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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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최근연재일 :
2024.09.1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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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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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왕좌를 비워라(1)

DUMMY

세상에 둘은 없을, 그리고 있어서도 곤란할 빌런 조커(Joker)는 이렇게 말했다. 단 하루의 재수 없는 날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굴 수 있다고.


물론 자그마치 300년은 더 지나야할 만화 캐릭터의 대사를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들었다면 일요일마다 듣는 주교님의 설교보다 더 감명깊게 들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의 상황을 그보다 잘 표현한 말은 없었으니까.


“문을 모두 막아요. 설령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문 앞에 서 계신다한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결코 열려선 안될 겁니다.”


부활절을 이제 겨우 하루 넘긴 시점에서 몹시 불경한 말이지만 예카테리나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파문에 이를 중죄가 아닌 한 고해하여 보속받을 기회는 있겠지만, 그녀의 목은 한 번 잘리면 다시 못 붙이지 않겠는가.


"큰일났어요, 예카테리나님! 산파 올가랑 알렉세이가 둘 다 보이지 않아요. 어디에도요!"


공범자들에 가로막힌 문을 등진 시녀장 보론초바 여백작에게 곁방 통로에서 빠져나온 기다렸다는 듯 시녀 하나가 다가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부르짖는 두 이름에 예카테리나는 눈앞이 순간 아찔해졌다.


"뭐? 산파가 왜, 알렉세이 그 앤 슈쿠린 경이 데려온 아이잖니! 그런데 이런 때에 사라지는게 말이 되는... 설마?"


배신한 셈인가? 그렇다면 슈쿠린 경은 믿어도 되는 심복이 맞는가?

시종장 바실리 그리고리예비치 슈쿠린이 황후의 측근이 된 건 올해 초였다. 그전까지 시종장에 대한 예카테리나와 측근들의 평가는 첩자와 다름없었다. 옐리자베타 선황이 심어놓은 눈, 황후를 손볼 기회를 갖다바친 배은망덕한 전적은 시녀장의 의심을 부추기기 적절하고도 남았다.


울며불며 황후를 다시는 속이지 않겠다 맹세한 후 딴맘을 품은 기색은 없었지만, 맹세가 어디 힘있는 족쇄인 적이 있는가.


"슈쿠린 경에게 말해봤느냐? 그는 지금 어디 있지?"


"지시하신대로 곁방 통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알렉세이가 없다는 건 저한테 듣고나서야 안 듯 한데, 달리 사람을 풀기에는."


때마침 황후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어놨지만, 예카테리나는 어렵지 않게 뒷말을 짐작했다.


그렇다. 배신자가 나온 게 맞다면, 이 이상 틈을 늘려선 안된다. 더욱이 지금처럼 황후가 남들 앞에 멀쩡히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곁방 통로를 지키고 있을 슈쿠린의 충성심을 믿는 수밖에 방도가 없다.

이 안에 있는 사람 외에 모두가 그들의 적일 테니까.


"카챠, 카챠!"


비명소리에 섞여 애칭으로 그녀를 부르는 황후의 목소리에 예카테리나는 즉시 산실이 된 침실로 들어갔다. 곁방에서 들여온 뜨거운 물과 새빨갛게 물든 수건과 피범벅인 하얀 천에 가려진 황후 예카테리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밖에 별, 일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이지!"


신음에 끊기는 목소리에도 보론초바는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맞잡은 손이 아파올만큼 힘을 주면서도 핏발 선 여주인의 눈은 고통에 지지 않을 것처럼 강렬했다.


"아닙니다, 폐하. 저희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초산이 아니니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순간이 끝날 거란 건 안다.

그렇지만 말하면서도 의심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코끝을 찌르는 피냄새와 정신없는 방 안 공기가 그녀의 머릿속을 한없이 텅비게 했다.


'자비로우신 주님, 바라옵건데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칠 수 있도록 보호해주소서. 어려움을 이겨낼 도움을 내려주세요.'


물러나듯 거실로 나오며 덜덜 떨리는 손을 모아 기도한 예카테리나에겐 야속하게도 황후의 방에 딸린 대기실과 연결된 문이 갑자기 쾅쾅거렸다. 금박을 씌운 문의 경첩이 내는 쇳소리에 섞인 혀가 꼬부라지는 목소리는 천둥보다 더 무섭게 시녀장을 겁먹게했다.


"문을 열어라! 짐이 왔으니, 지금 꼭 황후를 만나봐야겠-."


황제는 근위병을 데리고 왔을까?

그들이라면 우왁스럽게 시녀들을 지켜주고 있는 저 문을 종잇장처럼 뜯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뒤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궁전 앞에 죄인처럼 목 매달리게 되는 건가.


"감히 이 궁전에서 짐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옳구나. 예상대로 간악한 짓을 하고 있는 게로군. 당장 도끼로 찍어버리겠다!"


"폐하?"


공포와 체념이 그림자처럼 내실에 내려앉으려던 찰나.

금방이라도 부술 듯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표트르 3세의 험악한 목소리를 앳된 목소리가 막아서듯 들려왔다.


"폐하께서도 보러 와주신 거예요?"


황제에겐 다소 뜬금없는, 그러나 방 안의 사람들에겐 누구보다 간절했을 방해꾼.

그 이름은 파벨 페트로비치라 한다.


***


'와씨, 이게 무슨 일이야.'


높은 사람이라면 시중을 받는 게 당연한 이 시대에 궁전의 문이란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잠구지 않는다.

처음에야 새벽에 문을 벌컥 열어대니 나도 놀랐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꿀잠 자고 있는데 시중 들게 문 열어달라 앵앵대면 그것도 나름 빡친다. 별일 없는 대부분의 날들엔 어느정도 깰 시간 될 때가 되면 들어오니 이제는 익숙해졌고.


그렇기에 굳게 닫힌 황후의 방문과 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황제와 그 정부의 모습은 내게 이미 듣고 온 상황에 달린 해설인 셈이었다.


'들은 거지, 황후가 출산중이란 걸.'


내가 헐떡이면서까지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2, 30분 전쯤 황후의 내실에서 돌아온 나는 곧장 잘 준비를 했다. 꺼림칙한 감이 남은 만남도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운 채 막 잠이 들려던 그때 내 방문을 부술 듯 때려대는 예의라곤 싸먹어버린 불청객이 있었다.


"뭐야, 안드레이?"


"그, 글쎄요?"


둘다 당황했지만, 그래도 나이 좀 더 먹은 내가 일단 문부터 열어보라고 안드레이를 보냈다. 열리기 무섭게 굴러떨어지듯 엎어진 건 황후의 시종 복장을 한 남자였다.

못해도 안드레이 또래일 하얀 가발을 쓴 애는 자신을 알렉세이라 밝혔다.


"알렉세이? 그래서 왜 왔지?"


설마 황후가 방금 헤어진 아들이 보고 싶다 했을 리는 만무하고, 황후의 하급 시종이 나를 찾아올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어디 불이라도 낫나 했던 나는 들려온 다음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화, 황후께서 지, 지금 출산중이십니다!"


"....뭐?"


"출산이라니! 황후 폐하께서 지금 임신중이셨다고?"


듣도보도 못한 얘기에 안드레이가 당황하건 말건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맹렬히 돌아갔다.

정말로 황후가 출산중이라면 예카테리나를 안았을 때 느꼈던 꺼림칙한 느낌은 태동이었던 셈이다.


젠장, 그냥 넘기지 말 걸.


"시, 시종장님이 대공께 얼른 가야한다고!"


"잠깐. 너 올 때 딴 사람은 다 있었어?"


"전하?"


"대답해. 다 있었냐고."


평소랑 다른 내 목소리에 당황한 건 피차 같지만, 과연 황후의 시종인지 뭔가를 떠올리던 알렉세이의 대답은 새파래진 얼굴만큼 쓰디썼다.


"올가, 산파 올가가 안 보인다고 시종장님이."


'클났네.'


애 낳는데 어디서나 필요할 이 시대의 산부인과 의사인 산파가 없어졌다면 가능성은 둘, 내뺐거나 붙잡혔거나다.

전자면 낫지만, 만약 후자라면 일이 피곤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황제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표트르라면 황후를 끌어내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부정을 저지르고 사생아까지 낳는 부인에 대해선 다른 귀족들도 편들지 않을 확률이 높고.


'썩어도 준치라더니. 생각해보면 걔도 머리가 나쁘진 않았어.'


단지 한 165도쯤 돌아서 남들이 은밀하게 행동할 걸 이렇게 시종 하나가 빠져나가도 모르게 허술하다는 거겠지. 마누라가 지 킬각 잡은 것도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예카테리나한테나 나한테나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신앙심 개판인 황제가 부활절 새벽녘에 황후가 사생아를 낳으려 했다고 난동부린 게 루머임이 밝혀진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평판이 더 추락할 게 있을까 싶어진다. 덤으로 아들도 때렸다는 명성도 쌓아주면 더 좋고. 이 동네가 애들 패는 걸 예사로 여기긴 해도 되도 않는 헛소리로 어린애고 어른이고 마구 찔러보는 미친놈을 그러려니 할 정도는 아니다.

무엇이 됐건 결국엔 이곳에 온 후로 그래왔듯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고를 뿐이지만.


"안드레이, 그 염병할 군복 나 좀 입혀줘."


"예? 지금요?"


"지금 입어야 해."


표트르의 정신을 돌릴 수단은 남김없이 꺼내어 입고, 신고, 걸치고, 쓰고 간다.

영업사원이 집에 놔두고 갈 것은 건조대에 널어둔 간과 쓸개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는 표트르 3세를 향해 나는 절박한 얼굴로 마주섰다.

지금은 영업의 시간이다.


***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아들 추정일 소년을 보며 표트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절호의 기회에 방해하러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도, 꼴보기 싫은 어린 것이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입고 있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왜 저걸 저 애한테 주었던 거지?'


접힌 목깃 안쪽은 붉게 물들인 진녹빛 테일코트에 달린 금빛 단추들이 복도마다 내걸린 촛불에 반사돼 빛났다. 허리에 두른 금색 띠에 검을 매달고 한쪽 가슴엔 아직 수여받지도 않은 대신 홀슈타인 공국의 문장을 새긴 장신구를 패용했다. 금색과 붉은색으로 채워진 문장 위에 왕관이 표트르의 눈에 유독 못마땅하게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처구니 없는 짓을 그 자신은 저지른 셈이다. 사생아일 아이에게 적자에게나 허용되는 문장까지 주다니.


"대답해봐라, 파벨. 왜 깨어있느냐. 게다가 여기에 군복까지 입고 온 이유가 뭐지?"


한시바삐 황후의 부정을 잡아내야할 이때에 그의 공식적인 아들은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작은 키론 가려지지도 못할 문 앞에 우뚝 서서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폈다.


"폐하께서 저를 페테르슈타트에 데려가주셨잖아요. 제가 다녀와서 감기에 걸려버려서 못 보여드렸는데, 오늘이라도 보고 싶다고 황후 폐하께서 부탁하셔서 갈아입고 왔어요."


"갈아입어? 황후랑 같이 있었다고?"


"예, 폐하. 올 때까지 화장을 고치신다고."


".....거짓말!"


뻔뻔하게도. 제 어미처럼 태연하게 거짓을 입에 담는 파벨의 뺨을 표트르는 세게 후려쳤다. 금방 부풀어오르는 오른쪽 뺨이 아픈지 얼굴을 붙잡고 찡그리던 아이의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라도 빠졌나?'


피를 보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표트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사생아라 이빨도 약한 모양이지.


"누가 그 여자의 아들 아니랄까봐 지옥에 떨어질 거짓을 잘도 내뱉는군! 그럼 이 여자가 한 말은 뭐지? 산파라는 이 천한 것은 짐에게 황후가 산달이라고 자백했다. 숨어서 낳기 위해 장교를 시켜 자신을 몰래 불러왔다고도 했지. 입막음용으로 큰 돈까지 약속했고!"


아이의 어깨를 잡아끌며 말할수록 표트르는 분통이 치밀었다. 제 것은 하나도 없는 가난뱅이가 주제도 모르고 그의 것을 제 것인양 굴면서 사생아까지 낳으려 하고 있고.

그런데 그 아들놈은 황제의 앞을 막아서며 제 어미를 두둔하려고 막아섰다.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홀슈타인을 몸에 걸친 채로.


"비켜라. 더 맞고 싶지 않다면!"


"못합니다"


어깨를 잡은 황제의 손을 파벨은 오히려 되잡았다.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대면서도 눈을 부릅 뜬 얼굴이 어쩐지 매일 아침 보게 되는 거울 속 모습과 닮았다고 표트르는 잠깐 생각했다.

정말 이가 빠졌는지 뭉개지는 발음으로 파벨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폐하는 제 아버지세요. 프리드리히 폐하처럼 훌륭한 군인이고 남자시고요."


파벨이 그가 존경하는 군주,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언급하자 표트르는 몸을 움찔했다.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밀어내려는 그의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예절책에 멋진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면 지켜줘야한다고요. 폐하는 저 분도 때리실 건가요?"


아들의 작은 손이 가리킨 곳엔 옐리자베타가 서 있었다.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는 연인의 얼굴엔 당혹감과 두려움이 뒤엉켜있어 표트르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황후를 사랑해? 그런 여자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표트르는 언제나 다른 여자들만을 사랑했기에.


옐리자베타마저 들먹인 파벨에 대한 분노로 급기야 표트르는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굳게 닫혀있던 황후의 방문이 열린 것도 동시에였다.


"밖이 시끄럽다 생각했는데, 폐하께서 와주셨네요."


창백한 얼굴의 아내, 예카테리나가 가벼운 하얀 드레스만 걸친 채 열린 문 가운데 서 있었다.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엔 애정은커녕 그의 예고없는 방문으로 놀란 기색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미안해요, 파벨. 단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괜히 화를 봤네요."


"괜찮아요. 폐하께서 예뻐지신 황후 폐하를 빨리 보고 싶으셨나봐요."


"호호, 농담도. 그럼 폐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예까지 와주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질문을 던지는 예카테리나를 밀치듯 방 안으로 들어선 표트르의 얼굴은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활짝 열려진 창문과 여러 드레스를 늘여놓아 어수선한 방, 그리고 무릎을 굽혀 절하고 있는 시녀들과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갓난쟁이까지.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그럴 리 없어.'


저 간악한 여자가. 그리고 저 애가 모든 걸 망친 거다. 모자지간 아니랄까봐 혀를 놀려 남을 꼬여내고 상황을 회피하는 짓도, 잔머리 굴리는 것까지 똑 닮은 모양이지.

그를 밀어내고 이모의 유언장을 입맛대로 꾸며내다 수녀원에 들어갈뻔한 그때처럼. 함께한 공모자들을 모조리 처형대에 보내고도 태연하던 독사같은 여자!


표트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증거가 없어도 황제는 신하를 구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힘을 합쳐 고토를 수복할 날을 코앞에 둔 지금 이 이상 궁전을 들쑤셔봐야 도움될 것이 없다.


'그래, 당신은 운이 좋은 여자야. 예카테리나.'


그가 아둔했다. 고향으로 보내는 것도 자비롭지, 수녀원에 처박으면 끝나는 것을.

조만간 두 사람을 함께 보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표트르 3세는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그렇군. 짐이 조만간 파티를 열 생각이오. 황후도 참석하길 바라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요?"


"그게 다요. 이만 가지."


닿는 것조차 끔찍한 아내를 스쳐 방을 나서던 표트르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던 파벨을 손을 뻗어 밀쳤다.


"파벨!"


"전하!"


"전 괘, 괜찮아요. 폐하."


시종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을 보자 표트르는 그제야 기분 좋게 옐리자베타의 허리를 감싸안을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보며 슬며시 웃는 어린아이는 물론 보지 못했다.



바퀴벌레 한 쌍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예카테리나는 주저앉듯 내 얼굴을 잡았다. 서 있기 힘든 건 피차 마찬가지였을 테고.


"괜찮아요, 파벨? 세상에 이가 빠져버렸잖아요."


"괘안아요. 아야야."


여동생인 보론초바 여백작이 가져다준 손수건을 피가 나는 쪽에 꽉 문채 나는 손을 내저었다. 속으론 표트르를 신나게 까면서.


'미친 새끼, 여덟살 애 얼굴을 때리냐.'


병정놀이만 한 게 아닌지 표트르의 손은 제법 매서웠다. 남자여서기도 하겠지만, 슬쩍 혀로 쓸어보니 다행히 빠진 건 어금니는 아닌 듯했다.

임플란트도 없는 세상에 그게 어딘가 싶던 난 눈 깜빡할 사이에 안긴 모양새가 됐다. 눈을 굴리니 예카테리나였다.


"무슨 이런, 위험한 일을 한 겁니까. 폐하의 앞을 막다니, 파벨은 이제 여섯 살이에요. 뭘 해선 안될 나이라고요."


"그치만, 황후 폐하는 제 어머니시잖아요."


혀까지 깨물까봐 어눌한 발음이 나오는 게 열받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화를 삭히며 나는 재차 말했다.


"원래 아들은 어머니를 지키는 거랬어요."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물어봤다면 곤란했겠지만, 예카테리나는 질문 대신 나를 꽉 끌어안았다. 시녀장이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내 얼굴에 가져다줄 때까지.

덕분에 풍만한 가슴팍에 안겨있으면서 나는 여러 의미로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


그렇게 부활절 새벽녘의 소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어김없이 아침 해가 밝아온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인근에 자리한 파닌 저택에서는 집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의식하듯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결국, 누구도 폐하를 꺾지 못했군. 나도 마찬가지다만."


제국을 섬겨온 노련한 외교관, 니키타 이바노비치 파닌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았다. 눈두덩을 지긋이 누르던 그가 희뿌얘진 눈을 들어 마주앉은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프로이센 측에선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으냐, 표트르?"


동생 표트르 이바노비치 파닌은 상심한 얼굴로 형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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