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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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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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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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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38화

DUMMY

38화




형 과도경방과 동생 과도경전. 쌍둥이 형제 중 나선 이는 비교적 침착한 성품의 형이 아닌 다혈질의 동생이었다.


“신천 그 녀석을 꺾었다고 그리 자신이 넘치는 건가? 조금 과한데.”


과도경전이 기다란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납도했다. 코등이와 도집의 충돌음이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탁—


그러면서 조소하자, 한쪽 입꼬리만 위로 휘어지는 입매에서 섬찟한 기색이 실처럼 풀려나왔다. 그런 동생의 어깨를 짚으면서 나란히 서는 과도경방.


“방심은 금물이다. 형제.”

“알고 있다, 형제. 나는 신천이 아니야.”


그처럼 연거푸 언급되는 소이신천. 그를 들은 견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 차례 주억였다.


“신천이 천진에서 죽은 놈인가 보군.”


견신이 궁을 나선 뒤 행한 살인은 천진과 창주에서 벌인 두 건이 전부. 창주 쪽은 신원이 명백하니, 자연스레 신천은 천진에서 죽은 이들의 수장이 되는 셈이었다.


확인은 과도경전이 해주었다.


“거 싸울 때 싸우더라도 통성명은 하지 그랬나.”

“통성명 없이 들이닥치던데, 다짜고짜 죽이고. 아무튼 내 오라 하였음에도 오지 않고 납도한다?”

“하여튼 신천, 그 녀석은 보는 눈이 없지.”

“······.”

“한참 어리긴 하나, 네 그 기백. 봐줄 만하다. 예상보다 많이 어리기는 하나, 진짜 무사였어. 무사라면 응당 자격이 있지, 이리 나와 손을 겪을 자격이.”


그는 주변 횃불들이 비추는 견신을 찬찬히 뜯어보던 중 견신의 뒤, 어렴풋이 보이는 시신을 발견했다. 세로로 쪼개진 축자뇌각을.


흠칫—


그에 내심 조금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한참 어린 상대, 무사에게 그런 속내를 들킬 수는 없으니까. 같은 무사로서.


‘단칼, 분명 단칼에 한 것이다.’


아무튼 놀라운 일이다. 변절자, 축자뇌각은 단칼에 당했다. 틀림없이.


상대를 세로로 쪼개는 일 자체가 드물거니와, 여러 차례의 칼질로 하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 격전 중에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으니까.


승자가 죽은 상대에게 극도의 원한을 품은 나머지 사체를 훼손하여 모욕을 주려는 경우. 또는 승자가 사체 훼손을 즐기는 자일 경우. 그 두 가지 경우라면 또 모를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따라서 축자뇌각은 단칼에 저리된 거고, 그렇다면 이는 아주 놀라운 일이다. 축자뇌각이 쓰러진 위치상 형주 사람 고사에게 죽었다는 뜻이고, 이는 물건의 두 번째 운반자, 고사가 상식 밖의 고수임을 시사하는 증거니까.


축자뇌각이 반항할 수 없는 상태로, 똑바로 ‘나 죽여줍쇼.’ 하고 서 있는 상태였다면 상당한 수준의 외공과 날카로운 도검. 그 둘로 가능한 일이겠으나 결박당한 흔적 등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어디서도.


얼마 전 천진 조운선에서 소이신천이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보기 드문 소년 고수라며 생각한 건 사실이나, 이 정도 수준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상상 이상이다.


‘이놈··· 고수다, 희귀한.’


병기의 날카로움은 일정 수준 이후, 실전에서의 효용, 그 차이가 미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병기를 다루는 자, 무사다.


병기는 어디까지나 수단이고 도구일 뿐, 무(武)의 구현, 그 주체는 무사다. 무사의 외공이 중요한 것이다. 근력, 빠름, 정확성 등등.


사람의 몸을 수직으로, 단칼에 쪼개는 일에는 날카로운 병기도 필요하지만, 그전에 격이 다른 외공이 필요하다는 의미. 따라서 고사는 그런 외공을 성취한 고수가 되는 셈이고.


‘천재··· 천재다. 저놈.’


놀랍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그 어떤 기대와 희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서 정수리를 저릿하게 자극했다.


엇비슷한 수준의 고수를, 그러나 이겨낼 수 있는 상대를 만나서 무(武)를 견주는 일은 기연이다. 진정한 성취는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무사에게 벽은 깨달음 또는 고수와의 대결, 오직 그 둘을 통해서만 넘을 수 있는 난관이므로.




그처럼 경탄과 약간의 공포 그리고 기대와 희열을 만끽하는 과도경전의 귀로, 견신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생사결이군.”

“그래. 염류(念流), 과도경전이다.”


견신은 대결에 앞서 저를 소개하는 과도경전과 그의 주변에서 멀어지는 과도경방 등을 확인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끄덕—


과도경전이 적이라는 사실 포함,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서 한 사람의 무사임을 이해하고 인정했다. 무사로서 승부를 내고자 하는 것임을.


그게 아니라면 그대로 기세를 몰아서 짓쳐 들었을 테니까. 물건의 회수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병기를 휘둘렀을 것이므로.


녀석은 연판장보다 무(武)를 우선시하고 있고, 그리하여 사물보다 또 목숨보다 무(武)를 우선시하는 자. 무사다.


“팔문검법(八問劍法), 고사.”

“팔문이라··· 오묘한 이름. 내력을 묻고 싶으나 생사결의 질문은 본디 하나라지. 물건은 너에게 있나?”

“있다.”

“좋군.”

“흑회인가, 부역자인가.”

“흑회.”

“좋군.”


그렇게 각자 무(武)와 명예를 내건 문답을 주고받은 두 사람. 견신도 과도경전도 참이냐며 의심하지도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런 두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지켜보는 이들의 특별한 반응을 끌어냈다. 물건이 있다는 대목에서는 과도경방 일행과 세 호위 일행이 모두 반응했고, 흑회임을 인정하는 대목에서는 세 호위와 홍소화 일행이 반응했다.


[!!!!!!]


그러는 사이, 견신과 과도경전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별다른 신호 없이도 일제히 생사결에 돌입한 것.


두 사람의 거리는 여섯 보(步). 과도경전은 오른발을 일 보 내밀면서 몸을 틀고 숙인 뒤 무릎을 아주 천천히 굽히는 모습.


스윽—


왼손은 도집의 입구를 쥐고 구부린 엄지를 코등이에 가져다 붙였다. 오른손은 도파의 위 허공에 일 촌쯤 간격을 두고 떠 있었고.


반면에 견신은 왼손으로 쥔 검을 비스듬히 내려트린 자세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왼쪽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를 따라 과도경전도 몸을 틀었고.


과도경전의 자세를 본 견신은 발도술 혹은 발도술과 연계한 공세를 예상할 수 있었으며 과도경전은 견신이 선수비 후 반격할 심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더, 견신은 과도경전의 오른손이 아주 희미하게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미묘하게.


무사는 스스로 단련한 감각을 믿어야 하는 법.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손바닥 안쪽에 반짝인 그것이 공력이라고 생각했다.


‘···공력인가.’


전생 시절 금릉 전투 당시 팔이 잘렸을 때 확실히 깨달았다. 공력을 머금은 손과 병기에는 미묘한 빛이 감돈다는 것을.


공력은 근력으로 상징되는 힘이 아니다. 공력은 특정한 성질을 극대화하는 힘. 이를테면 단단함이나 첨예함 같은 성질을.


그래서 그 당시 공력이 깃든 칼이, 사검 고사가 휘두른 창대와 그를 쥔 팔까지 두 동강 낼 수 있었던 거고.


그때를 떠올려서 그런 것인지, 오래전 그날 잘린 팔뚝에서 당시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저릿—




그처럼 견신이 멀쩡하게 달린 팔에서 환상통을 느끼는 사이, 견신과 과도경전을 지켜보는 이들은 승부의 향방을 주목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어느 한순간, 과도경전의 좌우 수레에 꽂힌 횃불이 꺼지는, 그에 밤의 어둠이 과도경전을 에워싸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맹수의 눈으로 견신을 주시 중이었던 과도경전이 움직였다. 두 다리 근육을 일시에 폭발하듯 이완, 그 힘을 통해 활시위를 벗어난 살처럼 육신을 밀어붙였다.


[!!!!!!]


삽시에 거리를 좁히는 가운데 왼손 엄지로 코등이를 있는 힘껏 밀어 올리고.


딸깍—


그에 도파는 대기 중이던 오른손의 권역에 진입했다. 이제 남은 건, 육신의 쇄도에 더해 도를 쏘듯이 휘둘러 상대를 베는 것.


염류 발도술의 오의, 생념일사(生念一死)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하나의 죽음도 일어난다는 뜻.


마치 빛살처럼 다가오는 공세. 그러나 빛이 없기에, 볼 수 없다. 공기가 밀려나는 소리와 어둠의 묘한 이지러짐 등을 통해 느낄 수만, 짐작할 수만 있다.


다시 한번 그러나, 공세를 마주하는 상대는 불세출의 검사다. 전생 시절 경험한 온갖 종류의 공세를 심신이, 영혼이 기억한다.


견신의 의식에서도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동영(東瀛) 정통 발도술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그러나 능히 짐작한다. 그를 응용한 많은 수법을 경험한 바 있으므로.


발도술은 무도의 여러 이치 중 쾌(快), 쇄(碎). 그 두 가지 이치의 극치를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쾌는 빠름의 이상향이요, 쇄는 첨예 즉, 날카로움의 이상향. 즉, 날카롭게 베고 찔러 부수는 것. 그것이 쇄가 추구하는 이상이다.


그런 쾌, 쇄의 결합에는 육신 근력을 포함, 상당한 기력이 필요하고.


따라서 상대가 피하는 순간, 치명적인 허점을 노출하게 된다. 응축한 힘을 폭발시킴으로써 그 위력을 발휘하는 수법이기에, 한 번 전개하면 회수 불가능이기 때문.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뛰어난 보신경이 보조하는 발도술, 그 도격의 권역을 예상하고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또 짙은 어둠 속에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쾌와 쇄의 극치 그 결합을 파훼할 수 있는가.


답은 죽음, 거기 있을 것이다. 백여 년 전 한 차례 잃은 팔에서 느껴지는 환상통과 함께 그들이 차례로 명멸했다. 망자들이.


‘서달도 죽고, 여로도 죽고, 부모 형제도 죽고.’


그 겨울 마을을 떠난 후, 동상에 걸린 팔다리를 자르면서 시작된 죽음은 서주성에서 만난 원(元) 승상 탈탈이 몰고 온 죽음, 매형들과 조카들의 죽음, 여로의 죽음, 가족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죽음은 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마침내 벗어났음에도 이어졌다. 역전의 장수들, 책사들이 적의 도검 아닌 다른 어떤 무엇과 마주하여 죽어갔다. 전쟁이 끝났으나 죽음은 끝나지 않은 것.


제명에 또 무사히 늙어 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원장 그 녀석 정도.


‘죽음은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통 중 하나인 죽음은 벽력과 닮았다. 종종 예고 없이도 찾아왔고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찰나에 작렬했다. 육신부터 정신은 물론 생애의 기억, 인연의 추억까지 모조리 앗아갔고.


그런 죽음 앞에서는 어떤 시도도 무용지물이었다. 죽음은 모든 노력을 튕겨냈고 허사로 만들었으며,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였고 아주 오래전에 정해진 일이며,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죽음은 만 가지 시도를 거부하므로 모자란 병사는 가족도 형제자매도 전우도, 누구 하나 구할 수 없었음이다.’


그런 죽음과 벽력의 의(意)를 검의 이치로 녹여낸 총아를, 무도의 네 번째 이치이자 쇄(碎)의 상극을 탄(彈)이라 한다.


‘팔문 사식.’


바로 그 탄에 윤회로 얻은 생에서 깨달은 이치를 하나 더 한다. 공력의 투사를.


공력이 투사된 병기로 구현하는 쾌와 쇄의 공세를 기여가 공력 없이 감당할 수 없을 듯하여.


곧바로 단전에서 태동하는 공력의 울림. 음양오행으로 분리하여 양의 기운은 양맥을, 음의 기운은 음맥을 따라 흐르게 한다.


양의 독맥과 음의 임맥을 벗어나면 오행으로 분리, 상극의 이치를 통해 각각 오행의 성질을 띤 오장육부와 서로 밀어내게 함으로써 경맥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손바닥 중심 노궁혈에 이르러 다시 오행이 음양으로, 음양이 태극으로 합쳐지니 기여가 오행 중 쇠(金)라고 해도 능히 어우러질 수 있음이다. 태극은 음양오행의 본질, 만물의 원형이므로.


이내 어둠 속에서 쇄도하여 모습을 드러낸 상대의 도가 우전방 하단에서 사선으로 궤적을 늘이니.


쐐—애—액—


그 궤적의 한가운데 기여를 거꾸로 세운다. 왼손으로 검파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날의 하단을 받친다. 검으로 벽을 세우듯이.


‘탄벽(彈霹).’


그러고는 검을 받치는 두 손에 탄(彈)의 이치를 더해 잘게 또 빠르게 진동케 하여 상대의 도를 능히 감당케 한다.


까—앙—


범위는 미세하지만 내포한 힘은 격렬한 진동, 파동은 모든 힘을 튕겨내는, 거부하는 위력을 가졌고 생념일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여와 견신까지 단번에 베고자 했던 과도경전의 도가 직후방으로 강하게 튕겨 나가면서 주인의 손아귀를 이탈하고, 병기를 잃어버린 과도경전의 가슴을, 금세 자세를 바꾼 기여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푹—


곧바로 심장과 폐가 찢기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부릅뜬 과도경전의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꺼걱— 초··· 식··· 이···?”


견신의 뇌까림이 그의 청신경을 매만졌고.


“팔문 사식, 탄벽.”

“탄··· 벽··· 완벽··· 한···”


기여가 그의 몸을 빠져나오는 순간, 영혼과의 연결이 단절된 육신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쿵—




#




흑회 일행 중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과도경방뿐이었다. 과도경전이 패한 뒤 곧바로 흑회의 개화무사 여섯이 일제히 협공했으나, 차례차례 목숨을 잃었고, 지금 과도경방도 칼을 내려치려던 자세 그대로, 명치를 뚫은 기여를 내려다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쑤욱—


기여가 빠져나가자,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은 과도경방이 얼른 칼을 세워 땅을 짚었다. 위가 찢어진 그의 입에서 더운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쿨럭—


연거푸 피를 게워 내는 그에게 견신이 물었다.


“회주는 무도관에 있나?”


견신이 그처럼 정중하게 물은 까닭은 과도경방 역시 무사의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


다시금 한 움큼 피를 게워 낸 과도경방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고, 견신은 그 답의 의미가 모름이 아닌 거부임을 깨달았다. 고문할 생각도 없지만, 고문한다고 말할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깨달았고.


“격군들도 다 달아났겠지. 죽었거나.”


과도 형제와 일행이 상륙하기 직전에 노를 저으라는 외침을 들었으니, 배에 격군들이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시간이 꽤 흐른 만큼 배도 다 탔을 거고, 격군들도 살길을 찾아서 흩어졌거나 도강 중에 몸이 얼어 죽었을 터였다. 잡은들 격군의 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을 거고.


“도와주기를 원하나?”

“후욱— 후욱—”


견신을 올려다보며 가쁜 숨을 헐떡이는 과도경방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을 줄여달라는 뜻. 죽여달라는 의미다.


그에 견신이 잠시 그런 과도경방을 바라보다가 한순간, 기여를 가로 그었고 과도경방의 목이 떨어졌다.


툭—




그때 홍소화를 비롯,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은 떨어진 목이 아닌 견신의 등을 보고 있었다.


[······.]


피를 게워 내던 직전과 달리 편해진 얼굴의 수급을 내려보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는 견신의 등을.


한 시진은 더 지나야 동이 틀 새벽. 안개는 한층 더 짙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생존자들의 막막한 심정처럼. 또 그들에게 남겨진 죄책감과 슬픔처럼.




이윽고, 나무에 앉아서 줄곧 그 모든 풍경을 내려다보던 부엉이가 새하얀 날갯짓과 함께 나뭇가지를 떠났다.


퍼드득—




#




봄기운이 며칠 새 조금 세를 늘린 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귀 언저리를 스치는 바람에도 전과 다른 온기가 실려 있었고, 태양이 하늘과 땅 사이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를 증명하듯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낮 동안 언 땅을 녹이느라 애쓴 해가 슬슬 돌아갈 준비를 마칠 때쯤,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트린 행렬이 북쪽에서 덕주(德州)로 진입했다.


무명과 거적을 덮은 수레들을 끌고 고을로 들어서는 이들은 견신과 그 일행이었다. 홍소화와 산서상인, 세 호위, 정검당도 함께였다.


수레바퀴가 녹은 땅 위를 구르며 덜그럭거렸다. 그들이 도시 외곽으로 들어서자, 거기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저기 온다. 저들이다. 가자.”

[예!]


연락받고 견신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산서상인 소속 덕주 사업체들을 총괄하는 행수 문국과 식솔들이었다.


“···저게 다 시신이란 말인가. 한 하늘을 이고 살 순 없는 운명이구나.”


마흔 줄, 통통한 체격. 넉넉한 인상의 문국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식솔들 포함 많은 망자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


말과 나귀가 낑낑대며 끌고 오는 짐수레들의 배가 볼록하게, 산더미처럼 솟은 모습. 거기 거적과 무명 아래, 삐져나온 것은 분명 사람의 손발이었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인 산동 북부에서 이게 다 무슨 흉사인지. 좌우지간에 흑회와는 양립 불가능한 운명임이 확실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였다. 그런 사선을 뚫고 나온 젊은 행수. 도방 혹은 대방의 호위들과 엇비슷한 수준의 무위를 가졌다고 평가되는 소년 무사.


젊은 행수는 대방의 자녀를 제외한 나머지 행수 중 최연소, 전국을 오가는 행수 중에서도 최연소 인물이다. 대방의 자녀들은 이쪽처럼 고을을 맡았으니까.


또 평가대로라면 소년 무사도 최연소 인물이다. 열다섯 나이에 그 정도 무위는 금시초문.


‘저처럼 어린 인사가 장래 초현 혹은 화중에 이를지도 모르는 고수라니. 정녕 놀랍군.’


며칠 전 소년 무사의 검에 죽은 흑회 인물 중 과도경방과 과도경전이 있다고 했다. 상인이 취합한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쌍둥이 형제고 흑회에서 강북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요인들이었다.


그런 요인 둘을 제압했다는 건 소년 무사가 그 나이대의 실력 아니, 한계를 훨씬 초월한 고수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미 고수인데 이제 겨우 열다섯이니, 잠재력도 차고 넘치는 인물인 셈.


그에 대방과 도방들 모두 형주 사람 고사를 각별하게 대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당연한 조처다. 투자 중 제일은 사람에게 하는 투자고, 장사 중 가장 큰 이문을 남기는 장사는 사람 장사니까.




준비한 관들을 실은 수레들 뒤로 따라붙은 그가 맨 앞 견신과 홍소화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홍 행수. 이리 뵙게 되어서 참··· 그나마 행수께서 성하시니 하늘이 도왔습니다.”


화답은 식구인 홍소화가 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행수 어른. 여기 이쪽이 고 대협이십니다.”

“산서상인의 행수, 문가 국이라 합니다. 고 대협.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상의 대방부터 도방까지, 모두 대협을 각별히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금일은 해도 졌으니, 덕주에서 하루 유하시지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견신이 마주 예를 취하며 대답하자, 문국이 식솔들을 재촉했다.


“다들 서둘러주게!”

[예! 행수!]


그의 식솔들은 지치고 침통한 기색의 식구들을 말없이 도닥이며 빠르게 움직였다.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그들에게서 말과 나귀의 고삐를 넘겨받고, 짐 위의 시신들을 준비한 관과 수레에 옮겼다.


그러자, 고삐를 넘겨주는 게 신호였다는 듯 홍소화의 식솔들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다는 듯 가까스로 버텼다는 듯 일제히 주저앉으려는 그들을 문국의 식솔들이 얼른 부축했다.


[어엇!]

[이, 이보게!]


팔과 겨드랑이 그리고 허리 등을 부축하는 이들의 눈에 띈 건 눈물이었다. 애써 막고 있었던, 같은 식구를 만났음에 안도하면서도 북받쳐 오르는 눈물.


그에 문국의 식솔들이 부축한 식구들을 수레에 앉혀주며 조심스레 어깨를 다독였고, 이내 흐느끼는 소리는 통곡이 되었다.


[아아아—]


저 아득한 멀리, 서쪽에서 달려온 노란 노을이 투명한 눈물과 얼굴을 물들이고, 견신과 홍소화 그리고 문국은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가만히.


[······.]


견신은 담담한 기색이었고, 홍소화는 애써 참는 기색, 문국은 홍소화를 곁눈질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그처럼 잠시, 각자 상념에 잠겨서 밀려드는 슬픔 그 파도에 심신이 젖어 들던 때였다. 북쪽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인마(人馬)들의 기척이 들려온 것은.


두두두두—


그에 견신을 비롯해 산서상인, 정검당의 슬픔과 다소의 거리를 둔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


상당히 급하게 달려오는 모양새. 덕주 권역이니만큼 당연히 흑회도 도적 무리도 아니다.


이내 그들이 가까워지자, 견신의 눈이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깃발이었다. 테두리를 붉게 칠한 노란 바탕의 가운데 검은색으로 글자를 쓴, 아주 익숙한 생김새의 깃발이었다.


아마도 그 글자는 대명(大明)일 터.


‘···대명.’


역시나, 글자는 대명이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파발들인 것.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파발치고 그 인원이 상당히 많다는 점. 보통 서넛쯤 많아도 네다섯쯤인데, 그 두 배인 열이 넘는다.




그처럼 견신이 포착한 의아한 점을 공손신정을 비롯한 세 호위도 인식한 그 순간, 파발의 선두가 진입 중에 소리쳤다.


“덕주의 신민들은 들어라! 천순 팔 년 금일에 이르러 천순 폐하께서 붕어하셨노라!”


쿵—


곧바로 견신과 세 호위의 가슴이 급격하게 침하하고, 네 사람의 시야에 스며드는 노을은 더는 황금빛이 아니었다. 새빨간, 핏빛이었다.


작가의말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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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39화 +43 24.09.09 9,145 495 22쪽
» 38화 +47 24.09.03 9,873 505 21쪽
38 37화 +17 24.08.30 9,003 385 18쪽
37 36화 +21 24.08.29 9,363 409 21쪽
36 35화 +15 24.08.27 9,265 403 19쪽
35 34화 +12 24.08.26 9,317 372 23쪽
34 33화 +18 24.08.23 9,694 427 20쪽
33 32화 +15 24.08.21 9,626 379 20쪽
32 31화 +25 24.08.20 9,743 382 18쪽
31 30화 +24 24.08.16 10,334 437 16쪽
30 29화 +21 24.08.15 9,873 484 21쪽
29 28화 +34 24.08.13 10,236 370 21쪽
28 27화 +25 24.08.12 9,948 394 20쪽
27 26화 +26 24.08.09 10,219 446 20쪽
26 25화 +20 24.08.08 10,704 388 18쪽
25 24화 +23 24.08.07 10,459 430 20쪽
24 23화 +20 24.08.05 10,437 390 21쪽
23 22화 +25 24.08.02 10,579 457 21쪽
22 21화 +14 24.08.01 10,862 390 18쪽
21 20화 +16 24.07.31 11,086 401 21쪽
20 19화 +21 24.07.30 11,036 464 18쪽
19 18화 +16 24.07.29 11,447 431 21쪽
18 17화 +32 24.07.26 11,380 58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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