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8화
같은 시각, 마장이 내려다보이는 지붕.
용마루 위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견신을 관찰 중인 세 호위. 세 호위는 창주 진입 후 각자 보고를 위해 잠시 흩어졌다가 조금 전 다시 모인 참이었다.
이들은 견신이 마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마장이 잘 보이는 지금 위치에 자리 잡았고 산서상인 행수 양성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하자 개입을 준비했었다. 그랬으나, 견신이 한 합에 한 명씩 두 번째 무사까지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안심하며 관전 중이었다.
맨 왼쪽, 눈을 가늘게 뜬 공손신정이 무거운 어조로 뇌까렸다.
“양성이 꼬리를 내리는군. 며칠 새 본 결정 중 그나마 영리한 결정이다. 나머지는 엉망진창이었고.”
그의 불룩해진 앞섶에 삐져나온 서책 표지의 머리글자는 야(夜)였다. 해가 지면 찾아오는 밤.
가운데 엎드린 유희가 양손에 든 닭다리를 열심히 뜯으면서도 뒷글자를 보기 위해서 은근슬쩍 힐끔거리는 눈치였다.
그 사이, 맨 오른쪽 조경이 대꾸했다.
“상인답게 손익 계산이 빠른 거지. 나중에 나선 놈이 옷차림새도 그렇고 연배도 그렇고 최고수였나 본데 주장이 깨졌으면 대갈통 박아야지. 전멸을 각오하고 덤비는 건 멋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무사들이나 하는 짓이고. 상인이라면 저처럼 계산이 빨라야지.”
“일단 물러난 뒤에 뒤를 도모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저놈은 내가 처리한다. 감히 전하께.”
그는 흉험한 각오를 밝히면서도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히죽히죽 웃는 중. 폭 좁은 비취반지였는데 못 보던 반지였는지라 유희가 주목했다.
“못 보던 거네?”
그런 유희도 공손신정도 마장의 상황에 집중한 나머지, 조금 멀리 시전에서 반지가 사라졌다며, 도둑이 들었다며 고래고래 내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때? 어여쁘지?”
“······.”
보란 듯 손을 내밀었는데 유희가 대답 없이 인상을 찌푸리자, 조경이 탐탁지 않은 듯 입맛을 다셨다.
“하긴··· 네가 미(美)에 대해 뭘 알겠냐. 그놈의 닭다리나 마저 드시지. 그동안 어찌 참았냐? 그 많은 것이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이번엔 유희의 차례였다. 부지불식간에 허점을 찔린 그녀가 순간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막내라 그래.”
“어떻게 먹을 것만 보면 그리 눈이 돌아가냐?”
“막내라 그렇다고··· 못 먹고 자라서···”
“무당은 한 사부 밑에 제자가 뭐 백 명씩 되냐? 그 정도면 사형제 열을 먹이고도 남겠네. 나도 입궁 전에 나름대로 굶어봤다고 자부하는데 너처럼은 안 되던데. 내가 본 여인 중에 말코 네가 최고수다. 식계의 최고수.”
“···치, 나 안 먹어.”
완전히 토라진 유희가 뾰로통한 얼굴로 조경을 노려보자 마장에 집중하고 있던 공손신정이 거들었다.
“피로유발자,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말코, 마저 먹어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능할 때 힘을 비축해 둬야겠지. 그리고 음식을 버리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에 유희가 금세 화색이 돼서 다시 닭다리를 물었다. 작은 입술과 하얗고 잔뜩 부푼 볼에 양념이 덕지덕지 묻은 모습.
“그치? 역시, 웅(熊)군자. 네가 뭘 좀 안다니까. 잘 배운 녀석이라 그런지 피곤한 누구랑은 생각하는 게 달라. 다 먹어야지.”
“참 나. 누군 안 배운 줄 아나? 금강경 한번 읊어줘?”
어처구니없어하는 조경. 그를 향해 양 볼 가득 고기를 머금은 채, 혀를 내밀어 보였던 유희가 다시 마장을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어찌 생각해? 웅군자?”
“일단 하나는 명백하다고 본다.”
공손신정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의미를 읽은 조경이 불퉁한 얼굴이 돼서 물었다.
“뭐가 명백하다는 거냐? 곰?”
“전하께서 토납을 십 년 익히신 것으로 가정하자. 저러한 보신경과 공세가 가능하다고 보나?”
보신경(步身輕). 걷고 뛰는 법과 몸을 쓰는 법 그리고 몸을 가볍게 하는 법. 그 세 가지 법을 아울러 보신경이라 한다. 그중 몸을 쓰는 법을 신법(身法)이라 하는데, 초식과 구분되는 점은 균형 유지와 보법, 경공의 극대화가 목표라는 점.
초식은 공격에 대한 상대의 대응을 예측하여 재대응하고 또 제압할 수 있도록 수법 혹은 수법이 공간상에 점유하는 길을 묶어놓은 것이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수법은 둘째 치고 보법이 다르다. 공력의 조력 없이 가능한 빠름이라고 보나? 절대 아니지. 피로유발자 너야 시작부터 음양무맥으로 해서 모르겠지만, 말코 너는 알잖아?”
“불가능이긴 하지.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그게 구룡분승을 몰래 익히셨다는 증거는 아니 되지 않나?”
조경의 가세가 반박자 빨랐다.
“아니 되지. 누구 아니, 곰 너 전하에게서 구룡분승의 특징을 봤어? 한 번이라도? 이틀 전에는 암흑이었다. 구룡분승의 특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지. 그때도 못 봤고 금일도 못 봤다면, 이제는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냐?”
“허면, 어찌 설명할 건가? 저 무위를?”
황궁 3대 무맥은 구룡무맥과 유성무맥, 음양무맥. 구룡무맥은 황실, 금의위, 황제가 직접 지명한 조정 고위 무관의 자제가 유년 시절부터 익히는 무맥이고, 음양무맥은 동집사창 고유의 무맥.
전방위적 감찰을 위해서 보다 철저한 신분 위장이 요구되는 도찰원은 출신 성분에 따라 구룡무맥을 잇는 사례도 있고 유희의 경우처럼 다른 무맥을 이은 이가 선발 및 임명되어 종사하는 사례도 있었다. 구룡무맥을 익히는 순간 낙향은 불가능해지는 거고.
즉, 공손신정의 견해는 황궁 시절 외부 인사와 교류가 없었던 견신이 외부 무맥을 이었을 리는 만무하니 몰래 구룡분승을 익혀온 것으로 봐야지 않겠냐고, 구룡분승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실력이 아니냐며 따져 묻는 것.
반면에 조경은 구룡분승의 특징인 금빛 광채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아니라고 보는 거고.
“곰. 첫 번째 수법은 얼추 봤지만 두 번째 수법은 못 봤다. 한 합(合)에 도를 날려버리셨어. 쳐내신 것도 아닌데. 넌 봤냐?”
“······.”
공손신정도 마찬가지, 견신의 두 번째 수법 명암은 주시하고 있었음에도 보지 못했으나,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말을 아꼈다.
“내 지난번에도 말했지. 전하에 대해서 그간 갖고 있었던 평가를 지워야 한다고. 새로운 눈으로 봐야 한다고. 삼대무맥 없이 저와 같은 검예를 익히셨다. 심법이라고 다를까.”
심법이라고 다르겠냐며 묻는 대목에서 유희와 공손신정의 눈과 입이 확장됐다.
[!!!!!!]
공손신정은 홀린듯 다시 고개를 돌려서 저 아래 양성 일행이 물러난 뒤 홀로 남은 견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중.
“······.”
흔들—
유희는 놀란 나머지 한 손에 들고 있던 닭다리를 떨궜다. 닭다리는 바로 옆 조경의 무릎 위로 떨어졌고.
“이 말코가! 진짜 드럽게···!”
“피로유발자.”
“왜! 이 추잡한 말코 같으니.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거 이번에 새로 지은 건데! 아···!”
“너 지금 전하께서 종사라는 말을 하는 거야?”
고유의 심법을 창안한 자. 그 심법이 천하에 이름을 떨칠 만큼 고등한 것이라면, 그자는 종사(宗師)의 반열에 오른다. 소림의 육조 혜능이 그러했고 전진교 초대 장교 왕중양이 그러했으며 화산 개파 조사 학대통이 그러했다.
물론, 고등 수준의 외공을 창안한 이도 마찬가지. 그런데, 근래 강호는 내공을 중시하는 기조로 흐르는 중. 외공을 창시한 종사보다 내공을 창안한 종사를 점차 더 높이 받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종사를 대라고 하면 누구나 몇 명 이름을 댈 수 있을 만큼 종사는 희귀한 존재였고 그들의 출현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희박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닐 건 또 뭔데? 잊었어? 전하께서 태종 폐하를 능가하는 무골로 태어났다는 거?”
조경이 묻자 유희는 고개를 살짝 주억이며 생각에 잠겼고 공손신정은 반점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견신에게서 시선을 회수하며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문제는 결론을 보류하도록 하지. 말코, 어때?”
“그래, 중요한 문제니까.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지.”
그처럼 유희가 동조함으로써 견신이 구룡분승을 몰래 익혔는지 그 여부를 가리는 문제는 이번에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미 두 명이 합의했으므로 조경의 의사는 의미가 없는 거고.
그런 두 사람을 조경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번갈아 봤다.
“···곰, 말코. 역시 너희는 전하의 곁에 설 생각이 없는 거군. 둘 다 이리 보고도 또 그런 결론을 내린다는 건···! 나로서는 그리 볼 수밖에.”
“나는 천자 폐하와 제국의 곁에 설 따름이다.”
“본녀는 어사야. 어사가 누구 곁에 서? 그러면 제대로 감찰할 수 있겠어?”
“지금 그 말, 내 똑똑히 기억해 두지. 둘 다 그 마음 변치 마라. 절대, 절대로! 나중에 전하의 곁에 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역겨울 것 같으니까. 양성은 내가 처리하지.”
다른 두 사람을 마치 혐오하는 생물 보듯 일별한 조경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양성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의 흰자위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다시 한번 꺾일 예정이었다.
“불가. 무사와 상인의 갈등이었다.”
“그래, 나 역시도 불가 의견. 양성이 전하께서 친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저리한 게 아니니까. 행여 네 소행이 밝혀지면 상황이 곤란하게 된다는 거, 너도 알 거야. 다른 데도 아니고 산서상인이라고. 양성은 잡상인이 아니라 행수고.”
“그래. 천자께서 한낱 상인을 달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불충도 그만한 불충이 없지. 아니 그런가?”
“약속 잊지 마, 조경.”
그처럼 연거푸 발목이 잡힌 조경의 흰자위가 빨갛게 물들고, 꽉 움켜쥔 주먹에서 시작된 떨림이 전신으로 확산하는 중이었다.
부들부들—
“이···! 이···!”
그러다 어느 순산,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심화를 안간힘을 다해 삭이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뇌까렸다.
환관은 세상 어떤 부류보다 약속을 중시하는 부류다. 어리게는 대여섯 살에 많게는 스물이 넘어서 스스로 남성의 제거를 결심하며 약속을 맺는다. 은 여섯 냥을 대가로 남성을 제거해 주는 도자장(刀子匠)과.
첫 번째, 남성을 제거한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요.
두 번째, 남성을 제거해 준 도자장과 장자에 먼저 악심을 품거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고.
세 번째, 그 두 가지를 천지신명의 이름으로 약조하며.
네 번째, 거세를 통해 금일부터 천지 간에 가장 순결한 몸 즉, 정(淨) 혹은 통정(通淨)이 된 자로서 앞으로 어떤 약조도 깨지 않는 고결한 자가 되겠다고.
그러니, 환관에게 약속이란 오래전 스스로 자른 남성이고 그날의 결심이며 또 목숨이요 존재의 정당성이다.
즉, 약속을 깨는 순간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셈.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스스로 훼손한 불효막심한 자에 더해 남성도 여성도 아닌 흉측한 괴물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좋다. 내 놈을 당장 어쩌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내 보기에 놈이 이대로 포기할 리 없어 보이는 만큼 뒤는 밟아볼 것이다. 이까지 방해하진 마라. 그때는 너희 둘 다 내 임무와 전하의 안녕을 방해하려고 온 사람으로 간주, 생사를 결하고 말 테니.”
“그래, 나는 전하를 주시하고 있지.”
“피로유발자, 있어. 본녀가 갈 테니. 그리 못 믿는 곰과 이 말코에게 네 전하의 안녕을 맡기시게?”
“······.”
그나마 유희의 배려가 그런 조경의 심화를 조금 어루만졌다. 그런 유희가 입에 문 닭고기를 삼키며 일어서자 조경이 앞섶에서 꺼낸 손수건을 내밀었다.
“···드러워. 그러지 않아도 못생긴 면상 막 쓰지 말고 좀 닦아라.”
여느 여인이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은 손수건. 그를 쥐고 돌아서는 유희의 입매가 조금 휘어져 있었다.
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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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반점에서 흑룡의 새 이름을 궁리 중이던 견신은 기다리던 궁호상 부자를 만났다. 창밖에는 이두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반점에 들어와 견신을 발견한 궁호상이 얼른 달려왔다. 그는 견신과 양성의 충돌이 일단락된 후, 견신의 지시를 받고 병든 아내를 데리고 왔다.
“대가, 말씀대로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큰돈을 번 것을 마장 사람들이 알았고 또 이 사람으로 인해 산서상인과 다툼이 있었으니, 대가께 해가 갈지 모릅니다. 이 길로 제남으로 가십시오. 남쪽, 오백 리가 조금 안 될 겁니다.”
“제남이요···? 오백 리라면··· 소인이 거기를 어찌···?”
평생 창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궁호상에게 오백 리는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아득하게 먼 거리였다. 그 아득한 거리감만큼 커다란 두려움이 싹트는 건 당연한 일이고.
현(縣)의 아래 촌락의 백성들은 110가구를 1개 리(里)로 편성하고 그중 부유한 10가구를 이장호로 나머지 100가구를 갑수호로 편성하는 이갑제로 묶여서 이장과 갑수의 통제를 받았다. 현은 이갑제를 통해서 실제 인구를 파악했고 각종 부역을 부과했다.
부역의 부과 및 유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평범한 백성에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는데 백성들이 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인(路引)으로 불리는 문서를 휴대, 검문 때마다 제시해야 했다. 노인은 나라가 여행을 허가한 사실을 증명하는 공식 문서고.
검문 시 그런 노인을 휴대하지 않고 또 부역을 부과한 내역을 기록한 부역황책에 성명이 없는 사람은 임의로 거주지를 이탈한 자, 화전민 혹은 도적으로 간주하여 처벌했다.
그처럼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궁호상에게 무려 오백 리 남쪽 제남은 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문자 그대로 미지의 세계였다. 백년 전 견신에게 마을 밖 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당황한 궁호상에게 견신이 관리에게 돈을 먹이고 떼온 노인을 내밀었다. 빳빳한 종이 석 장에 궁호상 일가의 성명과 이런저런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는 노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현이 써준 것이니 검문하는 병사가 요구하면 보여주십시오. 잃어버리게 되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 제남에 도착하실 때까지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이 가죽 주머니에 젖지 않게 보관하시고.”
“무, 무사님. 그··· 소인은 제남이 어딘지도 모르고···”
“은 이백 냥을 산서상인의 전표로 준비해 뒀습니다. 조금 뒤 해 질 녘에 무사 둘이 여기로 올 겁니다. 그들이 길잡이가 되어줄 겁니다. 제남까지는 길이 좋고 또 벌판에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길인지라 도적이 활개치기 어려우니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소인이 정녕··· 가야 한다는···! 소인이 갈 수 있는 것입니까···?”
“가실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 흉흉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길로 내자를 모시고 정가의방에 들르신 뒤 의원이 금일 떠나도 된다고 하면, 그 길로 떠나십시오. 서두르실수록 대가께 이롭습니다. 양성이 이 사람 눈에는 아무래도 사특한 자로 보이는지라 무슨 짓을 벌일지 짐작하기 어려우니.”
그처럼 견신이 일사천리로 결정하고 또 지시하는 통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궁호상은 가까스로 한 생각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왜?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소년 무사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미 마부와 마차를 사줬으면서 이제는 은 이백 냥에 무사 둘을 더 사겠다니?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울리는가 말이다.
“무, 무사님. 어찌 소인에게 이런···?”
“삼백 냥에 보낼 수 있었으나 이 사람에게 보내주셨으니 그 값을 쳐 드린 것입니다. 실은 흑룡이 이 사람 눈에는 순종의 한혈마로 비쳤습니다. 이 사람의 눈이 제대로 봤고 흑룡이 건강했다면 천 냥도 너끈히 받아낼 녀석입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고 그 돈으로 집도 구하시고 자리 잡을 때까지 여비로 쓰십시오.”
“···무사님.”
“아, 하나 더. 제남에 가셔서 이름 마지막 글자로 린(潾)을 쓰는 이를 찾으십시오. 수소문하면 금세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예?”
궁호상으로서는 이름 한 글자 만으로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세상 사정에 밝은 박학다식한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기에.
“이 사람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이에게 가셔서 형주 사람 고사가 이리 전했다 하십시오. 여름날 공(公)이 능소화 만개한 서고에서 보내준 서책은 잘 읽었다. 그날이 좋았노라. 이리 전하시면 그이가 대가를 살펴드릴 것입니다. 기억하셨습니까?”
“아···! 그··· 여름날 공(公)이 능소화 만개한 서고에서 보내준 서책은 잘 읽었다, 그날이 좋았노라.”
“좋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어디 적어두셔도 좋습니다. 허면, 어서 가십시오. 무사는 정가의방으로 보내겠습니다.”
등 떠미는 견신을 궁호상이 멈춰 서며 불렀다.
“그···! 무사님!”
“더 하실 말씀이라도?”
“허, 허면···! 우, 우리는 이리 헤어지는 것입니까? 무사님과 소인은 이것이 마지막입니까?”
“그렇습니다. 양성 그자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거든 이 사람부터 찾을 테니 서두르시는 것이 좋습니다. 훗날, 제남에 들르거든 대가를 찾아뵙겠습니다.”
“···꼭, 꼭 찾아주십시오. 이 사람과 세 식구가 기다리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할 일이 있어서 몇 달은 흘러야 할 겁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리하겠습니다, 무사님.”
견신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주억인 궁호상이 몇 걸음 가다가 문득 다시 돌아섰다.
“······?”
그러고는 의이한 눈빛으로 보는 견신을 향해, 아주 정중한 몸가짐과 태도로 천천히 엎드렸다.
“창주의 범부, 궁 모가 일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보잘것없는 촌부가 내내 바라고 또 원할 테니, 부디 무사님의 장도에 무운이 함께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반점 내 사람들이 다들 돌아보고 있음에도 일어설 줄 모르는 사내의 두 눈에서 흐른 뜨거운 눈물이 바닥에 또 미처 말리지 못한 견신의 마음에 스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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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어슴푸레한 밤이었다. 가까운 산도 무려 사십 리 너머에 있건만,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꾹꾸— 꾹꾹—
견신은 반점 마구간의 귀로에게 여물을 먹이고 자세히 살핀 뒤 방으로 올라왔다. 귀로(歸路)는 흑룡의 새 이름. 돌아가는 길이라는 뜻. 전생의 벗이었던 여로와 짝을 이루는 이름으로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창주를 떠나고 싶었지만 또 양성의 일도 있고 해서 서둘러 떠나는 게 여러모로 좋지만, 귀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귀로는 한겨울 먼 길을 떠나기에 충분하게 건강하지 않은, 쇠약한 상태였다. 그에 이삼일쯤 보양식을 먹이면서 몸과 발굽을 관리한 뒤 떠날 계획이었다.
떠나더라도 달리는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 가능할 터였다.
그런 귀로의 뒤로, 난리 통에 잠시 잊었던 그들이 따라붙었다. 한창 길을 달리고 있을 종청산 부녀가.
“···잘 가고 있겠지.”
더불어 그가 주고 간 연판장이 떠올랐다.
종청산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의 핵심은 흑회라는 이름의 결사, 그 예하 조직인 무도관이 항주는 물론 유도 남경의 관리와 지방군까지 장악하여 사실상 남동부 해안을 왜구에게 내준 상태라는 것.
그로 인해 밀무역이 성행하고 남경과 항주 일대 백성들의 삶은 논밭을 빼앗기고 강제로 고리채를 썼다가 노예로 전락하는 등등 각종 수탈로 인해 피멍이 든 상태고.
그런 흑회와 내통하는 자가 북경에도 있을 수 있으니 이현이 연판장을 북경으로 보내지 않고 항주로 보내면서 종청산의 항주 도착에 맞춰 믿을 만한 관리와 군대를 급파, 흑회를 일망타진한다는 계획이었다.
그 이야기 중 특별히 관심이 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노(老) 장수의 이름이.
“위지휘사 이광(李廣)이라···”
정3품 위지휘사는 5천 6백여 군사를 지휘하는 고위 장수, 이현이 종청산에게 지금 유도와 항주 일대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로 지목한 인물이다. 본래 한 성(省)의 군정을 맡는 정2품 도지휘사였으나, 흑회의 농간으로 인해 강등됐다고.
또한 그가 맡은 해안선이 왜구를 틀어막고 있는 통에 흑회의 행보가 늦춰지고 있는 셈이라며 강조했다고.
그렇게 잠시 이광을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밖에서 이쪽을 찾는 음성이 들려왔다.
“본관은 창주 지주 형이산이오. 낮에 마장에서 산서상인 행수 양성과 실랑이를 벌였던 형주 사람 고사는 나오시오.”
우르르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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