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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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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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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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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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전방과 후방(1)

DUMMY

"호, 3월인데도 공기가 따뜻하군. 이맘때의 제국은 싸매지 않으면 눈발에 살갗이 얼어붙곤 하는데 말일세."


"이곳은 우리보다 한참 남쪽이지 않습니까. 뭐 살기 좋은 땅인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부러우면 여기서 살지 그러냐. 큰형에게 부탁하면 폐하께서 널 이곳의 대사로 보내주실 것을."


"됐습니다. 여자와 따뜻한 날씨 말곤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여긴."


동행한 동생 표도르의 부러움 섞인 투덜거림에 알렉세이는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곤 옆을 바라봤다. 그들 형제와 함께 온 두 명의 장교들은 바로 보고를 올렸다.


"최근들어 모레아 쪽 그리스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않습니다. 마니와 에게해 섬 사람들도 저희가 있는 베니스로 찾아오는 일도 잦아졌지요."


"로마 이교도 황제들의 박해에도 살아남던 이들의 후예들이 이교도의 박해에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살 순 없었겠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의 말발굽에 짓밟힌 건 벌써 삼백 년 하고도 십오 년 전.

분명 한 사람의 일생이 감히 비할 수 없게 긴 세월이었지만, 여전히 그 땅에 터잡고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의 마음에서까지 로마 제국이란 글자를 지워내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천 년이나 지속되어온 빛나는 과거는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오스만에게 굴복하려는 마음을 재차 일으켜세웠다.


그들은 로마의 후예였다. 제 아무리 더러운 튀르크 놈들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고 콘스탄니노폴리스를 더럽힌대도 그 근본은 결국 이교도이지 않던가?


애석하게도 오스만은 연이어 걸출한 군주와 재상들을 배출해내며 그들의 독립은 신기루처럼 사라져갔지만, 달이 차면 기울듯 선대의 위업에 못 미치는 군주들이 옥좌를 차지하면서 그들에게 다시금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기회는 곧 같은 신앙의 형제 러시아의 기회이기도 했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지. 우리가 나데즈다와 함께 이 지중해로 파견되어 항구와 해협을 항해한 것은."


표트르 3세가 퇴위한 1762년부터 줄곧 그들은 상선으로 위장한 프리깃 나데즈다 블라고폴루치나를 타고 지중해로 숨어들었다. 건조중인 함선이 항해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바다를 알아보기 위해 그들은 해협과 항구를 샅샅이 조사하고 틈나는대로 본국으로 자료를 보냈다.

선체의 길이, 선폭의 넓이, 하다못해 선체의 손상을 막기 위해 양털로 안감을 댄 참나무 판을 덧대는 작업을 추가하는 것까지 그들의 노고가 배어있었다.


"그렇다면 때가 온 것입니까? 백작 각하."


"맞네, 지긋지긋한 튀르크인들의 콧대를 눌러줄 때가 온 거야."


러시아의 정세가 어지러울 때마다 오스만 제국과 그 산하인 크림 칸국은 끊임없이 제국의 국경을 헤집었다.

땅을 약탈하고, 남자들을 죽이며 여자와 아이들은 납치해서 노예로 삼았다. 이반 4세의 치세 말기에 접어들어선 수도였던 모스크바를 기습해 크렘린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고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조차 노예로 잡아가는 치욕마저 겪었다.

허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피어오른 전쟁의 불꽃은 악연이란 바람을 타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국경에 옮겨붙으려 하고 있었다.


"저들이 우리의 장작이 되어줄 걸세. 그리고 우리는 그 선봉에 서게 되겠지."


저 멀리 다가오는 그리스인들을 바라보며 알렉세이 오를로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의 새로운 돈주머니, 흑해의 주인을 바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흔히 죽을 때가 되면 눈앞에 주마등이 스친다고 하지. 내용이야 살아오면서 하지 못했던 것의 아쉬움, 희노애락의 순간 뭐 그런 것들일 테고.

그에 비하면 나는 개꿈도 안 꿨으니 안 죽을 운명이었던 게 틀림없다.


"무슨 그런 말씀을!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으니 망정이니 정말 큰일날 뻔 하셨습니다."


오늘도 꼴보기 싫은 약병을 은쟁반에 받쳐든 채 안드레이는 핀잔했다. 한 2주 정도 같은 얘길 들으니 이젠 저 약병이 싫은 건지 쟤가 싫은 건지 분간이 안됐다.

어릴 적 먹던 감기 전용 물약마냥 끈적이는 식감에 얼른 입을 헹궜다. 간신히 되찾은 미각을 생각하자 옛날에 봤던 DVD 플레이어마냥 머릿속 시간이 사흘 전으로 되감겼다.


나와 예카테리나의 천연두 예방 접종 장소로 정해진 곳은 차르스코예 셀로, 피서지용 궁전이었다. 너무 요란하고 화려해서 나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카테리나는 날이 덥거나 추워질 때면 그곳을 여름휴가지마냥 찾곤 했다. 물론 애인과 함께.

잉글랜드 출신 의사 토머스 딤스데일을 본 것도 거기서였다.


"두 분의 천연두 선제 접종을 맡을 의사 토머스 딤스데일 씨입니다. 잉글랜드 출신으로 애버딘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옆 사람은 아들인 너새니얼 딤스데일 군입니다."


"마,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대공 전하!"


비오듯이 흘리는 땀과 더듬거리는 말투, 땅을 파고들 듯 숙여진 고개. 잉글랜드 출신 의사 토머스 딤스데일(Thomas Dimsdale)의 첫인상은 모난데 없이 평범했고, 긴장돼보였다.

그를 이끌고 온 니키타 파닌 백작이 딤스데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 동안 나는 건네받은 논문을 꼼꼼히 읽어봤다. 천연두 예방 접종의 현재 방법(The Present Method of Inoculating for the Small-Pox)이란 제목에 걸맞게 우리가 받게 될 접종에 관한 지식이 직관적으로 설명돼있었다.


"우선 명령하신 대로 폐하께 먼저 접종을 한 후 대공 전하께 접종해드릴 겁니다."


그러는 사이 파닌 백작의 소개가 끝나고 닥터 딤스데일은 접종 절차를 설명했다.


"편지로 설명드린대로 접종하고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열이 오르거나 수포가 생겨날 수 있고 최대 2주 정도는 나른하실 수 있지만,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라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정말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게 맞소? 이전처럼 건강해진다고 편지에 적혀있긴 했으나 소르본 대학의 의학 교수들은 이 예방 접종이란 것에 반대를 많이 한다 들었소만."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폐하께서도 익히 아시듯이 프랑스인들은 호들갑을 떨기 좋아하고, 저희 잉글랜드에서 나온 거라면 설령 그게 성경이라 할 지라도 이단이라 모욕할 이들입니다."


몇백년 후의 후손들과 달리 이 시대의 영국-프랑스 관계란 권태기 온 부부보다도 사이가 험악했다.

8년 전쟁 종전 협정 당시에 아메리카쪽 노른자땅을 몽땅 뜯긴 후론 아예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같은 관계가 돼버렸다. 당장 닥터 딤스데일조차 프랑스 얘기가 나오자마자 말이 갑자기 유창해졌고, 옆에 선 아들 너새니얼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나와 눈맞추치곤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무엇보다 자신 없는 것을 접종할 의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역설적이게도 당당해진 모습이 예카테리나에게 신뢰를 심어준 듯 했다. 그들 부자를 찬찬히 보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겠소. 허나 이쪽에서도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딤스데일 씨가 사용할 그 접종 도구란 것을 짐의 아들 파벨 대공이 만든 '리퀘파케레'란 것에 담구고, 끓인 물에 한 번 더 씻은 후 사용하구려."


의료위원회에서 올린 보고서를 읽은 예카테리나는 접종 도구란 것을 '소독'해서 쓰자는 내 의견에 찬성했다. 현격하게 비교되는 사망률과 피해율이 본인의 접종 후유증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 듯 했다.

딤스데일 역시 안드레이가 건네준 보고서를 보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알겠노라고 찬성했기에 우선적으로 예카테리나의 접종이 진행됐다.


"주 오스만 대사 오스베스코프 경과 우리 외교관들이 예디쿨레 요새로 보내졌다고요? 외무장관, 사절을 구금했다는 건 오스만 쪽에서도."


"예, 근 시일 내로 전쟁을 선포할 것 같군요. 대재상 무신자데 메흐메트 파샤가 해임된 것을 보면 무스타파 3세의 의견이 확고한 듯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란 격언은 여전한가보군요. 체르니셰프 전쟁장관?"


"예, 전하. 일전에 폐하께서 지시하신대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예고한대로 한 사흘을 끙끙 앓던 예카테리나 대신 나는 정무를 봐야했다. 정무라고 해봐야 예카테리나가 지시해놓은 대로 움직이는 걸 허락해줄 뿐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온 라부아지에의 편지로 심심함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나흘 째 되던 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예카테리나의 지시로 딤스데일은 내 팔에 작게 상처를 내곤 소독한 도구에 천연두 딱지에서 떼낸 액체를 접종했다.


"전하? 전하!"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내 증상은 예카테리나와는 달랐다.

처음 코로나에 걸렸던 날처럼 미친듯이 올라가는 열에 눈앞이 흐려졌다. 어쩌다 팔을 들어올리면 빨간 점들이 마치 대장균 페트리디쉬마냥 다닥다닥 붙어있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머리를 쪼개고 싶을 정도인 두통이었다.


"그 딤스데일이란 작자, 순 사기꾼에 돌팔이가 아니었을까요?"


다 비운 약병을 치우면서도 안드레이는 여전히 삐딱하게 굴었다.


"안드레이. 토머스 딤스데일 남작이라 해야지. 폐하께서 내린 작위을 왜 계속 빼먹는 거야?"


"하오나 하마터면 전하께서 큰일날 뻔 하셨잖습니까."


"안 죽었으면 된 거지. 죽는데도 네 입버릇처럼 뭐 주님의 뜻이지 않겠나."


"전하!"


안드레이가 빽 소리를 지르건 말건 나는 귀를 막고 안 들려를 고수했다.


사경을 헤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시력도 곰보자국도 없이 무사히 나도 완쾌하자 예카테리나는 의사 토머스 딤스데일에게 남작 위를 내렸다.

이곳 러시아 제국은 작위가 크게 공작(크냐지), 백작(그라프), 남작(바론) 세 개가 있다. 그밖에도 어느 정도 위계가 있는 관료나 장교, 혹은 훈장을 수여받으면 세습 귀족이 될 기회도 주어지지만 황제가 수여하는 세습남작위랑 비교할 순 없지.


'딱히 기뻐보이진 않았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발달한 미래에서도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꾸준히 나온다.

아마 내 증상도 그런 맥락일 거라 예상했지만 당사자인 딤스데일 남작은 태연하지 못했다. 하기야 황태자를 죽게 했다간 몸 성히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을 거고, 돈도 많이 주고 작위도 줬는데도 기어코 돌아간 걸 보면 귀향이유는 안봐도 비디오겠지.


"그래도 나 말고는 다들 가볍게 앓았잖아? 안드레이 너만 봐도 그렇고."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위험한 일은 다신 안할 겁니다!"


반박할 말이 없는지 수긍하면서도 안드레이의 볼멘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황제와 황태자가 솔선수범해서 맞은 덕분인지 궁전의 시종과 시녀, 하인에 이르기까지 200명 가까운 사람이 예방접종을 받았고,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실시하기엔 도로사정이라거나 돈이라거나 등등의 이유가 있어 시행하지 못했지만, 그럴 시간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른 쪽으론 없어서 그렇지.


"어차피 당분간은 더 할 수도 없어."


오늘자 국무회의록을 베껴온 사본을 책상에 던지듯 놓으며 나는 물잔을 내밀었다. 얼른 다가온 안드레이가 따라준 물을 몇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양쪽에서 전쟁이 터질 모양이니까."


***


1768년 10월 29일, 그레고리력으론 11월 11일이 되던 날.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의 국경으로 군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한달 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작가의말

제 글을 봐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조금 많이 늦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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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전쟁의 전방과 후방(2) +3 24.09.08 394 15 15쪽
» 전쟁의 전방과 후방(1) +4 24.09.07 418 13 12쪽
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11 21 14쪽
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46 19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70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8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4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2 17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483 17 14쪽
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8 13 14쪽
15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60 13 20쪽
14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19 21 20쪽
13 왕좌를 비워라(3) +9 24.08.22 622 23 16쪽
12 왕좌를 비워라(2) +4 24.08.22 570 19 19쪽
11 왕좌를 비워라(1) +5 24.08.20 632 22 17쪽
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73 21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6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5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1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8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6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5 2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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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761년 겨울(1) +3 24.06.09 1,099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2 1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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