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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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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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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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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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DUMMY

"허, 세상이란 역시 오래 살아볼 일이로군."


오스트리아의 황실군을 떠받친 두 기둥 중 하나인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은 언덕 너머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행렬에 투덜거렸다.


"원수 각하. 감히 말씀드리건데 소관은 각하를 몹시 싫어하지만, 더 싫은 이들이 오는 걸 보니 각하가 좋아질려고 합니다."


"그것 참 기묘하군. 중장, 나도 방금 같은 생각을 했다네."


다른 한 명,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피차 싫어하긴 마찬가지인 부하를 바라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제국에 헌신한 다운 백작과 달리 라우돈 남작의 청년기는 박대의 연속이었다. 외지인이라 박대받고, 적국에서 복무한 이력과 심지어는 얼굴 때문에 문전박대당한 남작은 자신을 받아준 오스트리아에 충성을 다했다.

윗선에 신임을 받는 군인들답게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면서도 능력을 인정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극렬하게 미워하게 된 리그니츠 전투 때를 라우돈 남작은 떠올렸다.


"각하, 리그니츠 때를 기억하십니까?"


"잊을 리가 있겠나."


다운 백작은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만에 달하는 병력이 죽거나 다치고 100여 문 가까이 되던 대포를 상실한 피해에도 적군의 피해는 삼분지 일 수준에 불과했다. 크게 꺾이지 않는 전의가 보여준 토르가우 전투는 또 어떠했는지.


허나 종결수순이던 때만 보았던 원수와 달리 라우돈 남작은 그날의 풍경이 여즉 눈에 선했다.

적군의 대포가 불을 뿜으며 아군의 화약 마차를 직격하던 그때는 지옥의 한 장면 같았다. 병사들의 비명소리, 포탄이 파고든 땅이 꺼질듯한 굉음과 좌익의 프로이센 보병대가 찔러들어올 때의 아찔함과 퇴각을 결정해야했던 순간의 굴욕감마저도.


그리고 그들이 퇴각 준비를 할 때에 도착한 다운 백작이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철수했을 때의 분노를 되새기며 에른스트 기데온은 딱딱하게 말했다.


"제 원망은 응당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원수 각하께서 이끌고 오신 병력은 8만이나 되었으니 말입니다. 적들도 아군만큼 지쳤고, 어쩌면 왕을 잡을 수도 있었을 기회였다고 생각했었지요."


"허나 밖에서 보던 난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네. 중장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휘하의 병력은 전의를 상실하거나 사지를 잃은 채 주님께 갈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지. 나는 그 상황에서 프로이센 국왕을 상대하는 걸 망설였다네. 자네와 그곳에 있던 이들에겐 배신이었을 테지."


힘없는 수긍에 라우돈 남작은 옆에 선 다운 백작을 흘긋 보았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답게 주름이 패기 시작한 황제군 원수의 얼굴엔 짙은 피로감이 깔려있었고, 에른스트 기데온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저들도 염치가 있다면 두 번이나 우리의 뒷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위로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라우돈 남작의 말에 레오폴드 요제프는 피식 웃었다. 손에 든 종이가 팔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래, 이런 제안까지 해올 정도라면 그런 정신나간 생각은 하지 않을 테지."


동맹국의 황제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순간이 전장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누가 타타르 피가 섞인 신의라곤 없는 야만인들 아니랄까봐 멋대로 동맹을 파토낸 것도 모자라 적국이던 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주는 짓거리에 다운 백작은 그토록 분노해본 적이 없었다. 하얗게 타버려 전의를 잃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주님의 생각은 한낱 사람이 헤아릴 수 없듯, 동맹도 아닌 원수가 되버린 러시아의 차르가 또 한 번 바뀌더니 수도 빈에서 새로운 명령서가 하달되었다.


-이 명령서를 수리한 즉시 시비드니차 부근으로 진군중인 2만 5천의 러시아군과 만나 아군 병력을 회수할 것, 베를린에 주둔중인 러시아군 2만은 쾨니히스베르크 총독부로 지휘권을 절반 이양하였음. 명령서는 러시아군과 상호합의한 것임을 밝힘.


"적군도 아군도 병력은 약 4만인데, 추가로 들어오는 러시아군은 일부인데도 2만 5천이라. 대단하군."


레오폴트 요제프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감탄했다. 오스트리아만큼이나 피를 흘린 건 러시아도 마찬가지이건만, 슈테틴에 모아놓은 병력만 6만에 달한다는 보고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저 나라는 무슨 병사를 땅에서 캐내기라도 한단 말인가?


"절반이 뭐랍니까. 기왕 회수할 거면 전부 다 회수했어야지요. 하여간에 러시아놈들은 양쪽에 간을 보겠다는 거 아니랍니까."


"어쩌겠나. 평화협상을 이행하겠다고 한 이상 줬다 뺐는 건 정치적으로 타격이 크다 보았을 걸세. 적의 예상 병력을 알려줬으니 그걸로 만족하세. 군인이 항상 유리한 전장에서만 싸울 순 있던가?"


"이뤄지지 않을 꿈 같은 말씀이군요."


"그럼 이룰 수 있는 꿈으로 만들러 가보세. 에른스트 기데온 중장, 나와 전장으로 함께 가겠나?"


서로의 얼굴이 보일 거리까지 온 '일단은 아군'인 작센 선제후국의 깃발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러시아군 장성을 맞이하러 말에 오른 다운 백작은 고삐를 잡아채며 넌지시 물었다.


"하하, 이번엔 결코 지지 않을 겁니다. 각하께서도 내빼지 마십시오!"


"그럴바엔 프로이센 왕에게 포로가 되겠네!"


"기대합지요. 핫!'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중장은 위로 길쭉해서 못난 얼굴에 남자답게 웃음을 지으며 박차를 찼다.

반목하던 두 명장이 손을 잡은 순간 흐릿하던 하늘에서 한줄기 햇살이 내비치고 있었다.




"다운 백작과 라우돈 남작이군."


부르케르스도르프 마을 근방 진지에서 말을 타고 마중나오는 지휘관의 복색에 부툴린 사령관은 한눈에 두 사람을 알아봤다. 7년 간의 전쟁 중에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황제군의 지휘관들은 서로를 한 번씩은 지휘해본 경험이 있었다.


"사령관 각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건 또 뭔가, 수보로프 중령. 잃어버린 명예야 전장의 승리로 되찾으면 그뿐일세."


부관의 염려에 야전사령관 부툴린은 신 과일이라도 베어문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머리 위로 휘날리고 있는 건 흰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이뤄진 러시아 제국의 자랑스러운 깃발이 아닌 작센 선제후국의 깃발이었다.

수도의 명령 아니 부탁이었다지만 별것도 없는 타국의 깃발 아래서 싸우는 것이 아닌 상황은 포로도 아닌 장성에겐 모욕이다. 그럼에도 담담한 상관의 옆에서 나란히 말머리를 하며 부관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중령은 묵묵히 보고했다.


"쾨니히스베르크 총독부에서 하달된 명령서는 다운 백작과 합류하여 그들의 휘하에서 병력을 운용하라고 하더군요."


"표트르 3세 선제가 프로이센에 체르니셰프 중장에게 딸려서 준 병력 때문이겠지. 프리드리히 2세의 손에 대군이 들려있는 한 이미 한계인 오스트리아로선 이길 재간이 없어."


"보급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함께 싸울 때에도 돈이 없니 뭐니 하며 저들 몫만 준비하던 오스트리아였지 않습니까."


"표트르 파닌 총독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그러모아주기로 했다네. 부임했을 때부터 혹시 몰라 프로이센 측에 보내주기로 밀가루와 귀리, 소금 등을 조금씩 빼돌려뒀다더군. 예카테리나 폐하와 파벨 대공께서도 개인금고를 열고 귀족들을 설득해 자금을 받아내셨다지. 그래도 대단한 남자야. 간도 크지 뭔가."


전선에 나와있는 군인들이야 알 수 없는 얘기지만, 오스트리아만큼은 아니더라도 러시아 제국 역시 긴 전쟁으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였다.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는 쿠데타 직전이라는 어수선함을 틈타 돈 나올 곳을 들쑤셨다. 수도원과 귀족들의 자발적인 기부(앞에 비(非)가 붙은 듯한 건 기분탓이다)와 내년 영지 세금을 흉년일 경우 감면 약속, 표트르 3세의 측근들과 정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에게 하사된 황실 재산, 그리고 장난감 요새에 붙은 장식들을 팔아 모은 자금을 전부 쾨니히스베르크 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수보로프는 군수품을 빼돌렸다는 것에 경악해야할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아본 듯한 총독의 예상에 감탄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리가. 허나 우릴 이곳으로 보내겠다고 결정한 이상 차리차께서도 허락하셨거나 미리 지시하신 일이란 말이네. 우리는 전장만을 보세나, 수보로프 중령. 아니지."


부툴린 사령관은 수보로프를 향해 손짓했다. 이에 상체를 그를 향해 수그린 수보로프의 계급장을 떼낸 사령관은 반대편에서 다가온 부관이 든 상자에서 새 계급장을 꺼내어 달아주었다.


"약식이라 미안하군.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 대령, 전 러시아의 황제이신 예카테리나 2세 폐하를 대신하여 대령 진급을 축하하네."


"각하?"


"페르모르 사령관과 막심 바실리예비치 폰 버그 소장도 자네의 진급을 추천했네. 우리와 갈라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회군한 루먄체프와 나도 반대하지 않았지. 자네의 전공엔 소장 진급도 거뜬하네만 아직 젊어서 그건 힘들었네."


별안간 예상 못한 일에 눈을 껌뻑이는 수보로프의 모습에 웃으며 부툴린 야전사령관은 엄숙하게 고했다.


"무엇보다 수보로프 대령, 자넬 내게 보낸 페르모르도 나도 이들을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할 작전에서 지휘할 수 없다네. 우리는 그저 '철군'하는 중일 뿐이어야하고, 프리드리히 왕과 함께 있을 체르니셰프 중장이 내 얼굴을 알지. 허나 자네는 아니지 않은가?"


러시아군이 정말로 회군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함께 회군하던 루먄체프를 먼저 보내고 말머리를 다시 시비드니차로 부툴린은 말머리를 돌렸다. 기만전술이라 부르기도 부족한 행군에도 페르모르는 신뢰하는 부하를 부툴린에게 보냈다.


"하오나 소관에게 버거운 짐입니다."


"때에 맞지 않는 겸손은 비례일세. 아니면 페르모르 사령관의 눈이 잘못되었다는 건가?"


물론 2만 5천에 달하는 병력은 군단급으로 묶인다. 응당 이들을 통솔하는 건 중장이거나 적어도 소장이어야한다.


허나 부툴린은 휘하로 배속된 부하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물론 수보로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 격전지가 될 게 뻔한 전장에서 그들 중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들 중 절반은 페르모르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고 나머진 내 지휘를 따랐지. 우리 둘이 인정한 이상 불복종할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 대령 계급장을 달아준 거라네. 그럼 수보로프 대령, 귀관은 제국이 바라는 성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


승리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오스트리아군 휘하의 작센 선제후군일 뿐이니까. 맨 앞에서 세울 병력 역시 홀슈타인 떨거지들일 뿐이다.

그러니 성과다.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황제군도 누구 하나 완전히 이기지 못한 무승부를 러시아는 원한다. 전쟁을 지속하기에 그들은 돈이 없고, 돈이 나올 땅은 오스트리아가 이겨야만 얻을 길이 열린다.

평화협상으로 잃을 뻔한 이익을 되찾을 단 한 번의 판세 전환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한, 수보로프는 싸울 뿐이다.


"기대에 전력으로 부응하겠습니다."


훗날 러시아 제국이 배출한 명장 중의 명장이 될 남자, 서른 두 살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령은 말 위에서 군례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각오를 다졌다.

부툴린은 마주 경례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믿지."


***


"역시 부르크슈타트 쪽에 진을 쳤군. 다운 백작 그 자답다고 해야할지."


척후병의 보고를 들은 프리드리히 2세는 턱을 매만졌다. 얼핏 얼굴에 스친 아쉬움은 적의 진지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미련의 흔적이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물러날 수 없어서이겠지요."


"슈바이트니츠가 온전히 프로이센 속에 들어와도 과연 오스트리아 황후가 다운 백작을 계속 기용할지 싶습니까. 그가 나올 전장이 더는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측근 노이비트와 뫼렌도르프 장군의 말에 프리드리히 2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멀리 서 있는 체르니셰프 중장을 바라봤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원군이었던' 장군을 잠시 눈에 담던 프리드리히는 이내 지휘봉으로 지도를 두드렸다.


"허나 방심은 금물일세. 병력이 모자란 건 우리도 피차 마찬가지니. 만토이펠 중장!"


"예, 폐하."


"라민 소장과 함께 휘하 보병 여단을 이끌고 부르커스도로프 언덕에 포진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트라우틀리베르스도르프(Trautlibersdorf)와 노이 로센도르프(Neu Reuseendorf)로 합공하게. 자네들이 적의 시선을 끌어주어야만 오스트리아의 주의를 분산시킬 걸세."


"명 받듭니다."


"뫼렌도르프 소장과 크노블로흐 소장은 2개 여단을 이끌고 베르거도르프 쪽 산길로 우회하여 야전포대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중심의 측면을 노리면서 만토이펠 중장과 협공하게. 노이비트 중장은 우익을 맡기지, 루드비그스도르프 쪽을 급습해서 적의 사기를 꺾어놓도록 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체르니셰프 중장."


명목상이나마 지휘권을 이양한 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자카리 체르니셰프 중장은 고개를 들었다. 프리드리히는 부탁하듯 입을 열었다.


"장군이 차르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아오. 그러니 무리한 부탁은 안하리다. 만토이펠 중장과 함께 시선만 끌어주는 역만 맡아줄 순 없겠소?"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지만, 제 휘하의 군대는 일절 전투에 참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이오. 어차피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잖소."


염려했던 부툴린 사령관이 이끄는 귀환행렬이 정말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방향로 떠났다는 걸 정찰병을 통해 확인한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자신감 넘치는 군주로 돌아와있었다. 러시아군은 없다. 그렇다면 다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만 남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도착해있다는 것조차 아직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럼 이번에도 프로이센에 승리를 안겨주시오."


회의실에 모여있던 독일군 장성들이 마치 한 몸처럼 왕에게 경례를 올렸다.

자신감 넘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체르니셰프 중장은 남몰래 품 속에 넣어둔 부툴린의 편지를 의식하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자카리 그리고리예비치, 짐은 귀관을 신뢰하고 있으며 원치 않은 명령에도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 그대의 명예에 조금도 흠집낼 생각이 없습니다. 지휘권 이양은 일시적인 것이며 중장의 충성심을 짐과 파벨 대공은 알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머잖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중장을 보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 러시아의 황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와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이.


여성 특유의 얇은 필체와 어린아이가 쓴 듯한 서툰 필체가 체르니셰프의 눈을 사로잡았다.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은 안전하다. 그러니 러시아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잊지 마라.


체르니셰프는 마음을 다잡은 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그는 어쨌거나 러시아 제국의 군인, 조국에 해가 될 행동은 할 수 없다.


***


"프로이센 왕국군이 우리가 주둔한 이곳 디트만스도르프와 로이센도르프 인근으로 행군중이라고 하오."


상석을 차지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원수는 그렇게 운을 뗐다.

슐레지엔 주 부르크슈타트 시 인근 부르커스도르프 마을의 고지대에 진을 친 오스트리아-작센 선제후군으로 위장한 러시아 제국군 장성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았다.

상석을 양보한 러시아군의 부툴린 사령관과 수보로프 대령은 오른편에, 라우돈 남작과 브렌타노 장군은 왼편에 착석한 채 다운 백작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왕이라면 필시 이곳을 노리겠군. 원수께서 우리 러시아, 아니 작센 군을 배치해달라 부탁한 곳이니 분명 오스트리아군의 약한 고리인가 보오."


"바로 보셨소, 부툴린 사령관."


그들의 앞에 펼쳐진 작전 지도와 그 위의 말들을 바라보던 부툴린 사령관은 오른손을 들어 로이트만스도르프 마을을 가리켰다. 오스트리아군의 최우익이 배치되어있는 마을은 사선 대형을 이룬 채 루드비그스도르프 쪽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 꼭대기까지 이어져있었다.


"사령관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준 덕분에 쓸 수 있는 작전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황실군은 이곳까지 행군을 재촉한 탓에 지쳤고, 대포와 포탄 또한 그리 넉넉하지 못하오. 그러니 브렌타노 중장."


말없이 지도를 노려보고 있던 안톤 요제프 폰 브렌타노-치마롤리 중장은 고개를 들어 원수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아는 프로이센 국왕이라면 전투에 앞서 아군의 수를 줄이기 위해 습격해올 가능성이 있소. 중장은 루드비그스도르프 인근 진지로 대대를 이끌고 먼저 도착하여 대비토록 하시오. 병력은 작센군이 추가로 더 지원해줄 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툴린 사령관께선 우리 오스트리아 기병 연대가 배속된 위치에 대포를 배치해줄 수 있겠소? 귀국의 유니코른 대포의 사거리는 정말 놀라웠지. 만에 하나 프로이센군이 우리 기병대를 몰살시키려한대도 러시아군이 막아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이오, 원수. 또한 프로이센 측의 '러시아 군'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확실해졌소. 체르니셰프 중장이 수도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평화협상 내용을 수정하느라 지휘권을 회수해놓은 상태라 하니 그들이 프로이센군과 함께 있다고 해도 수로 칠 필요가 없을 거요."


부툴린 사령관의 단언에 오스트리아측 장성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말인즉 프리드리히 2세가 러시아군을 내세운다해도 그들은 말 그대로 있기만 허깨비란 소리다.


"고마운 말씀이군요. 허면 오켈리(O'Kelly) 장군, 2개 보병 연대를 이끌고 본대 동북쪽 지대에서 대기하시오. 부툴린 사령관께선."


"알고 있소. 로이트만스도르프, 미셀스도르프 두 곳을 내 반드시 지켜내보이지. 나만 믿으시오."


"감사하오. 그러면 수보로프 대령, 프로이센 측에서 끌고 올 포대는 이곳 부르커스도르프에 설치할 테지, 그들이 포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뒤를 치게. 상황에 따라 자율권을 행사해도 좋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른스트 기데온 중장. 오켈리 장군이 지키게 될 지대는 낮고 돌출되듯 튀어나온 곳이니 분명 프로이센 놈들은 이곳을 포위하고 싶어 안달이 날 걸세."


내내 눈을 반짝이고 있던 에른스트 기데온 중장은 호명되기 무섭게 허리를 꼿꼿히 세웠다. 두 사람의 악연을 아는 오스트리아 측에서 당황해하고, 그 모습에 부툴린과 수보로프가 의아해하는 사이 다운 원수는 명령했다.


"러시아 카자크 연대 2개를 내주지. 수보로프 대령과 함께 프로이센 놈들의 머리와 허리를 끊어버리게."


"명령 내릴 지휘관도 한 명 붙여주겠소."


"명령 받들겠습니다!"


다운 원수에 이은 부툴린 사령관의 첨언에 라우돈 남작은 군례를 올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운 백작은 좌중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소. 이기면 슈바이트니츠를 지킬 것이고, 진다면 제국은 프로이센에 무릎을 꿇게 될 거요."


그리고 오스트리아에게 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툴린과 수보로프는 질린 듯한 얼굴로 핏발 선 눈으로 오스트리아 장성들의 외침을 듣고 있었다.


"슐레지엔을 위하여!"


"프로이센 놈들을 무릎 꿇리자!"


역사의 흐름이 틀어져버린 그레고리력 1762년 8월 1일.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라 명명될 전쟁터에 날이 밝아오기 전 새벽녘, 준비를 마친 프로이센 왕국군의 중장 노이비트가 진군을 시작하며 포문을 열었다.

800px-Battle_of_Burkersdorf.png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 지도>

중앙 상단의 붉은 원은 수보로프, 양쪽 하단의 빨간 원 두 개는 부툴린. 다운 원수가 있는 왼쪽 하단의 양 옆 금색 원 두 개는 러시아군 대포 각각 5문씩, 그리고 부툴린의 두 원 사이에 있는 금색 원은 에른스트 기데온 중장입니다. 전투씬은 태어나서 처음 써보는 거라 배치가 이상할 수 있으며 틀린 점이 있다면 바로바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작가의말

전전편에 나온 표트르 이바노비치 파닌은 원래대로라면 벌써 총독 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했지만, 예카테리나와 파벨이 뻥치고 표트르를 부르는 등 해서 시간을 끄는 동안 흐지부지 되어버린 탓에 그대로 총독직을 유지하면서 자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작중 부툴린 사령관을 움직인 것도 파벨->니키타 파닌->예카테리나 순서로 차리차의 개인 서신을 받은 부툴린 사령관이 황제가 크론슈타트까지 쫒겨왔다는 걸 듣자마자 바로 편을 바꾼 덕분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나 나올 예정이지만, 원역사와 달리 파벨이 예카테리에게 딱 붙어있으면서 파벨 대공 지지파(가장 먼저 니키타 파닌)와 황제파가 분열하지 않았고 모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돈, 돈, 땅! 을 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 편에 나온 위문 편지를 보낸 이유 중에 하나는 작중 언급은 깜빡했지만, 자금 부탁도 있었습니다.


본래 역사에서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는 1762년 7월 21일에 치러졌습니다.


이 시기에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3세의 뻘짓 때문에 평화협상을 했지만, 사실 욕 좀 먹으면 다시 재개할 수도 있는 여지가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어가지 않고 철군 결정을 고수한 이유 중엔 불사조처럼 살아난 프리드리히의 공세로 승산이 저쪽으로 넘어간 탓도 있지만,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상 귀족들에게 이권을 넘겨주기도 해야했으니까요.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는 다음편에서 마무리 될 예정이며 다시 파벨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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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전쟁의 전방과 후방(1) +4 24.09.07 418 13 12쪽
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11 21 14쪽
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46 19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70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8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5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3 17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483 17 14쪽
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9 13 14쪽
»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61 13 20쪽
14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19 21 20쪽
13 왕좌를 비워라(3) +9 24.08.22 622 23 16쪽
12 왕좌를 비워라(2) +4 24.08.22 571 19 19쪽
11 왕좌를 비워라(1) +5 24.08.20 634 22 17쪽
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73 21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8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7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3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9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7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6 25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21 21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100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3 1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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