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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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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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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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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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과 폭풍 전야

DUMMY

지구 반대편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프로이센과 작센이 실망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프랑스령 칼레에서 열린 평화 협상장에서 프랑스 대표 세자르 공작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퀘벡, 아카디(캐나다 동북부 지역으로 영어로 아카디아)도 모자라 미시시피 강 동쪽에 퐁디체리까지 다 내놓으라니, 사실상 누벨프랑스와 인도를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말이 아니요!"


"대신 뉴펀들랜드와 세인트 로렌스 만의 어업권을 보장해드리지 않습니까. 생 도맹그와 카리브 쪽도 남겨드리지요."


그와중에 끼어든 영국 대표 존 러셀 대사의 말에 그는 당장에라도 쌍욕을 내뱉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사. 우리가 패전국이 아니듯 영국과 프로이센도 승전국이 아닌 걸 잊으셨소?"


"잊을리가요. 영국은 그저 전쟁에서 점령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다만 루이지애나를 빼놓으시면 안됩니다."


스페인 왕국 대표 헤로니모 그리말디 대사 역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영국의 말을 거들자 세자르 공작은 동맹의 배신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스페인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리스본 대지진의 여파로 중립을 고수하던 스페인 왕국은 같은 부르봉 왕가로서 맺은 동맹과 왕위계승전쟁 당시 분탕을 쳐놓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 본토와 달리 패색이 짙어져가는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돈은 돈대로 들어가면서 얻을 건 없다 판단해서 이탈 조짐을 보이던 그때 영국이 접근해온 것이다.


'프랑스가 가진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그것을 둘로 나눠가지자니. 누군들 받아들이지 않겠나?'


대지진의 피해도 완전히 복구못한 스페인이다. 하물며 전쟁 막바지에 참전하였으니 플로리다를 달라는 영국의 요구에 거부할 병력도 깜냥도 없었다. 허나 미시시파 강 서쪽과 누에바 오를레앙(뉴올리언스)을 얻는다면 마냥 밑지는 장사는 안한 셈이다.

영국에게 뺏길 것을 대비해 동맹인 스페인에게 누벨오를레앙을 넘기기로 한 퐁텐블로 조약을 떠올릴 프랑스로선 어이가 승천할 지경이겠지만, 스페인이 알 바는 아니었다.


"하! 게르만과 슬라브끼리 손을 잡았나보군. 그래, 어디 오스트리아 황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진 대가가 어딘지 궁금하니 좀 알려주시겠소?"


"각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자중하시지요."


발언수위의 엄중함에 그리말디 대사가 중재에 나섰지만, 그게 오히려 세자르 공작을 자극했다. 몸을 등받이에 쭉 기댄 채 공작은 빈정거렸다.


"호, 선뜻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빌붙은 대가로 얻어낸 게 있는 모양이군. 하긴 같은 편 돈줄을 막아 국왕의 나라가 폐허가 됐을 테니 복구비용이라도 구걸해야 분노를 피할 테지."


영국의 왕이면서 하노버의 군주이기도 한 조지 3세는 선량했지만, 조부인 조지 2세처럼 하노버에 관심이 깊었다.

그러나 국왕과 달리 하노버에 큰 관심이 없던 내각과 남부장관(내무장관) 피트의 '하노버는 프로이센에게 맡기고, 우린 식민지에 집중하자' 는 주장에 화가 난 나머지 그만 그를 해임하고 만 것이다.


덕분에 돈줄이 막힌 프로이센은 군인들 월급조차 주지 못할 상황에 놓인 채 프랑스가 하노버 영내 침입을 허용하고, 러시아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렸으니 프랑스로선 그렇게 쭉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물론 관심이 없다해서 대대로 적이었던 프랑스에게 당한 게 기분 좋을 리 없는 영국 대표 존 러셀 역시 손등에 핏줄이 돋을만치 주먹쥐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유럽은 고사하고 아메리카에서도 쪽도 못 써놓고 입심만 여전하군요. 남네덜란드도 못 얻고 돌아가 퐁파두르 부인 앞에서 욕 먹을 생각하니 두려우신 모양입니다?"


"뭐요? 이 양털이나 깎아팔던 변두리 촌것들이!"


"생선가게 여자 치마폭에 빠진 왕을 모시는 것보단 낫소!"


러셀 대사의 도발에 세자르 공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대대로 사이나쁜 두 나라의 대표가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것을 스페인 왕국 대표는 말리길 포기한 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봤다.

결국 양국의 외교단이 뜯어말린 후에야 두 사람은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손톱만큼의 잔정도 남지 않은 존 러셀 대사는 프랑스 대표단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외교관답지 않게 단언했다.


"번복은 없을 겁니다. 전쟁을 끝내고 그나마 챙길 것을 챙기든, 아님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가든, 어느 쪽이든 선택권은 드리도록 하지요."


선택은 커녕 강요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세자르 공작은 몸을 떨면서도 끝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기세가 꺾인 걸 확인한 스페인 대사 그리말디는 얼른 서약문을 내놓으라고 외교관들을 닦달했다. 이윽고 그들 앞에 서명할 필기구와 함께 조약서가 펼쳐졌다.


1항, 프랑스 왕국은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에 퀘벡, 아카디, 미시시피강 동쪽에 있는 캐나다 영토를 양도한다. 또한 스페인 왕국에 누에바 오를레앙을 양도한다.

2항,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은 프랑스 왕국에 뉴펀들랜드와 세인트 로렌스 만의 어업권을 비준하며, 생 피에르 앤 미클롱 군도와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생 도밍고 지역 또한 프랑스의 영유권을 인정한다.

3항. 스페인 왕국은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에 플로리다를 양도한다.


누구보다 빨리 서명을 마친 존 러셀 영국 대사와 헤로니오 그리말디 스페인 왕국 대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와인잔을 부딪치고, 그 모습에 세자르 공작이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조약서에 서명을 적어넣으면서.

훗날 칼레 조약이라 불릴 회담도 그렇게 마무리지어졌다.


***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군."


기나긴 7년 간의 전쟁을 마치고 당당히 귀환길에 오른 돈 카자크(Don cossacks)의 소지주 중 한 명인 이반의 아들 예멜리안은 어렴풋 보이는 듯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풍경에 삐뚜룸하게 미소지었다.


독실한 고의식파 신자인 예멜리안은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프로이센으로 파견된 카자크 연대의 일원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시작된 해부터 마지막 해까지 체르니셰프 중장의 사단에 속해있던 그를 돈 카자크 연대의 아타만 일리야 데니소프 대령은 군의 모범으로 삼았고, 3년 간 머물던 프로이센에서 굵직한 전투에 참가하며 살아남은 대가로 수도에서 약속한 포상은 스물 한 살의 청년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뭘 사면 좋지? 아버지께 대부분을 드리고 남는 돈으론 역시 가축을 늘리는 게 낫겠지. 말을 사거나.'


세 살때부터 말을 타는 연습을 하는 카자크 인답게 예멜리안은 가족의 땅에서 뛰노는 수많은 말떼를 상상하며 미소지었다. 가장 우선할 것이야 단연 돌아가는 즉시 아들을 낳는 것일 테지만.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이 말을 타는 걸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하던 예멜리안의 귀에 들뜨고 어쩌면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꽂힌 건 분명 우연이었을 것이다.


"이번 포상에 딸린 영지에 농노도 있다면서요? 농사 잘 지을 만한 튼튼한 놈들이 걸려라!"


"여자들도 좋지. 개중엔 귀족 피가 섞였는지 꽤 예쁜 얼굴들도 있다고."


"뭐가 됐든 돈 벌어야지. 돌아가면 나 없는 동안 늘어졌을 농노들 기강부터 잡는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선 현실과 밀접한 얘기들이 오갔다.


"얼마나 주려나? 기왕이면 장가갈 정돈 됐으면 좋겠는데."


"지금이 좋을 때인데 굳이? 하기야 무덤으로 걸어들어간다는데 말릴 이유가 있나."


"고향은 무사하겠지? 들어보니 근처 마을들이 귀족 나리들 땅으로 자주 바뀐다던데."


"뭐가 됐든 세금은 좀 내렸으면 좋겠네. 소금 값이 금보다 비싸다던데."


마치 모세의 기적에 갈라진 바다처럼, 귀족과 평민이 나뉘어 앉은 자리는 대화거리조차 달랐다. 생존에 대한 기쁨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한 평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카자크인 예멜리안의 마음에도 박혀들었다.


'소금이라. 그래, 우리 고향도 그랬지.'


본래 자유롭게 살던 카자크에 제국 정부는 서서히 통제범위를 늘려갔다.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을 시작으로 생선와 청어알에까지 뻗어나간 제한은 카자크를 통솔하는 직책조차 예외가 없었다. 카자크 연대의 의견은 묵살되고 차르가 직접 임명함에 이의를 제기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는 동족이 조금씩 늘고 있던 걸 예멜리안은 기억했다.


'생각해볼 일이군.'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한껏 들떠있는 와중에도 평민들의 머릿속에 심겨진 불만이란 씨앗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카자크의 뇌리에도 자리잡았다.

그것이 자라지 못한 채 썩어버릴지, 아니면 발아하여 어떤 싹을 틔울지 돈 카자크의 일원인 이반의 아들 예멜리안 푸가초프조차 아직은 알지 못했다.


***


"하여간에 프랑스 놈들이란, 다 끝난 일을 질질 끌기나 하다니."


본국과 인접한 칼레에서 체결된 평화협상 조약내용을 전해들은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총리 존 스튜어트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봐주시지요, 총리 각하. 얻은 거 없이 돌아가려니 어린애처럼 울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허나 우리 상황도 녹록치 않은 건 매한가지잖나."


마음 같아서야 좋아하는 식물들이나 연구하며 책을 쓰며 여생을 보내고 싶지만, 총리라는 직함이 존 스튜어트를 그의 루턴 후 성(Luton Hoo Castle)이 아닌 책상 앞에 붙들어놓았다.

책상에 널려있는 서류와 지도, 그리고 종이 위에 당당히 적힌 아득한 금액이 총리의 눈에 박혀들었다.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어 얻은 청구서가 1억 6100만 파운드(한화로 대략 281억 4천만원)라니. 선대 총리들이 들었다면 뒤로 넘어갔겠군."


얻은 거 없이 7억 리브르나 되는 빚을 진 프랑스 왕국이나 1억 2천만 라이히스탈러의 청구서를 받아들 프로이센에겐 도발같은 말이었지만, 영국으로선 손해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전세계에서 돈을 끌어모으고 있다지만, 박살이 난 프랑스령 식민지며 인도에서 손해를 메꾸려면 또 다시 돈을 써야한다. 허나 선거를 앞둔 지금 전쟁비용을 메꿀 세금을 올리거나 신설하자는 주장을 해봐야 다음 선거 때 낙선을 확정짓는 셈이다.


의회에서 준비중인 식민지에 부과할 인지세를 떠올리며 존 스튜어트 총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하노버 왕국에 프로이센 령 영지들을 추가하게 됐으니, 앞으로 대륙 일에 끼어들 날이 늘어나겠지. '양보' 로 우리에게 프로이센의 원한마저 떠넘기다니, 황후인지 재상의 솜씨일지 몰라도 과연 합스부르크답더군."


오스트리아와의 거래로 하노버 왕국과 인접한 프로이센령 클레베를 뚝 잘라붙인 것도 문제였다. 괜스레 프로이센을 자극할 일을 만든 게 아닌가 싶었지만, 오스트리아가 거래한 건 하노버 왕국이었기에 영국으로선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하오나 수입 역시 적지는 않습니다. 하노버 왕국군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추가비용을 줄일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의 왕을 모시나 별개의 나라인 하노버 왕국, 그러나 역대 왕들은 자신들의 뿌리인 하노버에 이권을 챙겨줄 궁리에 영국의 힘을 끼어넣으려 애썼다.

영국의 총리로서 존 스튜어트는 그런 작태에 불만을 가졌지만, 어디까지나 불만에 그쳤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 마음도 달라지는 법이니 영국이라고 하노버를 이용 못할 이유가 또 어디있겠는가?


"내 후임 총리에게 미안하군. 이 골치아픈 걸 넘겨주고 가야하니 말이야."


필요한 일과 내키지 않는 일 사이에서 존 스튜어트 총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식민지를 빼앗긴 프랑스와 뉴올리언스로 만족하지 못할 스페인 왕국에게서 북아메리카를 지켜낼 군대 주둔안과 그걸 위한 세금 청구서가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실테지.


"그러고보니 러시아 제국의 대관식이 곧이겠군?"


"그렇군요. 저들은 아직도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으니 아마, 3주 뒤일 겁니다."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존 스튜어트 총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을 방향의 창문을 바라봤다. 발트해와 인접한 땅을 얻어낸 러시아에 대한 견제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


분노하는 프랑스와 견제하는 영국, 기회를 엿보는 프로이센과 폐허를 추스리느라 바쁜 오스트리아와 달리 러시아 제국은 다시 얻어낸 승리와 대관식 준비로 들뜬 분위기였다.

옛날 수도 모스크바로 들어서던 황제를 맞이하러 몰려든 사람들의 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전하, 근사하십니다. 언제 이렇게 크셨는지."


대관식 참석을 위해 예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안드레이 역시 황실 시종 정복으로 쫙 빼입은 상태였다.


"누가 들으면 네가 내 부모님인 줄 알 거야, 안드레이."


투덜대긴 했지만 안드레이가 고생한 건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예카테리나의 시종장인 슈쿠린 경에게 부탁해서 직급도 기존의 시종사(6급)에서 5급 시종보로 올려줬고. 5급이라 작아보일 순 있지만, 군 계급과 비견해보자면 준장급이라고.

덕분에 너무 과한 진급이라고 뒤에서 말이 나오긴 한 모양이지만, 출산 소동 때 내가 개입할 수 있었던 게 알리러 온 시종 알렉세이가 안드레이와 친분이 있던 덕분이라 그 점을 어필했더니 예카테리나도 인정했다.


"저도 한 몫을 했지 말입니다. 전하, 잠시만 고개를 숙여주시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숙이자 안드레이는 예복의 꽃, 훈장 중 가장 격이 높은 성 안드레이 기사단의 훈장을 목에 걸어주었다. 표트르 3세가 사망했기에 내게 상속된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의 공작관은 쓰지 않았는데,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건 오직 차르와 황후만이 가능해서였다.


"오, 준비가 끝나셨군요. 전하!"


허리에 의식용 검까지 패용하자 열린 문으로 쿠라킨이 들어왔다. 예카테리나에게 부탁해서 대관식에 참석할 권한을 얻어줬기에 붉은색 계열로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 꼭 깃털을 부풀린 공작처럼 화려했다.


"누가 보면 네가 주연인 줄 알겠어, 알렉산드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은색으로 차려입으셨으니 제 붉은 색 옷이 좋은 배경이 되어드릴 겁니다! 자, 그럼 가시지요."


어린애처럼(실제로도 어린애지만) 웃던 쿠라킨이 표정을 엄숙하게 고치곤 몸을 굽혔다. 안드레이며 다른 시종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 전하."



러시아 제국의 대관식은 아침 일찍 크렘린 궁전의 붉은 현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른 두 명의 엄선한 러시아 장군들이 들어올린 캐노피에 햇볕을 가린 채 예카테리나 2세는 기름부음을 받을 성모승천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 황태자인 내가 따라 걸었고 의전용 지팡이를 든 의전장관과 전쟁부 장관, 제국 의회 장관, 경비대 소장과 기마 근위 연대 사령관이 뒤따랐다. 그동안 황제의 근위대는 성당까지 향하는 길목에 벽처럼 굳건히 늘어서있었다.


금빛의 십자가를 얹은 황금색 돔이 흰색의 벽면과 대비되어 파란 하늘에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황족들만 들어서는 남문에는 블라디미르의 성모 성상화가 그려져있고, 문 주변으론 섬세하게 조각한 아치형 기둥이 몇 겹으로 세워져있어 황제의 머리 위를 떠받쳤다.


성당 앞에 다다르자 티모페이 모스크바 대주교가 예카테리나에게 축성한 십자가를 내주었고, 그녀가 십자가에 입을 맞추자 성수를 뿌려주었다. 입장을 허락받은 우리의 눈앞이 순간 금빛으로 물들었다.


'와, 저게 다 금이라고? 팔면 다 얼마야.'


수십 개의 초를 얹은 샹들리에가 천장에 고정된 채 주위를 밝혔고, 오래된 성화들이 성경의 내용을 응축한 채 고풍스러우면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예술도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나조차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기면서도 감탄하기 바빴지만, 감상은 나중 일로 미뤄야했다. 그야 대관식이니까.


"온 세상의 왕이신 주님,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당신의 종 다윗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하셨듯 저희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당신의 종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에게 기름부음을 허하소서. "


모노마흐의 왕좌라고 불리는 곳에 선 예카테리나가 자리에 앉자 대주교가 사제의 손에 들린 축성한 성유가 담긴 금 숟가락에 손끝을 찍어 예카테리나의 손바닥과 가슴, 그리고 이마에 차례로 성호를 그어주었다.

가슴 쪽에 닿을 때 움찔한 걸 본 건 예카테리나 말곤 나뿐인 듯 했다.


"모두들 주님께 머리를 숙이십시오."


그 말에 모두의 고개가 기도할 때처럼 숙여졌고, 이윽고 내 뒷머리에 대주교의 기도가 떨어져내렸다.

뭔가 불라불라 길게 이어진 기도의 끝에 예카테리나 2세의 목소리가 쥐죽은 듯 모두가 숨을 죽인 성모 승천 대성당 안에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대주교는 짐의 관을 주시오."


흔히 사제가 왕과 여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것과 달리 정교회에선 황제가 직접 왕관을 머리에 쓴다. 옛날 동로마 제국 때부터 내려온 관습으로 권력이 사제가 아닌 황제에게 직접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티모페이 대주교가 직접 축복한 제국관(Imperial Crown of Russia)을 건네받은 예카테리나 2세는 그녀를 위해 새로 제작된 왕관을 직접 머리에 얹었다.

마치 커다란 타원형 알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모습과 테두리에는 진주를, 띠에는 열아홉 개나 되는 다이아몬드를 박아놓은 왕관이 웅장한 대관식 한 가운데에서 홀로 반짝거렸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시는 전 러시아의 황제이시며 모스크바와 키예프, 블라디미르와 노브고로드의 군주이시고, 카잔과 아스트라한, 시베리아의 차르이시며-."


숨이라도 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헐떡이며 러시아 황제의 공식 명칭을 읊기 시작한 대주교에게서 눈을 뗀 나는 예카테리나 2세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긴장한 듯, 그러나 들뜸을 애써 감추고 있는 얼굴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총신들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는 공통의 목표를 둔 동지에서 언제든 뜻을 가른 채로 싸울지 모를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이시며 모든 북방 국가들의 주인이신 예카테리나 2세 폐하께서 세세토록 우리 위에 군림하시리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대주교의 기도가 끝나고 내 차례가 왔다. 원래라면 황후의 대관식이 치러져야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의 배우자 자리는 비어있고 나 말곤 다른 황족도 없었기에 새로운 예식을 집어넣은 것이다.

원래도 이런 게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왕좌에 앉은 예카테리나의 앞에 성 안드레이 기사단의 예복을 입은 난 배운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은 새로이 즉위하신 전 러시아의 황제께 충성과 헌신을 맹세합니다.

온전한 진실과 믿음만을 바칠 것이며,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배신하지 않을 것임을 신께 맹세합니다."


갑자기 떨어진 별세계 같은 과거의 러시아. 몸에 맞지 않는 황족이란 신분과 그에 얽히고 설킨 복잡미묘한 인간관계를 원한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내 삶은 아무런 부족함도 없던 금수저 그 자체였으니까.

이곳에서 살다보면 일은 끊임없이 벌어질 테고, 분명 내 머리로는 해결 못할 난제에 시달리다보면 표트르 3세 꼴이 날 수도 있을 것을 안다.


"주님께서 우리의 차리차를 보호해주시길."


그러나 달라질 건 없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나는 나답게, 어느날 갑자기 표류하게 된 이 세상에서 적응하며 살아남을 뿐이다.

전 영업사원, 현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로서.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도가 1768년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열네 살의 봄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맞이했다.

1000012921.jpg

<예카테리나 2세의 대관식>

Russian_Imperial_Crown.svg.png

<러시아 제국 황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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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8 17 15쪽
»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5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2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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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8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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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73 21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7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6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3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9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6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6 25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21 21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100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2 1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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