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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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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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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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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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방어는 최선의 공격(2)

DUMMY

시간 역행-라케시스의 실타래.

초고에서 레온하르트에게 주어진 이 능력은 두 가지 기능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시간 역행’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세계 전체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개인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전자는 헬리온도 사용한 적 있고,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기에 이해하기 쉬웠다. 후자를 간단히 말하자면 진통제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칼에 찔려 상처가 났다고 했을 때, 이 특능을 사용하면 상처 부위의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 즉 상처 부위의 시간이 ‘상처가 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위의 시간이 다시 흘러, 상처가 난 시점에 다다르면 다시 상처가 벌어진다. 그러니 치유 마법과는 결이 다르며 사후 치료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거나 계속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움이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지금으로선 괜한 의심을 사기 쉽다.


‘그리고···. 이건 추측이지만, 능력 소유자에겐 다르게 적용되는 것 같아.’


헬리온은 레온하르트와 베일린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훅 끼쳐오는 술 냄새에 창문을 열어 뒀는지 확인한 그는 손에 든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달리안의 상처는 다시 벌어졌는데 내 생채기는 전부 나았지. 이 이론대로라면 내 몸은 계속해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거고···, 술을 잘 마시게 된 것도 어쩌면 이 능력 덕분일지도 모르겠군. 괜찮은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반복하라는 건가.’


무심코 헛웃음을 터트리자 신나게 떠들던 두 사람의 시선이 헬리온에게 집중되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지레 놀란 헬리온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뭐야? 왜 날 봐? 하던 얘기 마저 해.”

“딱 걸렸다. 헬리온, 너 딴생각하고 있었지?”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래.”

“와, 진짜네. 너무해—”


우우우. 레온하르트는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그 모습에 깔깔 웃는 베일린은 술기운이 도는지 얼굴이 조금 붉었다.


“장난이야, 장난.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어.”

“그래···. 다 마셨으면 슬슬 가지 그래?”


술과 탄산수 모두 바닥을 보였다. 세상 귀찮고 피곤해 보이는 헬리온의 얼굴은 불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


모두 방으로 돌아간 후, 고요한 새벽이 찾아왔다.

헬리온은 죽을 만큼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운 채 성경을 읽었다. 시야 끝의 금빛 글자는 여전히 거슬렸다.


[완성도: 1.8%]

[열람 가능 □□□: 초고, 성경]


‘저 검열삭제 같은 네모는 대체 뭔지.’


금빛 글자는 대체로 헬리온에게 우호적이었다. 저 검열삭제를 제외하면.

그에게 보이는 글자 중 검열삭제가 들어간 단어는 [□□□ □□□: 초고], [□□□ □□□: 성경], [□□□의 눈물] 정도였다. 단어를 몰라도 필요한 걸 알아서 띄워 주니 굳이 알아볼 생각은 안 했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초고랑 성경 앞에 붙은 여섯 글자는 같은 거라고 봐도 되려나? 책을 펼친다는 점에서 비슷하니까.’


30년을 살면서 종교라곤 가져 본 적 없는 그에게 왜 성경을 열람할 수 있는 기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술김에 천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인 라피부터 이름을 바꿔야 했다. 세세한 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의 눈물···. 이건 진짜 짐작도 안 가는데. 뭐지? 초고에도 이런 아티팩트는 넣은 적 없는데···.’


그의 모든 특성은 서포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학창 시절 게임을 해도 탱이나 딜만 담당하던 그인데다, 기본적으로 21세기 문명사회를 살아가던 사람으로서 공격 마법을 쓰고 싶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


‘탱이나 힐이라면 딜보다는 자신이 있지.’


헬리온은 문득 이 학교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약간의 변수는 있었지만, ‘왕자와 친해지기’는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다. 불편한 시종도, 어색한 부모도 없이 아이들만 있는 곳에 던져지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사실, 그가 굳이 주인공과 가까워질 이유는 없다. 훗날 안정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이니만큼 위험 부담이 컸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듭 고민한 끝에, 헬리온은 주인공과 가까워지기를 택했다. 가질 필요도 없는 죄책감이 들어서였다.

그는 이 세계를 만들었다. 인물을 조형하고, 지명을 정하고, 대립 구도를 만들고······. 단순히 ‘재미있는 전개’를 위해, 모든 혼란과 분열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레온하르트는, 헬리온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동시에 그가 직접 모든 시련을 부여한 존재였다. 만약 세계를 조형해낸 이후, 아무런 전개도 정해두지 않았다면 평화로웠을지도 모르는 그의 인생에 장애물을 설치한 장본인이다.

부모에 대한 정을 버렸듯, 다른 모든 정도 버릴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헬리온 딜라드는 지금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살아 숨 쉰다.

본인이 만들어낸 창조물을 제 손으로 파괴하고 싶어 하는 이는 예술가 정도일 테다. 더 나은 창조물을 빚어내겠다는 목표가 있으니까. 그러나 헬리온은 예술가가 아니었고, 엉망진창인 초고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주인공의 시련을 함께 감당하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언젠가 이 죄책감이랑 동정심 때문에 크게 화를 입을 거다, 진짜로.’


그래도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다. 헬리온은 그런 사람이었다.

점점 잠이 쏟아졌다. 알코올로 조금 맑아졌던 정신은 뒤늦게 올라오는 피로를 막을 수 없었다. 옆구리에 웅크린 고양이는 따끈했고, 온종일 구른 몸은 나른했다. 헬리온은 거의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헬리온은 수업 시작 3분 전 아슬아슬하게 강의실에 뛰어 들어왔다. 다른 수업이라면 몰라도, 마법 기초 수업은 1초라도 지각하면 그날 수업 직후 배운 내용을 요약하여 발표해야 했다. 주인공을 적당히 서포트하며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아직 놓지 못한 헬리온은 거칠게 숨을 고르며 빈자리에 앉았다.


“오, 헬리온이네? 좋은 아침. 넌 항상 뛰어오더라. 아침잠이 많은가?”

“···프레이야, 베일린은 어디다 버리고 여기 있어?”

“걘 오늘 땡땡이. 뭐라더라, ‘이딴 지루한 강의를 듣고 앉아 있을 바에야 차라리 검술 연습을 더 하겠다’고···.”


짐작 가는 구석이 있다. 어쩐지 아침부터 레온하르트의 방이 조용하더니, 수업에 일찍 간 게 아니라 같이 대련이라도 하러 간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제적당하면 어떡하지? 룸메이트가 없는 기숙사 생활은 너무 쓸쓸한데!”

“그런 건 계산 잘하니까 알아서 출석 일수 맞추겠지···.”


프레이야와 대화라면 기가 쪽 빨리는 기분이었다. 베일린도 활발하지만, 프레이야는 결이 달랐다. 그 둘이 룸메이트인 게 어찌나 다행인지. 헬리온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잠을 쫓았다.


“성실해 보이는데 아침 수업은 항상 아슬아슬하단 말이야. 수업 끝나고 뭐 해?”

“···미친 과학자 기분 맞춰주기.”

“아···. 달리안이구나.”


아직까진 달리안의 성별을 여자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헬리온과 그 주변인은 달리안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기에 그가 남자라는 사실과 본성을 알게 되었지만, ‘달리안’과 ‘달리아’는 얼핏 들으면 잘 구분되지 않는 데다 객관적으로 귀여운 외모를 지닌 달리안은 모든 학생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본인 또한 딱히 해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다들 걔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알아야 해.’


몇 주간 달리안에게 굴려진 헬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 기초와 실전 면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스승이었지만, 그 외에는 전부 자기 마음대로였다. 헬리온이 생각보다 잘 따라온다는 걸 안 이후로는 그 강도가 더 심해졌다.


‘에테르 순도가 높으면 위력이 통상의 2.5배라나 뭐라나 하면서 엄청 들떠있었지, 어제도.’


실험용 모르모트가 된 기분이었다. 프레이야는 그 고충을 이해한다는 듯 헬리온의 등을 토닥였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든 걸 보니 교수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헬리온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책을 꺼냈다. 프레이야가 옆에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와, 마틴 오늘따라 왜 저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논문 통과라도 됐나 보지···. 아, 아니다. 저건 그 표정은 아니야.”

“정숙.”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1학년의 마법 기초 수업, 2학년의 마법 심화 수업을 모두 담당하는 마틴 교수는 무뚝뚝하고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기로 유명했다. 그는 조용해진 학생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서클 여는 법을 배웠지. 이번 주엔 간단한 공격·방어 마법 이론을 배우도록 하겠다.”


달리안에게 죽도록 많이 들은 수업이었다. 분명 자다가도 반사적으로 물음에 대해 답할 수 있을 테다. 헬리온은 수업을 듣는 척 자세를 잡고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울 계획을 세웠다.


“그 전에,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봐 두는 게 좋겠지. 들어오도록.”


마틴 교수는 항상 이론을 배우기 전에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서클을 여는 수업에서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공격과 방어는 한 번에 보여주는 게 시각적으로 잘 전달될 테니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구한 것이리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은 이 때문이었나 보다.

문제는 그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달리안이라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마틴 교수님의 시연을 돕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부드러운 미소는 누구나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학생 중 표정 변화가 없는 건 프레이야와 헬리온 둘 뿐이었다. 마틴은 달리안을 옆에 두고 설명했다.


“공격 마법은 그 종류도 위력도 천차만별이지만, 이왕이면 가볍게 보여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걸 보여주는 게 좋겠다 싶어 부탁하게 되었다. 화염 마법이 특기라고 했지?”

“네에. 그 외에도 거의 다 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가식적인 낯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헬리온을 붙잡고 미친 듯이 굴려대는 달리안과는 다른 사람인가 싶어질 정도였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 시연을 시작하려는 순간, 달리안은 헬리온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교수님.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뭐지?”

“방어 마법 시연을 다른 학생에게 부탁하고 싶은데요.”


강의실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예습을 통해 이론을 익힌 이는 있어도, 실전 경험은 없는 아이들이 절대다수였기에 꽤 위험한 제안이었다. 교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난색을 보였다.


“이 중에 실제로 방어 마법을 구현해 본 학생은 없는 걸로 아는데. 너무 위험한 게 아닌가?”

“걱정 마세요. 적임자를 한 명 알고 있거든요.”


프레이야는 헬리온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베일린처럼 남자 기숙사에 놀러 오지는 않았으나 밥은 항상 같이 먹었고, 나름 친하다고 할 수 있었다. 헬리온은 필사적으로 눈을 피했다.


“헬리온? 나와.”


웃음기 가득한 달콤한 목소리는 헬리온에게 공포 이외의 감정을 주지 못했다. 그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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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균열 너머의 세계(1) 24.09.09 4 0 9쪽
38 38. 비밀 결사(4) 24.09.06 4 0 10쪽
37 37. 비밀 결사(3) 24.09.04 8 0 9쪽
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7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8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9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8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8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8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9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9 0 10쪽
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1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0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0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0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1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3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0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1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4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3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6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19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7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6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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