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최근연재일 :
2024.09.18 01:07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16,940
추천수 :
540
글자수 :
199,916

작성
24.08.22 15:12
조회
570
추천
19
글자
19쪽

왕좌를 비워라(2)

DUMMY

"이르다 뿐입니까. 늪에 빠졌다가 구명줄이 내려온 셈인데."


형과 닮은 듯하면서도 선이 좀 더 굵은 표트르 파닌은 외교관인 형과 달리 스물 다섯살부터 줄곧 군에 몸담았다.

이즈마일롭스키 근위 연대로 시작한 군 생활은 뮌니히 원수를 따라 페레코프과 바흐치사라이 공방전을 치르고 프로이센과 굵직굵직한 일전을 벌이며 유명세를 쌓아갔다. 거기에 일국의 수도인 베를린 점령이란 위업에 한 몫을 하면서 그의 드높은 자부심은 정점을 찍었다.


빠른 성장은 자연히 타인의 경계를 사기 마련이다. 그러나 표트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되려 그에게 날을 세우는 이들을 비웃곤 했다.


'능력 없는 것들이나 남을 질투하는 법이지.'


이름을 떨칠만한 전쟁터에 그가 불려다니는 이유가 뭔가? 유능해서다.

그의 가슴팍 한켠에 자랑스럽게 매단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에 이어 성 안드레이 훈장을 수여받는 날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베를린 점령이란 수훈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멍청한 황제가 내린 아둔한 결정에 그의 모든 영광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라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어느 나라가 다 이긴 싸움을 포기하고, 그도 모자라 패자나 받아들일 조약 따윌 체결한답니까? 젠장! 라주모프스키 백작이 옳았습니다. 옐리자베타 폐하가 오늘내일 하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아니 알아봤는데도."


속이 타는지 와인을 따라둔 잔 대신 표트르는 병째로 집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흔줄에 접어들고도 여전히 성격 급한 동생의 속타는 마음을 꿰뚫어본 니키타 파닌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야. 과거에 내린 결정 중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없지."


"하지만 형님!"


"그러나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바꿀 여지가 있다."


좀처럼 듣기 힘든 형의 단호한 목소리에 반밖에 안 남은 와인병을 허공에 든 채 표트르는 눈을 깜빡였다. 웃음기 없이 드물게 딱딱한 얼굴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형 니키타 이바노비치는 느긋한 성격이었고,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으며 뭐든 말로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표트르의 나이였을 적부터 이미 외교관이었던 니키타 파닌의 웃음기 없는 표정을 표트르 파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폐하께서 내린 판단들로 보건대 네가 총독으로 부임할 쾨니히스베르크는 머잖아 프로이센과의 화해를 위한 선물로 넘겨지게 될 거다. 거기에 홀슈타인 인사들과의 회동도 부쩍 늘어난 걸로 보면 그곳을 지배중인 덴마크와의 관계도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훈장을 수여하고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했어도 표트르 3세는 니키타 파닌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가 호위랍시고 붙여준 부관은 그가 애인인 셰레메테바 부인을 만나거나 친분 있는 귀족의 저택에 초대받았을 때도, 심지어는 파벨 대공과의 수업 때문에 궁전을 방문할 때조차도 따라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니키타 파닌을 분노케한 건 그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잇는 계획을 표트르 3세가 망가뜨리려한다는 점이었다.


'황제의 권력은 견제받아야하는 법이지.'


무능한 군주는 왕관 위에 매달려있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권력이란 실이 끊기길 바라는 것처럼 마구 흔들어댈 뿐.

그런 자의 왕좌를 이 이상 떠받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출렁이던 마음의 추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우는 것을 느끼며 니키타 파닌은 차분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건 내 짐작이다만, 폐하께선 홀슈타인을, 어쩌면 슐레스비히까지 손에 넣고 싶으신 듯 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아니 거길 왜."


표트르 파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주전장은 육지이지만 바다의 중요성을 아주 모르진 않았다.

얼지 않는 바다, 발트해를 위한 제국의 첫 선택이 그들이 있는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였으니까. 표트르 대제가 딸 안나를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결혼시킨 것도 그런 포석의 일부였고.


허나 지금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제국에 있어 그 가치가 다소 떨어졌다.

제국의 영토와 지나치게 떨어져 있는데다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프로이센, 북서로는 그들의 동맹인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노르웨이 왕국에 둘러싸여있어 설령 손에 넣는데도 끝까지 방어하기 곤란하다.

물론 동프로이센이 제국 영토가 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프로이센과 화해하겠다는 황제의 계획 때문에 그 또한 불가능한데도.


'....설마.'


이쯤 되면 프로이센 군대와 함께 그 두 곳을 치려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 순간 표트르 파닌은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국익과 하등 상관 없는 땅을 점령하고, 손에 넣을지 모를 결실조차 홀슈타인 패거리의 소유가 된다면.


그리고 형은 여기까지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와 손잡은 사람들까지도.

식어버린 분노를 털어내며 표트르 파닌은 고개를 들었다.


"형님."


"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예, 허면 제가 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그래, 중요한 일이지."


분노를 누른 흥분에 찬 동생의 얼굴을 보며 니키타 파닌은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조만간 폐하께선 홀슈타인 정복을 위해 움직이실 거다. 홀슈타인 계의 왕자들이나 뮌니히 원수가 움직일지는 미지수다만,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페르모르, 부툴린 사령관과 연통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라. 특히 슈테틴에 있는 루먄체프 총사령관을 잘 살피도록 하고.

우리 편으로 회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최소한 폐하쪽에 가담할 수 없게 잡아야한다."


형의 설명을 들은 동생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서로 닮은 얼굴의 동생은 또 한 번 손에 뻗을 만치 가까이 다가온 권력의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고, 형은 자신이 꿈꿔온 계획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에 들뜬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제국의 황제 대신 프로이센의 신하가 꿈이시라면, 응당 뜻대로 이루어지게 도와야지요.'


물론 이루어지기만 하면 될 소원이라면 굳이 살아서 이룰 필요는 없겠지만. 맛좋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니키타 파닌 백작은 입술 끝을 비틀었다.


바보를 때리는데 주먹을 아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


"허, 지옥 문턱에서 베드로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하인이 입기 좋게 들고 있던 코트에 양 팔을 차례로 끼우며 주 러시아 프로이센 대사 베른하르트 폰 데어 골츠 남작은 나직히 감탄했다.


베른하르트는 명예롭고 유서깊은 폰 데어 골츠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스물 여섯의 나이에 대령까지 진급할 만큼 전도유망했다. 서른도 안된 나이에 타국 주재 대사에 임명받은 성과는 아시아에 가까운 변방나라에 파견됐다는 아쉬움에도 한 점 빛바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대로 화려하여 볼거리는 많은 궁정 파티를 즐기며 좀 더 보람있는 타국 대사로 영전할 날만 꿈꾸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든 건 올해 1월.

프로이센을 혐오하던 옐리자베타 황제가 죽고 프리드리히 2세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멍청이가 즉위한 때부터였다.


'조른도르프, 호크키르히. 카이에 쿠너스도르프와 베를린까지. 정말 내몰릴 대로 내몰렸던 게 엊그제 같건만.'


베른하르트는 특히 쿠너스도르프 전투 당시를 떠올렸다. 카이에서 입은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국왕이 선택한 전쟁터에 포진해있던 적의 군대를.

자신들과 비등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러시아측 지휘관 표트르 살티코프 백작은 그에 아랑곳않고 휘하 병사의 목숨을 바쳐 그들을 잡아끌었다. 부하들의 목숨값을 백작은 프로이센 왕국군의 5만 병력 중 3할과 100여문이 넘는 대포, 그리고 막대한 보급물자로 회수했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프로이센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승리한 전쟁의 주역은 누구나 되고 싶어하지만, 패배한 전쟁은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법.

쿠너스도르프의 소식이 들려오자 포츠담의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국왕이 무리한 공세를 주문했기 때문이라 힐난했고, 누군가는 그 틈을 타 선왕 때부터 눌려온 권리를 되찾을 궁리를 했다.


허나 그들도, 국왕 프리드리히 2세조차도 의심치 않은 프로이센-러시아 전쟁은 의외의 전개를 맞이했다.

옐리자베타의 죽음과 새로 즉위한 표트르 3세의 무조건적인 평화 협상.


러시아 제국의 재상 보론초프 백작이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베른하르트는 오히려 당황했다.

점령된 지역을 반환하는 대가로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를 원한다는 황제의 속내를 들었을 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몸에 난 종기 같은 작자도 조카랍시고 후계자로 내세웠다니, 그 옐리자베타도 결국엔 여인이었던 것인가?


어차피 황제가 원하는 슐레스비히는 덴마크의 영토, 남의 땅으로 내 배를 불리면서 생색까지 낼 기회를 마다할 외교관은 없다. 있다면 그자는 바보이거나 문외한이거나 혼란을 틈타 권력을 노리는 자일 테니까.

하물며 아직 남은 적군을 물리칠 병력까지 제공하겠다는 관대한 제안이었으니, 동프로이센쯤은 기꺼이 넘겨줄 의향까지 있었던 프로이센 측에선 당연히 반색을 했다.


수도에서 보내온 전권 대사 임명서만 봐도 국왕이 얼마나 다급하게 한편으론 환희에 찬 채 이 소식을 들었을지 베른하르트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선황이 죽은 게 오히려 다행이군. 조카의 이런 말도 안되는 제안을 들었다면 당장 혈육의 목을 조르고 싶었을 테니 말이야. 아니 그런가?"


"저야 모르지요. 각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면 뭐든 우리한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러시아로 올 때 데려온 하인의 말에 베른하르트는 그 말도 옳다며 수긍했다. 하긴, 아랫것이 정사에 감히 왈가왈부하는 일은 있어선 안될 일이지.

한편의 즐거운 연극을 감상한듯한 기분으로 베스트와 코트의 주름을 점검하고, 구두의 흠집 따윌 면밀히 점검하던 베른하르트는 이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뒤를 흘긋 바라봤다.


"대사님. 슬슬 채비하셔야 할 듯 합니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 그래. 어서 가지."


기쁨에 들떠 국가의 중대사를 그만 잊고 있었다. 온 나라가 바라마지 않던 평화 협상을 위한 총리 보론초프 백작과의 회동을 소화해야했다. 프로이센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협력자에 대한 국왕이 보내온 호의를 전달해야하니 몸이 열두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이라면 기꺼이 감내해야지.'


주 러시아 대사 겸 명예로운 프로이센 전권 대사 베른하르트 폰 골츠 남작은 시종에게 건네받은 모자를 고쳐썼다. 문을 나서는 그에게 고개 숙인 러시아인 하인의 분통에 찬 얼굴 따위 들여다볼 가치란 존재하지 않았다.


***


"이에 러시아 제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화평하며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작센 선제후국과 체결한 동맹을 조약이 발효되는 1762년 4월 24일부터 파기함을 선언합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께서는 별도의 의사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당장 눈을 감고 싶어보이는 의전관의 얼굴을 보며 협상 조약문을 앞에 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표트르 3세는 기대에 찬 표정을 지어보였다. 협상장에 오기 직전 프로이센 측에서 전달받은 프로이센 대령의 훈장이 황제의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려있었다.


"이의 없소."


러시아 제국의 총리 로만 일라리오노비치 보론초프 백작은 담담히 말했다.


"프로이센도 이의 없습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전권대사 빌헬름 베른하르트 폰 데어 골츠 남작은 즐거운 목소리로 수긍했다.


대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협상장을 둘러싼 인파에 술렁거림이 일었다. 수군대는 목소리와 소수의 들뜬 목소리에 묻힌 분통에 찬 표정과 굳게 다물린 입매, 그리고 핏줄이 돋을만치 꽉 쥐여진 주먹을 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어서 서명들 하시게. 우린 아직 할 말이 많지 않은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 3세는 그런 신하들의 불만 어린 반응을 눈여겨보는 대신 두 사람의 서명을 재촉하기 바빴다. 베른하르트가 기꺼이 펜을 들어 조약문에 제 이름을 써넣는 동안 보론초프 백작은 황제를 한 번, 그리고 주변을 슬쩍 돌아보다 펜을 들었다.


"좋군! 아주 훌륭해!"


두 사람이 펜을 내려놓는 순간 표트르는 크게 손뼉을 치며 환호하기까지 했다. 홀슈타인 계나 프로이센 대사가 데려온 사람들은 따라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고, 대다수는 침묵하거나 한숨을 내뱉거나 더는 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모로 꼬아버렸다.


"기쁜 날입니다, 폐하. 흑수리 훈장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수여자는 처음 뵙는 듯 하군요."


"고맙네. 필시 대사 자네가 포츠담에 잘 전달해준 덕분이 아니겠나! 짐에게 따로 전해준 얘기 역시 몹시 감명깊었네, 협의한 바대로 진행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물론입니다. 폐하. 저희는 같은 조상을 둔 형제이지 않습니까. 형제란 어려울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주저없이 팔을 걷어붙이는 법이지요."


"말해 무엇 하겠나. 이런 기쁨을 짐만 홀로 누릴 순 없으니 조만간 파티를 열 걸세. 자네도 참석하게나."


웃는 얼굴의 보론초프 백작이 다가오자 제 가슴에 단 훈장을 자랑하듯 으쓱대는 표트르 3세를 보며 베른하르트 골츠 대사는 웃지 않으려 과장되리만치 고개를 숙여 긍정을 표했다. 그러나 황제를 따라나가는 대사의 비웃음 가득한 옆얼굴을 본 러시아 귀족들은 화낼 여력조차 없다는 듯 싸늘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프로이센과 홀슈타인 일파가 즐거운 시간을 쌓기 있을 무렵, 한 소문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7년 간 서로를 죽고 죽이던 적국과의 평화협상에 내포된 점령지 무조건 반환 소식이 전해지자 전사한 가족의 희생이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 가정의 슬픔은 커졌다,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는 아픔은 분노가 되어 겨울 궁전의 주인을 향했다.

거기에 황제가 프로이센과 손잡고 동맹인 북방 3국을 치려한다는 소문까지 더해지자 실금 같았던 일부의 불만이 점차 수도 전체의 분노로 뒤바뀌었다.


황제는 러시아인이 아니다. 황제는 우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황제를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어느순간 떠오른 의문은 작디작은 불씨하나로도 터져버릴 뇌관처럼 수도 시민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그 순간을 기다려온 이들의 바람처럼.


***


"오늘이지? 파티 말이야."


멀리서 들려오는 멜로디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바흐였나? 아니면 헨델?

서양 음악에 조예가 깊던 어머니 덕분에 클래식을 접하긴 했지만, 난 막귀다. 듣는 건 잘할 수 있는데 누군지 구분하는 건 힘들더라고. 솔직히 다 거기서 거기 같고.


하지만 잔잔하면서도 순식간에 휘몰아치듯한 음색이 지금 상황과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폭풍 전야, 이 네 글자가 딱들어맞지.


"예에, 엄청 화려하다던데요. 맥주에 와인에, 주방에서 준비하고 있을 요리도 알려진 것만 50개라던데, 부활절 음식 저리가라할 정도라죠."


생각만 해도 군침돈다는 듯 침을 삼키면서도 안드레이는 내 앞에 놓인 잔에 코코아를 따라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참 특이하게 코코아를 무슨 자양강장제 취급하더라고.


"배고프면 너도 먹고 오던가. 사람도 많은데 좀 먹어도 모를 거야."


"에에, 제가 전하를 놔두고 어딜 갑니까. 얼굴 찜질도 저 없으면 농땡이 피우시면서."


대공한테 농땡이라 말하고, 안드레이도 많이 컸다. 아님 내가 편해졌던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황후의 비밀출산과 그에 따른 표트르 3세의 난동 이후로 한 사흘은 쭈뼛대던 안드레이는 좀 이상해졌다. 예카테리나가 내게 보내라했다던 기술책을 가져오거나 내 심부름으로 궁전 밖을 종종 다녔지만, 대체로 내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또 폐하께서 전하를 때리거나 하시면 어쩝니까. 제가 먼저 맞든가 해야지요."


노예근성이라기엔 뭐랄까 그 말 할 때 안드레이 표정은 동생을 걱정하는 형의 얼굴 같았다. 내 이 빠진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참고로 그날 빠졌던 이는 소구치, 일명 작은 어금니다. 이 나이때쯤 유치가 빠질 나이니 상관없는데 어금니도 이때 빠지는진 잘 모르겠고.


'그래도 내 유치값은 비싸게 받아내야지.'


문자 그대로 존나 아팠다. 덜렁대지도 않은 말 그대로 생니가 뽑힌 셈이라 방으로 돌아올 때쯤엔 퉁퉁 부었는데, 시퍼렇게 멍든 뺨에다 얼음주머니를 대니 통증도 두 배가 됐다. 할 수만 있다면 얼음이라도 깨물고 싶었지만 이가 시릴까봐 참았고.


'예카테리나는, 잘하겠지. 표트르도 아니고.'


그날 본 표트르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뭔 짓을 저질러도 저지를 경고 수준의 눈깔은 가족도 하다못해 친척을 보는 정도를 넘어 적을 대하는 태도였다.

상대가 나를 적대하는데, 나는 여전히 화해의 손을 뻗을 이유가 있을까? 저 놈은 날 죽이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작정인데?


그래서 모든 걸 다 털어놨다. 예카테리나에게, 파닌 백작에게, 그리고 안드레이에게도. 페테르슈타트에서 들은 것, 본 것, 그리고 표트르가 바라는 소원까지도.


"혹시 모르니까 그거 늘 손 닿는데 둬."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 본가는 근처에 곰이 종종 나오기도 해서 쏴본 적도 있습니다."


누가 들으면 명사순줄 알겠네.

실전효용감이 별로인 이 시대의 소총, 머스킷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는 안드레이를 짜게 식은 눈을 봐주다 나는 창밖 너머의 바다와 배와 항구를 내다봤다.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찰랑댈 듯한 바닷바람이 짜면서도 기분 좋았다.


제국도, 신하도, 가족마저도 저버린 황제 표트르 표도로비치.

만에 하나 그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을 정복한다해도 이곳에 그가 돌아올 자리는 없다.

KakaoTalk_20240822_205249704.png

1762년 작중 시점에 근접한 유럽지도>

빨간색 원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위치, 노란색 원이 표트르 3세가 선물(?)한 쾨니히스베르크가 위치한 동프로이센 지역입니다.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뭘 어떻게 홀슈타인을 얻고 또 사수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KakaoTalk_20240822_205249704_02.jpg

<흑수리 훈장>

작중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수여받은 훈장으로, 프로이센에서 수여받을 수 있는 최고위 훈장입니다. 상단에 있는 부장에 적힌 표어는 SUUM CUIQUE(각자의 것은 각자의 것에)인데 수여한 사람과 수여받은 사람을 보면 조금 미묘해지는 구석이 있는 의미입니다.


작가의말

표트르 3세는 다음화를 마지막으로 안 보일 예정입니다. 저도 꼭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제목수정)전쟁과 평화의 레가토(1) +1 24.09.18 197 9 12쪽
28 전쟁의 전방과 후방(5) +1 24.09.17 265 11 15쪽
27 전쟁의 전방과 후방(4) +3 24.09.15 275 10 21쪽
26 전쟁의 전방과 후방(3) +2 24.09.11 340 15 11쪽
25 전쟁의 전방과 후방(2) +3 24.09.08 395 15 15쪽
24 전쟁의 전방과 후방(1) +4 24.09.07 418 13 12쪽
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11 21 14쪽
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46 19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70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8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5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3 17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483 17 14쪽
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8 13 14쪽
15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60 13 20쪽
14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19 21 20쪽
13 왕좌를 비워라(3) +9 24.08.22 622 23 16쪽
» 왕좌를 비워라(2) +4 24.08.22 571 19 19쪽
11 왕좌를 비워라(1) +5 24.08.20 633 22 17쪽
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73 21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8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7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3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9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7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6 25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21 21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100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2 19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