어놓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의 중심부 호프부르크 궁전의 제국총리실에서 재상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는 그런 역설적인 감상을 톡톡히 느끼는 중이었다.


"만약 당신과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제 주먹이 대사님의 얼굴을 후려쳤을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각하의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제 아내는 제 얼굴만 보고 결혼해주었거든요."


아주 미남은 아니라도 남자답게는 생긴 주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대사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골리친 공작의 넉살에 재상 벤첼 카우니츠 백작은 이마에 돋은 핏대를 가라앉히려 미간을 주물렀다.

아들을 성직자로 키우고 싶어하던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외교관으로 출세가도를 밟아온 카우니츠에게 그가 재상에 오른 이래 가장 화난 일을 꼽으라면 단연 동맹 러시아의 배신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국이 우리 상황이라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동맹과의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적과 평화협상을 하고, 그걸 무르지도 않고 이어가면서 우리와 다시 손을 잡자니. 이렇게 말하자니 실례지만 귀국 황제께선 양심이 남아계신지 궁금하군요."


"양심은 군주에게나 외교관에게나 필요치 않은 덕목이지 않습니까. 얼굴에 침을 맞더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의견을 전하고 각하를 설득하는 게 제 업무이지요."


골리친의 뻔뻔한 말에 카우니츠는 순간 소원대로 저 면상에 침 뱉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조국 오스트리아가 잃어버린 고토, 슐레지엔을 되찾으려는 주군 마리아 테레지아의 바람을 위해 카우니츠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취미가 서로를 거꾸러뜨리기였던 프랑스와 손을 잡고, 성장세를 탄 프로이센을 무릎 꿇리기 위해 마찬가지로 그들을 싫어하는 러시아와 연합했다.

제국에 모욕을 안겨준 로스바흐와 로이텐에서의 승리로 드높던 프리드리히의 자부심을 쿠네르스도르프에서 꺾는 순간 카우니츠는 비천한 거지의 입술에도 기꺼이 입맞출만큼 고양됐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의 차르가 바뀌자 모든 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버렸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는 말인가! 우리와 일절 상의도 하지 않고 이런 폭거를. 재상,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 거요!


함께 흘린 피로 거둔 과실을 함께 나누진 못할망정, 기껏 얻어낸 땅마저 거저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동맹을 치라고 군사를 빌려주는 국왕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누군들 상상했을까.

말도 안되는 걸 예상 못한 죄로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했던 카우니츠는 눈앞의 대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골리친 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상 각하. 이대로 간다면 슐리지엔에 프로이센의 깃발만이 나부끼는 건 기정사실이겠지요."


"덕분이오. 하나마나한 말씀을 하고자 한다면."


"허나 아직 온전히 프로이센의 승리라 할 순 없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 어쨌거나 저희는 협상을 이행할 테지만, 귀국을 돕는 방법이 꼭 공식적인 방법일 필요야 없지 않겠습니까."


외교관답게 돌려말하는 골리친의 제안에서 카우니츠는 잠시 생각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은 즉, 뒤로 빠진 채 우리를 돕겠단 말씀이시오?"


드미트리 골리친 대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배신자의 웃음에 잠시 화가 치밀던 카우니츠였지만, 화를 내기엔 상대의 의도를 알아채는 게 우선이었다.


프로이센령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은 지금쯤 철군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그들 중에 섞여있을 오스트리아군이야 회수받으면 그만이지만, 숱하게 치러온 전쟁으로 부상자가 넘쳐나는 제국군의 소요를 감당하기는 턱없이 부족할 테고. 스웨덴이야 얻을 것도 더 없는 전쟁을 러시아를 핑계삼아 빠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

그리고 숨돌릴 기회를 얻은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 왕국군은 지체없이 그들 오스트리아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노리고, 버림패로 쓰려던 나라가 되살아났으니 영국은 그 좋아하는 균형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적대하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 러시아가 앞세워 우릴 도울 나라가....설마.'


뇌리를 스치는 예감에 카우니츠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드미트리 골리친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작센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이지요."


여자에 미친 호색한 아우구스트 2세의 외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섬기고 있는 작센 선제후국은 대대로 신성로마제국를 이루어온 일곱 선제후 중 하나였다.

칠년 간 이어진 이 지긋지긋한 슐레지엔 탈환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품위없는 공격을 받아 국토가 폐허가 되버린 군주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싸울 배짱도 없어 바르샤바에서 숨어있기나 한다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용해먹기도 좋다.


'오스트리아의 지원으로 작센 선제후국 병사로 위장한 러시아 군을 이용한다면?'


비공식적인 도움이라도 성의표시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슐레지엔보다 중요한 건 오스트리아에겐 없었으므로.


'나쁘지 않다. 조율이 필요하겠지만.'


그제야 웃음을 되찾은 카우니츠는 골리친 대사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은 봉신국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지요. 제가 견식이 적어 잊고 있던 걸 대사님 덕분에 깨달았지 뭡니까."


"그거야말로 재상께서 이 제국에 꼭 필요한 분이란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원체 감당하실 일이 많으신 분 아니신가요."


"감사한 말씀이군요. 그럼 마저 이야기해봐야할 것 같군요. 귀국 황제께서 보내주신 제안에 대해서."


그의 잔에도 와인을 따라주는 골리친 대사를 향해 신성로마제국의 재상 벤첼 카우니츠는 턱을 들었다. 마주 웃으며 드미트리 골리친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시간은 금이니까요."


그들의 앞에 이윽고 유럽 한복판을 담아놓은 지도가 펼쳐졌다.


***


"결정을 재고하실 순 없겠소, 체르니셰프 사령관?"


호엔촐레른이 배출한 금세기 최고의 군주. 동방의 이름모를 나라의 후계자와 달리 부왕의 비인간적 학대에도 꿋꿋이 살아남아 승리자가 된 남자.

훗날 7년 전쟁이라 명명될 불사조 같은 명장, 프리드리히 2세 호엔촐레른은 아쉬운 얼굴로 맞은편에 선 타국 장성을 바라보았다.


"송구하오나 소장은 러시아 제국의 군인입니다."


자카리 그리고리예비치 체르니셰프 중장.

열세 살 나이에 입대하여 일생을 전쟁터에서 바쳐온 그는 전쟁 중의 급박한 상화이 아니라면 수도의 명령을 단 한 번도 불이행 적이 없었다. 그것이 불합리하건 멍청한 선택이건.

바로 어제까지 적군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을 '도우러' 병력을 이끌라는 표트르 3세의 명령조차 수행했던 그다.


허나 언젠가의 다른 세상과 달리 지금의 체르니셰프 중장은 프리드리히 2세를 도울 수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려온 명령서에는 이걸 수리하는 즉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표트르 파닌 총독에게 지휘권을 한시 이양한 후 평화협상의 내용대로 휘하 병력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철군시키란 것이었습니다."


"슈테틴에 주둔해있던 루먄체프 원수와 부툴린 사령관의 말머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비너노이슈타트로 향하고 있는데도 말인가? 동맹도 선전포고도 없이 '인접국'을 경유하는 건 뭐라하시던가?"


"슈테틴에서 사령관의 지휘 하에 있던 오스트리아 군을 돌려주기 위함이라 하더군요"


"빈(Wien)으로 향하면 될 것을, 일부러 초이나(Chojna) 쪽으로 붙어서 말인가? 한 줌도 안될 병력을 이송하기 위해 그 먼 거리를 행군한다니. 새로운 황제께선 신의가 넘치는 분이구려."


러시아군이 주둔한 슈테틴(Stettin)에서 비너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까지는 직선거리로 753km.

도착만을 목표에 둔 채 행군한데도 수십 일이 소요되는 거리를 천이나 이천쯤 될 병력을 '돌려주기 위해' 간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건 표트르 3세와 같은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프로이센과 인접한 도시들을 끼고 간다는 것부터 의도적인 이 행군이 빚을 보급소요를 러시아군이 감수할 이유는 오직 하나.


'인정은 하되 순순히 가진 않겠다는 말이지.'


예를 들어, 귀환중에 낙오된 병사들이 안타깝게도 멋대로 파토낸 동맹에 분노한 오스트리아 군 손에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면서 말이지 .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지만, 그게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점이 러시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분노였다. 위험한 행군로를 택하는 '바보짓'에 비웃음을 사는 대가로 본 목적을 숨기기 위한 적절한 가림막이 되어줄 만큼.


"평화협상에 따른 철군 명령이라. 참 노골적이라 오히려 알기 쉬워 좋다네, 난."


프리드리히 2세의 한탄에 체르니셰프 중장은 말을 삼갔다. 침묵은 어느 때보다 확실한 대답이 되었다.

분명 그는 군인으로서 프리드리히 2세를 존경했다. 절체절명의 국난 속에서도 훌륭한 국가를 보존하고 사방에 가득한 적과의 싸움에서 백중세를 유지하는 명장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존경할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는 프로이센이 아닌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자 귀족이었다. 가족도 친척도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프락신 원수처럼 될 수 없지.'


큰 손해를 입고도 내려진 철수명령에 머뭇거리다 반역죄로 옥사한 아프락신 원수의 최후는 당시 그와 함께했던 장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차르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하여 그는 적군을 도우러 왔다. 그 반대는 하지 못할 이유를 체르니셰프는 찾아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휘권을 잃은 체르니셰프의 명령은 적군을 돕는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하던 군단에게 힘을 잃은 지 오래였으니.


'표트르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성급했나. 아니, 아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봤다. 일찍이 노화가 찾아온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세 여자의 칼날이 목끝을 겨누고 있을 때 생긴 퇴로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품 속에 넣어둔 독약이 제 쓰임을 다하지 못한 것도 그 덕분인 것을.


'원한다면 협상을 재고하라.'


원래도 귀환하겠다는 체르니셰프를 붙잡은 건 프리드리히 2세 본인, 그의 파견도 순전히 차르 개인의 호의에 국한된 건.

그 차르가 물러난 지금 어쨌거나 협상대로 이행하겠다는 러시아의 대처와 적군이었던 체르니셰프와 러시아군의 주둔을 탐탁찮게 보던 프로이센은 뭐라할 구석이 없다.


'이들이 없다면 오스트리아와의 병력차는 대략 일만.'


러시아와의 전쟁은 끝났어도 프로이센에는 여전히 적이 남아있다. 이 7년 간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오스트리아, 그리고 전쟁에서 내준 슐레지엔에 대해 여전히 침을 흘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옛 주군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프리드리히 2세는 벽에 걸린 작전지도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선과 선의 움직임을, 프로이센 동부에서부터 조금씩 밀어내던 전선의 끝에 있을 평화는 아직도 멀게만 느껴졌다.


"쾨니히스베르크 총독에게 전해주시게."


오스트리아의 희망, 다운 백작(Leopold von Doun)을 상대로 백중세로 기운 상황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프로이센이 마지막이 아닐 쾨니히스베르크 총독 표트르 이바노비치 파닌 백작에게 전할 말은 하나.


"짐은 평화협상 내용에 추가조항을 넣기를 바라네."


모든 것은 슐리지엔과 독립된 왕국 프로이센을 위하여.


***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기만 하는 게 가능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애증(愛憎)은 완전히 분리하여 느끼기는 어렵다. 유전자가 뇌부터 피까지 그야말로 때려박은 생존본능 탓이다.

그렇다면 사랑받는 부모가 미움받는 부모와 동등하게 자식에게 증오받기만 할 때는 언제일까.


잘못에 대해 매를 들 때? 돈까스 반찬에 풀리는 건 증오가 아니지.

길게 간병해야하는 병에 걸리고 말았을 때? 적은 돈으로도 들어가는 요양병원도 많은 걸.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민족을 대표해 답을 내놓자면 바로 내 것을 남에게 줘버리거나 아예 주지 못할 때다.


"친구한텐 빠스찔라(말린 과일로 만드는 전통 과자) 줬는데 나는 말똥이나 치우라시면 어때?"


"화는 나도 아버지한텐 대들 수 없으니 걜 때려서 되찾아와야죠."


봐봐라,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멀찍이 서 있는 안드레이도 내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쟨 내 말에 무조건 예스상태가 돼버려서 신뢰성이 영 떨어지긴 한데, 요즘 이 궁전 사람들이 다 저런 분위기라 그러려니 했다.


'근데 쿠라킨 저 자식, 은근슬쩍 간식 접시를 동내고 있잖아.'


궁전 주방에서 만들어낸 내 간식들을 야금야금 해치우고 있는 얄미운 손님 손을 바선생 집듯 꼬집었다. 악 소리내며 펄쩍 뛰는데 진짜 바퀴벌레같더라.


"손이 놀고 있잖아, 쿠라킨. 아까부터 간식만 먹고. 맞고 싶지?"


"아니, 전하. 조금밖에 안 먹었- 근데 전 글쓰는 시종이 아닌데요!"


"시종은 맞잖아."


손등 좀 꼬집혔다고 아파 죽네 사네 하는 꼬마녀석을 보며 나는 코웃음쳤다. 꼬우면 네가 황제 아들 하든지, 누가 '공작' 아들되라디?


그랬다. 내 반응이 시큰둥하자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된 이 꼬마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쿠라킨 공작.


물론 이곳에선 작위가 성씨이니 진짜 다른 나라의 공작같은 게 아니지만 러시아 제국 귀족의 계보를 총집대성한 벨벳 책에도 적힌 유서깊은 쿠라킨 공작(크냐지)가문의 아들쯤 되면 귀족으로서의 격은 높다고 할 수 있다.

의외로 나하고도 연이 있는데, 이 녀석의 할머니가 파닌 선생님의 여동생이다. 그 얘길 들었을 땐 세상 참 좁다 생각했지.


'허허, 인사드리지요. 전하, 이쪽은 제 조카손주 알렉산드르입니다. 제게 자식이 없는지라 적적함에 종종 놀아주곤 했는데 제법 영특하더군요. 곁에 두어주신다면 분명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겁니다."


다시 만났을 때 황제의 고문에 임명된 파닌 백작의 밝은 얼굴을 떠올리다 고개를 돌렸다. 이걸 그냥 콱! 이라고 하는 듯한 시늉 하다 나와 눈이 마주치곤 당황한 쿠라킨을 보며 나는 펜끝을 까딱였다.

그런 대단한 이력이 있으면 뭐하나. 나보다 두 살이 많건 말건 내 아래란 건 변함없는 사실인 법.


"흠, 불경죄는 채찍형이던가. 파닌 선생님이 곧 올 테니 물어봐줄까?"


"아, 아닙니다! 쓸게요, 씁니다! ....으으아."


울먹이면서 다시 종이에 펜을 끄적이기 시작한 말동무를 보며 나도 쓰던 부분을 마무리하곤 새 종이를 꺼냈다.

사실 공짜 노동력 아니 말동무가 붙어서 최근 편해진 건 사실이다. 물론 안드레이도 있지만 얘 필체는 뭐랄까, 암호로 쓰기 딱 좋겠더라고.


"그런데요, 전하. 이걸 왜 저희가 쓰고 있는 겁니까. 폐하께서 하라하셨어요?"


"아니."


황제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냐. 내심 애인이랑 닐리리맘보 욜로 라이프를 즐기지 않을까 싶던 적이 있긴 하지만, 표트르 3세가 싸질러놓은 똥 치우기엔 하루가 24시간이어선 모자르다.


전권을 위임받은 보론초프 총리와 프로이센 전권 대사 간의 체결된 평화협상은 취소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왕관을 쓴 머리가 바뀌었다고 협상을 무른다? 그건 전쟁하자거나 아님 우리는 대화를 주먹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으로 하는 야만인임을 인정하는 꼴이고.

거기에 설상가상 전선에 나가있는 병력 철수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는데 비참한 도로의 상황과 보급로가 끊겨 어려워진 군수품 수급에 이어 일단은 아군인 야전사령관끼리의 대치란 삼파전이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타국의 지휘하에 있던 군대, 특히 프로이센에 빌려준 2만 명이란 군단급 병력의 지휘권 회수 조율. 당연하지만 이것도 표트르 3세의 작품이다.


'연대나 여단도 아니고 군단급을 빌려줘, 그것도 공짜로.'


먹이고 입히고 다달이 들어갈 월급과 품위유지비까지 생각하면 답이 없는데 숫자마저 아득해서 순간 나도 뒷목이 뜨듯해진다. 예카테리나가 표트르에게 농약 먹인데도 이건 무죄지 암.

이렇듯 무슨 고구마 캐듯 하나를 해결하려하면 둘셋이 줄줄이 튀어나오는데 전쟁 후의 뒷처리 따위에 신경쓸 리가 있겠나.


'뭐, 몇 개는 나도 모르게 거든 것도 있지만.'


프로이센과의 국경에 인접해있는 러시아 주둔병들을 타국 병으로 둔갑시켜서 프로이센 엿먹이기.

사실 난 아이디어만 냈고, 실질적으로 파닌 선생님과 그 형제가 해버린 일이지만 덕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표트르 파닌이란 백작은 나한테 감사편지까지 보내왔다.

뭘할지야 모르지만 수툴리면 내빼도 우리란 걸 증명할 수 없을 테고, 나야 모로 가든 돈만 벌면 그만이다 주의니까.


'바로 이득이 되지 않는 일도 하고 있지만. '


"간식 다 줄게. 잔말 말고 써."


"아오, 내가 왜 이런 일을!"


내가 이런 노가다를? 이란 표정의 쿠라킨과 내가 쓰고 있는(한 명은 쓰고 있던 것이 되버린) 건 이름하여 위문편지. 수신자는 지난 7년간의 전쟁에 징병됐다 전사한 귀족 장교의 부모들이다.


학교 다닐 때 지겹게 썼던 기억이 새록새록한, 받는 쪽도 쓰는 쪽도 진심이라곤 1도 없던 그것과 달리 내 편지는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성경의 좋은 구절, 그리고 사제들에게 공짜로 얻은 이콘성상화까지 삼종세트를 장착했다.

가뭄에 콩나듯 수도에 사는 평민들의 가정에도 보낼 것을 준비하고 있는데 뻘짓같지만 나름 계획이 있었다.


'어떤 미친놈 때문에 가족이 죽은 걸 조롱당하기까지 했는데, 수틀려서 나도 찌르면 어떡하냐고.'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당연하지만, 그 죽음에 대접은 없어도 조롱받지 않게 하는 건 국가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프로이센 반환을 결정한 표트르 3세는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에겐 쳐죽일 놈이 된다. 아마도 예카테리나가 대신 죽여줄 것 같지만 그렇대서 그들의 분노가 단시간에 사그라들 거라 생각지 않는다. 어쩌면 그놈 '가족'에게 불똥이 튈 수 있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나마 보상해주자니 얻은 게 없다.

한마디로 제국은 여전히 가난하다. 아직은.


'그리고 이런 신파도 가끔 도움이 돼.'


막장드라마에 닳고닳은 21세기 어느 시청자들이 왜 아직도 시간만 되면 욕을 하면서도 TV든 폰에서든 선행 소식에 감동받을까?

공감이 되어서다. 건전한 화풀이용도, 팍팍한 세상살이에 작게나마 위로도 얻는 거고.


'쓸 일이 있으면 좋고, 사실 없는 게 더 좋지만.'


어린애의 손으로 한땀한땀 적어보낸 위로.

실질적으로 얻는 것은 없고, 내실은 하찮다. 하지만 장례식에 와준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듯 힘들고 괴로울 때 건네는 누군가의 위로는 그 어떤 마약보다 확실하게 사람의 머릿속을 사로잡는다.


"조만간 폐하의 대관식이 있을 테니까. 내 옆자리로 해달라고 부탁해볼게. 아니면 나랑 마차도 같이 타던가."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드라마에서 방백하는 주인공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권력은 부동산과 같아서 위치가 중요하다고.


잘나가는 사람들은 다 모이는 대관식이란 이벤트에서 제국의 하나뿐인 후계자 옆에 설 기회를 헛되게 놓친다면 그건 귀족이라 할 수 없다.

당장에 쿠라킨을 보라, 흐리멍텅하던 두 눈이 레드불 처음 마신 초등학생처럼 초롱초롱해졌다고.


"편지 100장쯤은 이 알렉산드르에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일은 다른 애들도 불러오죠!"


"그거 좋네."


잉크가 튈만치 써대는 쿠라킨을 나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공짜 노동력 공급이라는, 먼 훗날 연봉 후려치기에 혈안일 사장님들도 무릎을 탁 칠 창조 경제 실현이다.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퇴근시간 1시간 남겨두고 잡힌 회식 때문에 올리지 못하고 지각한 것은 오늘내일중으로 벌충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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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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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목수정)전쟁과 평화의 레가토(1) NEW +1 23시간 전 197 9 12쪽
28 전쟁의 전방과 후방(5) +1 24.09.17 265 11 15쪽
27 전쟁의 전방과 후방(4) +3 24.09.15 275 10 21쪽
26 전쟁의 전방과 후방(3) +2 24.09.11 338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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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10 2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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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69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7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4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2 17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482 17 14쪽
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8 13 14쪽
15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60 13 20쪽
»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19 21 20쪽
13 왕좌를 비워라(3) +9 24.08.22 621 23 16쪽
12 왕좌를 비워라(2) +4 24.08.22 570 19 19쪽
11 왕좌를 비워라(1) +5 24.08.20 632 22 17쪽
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73 21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6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5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1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7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6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5 25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21 21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099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1 1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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