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최근연재일 :
2024.09.18 01:07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16,934
추천수 :
540
글자수 :
199,916

작성
24.09.11 23:55
조회
338
추천
15
글자
11쪽

전쟁의 전방과 후방(3)

DUMMY

크림칸국, 자칭하는 국호로는 크림과 킵차크 평원의 왕좌.

세계 제일의 정복자 칭기즈 칸의 후손이 세운 나라 중 하나로 오스만 제국의 번국인 이 나라를 누군가는 이렇게 칭했다.


우리의 피를 먹어치우는 게걸스러운 약탈자들이라고.


"하핫, 러시아의 노예들은 올 때마다 봄철 양떼처럼 살이 피둥피둥 올라있단 말이지. 거기, 가축에만 정신 팔려있지 말고 금 달린 장식도 있는대로 싹 챙겨라! 러시아 놈들이 오기 전에 치고 빠지자!"


"말 안 해도 압니다, 칼가!"


크림 칸국에서 칸 다음가는 지위인 칼가(qalga)와 누레딘(Nureddin)의 명령에 휘하의 코스(kos)들은 입꼬리를 히죽대며 손에 쥔 시미터를 휘둘렀다.

척박한 환경과 모든 성인 남자가 한 명 한 명이 전사인 이들의 칼날에 정주민의 삶을 택한 타타르족과 노가이족들은 비명과 함께 창공에 피를 뿌렸다.


"이거야 원 도통 재미가 없군."


간신히 퇴로를 발견한 이들조차 담벼락의 입 벌린 그림자가 되거나 낚아채여 말발굽에 밟히는 신세로 전락하는 걸 감흥없이 보며 키림 칸은 턱을 매만졌다.


"재미가 없다니요. 아버지 아니 칸?"


"바흐트, 잘 좀 보거라. 우리가 상대하는 놈들을."


칼가로 임명한 장남 바흐트의 모자란 안목에 혀를 끌끌 차며 키림 칸은 시미터의 칼날 끝을 허공에 쭉 뻗었다.


"순 사내놈들 뿐이지. 보아하니 지참금 마련 못한 타타르와 노가이 족 놈들뿐이고, 도시 놈들은 코빼기도 비치질 않는다는 게 뭘 뜻하겠느냐?"


아비의 말에 바흐트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봤다. 스물 셋이란 적지 않은 나이를 허투루 먹진 않은 듯 황량한 마을과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비명 속에서 그의 눈에도 이상한 점이 들어왔다.


"버림패로군요."


"저들 뜻에 반하는 족속들은 이리 된다 보여주려는 게지. 허면 나머지 놈들은 근처 요새에 갔을 테고."


겨울을 나지 못할 가축을 골라 도축하는 그들처럼 보호를 원하면 복종하라는 땅에 붙어사는 족속들답게 교활한 술수다웠다.


'허나 그뿐만은 아닐 테지.'


키림 칸은 먼저 내보냈던 정찰병들의 보고를 되짚었다.

별을 그리듯 세워놓은 놈들의 요새가 사실이라면 그 자체로 기병의 진격은 무산된다. 높은 성벽과 방비된 마을은 가축들이 떼죽음당하는 주트와 더불어 오래도록 그들의 적이었지 않던가.

게다가 초원이 길러낸 그의 감각은 이 상황이 비정상적임을 느꼈다.


왜 말과 양떼를 전부 놔둔 것이지? 얻을 게 없다면 코스의 칼날은 키림 자신에게 향했을 것이다.

어째서 요새 인근의 마을까지 그들의 군대가 들어옴을 인내했을까?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갈 수도 있다 판단했을 텐데.

단순히 지면과 시체가 타들어가는 냄새라고 보기 어려운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이르러선 어떤 징조처럼 여겨졌다.


마치 그들이 이곳에 시선을 집중하길 바랐거나 그저 물러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처럼.


"켈룩, 컥! 무, 무를."


"어어, 왜 그래!"


별안간 벼락이 떨어지듯 소란스러움을 뚫고 귓가를 들린 비명에 키림 칸은 계시를 받듯 살갗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약탈한 술통을 떨군 전사들이 목을 붙잡은 채 켁켁거렸다.

금을 펄펄 끓여 녹인 것을 삼킨 것마냥 물을 찾아대는 것과 달리 얼굴은 숨을 못 쉬는 것처럼 파랗게 질렸다. 고삐를 놓치고 말에서 낙마하거나 상처가 난 부위가 가려운 듯 마구 긁다 피범벅이 되기도 했다.


파블로프 제당거래소가 카자크 유르트에까지 전파한 '녹이는 물', 리퀘파케레가 불러온 염소 가스가 퍼진, 더욱이 그들 자신이 지른 불길에 흩어놓을 공기가 유입될 여지마저 차단된 지면에서 전사들은 폐가 녹아버리는 통증에 하나둘 땅에서 익사해가고 있었다.


"칸이시여! 도네츠 놈들이!"


유목민답게 좋은 키림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건 말발굽에 휘몰아치는 모래바람과 얽매이지 않는 자들, 마트베이 플라토프 하사가 이끄는 돈 카자크 선발대였다.


"카자크 형제들이여,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듯 불신자들을 죽이고 살아남자!"


"모조리 베어버리자! 베어낸 머리통 수만큼 파블로프의 은도 늘어나니!"


군마가 서로 엇갈리듯 때로는 맞부딪히자 살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말과 기수 중 누구의 것일지 모를 심장소리가 귓바퀴를 방망이질하고, 쇳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떨어져나가는 목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샤쉬카와 시미터를 놓친 손에 먼저 밧줄을 쥔 쪽에 생사가 쥐어지는 순간조차도 웃고 있는 이들이 크림 칸국의 전사들 눈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좀 뒤져라, 악귀 새끼들아!"


"이, 이 자식 목이 잘렸는데도 웃고 있다고!"


"소란 떨지 마라! 놈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아, 엇!"


"아버지!"


정신을 차린 키림 칸이 휘하 코스를 다잡으려던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뺨과 말을 찢고 꿰뚫었다. 살이 찢긴 걸 넘어 타들어가는 통증에 고삐를 놓친 칸이 낙마하자 혼란에 빠진 칼가와 누레딘이 보인 틈을 타 마트베이는 샤쉬카를 치켜들었다.


"칸의 목을 베어가자! 산처럼 쌓일 은을 가져갈 자는 우리다!"


"우라아아아!"


군인보단 마적떼에 가까운 함성에 밀린 크림 칸국 전사들이 도망치는 걸 얼마쯤 쫒던 돈 카자크는 플라토프 하사의 명령에 말머리를 돌렸다.

전달받은 대로 가죽을 덧댄 천에 감싼 귀금속을 챙기고, 가축, 그리고 노예가 될 뻔했던 부족민과 죽지 않은 크림칸국 부상병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돈 카자크 대원들은 먼저랄 것 없이 씨익 웃어댔다.


그렇게 이날 전투라 부르기도 뭣한 접전은 단 한 사람만 뒷목을 잡은 채 러시아의 승리로 돌아갔다.


***


삶은 결국 공수래 공수거라.

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조차 텅 빈 손을 관짝 밖에 내놓은 채 저세상으로 갔다는데 개뿔도 없는 내가 돈에 집착해서 뭐할까.

명경지수의 심정으로 기부했다손치면 되는 것이 아니...지!


"돈이라고! 그것도 어디 한 두 개여야 참지!"


아아악! 비명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 펼쳐진 건 노보로시야에서의 접전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본 직후부터였다.


사업을 벌이는 이유가 뭔가. 당연히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기 위해서다. 직원들 잘 챙겨주면 장기적으로 내게도 이득이 되기 마련이니 하는 거기도 하다.

그런 내게 있어 설탕 거래소는 자본증식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어 직원이 돈을 허공에 뿌리는데도 주인은 모르는 상황이 국경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단다.


"우리 제당공장, 그래 솔직히 베이거나 긁힐 곳이 많지. 리퀘파케레도 자칫 파상풍 아니 상처가 덧날까봐 예방차원에서 보내준 거고."


염소란 거대한 물탱크에 몇방울만 넣어도 인체에 치명적인 가스를 뿜어내는 저렴한 소독제의 왕.

고도로 발전된 미래에야 정밀한 농도 조절로 위험성을 최소화하지만, 수은과 비소를 소금처럼 태연히 써대는 이 시대에 그런 섬세함 따윈 예수님 말씀과 다름없다. 아무도 실천 안 한단 말이지.

그러다보니 직원 중에 한 명이 지침을 어기고 물에 섞어 양을 늘려 빼돌리려다 큰일날 뻔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옷만 구멍이 나는 정도로 끝난 것과 별개로 그걸 전해 들은 인근 돈 카자크 연대의 플라토프란 하사가 징발을 요청했고, 군 부대 요청을 우선시하란 지침대로 거래소 직원들은 인근 거래소 것까지 땡겨와서 바쳤다.

그 결과는 때 아닌 화학전 개전이었다.


'아군 부상자 전사율이 줄긴 했다는 건 다행이긴 한데.'


오래전 월남전쟁 당시 고엽제로 피아를 가릴 것 없이 샤워당했다던 일화처럼 인근 지점에서 댕겨온 염소를 오스만 쪽 식수원에 쏟아대고 있다 할 땐 정말이지.

편지를 읽으며 그 사이 날아가버렸을 내 돈이 안녕하고 손을 흔드는 환영을 보기도 했다.


애초에 제조과정은 전부 수작업, 거래소마다 상비케하는 비용에 허리가 휠 지경이다. 돈이라도 받는다면 또 몰라도 군부대가 징발하는 거라 적자나는 건 나뿐이라 생각할수록 눈물이 핑돈다.


"그러게 폐하 앞에서 호언장담을 하시니 그렇지요."


리퀘파케레는 휘발성이 강하니 섞였을지 모를 물은 꼭 끓여서 사용하라는 편지를 작성하는 내 옆에서 어김없이 초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볼 것도 없이 명백히 안드레이 셰드린 짓이다.


"안드레이, 네 은화는 멀쩡할 것 같지?"


"주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계약서 구절을 매일밤마다 확인해야 잠이 오지 말입니다. 자, 지체말고 여기랑 여기, 그리고 여기도 서명하셔야합니다."


"내가 사자 새끼를 키웠군."


듣자하니 오스만 측 장군들이 열뻗쳐서 자객을 보낼 생각도 한다던데, 기왕이면 몸값 비싼 애들로 보내주면 좋겠네. 비용 충당하게.

귀족은 사업이고 나발이고를 금지한다는 예카테리나의 훈시 덕에 내세운 주주의 협박에 나는 집어던진 펜을 도로 주워야했다. 이래서 사람 입이 방정이다.


"후, 그래. 선박 구입은 마쳤고. 연합왕국 쪽 인사에 명의위임하는 건 어떻게 됐지?"


다시 전선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표면상으론 러시아 대 폴란드-리투아니아 더하기 오스만 제국인 전쟁이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프랑스가 폴-리-오 쪽에 한 손 거들고 있는 상황.


저쪽이 물주를 두는 상황에서 우리만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건 비겁한 일이니 영국을 끌어들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저 동네는 돈없다고 아우성을 쳤다. 미국 아니 아메리카 식민지 때문에도 정신없다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퇴짜를 놨지.

그러니 별 수 없이 나도 정정당당하게 영국 명의를 해킹 아니 빌려서 써주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허락은 필요 없었지.


"지시대로 헨리 필 아니 스미스 대표 명의로 이전해두었고, 접선 예상 장소는 오스만 제국령 키프로스 쪽이나 상황에 따라 케팔로니아가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헨리 스미스란 대표는 폴즈 상회에 없다. 헨리 필드 대표의 사돈의 팔촌에 옆집 사람이라고 들었지. 실체가 없다고? 서류상에는 있으면 된 거 아닌가?


"장소가 좀 애매하긴 한데 필드 씨라면 융통성 있게 움직이겠지. 적당할 때 프랑스에도 흘리는 것만 잊지 말라고 해."


오스만으로 상품과 함께 반란 도울 바람잡이도 나를 배를 영국 국적으로 둔갑시킨 것도 그런 이유였다. 꼭 한쪽만 정정당당할 필요는 없지. 우리랑 상대랑 간보는 거래처 뒷통수만 멀쩡해서야 공평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 같이 오스만이든 프랑스든 불타거나 불태워봅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잉글랜드 곡물상들과 조율한 밀포대 수량과 가격 대비 보고서입니다."


"브린들리 상회? 들어본 적이 없는데."


"최근에 런던 곡물 거래소(Corn Exchange, London)에 이름을 올린 곳이라는데, 설립한 곳이라더군요. 거래경험이 없어 대금지급 문제나 운송상의 위험성은 있지만, 쿠라킨, 돌고루코프, 파닌 가문이 제시한 것과 가장 근접한 포대당 가격과 구입할 수 있는 석탄 물량면도-."


물론 아군의 거래조건을 이행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미래보다 돈 벌기 쉽지 않은 지금이었다.


작가의말

퇴근길 폰과 노트북 분실로 죽다 살아난 오리입니다. 개통하고 노트북도 사고 하다보니 늦었습니다. 절대 공지도 없이 잠수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염소는 가격대비 소독효과가 뛰어나서 아직도 현역입니다. 오존 소독은 다 좋은데 소독 후 오염 재발생 문제가 있기도 하고, 오존 자체 때문에도 염소 못지 않게 논란이 많죠.

특히 상처난 피부에 닿거나 공기 중으로 흡수할 경우 폐 속의 수분과 결합해 폐 조직을 손상시킬 수 있어서 실험 시 꼭 후드 안에서 진행하지만, 암만 노력해도 다른 화학물질로 실험실 사건사고가 발생하곤 하지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제목수정)전쟁과 평화의 레가토(1) +1 24.09.18 197 9 12쪽
28 전쟁의 전방과 후방(5) +1 24.09.17 265 11 15쪽
27 전쟁의 전방과 후방(4) +3 24.09.15 275 10 21쪽
» 전쟁의 전방과 후방(3) +2 24.09.11 339 15 11쪽
25 전쟁의 전방과 후방(2) +3 24.09.08 394 15 15쪽
24 전쟁의 전방과 후방(1) +4 24.09.07 418 13 12쪽
23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4)(수정) +5 24.09.04 411 21 14쪽
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46 19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70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8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5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2 17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483 17 14쪽
16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3) +3 24.08.26 488 13 14쪽
15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2) +2 24.08.25 560 13 20쪽
14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19 21 20쪽
13 왕좌를 비워라(3) +9 24.08.22 622 23 16쪽
12 왕좌를 비워라(2) +4 24.08.22 570 19 19쪽
11 왕좌를 비워라(1) +5 24.08.20 633 22 17쪽
10 세 황제의 해(7) +2 24.08.19 573 21 13쪽
9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7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7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3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9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6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6 25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21 21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100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2 19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