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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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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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1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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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겨울(2)

DUMMY

대공이니 황족이니 하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뭔가 엄청나고 빡센 일정이 기다리고 있겠다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혼자만 시간이 거꾸로 먹는지 나날이 젊어지는 어느 피터도 그렇게 말했지 않나. 큰 주먹엔 큰 대가가 따른다고.


그런데 내 기대가 무색하게 파벨로서의 일상은 널널하다못해 늘어진 금수저 생활 그 자체였다.


‘이러니 왕이니 황제니 하는 사람들 목을 백성들이 따고 싶어하지.’


악 소리도 못내고 세금이나 뜯기던 회사원의 쓰린 속을 달래며 지난 한달간의 내 생활을 요약해보자면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마치고 오전 수업을 듣는다. 과목은 대체로 자연과학이나 언어 수업이 주를 이룬다. 머리도 말랑, 혀도 말랑한 어린애라 그런지 토나오는 프랑스어도 어느정도 따라갔고, 라틴어는 어렵긴 해도 고딩 때 국어수업보단 할 만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되네. 대체 21세기에 중세 국어따윌 배워야해? 그것도 이과가 말이야.’


새록새록 떠오르는 내 고딩 시절을 마음속에 곱게 접어 던지다보면 오후 간식시간이 찾아온다. 그리곤 때때로 있는 음악수업에서 사교춤을 배우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그나마도 내가 어디 아프다 하면 취소도 자유롭더라. 와우!


‘이러니 얘 머리가 이렇게 나빴지.’


일곱 살이나 됐는데 아는 게 기초중의 기초밖에 없다니 금수저는 이래서 안된다. 성적만 좋으면 가는 의대입학을 위해 시들어가는 21세기 학생들이 봤다면 당장 볼펜으로 고슴도치를 만들었겠지.


‘난 게임 좀 할라치면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쫒아다니셨는데.’


인제와선 그리운 추억이지만, 지금의 나로선 마냥 추억에 잠겨있을 여유가 부족했다.

왜냐하면 나, 아니 파벨의 ‘어머니’와 맞닥뜨릴 일이 생겼기 때문에.


‘아니, 양육권을 황제가 가져온 거 아니었어? 친권은 그냥 놔둔 거야?’


빙의인지 환생인지 아무튼 내가 이 몸에 들어온 후로 종종 황제에게 문병을 갔다.

일단은 집주인이고 신세도 지고있으니 겸사겸사 안부도 묻고 그날 배운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게 다였지만. 그게 황제에겐 색다른 인상을 준 듯 했다.


여느 때처럼 문병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황제의 시녀가 전달하길,

조만간 기도하러 간다는 성 안드레인지 안드레아인지 모를 성인의 축일에 내가 모친을 만나게 해줄 거라고 했단다.


‘내가 떼라도 썼어 아님 엄마 얘기를 했어. 왜 급발진인데?’


얼마나 못 만나게 했으면 애 머릿속에 엄마와 함께 한 기억은 먼지 한톨만큼도 없더라. 엄마 이름이 예카테리나란 걸 아는 게 용하지.


아무리 쭈뼛거려도 이해가 되는 관계라지만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내 쪽엔 정보가 전혀 없었다. 물어볼 사람? 퍽이나.


'용돈 안 줬으면 설사약이라도 구해서 탔다 진짜.'


격려차원에서 황제가 내린 하사품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화려한 세공이 들어간 단검, 금과 은조각이 담겨 두툼한 가죽 주머니, 상자부터 보석인 보석함에 든 귀금속과 귀하다는 옛날 러시아 작가들이 쓴 책들.

내가 열다섯쯤 됐다면 쓸 곳이 무궁무진했을 테지만, 일곱 살인 지금도 썩 방도가 없지만은 않았다.


높은 자리에 있어도 더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편한 건 회사나 궁전이나 똑같다. 나를 좋게 보는 황제가 오늘내일 하는 지금, 다음 거래처를 뚫어두는 건 영업의 기본.


거기에 적당한 '기름칠' 은 그 모든 과정을 매끄럽게 해줄 것이다.


‘알아서 자리까지 깔아줬는데 이걸 마다하면 영업맨이 아니지.’


튜토리얼 따윈 없는 현실 막장 가족사 체험 한달 째.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만국공통의 진리를 되뇌이며 전 영업사원, 현 황족이 된 내 머리는 맹렬히 굴러가고 있었다.


***


거래처를 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전조사와 약속을 마친 매장에 가서 열심히 입을 털며 친분을 쌓는 것. 영업점 사장님이 나이 지긋한 ‘누나 뻘’이라면 얘기는 더 쉬워진다.


문병을 가는 나와 달리 몸이 아파도 황제는 일해야하는 법. 더군다나 입이 떡 벌어지는 드레스만 1만 벌 넘게 갖고 있다는 옐리자베타 황제는 병석에 있을 때조차 몸단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만큼 시간을 조금 앞당겨 가면 내겐 노가리 아니 정보수집할 시간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럼 부인은 폐하께서 여대공이실 때부터 모신 거네요? 엄청 대단해요.”


“전하께 칭찬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낮춰주시지요, 안 그럼 소인이 폐하께 꾸중을 들을 겁니다.”


“아,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 부인은 다정하고 조근조근 재미난 말도 잘해주고 또 예뻐요. 난 계속 얘기하고 싶은데, 안돼요? 바쁜가요?”


“어머나, 호호. 대공 전하와 함께라니, 저야 불감청 고소원이지요.”


50살을 넘긴 여제의 시녀들은 대체로 나이 지긋한 중년의 부인들로, 일찍 결혼하는 여기선 내 나이쯤 되는 손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시무룩한 표정과 아쉬운 눈길, 미련 가득한 말과 삐죽 내민 입술까지. 못생겼어도 커버되는 아이라는 이점을 십분 발휘한 애교에 노회한 귀부인의 입가에 금세 웃음이 걸렸다.


‘내 핸드폰 연락처 절반을 누님뻘로 채운 비결이지.’


이름하여 두 번째 방법, 기존 거래처의 거래처를 소개받기인 것이다.


내 편이 남의 편이고, 남의 편이 또 다른 편이 돼버리는 곳이 궁정이다. 한낱 어린 시동조차 눈과 귀를 열고 다니는 이곳에서 마음 놓고 말할 상대라곤 철없고 머리 나쁜 아이인

나뿐임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심지어 소소한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 역시 소소할 뿐이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곧 있으면 성 안드레이 축일이군요. 두 분 전하를 만나신다 들었사온데 어찌 슬픈 얼굴을 하고 계신지요?”


“응,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날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서 걱정이에요.”


“어머,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난 두 분이 좋아하시는 것도 잘 모르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일부러 애매한 지점에서 말끝을 흐리고 나는 땅을 쳐다봤다. 그러면 뒤따르듯 안타까움과 위로가 조언과 함께 손잡고 찾아들기 마련이니.


“두분께선 전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끼실 거라 생각하지만 음, 소인이 듣기론 황태자비 전하께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치던 누군가의 구덩이 역할쯤 내가 못 맡을 것도 없었다.


***


그렇게 마침내 맞이한 11월의 마지막 날인 성 안드레이 축일.


듣기론 가톨릭에서 가장 유명한 사도인 성 베드로의 남동생이라는데, 솔직히 콩라인인 듯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 사람이라도 베드로의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게 되잖아?


하지만 이곳 러시아 제국에서는, 특히 제국을 주름잡는 정교회란 종교에선 처음으로 부름받은 사도이자 나라의 수호성인이기도 했다.


내가 사는 이곳이 얼마나 큰지 궁전 한켠에 황실 전용 예배당이 있었다. 오늘 미사 아니 예배를 드릴 곳도 그곳이라 가긴 가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죄었다.


지난 30년 간 겨울을 나는데 이골이 나긴 개뿔, 얼마나 추운지 이가 절로 딱딱거렸다.


“대, 대체 왜 이런 날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건데.”


“예?”


“아, 아니야.”


다행스럽게도 누구도 내 투정을 듣지 못한 듯 했다. 의아해하는 시종에게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앞서 걷고 있는 황제를 보았다. 안 그래도 한 덩치 하시는 분이 나 못지 않게 껴입고 있으니 웬 암곰이 걸어가는 듯 했다.


‘애 아빠와 엄마는 먼저 들어간 건가?’


나란히 예배당을 향해 걸어가면서 주변을 슬쩍 훑었지만 보이는 건 시종과 시녀들 뿐이다. 파벨을 엄마와 만나게 해준다 하더니 그 허락의 범위는 내 생각보다 한없이 좁았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진짜 파벨이자 애였다면 모를까 내 나이는 이미 서른, 부모님 보고 싶다며 울고불고 할 나이는 옛저녁에 지난지 오래다.


누가 봐도 난 높은 사람이다! 싶게 생긴 수염 덥수룩한 성직자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마주 인사했다. 안내받으며 들어선 예배당엔 생각보다 따뜻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찰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내 눈이 확 뜨였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끝나가는 가을 태양빛을 받아 색색깔로 반짝이고, 금박을 씌운 듯한 세례반이 한쪽에 놓여있었다. 정교하게 깎은 장미목 제단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자리에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이쪽에 쏟아졌다.


“이모님.”


그리고, 내가 궁금해했던 두 사람이 제단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서선 황제를 반겼다. 흐리멍덩한 얼굴의 남자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차분해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이어 인사했다.


"그래.”


찬바람을 쐬서인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한 옐리자베타는 내게 눈짓했다.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나는 이쪽을 보는 두 쌍의 눈을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못생긴 얼굴을 물려준 게 틀림없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에요. 파벨.”


별로 닮은 구석이 없어보이는, 그래서인지 자식에게도 존칭으로 대답한 여자는 남편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 집안, 답이 없다고 옐리자베타를 따라 앉으며 나는 역시나 하는 마음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디 제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그러면 성당에 헌금도 천원보단 더 내겠습니다. 아멘.’


그래서 존재는 확실히 있는 신께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서울로 돌려보내달라고. 진짜로 성당에 나가보기도 하겠다고.


“폐하께서 허락해주셨다고 들었는데.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파벨?”


그리고 내 기도에 대한 신의 대답은 엿먹어라, 인간아. 인 게 틀림없다.

생물학적 모친 예카테리나 황태자비가 나를 만나러 왔으니까.


작가의말

1. 옐리자베타 여제는 키가 180cm로 엄청난 장신이었는데 재위 말년에 살이 찌는 바람에 초상화를 보면 한 덩치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촌인 안나 여제가 189cm,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가 2m가 넘기도 해서 정통 로마토프 가계가 대대로 키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표트르 3세는 170cm, 파벨은 166cm였죠.


*수정 전에 성 이사악 성당으로 썼는데 다시 찾아보니 이 시기에 성 이사악 성당은 2차 건축 때 세웠던 게 벼락을 맞아 심각하게 훼손을 당해 재건축에 들어갔고, 작중년도인 1761년에 시작해서 40년 후쯤인 1802년에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십년 전쯤에 러시아 관광을 가서 얻은 팜플렛과 위키 등을 검색해봤더니 겨울궁전 내에 황실예배당이 있다고 해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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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전쟁의 전방과 후방(1) +4 24.09.07 417 12 12쪽
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10 21 14쪽
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46 19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69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7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4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2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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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8 13 14쪽
15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60 1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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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5 2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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