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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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오리
작품등록일 :
2024.06.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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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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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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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황제의 해(6)

DUMMY

"철수라 하셨습니까. 사령관 각하?"


"옳게 들었네. 수보로프 중령."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 총사령관은 아끼는 부관의 실망한 목소리에도 담담히 긍정했다.


"귀관들도 알다시피 우리 러시아 제국군은 지난 쿠네르스도르프와 베를린 점령이란 성과를 거두는 쾌거를 달성했다. 허나 여느 전쟁이 그렇듯 우리 역시 적지 않은 손실을 감내해야했지."


용명했던 바실리 카프니스트 대령과 바실리 로푸힌 사령관, 이반 자이빈 중장은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에서 전사했다.

스테판 아프락신 원수는 정치적 알력에 휘말려 군인답게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내심 좋게 봤던 어린 장교들도 조른도르프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목숨을 잃었다.

그외에 이름도 없이 죽어간 13만에 이르는 러시아 병사들이 스러져간 전장의 최전선에서 페르모르 총사령관은 수도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서 있었다.


'얻을 게 있는 선택이었다면 말이지.'


그는 군인이다. 조국에 승리를 가져다주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것도, 자잘한 피해를 일일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너희가 흘린 피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물며 그들의 목숨값도 못 받은 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주게 될 상황인 것을!


"물론 콜베르크를 점령하여 보급로가 한결 수월해진 것은 맞다. 허나 7년 간 이어진 전쟁으로 병력은 소진됐고, 군량은 부족하지만 우리가 얻을 것은 아직 남아있지. 저들의 수도 베를린."


작년 말에 함락시킨 콜베르크를 후방기지로 둔 그들의 목표. 보급 문제로 점령하고도 일시적인 함락에 그쳐야했던 군침 나오는 종점.

콜베르크 남서쪽에 주둔한 플라텐 프로이센 장군이 시도했던 슈테틴과의 연락도 노블로흐 장군을 부툴린 사령관과 페르모르 사령관이 합세해 포위한 채 무산시켰다.

바야흐로 전쟁이 끝을 향해 가는 지금 페르모르 휘하의 지휘관은 사령관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를 기다렸지만,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허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베를린 점령보단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네. 콜베르크와 슈테틴에 주둔중인 군단도 글라츠에 있던 군단도 스트리가우로 이동하게 되었지."


"예? 하오나 그건!"


"전쟁비용 문제였겠지. 언제나 그랬듯."


수도에서 전언이 왔다는 소삭에 향후 전황을 함께 살피려 병영을 찾았던 부툴린 사령관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조국의 발을 번번히 잡았던 건 증오스러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라스푸티차, 그리고 낙후된 식량생산이었기에.


"그래도 성과는 있지 않습니까, 부툴린 사령관 각하."


"저희가 점령한 동프로이센 땅이 제국의 손에 들어오는군요!"


"하하, 이제부터 이름도 바꿔줘야겠습니다. 어디 쾨니히스베르크를 뭐라 불러주면 좋을까!"


"왕의 산이란 의미는 좋잖습니까. 그냥 쿄닉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라 합시다!"


"촌스럽게. 기왕 붙일 거 프로이센 놈들이 질색할 프랑스어로 붙여주자고."


들뜬 부관들은 동프로이센에 속한 지명을 러시아식으로 바꿔부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바빴다. 그 모습에 식은땀이 날 것 같은 페르모르를 대신해 수보로프는 군용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주먹 쥔 손으로 가볍게 두드려 시선을 모았다.


"아직 기뻐하긴 이르네. 우리는 아직 전쟁중일세."


부디 풍문은 풍문으로 끝나기를. 황제의 선택이 소문과는 다르기를.

로마노프 가문의 인장이 찍힌 쌍두독수리가 구겨지도록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며 빌림 빌리모비치 페르모르 사령관은 한숨을 참아내며 말했다.


"그리고 전쟁중엔 예상 못할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지."




"각하. 아직 하시지 못한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부관들이 물러난 막사엔 남아있던 세 사람 중 먼저 포문을 연 건 수보로프였다. 그의 만류로 아직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은 부툴린 사령관이 의아한 듯 페르모르를 바라봤다.


"하지 못한 말이라니?"


"수보로프, 자넨 언제나 눈치가 빠르군."


아들처럼 여기는 수보로프의 말에 페르모르는 내내 손에 움켜쥐고 있던 서한을 내던지듯 탁자에 올려놓았다. 선임자로서 중령보다 먼저 편지를 살핀 부툴린은 구겨진 황실의 문장에 한 번, 편지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이게 무슨. 평화? 평화라니?"


절로 터져나오는 노호성에 부툴린의 이마와 목에 핏대가 섰다. 예상했던 반응에 페르모르가 눈짓하자 수보로프는 중령이란 직위에 아랑곳않고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부툴린 앞에 내놓았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덕에 붉은기가 가신 얼굴 대신 부릅 뜬 눈으로 부툴린 사령관은 따져묻듯 말했다.


"빌림 빌리모비치. 설마 그대도 동의한 것이오?"


페르모르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상관의 명령에 동의하는 부하가 어디있겠습니까.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지요."


"허나 이건.... 중령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수보로프는 제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원수 각하와 나눈 말도 모두 이 친구에게 털어놓을 겁니다."


페르모르의 만류에 무덤덤한 수보로프의 얼굴을 흘긋 살핀 부툴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알겠소. 허나 이건 제국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지 않소."


"말을 삼가십시오, 원수. 논의중일 뿐입니다. 제국 의회가 모두 눈뜬 장님들일 리 없습니다."


"허나 제국 의회는 차르의 옥좌를 지탱하는 손발일 뿐이기도 하지 않소?"


손과 발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머리가 지시한 대로 움직일 뿐.

제국 의회가 아무리 뜯어말린 들 정작 차르와 총리 보론초프 백작이 밀어붙인데도 끝까지 막을 수 있는가?


부툴린 원수의 지적에 페르모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곧 대답이란 걸 아는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부툴린은 머리를 털듯 좌우로 휘저었다.


"부하들에겐 언제 말할 셈이오?"


"....곧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 명령이 내려오면 모두가 알게 될 테지요."


"그것 참 자비로우시군."


존경하는 표트르 1세의 잡역병으로 신뢰를 받았던 부툴린은 눈앞의 믿지 못할 상황에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분의 이름을 물려받은 황제가 이런 선택을 내릴 줄은 예순을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도록 꿈도 꾸지 않았다.


"빌림 빌리모비치, 사령관은 차르께 충성하시오? 아님 그분의 왕좌에 충성하시오?"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그리고 둘 다 같은 말씀이잖습니까."


"틀렸소,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 더군다나 살날도 얼마 안 남은 내가 뭐가 무섭겠소? 무서워해야할 건 차르께서 내리실 이 결정과 그분이 감당하실 대가겠지."


부툴린이 비아냥거림을 남긴 채 막사를 떠난 후 페르모르는 흘긋 이전보다 더 구겨진 통지문에 시선을 두었다.

원수의 말처럼 이 끔찍한 소문이 사실이 되는 날, 제국은 감히 신성한 차르를 용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선택을 해야할 테지.'


어떤 선택이 모두에게, 적어도 그와 가족에게 이로운 선택일지 페르모르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휘라면 모를까 이런 정치적 알력이 얽힌 문제에서 그는 언제나 갈팡질팡했다.


"자네라면 어떠할텐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소장은 그저 제국에 충성할 뿐입니다. 또한 상관의 명령은 비단 장교뿐만 아니라 하사관과 병사에까지 전달되어야하지요."


숨기지 말라.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우리들에게 전해달라.


군인다운 정론에 페르모르는 수보로프에게 감탄하면서도 부러움을 느꼈다.

그의 유능한 부하이자 아들같은 이 남자는 황제가 누가 되든, 그가 올바르게 제국을 이끌건 그렇지 않건 그저 제국의 적을 쳐부수겠지.

하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음도 안다.


"자네가 부럽군."


고뇌에 빠진 상관의 찬사에 담담한 얼굴로 받아들인 수보로프는 문득 막사 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전선에 다가올 혼란스러움에도 영광된 부활절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


러시아엔 이런 속담이 있다. 이유 없이 웃는 것은 바보의 특징이다.


그 말대로 전선에서 들려온 참담한 소식에 3월인데도 겨울 뺨치게 한기가 도는 겨울궁전에서 실없이 웃고 있을 사람은 원인제공자 한 명뿐일 거다.


"결국, 황제 폐하께서는."


존칭을 붙인 건 다른 사람이 있어서지, 딱히 표트르 3세를 존경하거나 어쩌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럴 구석이나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이,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하지요? 폐하는 신성하신 분이고, 당연히 그분께서 내리신 거면 뭐든 옳은 결정일 텐데."


독실한 신자이자 착실한 황실 시종인 안드레이마저 당황케한 그 일은 바로, 표트르가 선언한 프로이센과의 평화 조약이었다.


'평화, 당연히 좋지. 듣기만 해도 좋은 단어잖아.'


작년 말, 병마로 고생하던 옐리자베타 황제를 기쁘게 한 콜베르크 함락 이후 프로이센은 독안에 든 쥐 신세나 다름없었다. 일전에 표트르가 말해준 것처럼 오스트리아, 프랑스랑 함께 러시아가 두드려패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이란 구심점 탓에 러시아 제국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듣기론 무려 13만 8천 명이란 사상자를 냈다고 했다.


'그것도 완전히 전사한 수치지. 중상자 중에서 얼마든지 사망자가 더 나올 수 있고.'


하지만 피를 흘린 쪽이 얻는 게 있어야 끝나는 건 어느 시대의 전쟁이든 같았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점령한 땅 정돈 뚝 떼어 받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게 정상이니까.

하지만 우리의 미친 표트르 3세께선 정상이 아니란 걸 간과한 대가는 막심했다.


"그냥 주신다고 했다고? 돈이나 뭐 그런 것도 없이?"


"예, 예. 전하. 게다가 프로이센측에 콜베르크와 슈테틴에 주둔해있던 군단도 덴마크 왕국 인접 국경으로 옮기라 명하셨다고. 무, 물론 내각에서 반대하여 논의중이라곤 했습니다만."


어떤 일은 논의조차 되어선 안되었다. 부모가 자식을 돈에 팔거나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이 집주인을 해한다거나 하는 것처럼.

다 이긴 싸움인데, 얻을 것도 없이 무상으로 돌려준다니, 그건 패전국이나 할 일이다. 무조건 항복에서나 볼 법한 일이지.


"그냥 주셔도 되는 거야?"


"물론 아니죠! 제 형들은 다들 무사하다지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죽었다고 하던데요. 어떤 마을에선 젊은 장정이 삼분지 일도 안 남았답니다! 돈도 별로 못 받을 테고 병사들한텐 줄 땅도 없을 텐데 하다못해 승리의 영광도 없다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잃게 한 만큼 상대도 잃어야하는 게 인류 보편의 정의다.

얻을 것이 없다면 영광이라는 무형의 자산으로나마 상실의 슬픔을 달래야하건만 표트르 3세는 자신만 기쁜 선택을 내리며 그런 룰을 철저히 무시하다못해 구두굽으로 짓밟으려 하고 있다.


'표트르는 틀린 건가.'


듣자니 금식기간인데도 보론초바 여백작과 다른 귀족의 궁전에도 들릴만큼 뻑적지근하게 파티를 열었다지. 다들 금식하느라 괴로운 와중에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대놓고 제국의 국교를 무시하면서 사제들의 화를 돋구고 있는 와중에 전선에서의 대형사고까지 알려지는 순간 황제의 지지세력은 바람 빠진 풍선 신세가 되겠지.


"안드레이, 부활절 저녁에 같이 식사해주실 수 있는지 황후폐하께 여쭤봐."


"알겠습니다."


문 밖으로 금세 사라지는 안드레이를 보다 나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잠시 감은 눈꺼풀 아래로 멍처한 황제의 면상에 주먹을 꽂는 상상을 하니 속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


부활절, 완연한 봄이 시작되는 춘분이 지나 보름달이 뜨고 맞이하는 첫 일요일.

1762년의 부활절 역시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기 한 시간 전인 밤 11시에 성가대가 부르는 찬송가로 그 시작을 알렸다.


사라진 그리스도의 시신을 찾아 헤매던 것을 되새기듯 상트페테르부르크 곳곳에서 횃불을 든 이들이 정해진 구간을 돌았다.

불길이 마치 띠처럼 거리를 두르며 한순간 낮처럼 밝아진 문밖을 나와 함께 불꺼진 상석에서 보던 이들이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더불어 스승을 배신한 제자 가리옷 유다를 벌하듯 폭죽 같은 폭약이 마치 하늘을 수놓듯 팡팡 터지는 광경에 나는 죽은 지 천 년은 훨씬 지났음에도 욕먹는 어느 배신자를 떠올렸다.


'뼛조각도 안 남았는데 여전히 욕 먹다니. 역시 사람은 줄을 잘 타야해.'


그렇게 지구 멸망의 날까지 욕먹을 남자, 별명 은화 삼십 개를 짧게 애도하는 사이 시신을 찾지 못한 것처럼 행렬이 성당으로 향했다.

그들 앞에 내게도 낯익은 덥수룩한 수염을 단 베니아민 대주교가 몸소 앞으로 나서며 기력이 쇠할 나이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대주교의 외침에 형광등을 켠 듯 수백개의 촛불이 하나둘 켜지며 성당을 환하게 비췄다.

가톨릭과는 다른 미학적인 모자이크와 이콘이 교회 규칙에 따라 배열돼있고, 특유의 장식들이 대낮처럼 밝아진 널따란 공간을 비추자 무신론자조차 감탄하게 할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멋있긴 하네.'


나이를 무색할 만치 유창하게 성찬예배란 것을 시작한 베니아민 대주교의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는 이들이 늘어났다.

사순절 때는 성호를 긋고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바닥에 대는 부복자세를 하는데 규정인데, 이걸 성 에프렘의 기도라고 한다.


나도 예의상 몇번 고개를 숙였다 들었을 때 대주교와 눈이 마주쳤다.

인자한 얼굴로 눈인사를 해주던 대주교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을 땐 거의 욕하는 눈빛으로 바뀌더라. 당연하다시피 내 옆에 서 있던 표트르 3세를 본 것이 분명했다.


'눈으로만 한 게 어디야. 저쪽에서 총 빼들고 결투 신청할 만한 일인걸.'


수업 때 파닌 백작의 웃는 얼굴에서 불길함을 느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표트르가 어떤 선언문에 서명했다.

교회와 수도원 토지의 세속화에 관한 선언문을 부활절 2주 전에 반포한 게 절묘하다고 생각도 들었다.


이 선언문이 겨냥한 건 통치 총회는 표트르 1세가 총대주교좌를 없앤 이래 신성통치종무원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였다.

그런 통치 총회 사무국에서 파견하는 주교들의 재정수입처인 토지를 경제위원회란 정부 부처에 귀속시킨다는 것이 선언문의 주요 내용이었고.


말하자면, 교회 너네 재산 관리 못하지? 그럼 우리가 관리해줄게를 고상하게 돌려말한 셈인데, 하여간 토너없인 돌아가지 않으면서 동이나 서나 종이값 들게 돌려말하길 좋아한다.


돈 관련 문제만큼 비열하고 치사하고 구차한 게 또 없다.

오죽하면 21세기 대한비리민국조차 국회에서 국민의 대표라는 금뱃지들이 나서서 세금 관련 법안을 인준하기 마련인데, 표트르 3세는 그냥 협박만 했다.


내놓을 토지가 있는 교회와 수도원은 제국 의회 상원에 자진 납부할 것.

땅이 없어? 그럼 정부가 주던 지원금이라도 내놔.

교회에 속해있던 농민? 당연히 국영지 농민으로 돌려야지. 아 그러면 교회 소속이 아니니 걔들이 빌린 돈 납부랑 소송도 할 필요 없겠지?


그와중에 돈벼락 맞은 경제위원회에서 교회 의견을 청하겠다며 꽂아놓은 건 또 신성통치종무원 끄나풀이다.

설령 차르가 대머리들은 가발 금지 따윌 선언해도 찬성할 줏대없는 거수기들이 반대를 한다니, 그건 저 동쪽 나라의 아랫쪽 두 지방이 절친이 된다는 소리다. 개소리란 거지.


듣기론 저 아름답고 웅장한 이콘 사용도 금지하려한다는 말도 들리던데, 이쯤되면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다.

그렇게 통치 총회에 쌍 중지를 치켜들고서도 의외로 황제는 부활절 행사에 참여했다.


교회 사제들이 신성한 부활절 날 벤데타를 외치며 황제를 카이사르 시킬 리는 없겠지만 웬만한 담이 아니라고 나도 새삼 표트르를 다시 보긴 했다.

아까보니 예카테리나도 놀란 듯 했는데, 화를 먹는 걸로 푸셨는지 결과물이 코르셋으로도 안 가려지더라. 안타깝게도.


'한쪽은 기분 나쁘고 한쪽은 기분 좋고, 야누스야 뭐야.'


슬쩍 올려다본 표트르 3세의 얼굴은 들뜬 기색이 완연했다. 누가 측근 아니랄까봐 황제와 대각선상에 서 있는 두 단상 뒤의 보론초프 백작과 파닌 선생이 말한 볼코프도 따라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황제와 달리 정교회 신자인 건 분명하지만 딱히 부활절이라 신난 건 아니겠지.


나랑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파닌 백작은 늘 웃는 얼굴이니 넘어가고, 부친과 똑 닮아 한 눈에 알겠는 보론초바 백작부인이 나를 향해 인사하자 가볍게 목례해준 후 아무렇지 않게 예카테리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경제위원회, 또 그 아래로 들어올 막대한 토지수입으로 표트르 3세가 하려고 할 일을.


'전쟁이겠지. 그때 말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대한 황제의 집착. 돈을 잡아먹는 군대와 전쟁중인 상황을 해결할 열쇠는 언제나 돈이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군대는 돈만 나가는 집단이니까.

다시말해, 감당할 돈이 있는 한 전쟁을 벌이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걸 위해 프로이센과 친구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도 한 거고.


부모 양쪽을 티안나게 살피고 고개를 바로하자 앳된 얼굴의 사제가 달걀을 나눠주었다. 고향에서 부활절 달걀이라며 받던 것과 달리 피처럼 새빨간 표면은 그리스도의 피, 딱딱한 껍질은 봉인된 무덤을 상징한다.

죽음과 연관 깊은 축복받은 달걀을 손에 쥐자 때맞춰 성가대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활을 기리는 멜로디가 내 귀엔 기이하게 들려왔다.


"주님께서 죽음으로 죽음을 짓밟으시고, 또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무덤에 있는 망자들에게 생명을 주셨나이다!"


대주교가 선창하듯 외치자 주위에서 답가하듯 부활절 인사를 뱉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 축하 인사가 성당을 가득 채우며 너나할 거 없이 옆에 선 이들을 관습대로 포옹하며 세 번 뺨에 키스를 했다.

자신을 본체만체 하며 보론초바 여백작에게 다가간 표트르 3세를 흘겨보던 예카테리나는 나에게 다가와 그대로 끌어안았다.

불룩 튀어나온 복부에 배가 눌리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입맞춰준 후 떨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요, 파벨. 오랜만에 보니 기쁩니다."


한쌍의 바퀴벌레처럼 붙은 두 남녀를 모른척 하며 우린 손에 쥔 달걀을 서로 부딪혔다.

영어로 에그 헌팅이라 부를 이 과정은 깨어지지 않은 달걀을 가진 사람에게 그 해의 행운이 온다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둘 다 달걀은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하지만 내 눈에 띤 표트르 3세의 달걀은 보론초바 여백작이 부딪혀온 그녀의 달걀에 끝이 부서져 허공에서 소리없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행운처럼.


***


"이것도 들어요, 파벨."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드세요. 이거 정말 맛있어요!"


"입에 맞다니 다행이에요. 나중에 주방장에게 파벨의 칭찬을 전해주면 그도 분명 기뻐할 거에요."


성찬예배를 마치고 분명 모두가 기다렸던 부활절 기념 치팅데이가 펼쳐졌다.

6주 간의 더욱 엄격한 금육기간을 이겨낸 신자들에게 저택과 인근 궁전의 주방은 쉴새없이 음식을 내오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당연히 제국을 선도해야할 로마노프 가문의 겨울 궁전 주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쉬카(Pashka)라 부르는 달콤한 부활절 빵에 스메타나란 사워 크림을 곁들인 캐비어, 연어와 굴, 메추라기에 송아지 고기까지 식탁에 육해공이 포진해있었다.

채소와 고기로 속을 채운 러시아 전통 파이 피에로기가 한가득 담긴 접시가 있는가 하면,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쇠고기 스튜도 한켠에서 끓고 있었다.


굶다시피하다 갑자기 고기가 들어가면 탈날 게 분명했기에 내 첫 선택은 스프와 샐러드였다.

속을 달래놓은 후엔 피에로기 몇 개를 내 접시에 덜어 부활절 달걀과 함께 위장을 채워갔다. 물론 식사예절을 지켜가면서.


'어차피 내가 제일 점잖게 먹고 있고.'


파닌 백작은 진공청소기가 되어 양고기를 흡입중이고, 함께 동석한 그리고리 오를로프란 중위와 포툠킨인지 포템킨인지 모를 하사 한 명, 예전에 자주 봤던 옐리자베타 애인의 동생이라는 키릴 라주모프스키 백작과 기마 근위대의 볼콘스키 중령이란 사람은 누가 군인 아니랄까봐 접시까지 먹어치울 기세다.


예카테리나와 다쉬코바 부인은 그나마 나은 정도였지만, 그게 새모이만큼 먹었단 말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게 말없는 식사를 이어가던 것도 잠시, 얼굴에 기름기가 돌아온 키릴 라주모프스키가 등을 기댄 채 배를 두드렸다.


"후핫, 이제 좀 살 것 같군요. 배에서 하도 꼬르륵대니 대주교 예하께서 해주시는 좋은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지 뭡니까."


"이런, 헤트만 키릴 라주모프스키. 그래서야 전하 앞에서 면이 서시겠어요? 대공께선 저 어린 나이에도 훌륭히 금식을 해내셨는데."


"그야 장차 차르가 되실 후계자 아니십니까. 카자크를 이끌고 반란이나 일으키는 무지렁이들 때려잡는 게 적성인 저와 비교해서야 전하께서 웃으실 겁니다."


키릴 라주모프스키의 능청에 영문 모를 나를 제외한 어른들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 파닌 백작은 아예 너털웃음까지 지었고.


"그거야말로 헤트만의 유능함을 입증해주지요. 당장 그 카자크들이 제국의 통치에 순응하게 된 게 얼마나 되었던가요."


"멀게는 흐멜니츠키, 가깝게는 라진이 있었죠."


"과연 황후 폐하께선 역사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양고기를 썰며 덧붙인 예카테리나의 말에 라주모프스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반역자는 적이지만 감탄할 만한 걸물이었지요. 허나 감히 장담드리자면 헤트만국 관할 하에 있는 이들은 제국이 주는 신분과 안정, 그리고 부에 만족해합니다. 우리가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아랫것으로 여긴 제 동포들과 나란히 서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나 있을지 싶군요."


"우리 러시아에 필요한 건 그들의 샤쉬카이지 주님께 받은 머리가 아니지."


내내 와인잔을 기울이던 볼콘스키 중령이 입을 열었다. 옅은 눈썹에 걸맞게 표정이랄 게 없는 얼굴에 언뜻 분노가 스친 듯했다.

이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을 두 카자크에 새삼 분노할 일은 없으니 원인은 내 짐작대로 동프로이센 일이었다.


"미하일 니키티치. 이만 화를 풀어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잔하요. 한 번 흘러가버린 강물은 되돌릴 수 없지 않겠어요."


"황후 폐하께선 여인이시니 그리 너그러우실 수 있겠지요. 하오나 폐하께선 제국이 피흘려가며 얻어낸 동프로이센 지역을, 하다못해 마땅한 보상도 얻지 못한 채 고스란히 넘겨준다는 결정을 내리셨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고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얼마전인 3월 중순쯤 표트르 3세는 황실회의와 상원에 폭탄선언을 했다.

프로이센 왕국과의 무조건적인 평화협상, 그리고 그 장소는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할 거라는 말에 알현실에 모인 이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하들을 한줌 흙으로 돌려보낸 곳에서 휴전 협정을 한 것도 수치스러운데, 이젠 수도에서 그 짓을 봐야한다니 이게 말이 된답니까?"


얼마 전까지 폴란드 지역에 연대사령관으로서 주둔해있던 볼콘스키 중령(대령도 아닌데 이례적으로 연대 사령관이 되었다)은 노이마르크에서 프로이센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 때문인지 근위 기병 연대의 중령으로 배속받은 후로도 여전히 얼굴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볼콘스키 전하의 말이 옳습니다. 이는 패전국인 프로이센의 베를린에서 우리가 요구할 사항입니다. 그런데 허참, 완전 거꾸로 되어가고 있군!"


"근위대에서도 소란이 일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며 프랑스야 여력이 없다지만 우리가 대체 뭐가 아쉬워 그런 굴욕적인 협상을 한답니까? 돼지처럼 처먹기만 할 줄 아는 내각 놈들은 싸그리 총알밭이로 내세워야지 원!"


"어허, 자중하세요. 폐하와 대공 전하께서 계시잖습니까?"


"나는 괜찮습니다, 니키타 이바노비치. 폐하께선 더는 이 사람이 아닌 보론초바 여백작을 황후로 여기시는 것을요."


"그 무슨 말씀을.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모든 러시아 귀족이 받드는 황후는 예카테리나 폐하 한 분이십니다."


달래듯 말하는 파닌 백작의 위로에도 예카테리나는 불쌍해보이는 얼굴로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모로 꼰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안절부절해하는 남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백작의 다정한 위로를 잊지 않겠어요. 허나 나는 얼마안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파벨도 함께요."


가족방문이나 결혼, 장례식 참석이 아닌 이유로 황후가 후계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하나다. 이혼 혹은 혼인무효.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페테르슈타트에서 내게 한 말처럼 표트르는 내가 친아들인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진짜 살티코프란 남자의 사생아로 만들고 지 애인과 새로운 후계자를 볼 생각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처럼 큰 사건을 여럿 터뜨리고도 또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는 황제에게 이젠 감탄도 나오지 않는데, 나마저 당황케한 예카테리나의 고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설마."


"그래요. 폐하께선 나를 폐하고 보론초바 여백작과 결혼하실 생각이랍니다. 루터교회 식으로. 말이죠"


거저 내준 굴욕적인 전쟁 결과에 인기 많은 황후와의 파혼 예고, 거기에 제국의 근간인 정교회를 무시하는 루터교식 재혼 의혹까지.

소문만으로도 뒷목 잡을 사람이 여럿인데, 그 황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란 생각이 들지.


태연히 식탁 위에 폭탄 두 개를 연달아 던진 예카테리나의 옅은 미소에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고치는 척하며 이마를 짚었다.

표트르 3세는 결국 카이사르처럼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고, 황후는 남편에 대한 킬각을 잡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일 수도 모르지.


그리고 이 또 다른 전쟁의 결말엔 둘 중 한 명의 시체만 남겨지리라.


작가의말

뜨문뜨문 올리는 글인데도 봐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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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3) +6 24.09.02 446 19 15쪽
21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2) +4 24.09.01 470 22 17쪽
20 돈은 내가 벌고, 남이 쓴다(1)(일부내용수정) +3 24.08.30 508 17 15쪽
19 대관식과 폭풍 전야 +5 24.08.29 544 20 20쪽
18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5)(수정) +3 24.08.29 472 17 13쪽
17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4) +5 24.08.28 483 1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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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목수정) 정치란 전쟁의 연장선이다 (1) +2 24.08.24 619 2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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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황제의 해(6) +5 24.08.18 617 24 26쪽
8 세 황제의 해(5) +3 24.08.17 656 23 15쪽
7 세 황제의 해(4) +3 24.08.12 703 18 14쪽
6 세 황제의 해(3) +3 24.08.04 789 26 12쪽
5 세 황제의 해(2) +4 24.06.22 866 21 16쪽
4 세 황제의 해(1) +3 24.06.16 886 25 16쪽
3 1761년 겨울(2) +2 24.06.11 921 21 10쪽
2 1761년 겨울(1) +3 24.06.09 1,100 25 13쪽
1 프롤로그(수정) +2 24.06.09 1,102 1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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