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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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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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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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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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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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DUMMY

31화




그것은 분명 조우였다. 조금 특별한. 천하 곳곳에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쉼 없이 발생하고 있는 만남과는 조금 다른, 그런 조우였다.


태양에 쫓겨 타다 남은 노을과 긴 강의 만남. 여명 뒤 노란 햇살과 망막의 마주침. 빛나는 별과 달 그리고 바람의 교제. 하얀 서리 안개와 앙상해진 나뭇가지의 접촉 등.


일상적인 그런 만남과는 무언가 또 어딘가 다른, 그러나 그 다름을 당사자들이 바로 깨닫거나 느낄 수는 없는, 그러한 조우였다.


어쩌면 이는 아주 오래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는 일, 해후일지도 몰랐다.




모닥불이 달군 공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다 잠시 쉬어가는 거기, 흐드러지게 핀 눈꽃 사이, 순백색 부엉이 한 마리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무 아래서 일어난 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닥까닥, 고개를 꺾으면서.


홍소화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일시에 명도를 높이고, 그 얼굴을 비추는 모닥불이 여러 번 제 모습을 바꿀 때까지 견신의 눈도 입술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의 의식은 밀물처럼 동공으로 밀고 들어오는 홍소화의 얼굴, 그 거센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홍···소화···!’


홍씨 집안의 작은 꽃, 그이다. 그때 그 소녀다. 백년 전 그날에, 여름날 말간 하늘에서 적당히 따뜻한 구슬 소나기 내리던 날에, 수숫단 속에서 훗날을 약속했던 그 소녀다.


동글동글한 눈매, 작고 도톰한 입술. 가무잡잡한 살갗 가운데 오똑하게 선 코, 새까만 눈동자까지. 그러고 보니 목소리까지도 같은 듯싶고.


그래, 너였구나, 너였어. 아니,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정녕 너인가? 네가 맞나? 백년이 흘렀거늘, 네가 여기 있을 리 없잖은가?


이 내 기억은 온전한가? 나는 너를 선명하게 기억하는가? 고견신은 오래 정신병을 앓지 않았나. 지금도 앓고 있지 않나. 그런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얼굴이 있을까? 애초 온전한 기억이 있기는 있을까?


아니, 아니다. 너는 분명히 홍소화다. 내가 아무리 병을 앓아도 너를, 가족과 너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잖은가.


한데, 네가 어찌 이리 살아있다는 말인가? 너도 나처럼 ‘그’를 만난 것인가? 동굴의 그를? 그리하여 너 역시 나처럼 윤회한 것인가? 정녕 너도 나처럼 새 삶을 얻었다는 말인가?




그처럼 뜻밖의 조우로 인해 견신의 의식이 마구 뒤엉키고 급기야 붕괴로 치달으려 하는 그때, 나무 위에서 그를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꾸욱—


부엉이 울음소리가 아주 절묘한 시점에 견신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정(釘)이 바위를 쪼개듯이.


“······?”


덕분에 현실로 돌아온 견신은 다시금 홍소화의 얼굴을 주목했다. 기억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홍소화를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


다만, 열여섯 소녀의 그것보다는 나이 든, 적게 잡아도 스물 중반에서 서른쯤 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홍소화도 모종의 이유로 인해 견신을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견신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견신을 알아봤기 때문.


“무사님. 혹, 존함으로 고가 사(四)를 쓰시는지요?”


견신을 보는 순간, 며칠 전 창주에서 양성과 악연을 맺었다던 형주 사람 고사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창주에서 남서쪽 도보로 사흘쯤 거리. 열대여섯쯤으로 추정되는 소년. 치렁한 흑발에 흑색 일색의 옷차림새, 그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외모, 신검 고(鼓)를 빼닮은 검. 주인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빼다 박은 흑마까지.


완벽하다. 며칠 전 창주와 상인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던 그 인물의 인상착의로.


“형주 사람이시고···?”


물론, 알아봤다기보다는 확신한 것에 가까웠다. 천하는 넓고 사람은 무수히 많은 법이므로.


그녀의 물음을 들은 견신이 찰나 움찔거리는 동시에 왼손으로 검파를 움켜쥐었고 그와 함께 살기가 폭발했다.


저릿—


그에 깜짝 놀란 홍소화가 얼른 한 걸음 물러서며 소리쳤다.


“고 대협! 폐행수는 고 대협과 적대하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그녀를, 호위 수장 지청명이 얼른 앞으로 나서면서 가렸다.


“그렇소! 귀하를 해칠 심산으로 왔다면 이쪽에서 먼저 통성명했을 리가 없지 않소!”


그런 견신의 반응에서 그가 고사임을 확신한 홍소화가 다시 차분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투항하듯 무사의 권역에 저를 내맡기는 것은 적대가 아닌 친선의 뜻. 최고의.


“그렇습니다, 고 대협. 폐행수와 산서상인은 고 대협을 적대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고 대협의 뒤를 밟은 게 아니라, 대협의 인상착의를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여쭌 것입니다. 폐행수도 전갈을 받아서 알고 있었습니다. 양성, 그자가 상도의를 저버리고 폐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야기를. 그로 인해 산서상인의 명성이 땅에 떨어졌고 지금 신안상인의 비웃음을 듣고 있지요.”


그처럼 나지막한 해명을 들은 견신이 과민했다고 생각하며 기여를 땅에 꽂았다.


푹—


천천히 일어선 그는 홍소화의 말을, 그녀를 믿기로 했다. 별다른 심사숙고 없이 그렇게 결정했다. 물론, 홍소화가 이쪽의 방심을 끌어낸 뒤 적당한 때를 봐서 기습하려는 생각을 품고 왔을 수도 있으나, 무의식중 믿기로 한 것. 그 홍소화니까. 아니, 그 홍소화를 빼다 박은 사람이므로.


“하던 생각이 있었던 탓으로 과민하였습니다. 형주 사람 고사라 합니다.”


그가 두 손을 모으고 예를 취하자, 홍소화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아···! 역시 듣던 대로 화통하신 분이시군요. 양성 그자가 끼친 폐는 산서상인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송구합니다, 고 대협. 폐상의 총행수께서도 상행 중 누구든 대협을 뵙게 되면 반드시 사죄드리라며 명하셨습니다.”

“다 지난 일입니다. 그자와 이 사람의 은원이고. 산서상인에서 이 사람과 아무 은원이 없다고 여긴다면 이 사람 역시 그리 여길 것입니다.”

“폐행수가 총행수를 대신하여 확약건대 없습니다. 폐상과 대협 사이에는 한 점 원한도 없습니다. 외려 대협 덕에 양성 같은 쭉정이를 뽑아낼 수 있었으니, 폐상이 은혜를 입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랄 것도 없습니다만 가져오신 것으로써 해소됐다고 여기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대협.”


홍소화는 천천히 다가가며 생각했다.


‘기인이다. 척박한 천하에서 보기 드문.’


지금처럼 저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몫을 요구하지도 않는 소년이 진실로 담대하고 희귀한 인물이라며 생각했다. 지난 며칠, 상인이 파악하고 분석한 대로.


작금의 천하 아니, 천하는 지난 역사 내내 언제나, 모두 자기 이야기를, 자기주장을 늘어놓기에 급급한 세상이지 않았던가. 알맹이도 시원찮은 인사들이 저를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열대여섯 살 나이에 눈앞의 소년처럼 담백하게 행세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고 또 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나이 때는 왕성한 혈기를 절제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허위와 거짓으로라도 저를 드러내고 알리며 있지도 않은 제 몫을 요구하는 게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그 섬전도 조규상을 단 일 합으로 꺾을 만큼 뛰어난 무공을 가진 무사가 이처럼 겸손하고 소탈하게 행동한 사례는 가히 희박하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무사 특히 고수는 그런 부류였다. 절대다수는 관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류에게 초면에 하대는 기본이고 필요에 의하지 않고서는 상인과 말 한마디 섞으려 들지 않는, 알량하고 또 같잖은 자존심과 허세 그리고 명예욕으로 똘똘 뭉친 신흥 귀족들. 귀족 아닌 귀족들.


아무튼, 어디서 나타났을까. 이런 소년 고수가.


‘신비로운 인물이야.’


양성의 수하들이 상인의 조사 당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아무도 형주 사람 고사의 검법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무맥이나 유파를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고 했다.


산서상인의 무사들도 강호에서 한가락하는 이들이니만큼 그들 모두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검법은 드물 것이다.


‘십정의 제자일까? 일단 소림, 아미, 보타는 아니고.’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이 강호의 하늘, 소림을 비롯한 열 곳의 대(大)방문파. 십정(十正)이다.


아니면, 남궁가를 포함한 다섯 대가문 즉, 오의(五義).


그도 아니면, 그들이던가.


‘검회···!’


천하 검사들의 모임. 검회.


비록 하수일지언정 세상 물정에는 고수다. 그래서 잘 안다. 소년은 십정, 오의, 검회 그 셋 중 어느 하나가 아니고는 설명이 어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그 셋 중 어느 한 곳이 배출한 천재라는 사실을.


물론 신교와 흑회도 있겠지만 소년이 천산(天山)이나 무도관(武道館)에서 온 자라면 그때 양성 일행의 씨를 말렸을 거고 지금 또한 말 몇 마디 섞기도 전에 피를 보고 있을 터.


따라서 이 소년 무사의 본거지는 십정, 오의, 검회.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결론은 이참에 좋은 관계를 맺어둬서 나쁠 게 없다는 거고. 어차피 고사라는 성명을 주제로 나눌 이야기가 남아있기도 하고.


“대협,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좀 드셔보시지요. 폐행수도 한 점 나눠 먹고 가겠습니다.”


그처럼 나무 밑동 자른 것에 가죽 깔개를 덮은 간이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은 홍소화가 소반을 내미는데, 산서상인 행렬에서 지청명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행수! 여기 과객이 세 분 오셨습니다!”




#




빠르게 찾아드는 밤과 함께 나타난 이들은 견신을 뒤쫓던 사람들. 유희, 조경, 공손신정이었다.


줄곧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견신의 뒤를 밟은 세 사람은 밤이 되자 견신의 주변을 확보할 목적으로 숙영지에 합류했다. 조운선에 탔던 그들을 견신이 알아보겠지만 그들 입장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금처럼 견신이 외부 인사들과 접촉한 상황에서의 효과적인 호위를 위해서는.


셋 중 하나 이상은 호위보다 감시 또는 친왕 시해가 진짜 목적이겠지만.




아닌 척하면서도 내내 견신을 의식하며 다가온 조경이 어색하게 견신을 알아보는 척하려다 유희의 제지를 받았다.


“으음···? 혹, 그때 조운선···! 읍!”


지나치게 어설픈 연기를 보고 얼른 조경의 입을 틀어막은 유희가 얼굴을 굳힌 채, 지청명에게 말했다.


“양보 고맙소. 우리 사형제는 여길 쓰도록 하겠소.”


산서상인 일행의 수장은 홍소화다. 유희가 그를 뻔히 알면서도 지청명에게 말하는 것은 상인을 은연중 괄시하는 무사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무사는 무사와 대화한다는 것. 이는 유희가 바깥 사정을 꿰고 있는, 노련한 어사라는 증거였다.


거기에 하나 더, 지청명이 천하 양대 상단인 산서상인 그것도 행수의 호위 총책을 맡은 인물이니만큼 고수로 대우, 공대한 것도 노련한 행동이고.


그러지 않았다면 홍소화 일행의 특별한 관심 혹은 지나친 적개심을 샀을 터였다. 유희의 입장에는 하등 쓸모없는, 받아서 좋을 게 없는 관심 혹은 적개심을.


아무튼 견신에게는 그의 실체를 알고 있는 탓에 다소 어색하게, 하는 둥 마는 둥 얼른 인사를 해치우고 짐을 푸는 유희.


“···거기 소협도 고맙군. 사제들, 서둘러.”


그런 그녀를 따라 짐을 푸는 조경, 공손신정의 귓바퀴에 견신의 목소리가 도착했다.


“개살구들이었군.”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세 호위는 물론 숙영지로 돌아가려던 홍소화와 지청명까지, 듣기에 모자라지 않은 크기의 목소리였다.


[!!!!!!]


그중 세 호위는 얼마 전 조운선에서 들었던 그 말을 다시 들었음에 내심 놀랐고.


움찔—


홍소화와 지청명은 뜬금없는 개살구도 그렇거니와, 분위기상 혼잣말이거나 세 호위에게 한 말 같은데 세 호위가 대답하지 않으니 그 의미를 아리송하게 여겼다.


[······?]


그랬으나 이내 둘 다 견신의 혼잣말이겠거니 하며 돌아갔다. 지금껏 견신의 하대를 듣지 못했기에, 견신이 처음 본 이들에게 대뜸 하대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


그렇게 한때의 정적이 찾아왔고 한밤의 동행 각자 할 일에 심취했다. 산서상인 일행과 견신은 늦은 저녁 식사를, 세 호위는 숙영지 편성을 마무리했다.




묵묵히 잠자리를 준비하는 세 호위는 숙영지에 합류할 때와 달리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들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셋 다 창주를 떠나기 전 북경에서 온 전갈을 생각 중이기 때문. 먼저 공손신정은 금의위 지휘사의 명령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폐하께서 의식을 잃으셨다. 칠주야 이내, 늦어도 보름 이내 붕어가 있을 것이다.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원하시니 때를 봐서 결행하라. 금도(金刀)와 유성(流星)의 결의, 형제들의 의리를 기억하라.>


다음 조경 또한 동집사창 제독동창의 명령을 떠올렸다.


<천자께서 수일 내로 붕어하실 것이야. 태후 폐하만으로는 역부족이니라. 왕진의 패착 이래, 풍전등화에 놓인 창(廠)과 일족의 생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노니. 너 지금 일족의 은혜를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니라.>


마지막 유희 역시 도찰원 좌도어사의 명령을 곱씹었다.


<며칠 내 용상의 주인이 바뀔 것이다. 네가 창위와 합류하여 무당이 노출됐고 우리가 용상의 주인에게 충성을 보이지 않으면 지금껏 누려온 무당의 복락이 끊어질 것이다. 태자태사와의 의리를 지키는 일보다 우선할 일은 사문의 안녕일 것. 사문과 사형제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수장들의 전갈 내용을 요약하면 우선 천순제 주기진이 며칠 내로 세상을 뜰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고, 다음으로 견신을 제거하려는 귀비의 의지가 여전히 확고하다는 점.


그리고···


금의위의 공손신정.

동집사창의 조경.

무당파의 유희.


모두 각자 인연과 사연을 중시함으로써.


<정왕을 제거하라.>


때를 노려서 견신을 시해하고.


<정왕의 목과 검을 회수하라.>


견신의 수급과 기여를 가져오라는 내용이었으며 이는 지난 며칠 세 사람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공손신정은 며칠 숨을 고르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고.


“······.”


조경은 제독동창의 명령에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도 갈등 중이었으며.


“······.”


유희는 다른 두 사람과의 합류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하면서도 조금 후회하는 중이었으며 명령대로 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인지, 최선의 길인지 하는 의문에 봉착한 상태였다.


“······.”


그렇게 지난 며칠이 속절없이 흘렀고 창주를 떠난 이래 오늘 처음 견신의 바로 인근에 숙영지를 잡은 것이었다. 지난 며칠 중 가장 가깝게.


셋 다 이내 그런 위치 선정이 실수임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바로 저기 옆에서 밤을 나고 있는 친왕과의 거리가 뭐랄까. 불편하달까. 지나치게 가까운 탓에,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보이고 볼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엄습했다.


이는 너무도 비겁하고 저열한 행태이지 않은가. 정왕 주견신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저이에게 죄가 있다면 천생 무골로 태어났고 갖은 견제와 핍박을 받았음에도 잠룡의 기질을 보존했으며 귀비의 눈 밖에 난 것.


그게 제국의 친왕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황자가 죽어야 할 이유라는 말인가?


그러나 굶어 죽을 운명이었던 고아를 데려다 대명 금의위 위룡천호로 만들어준 형제들의 결의를 배반할 수는 없다.


귀비는 곧 태후가 될 거고 그런 그녀의 의중은 곧 태자 즉, 황제의 명령이 될 터. 황명은 금의위에게 목숨보다 중시해야 할 천명이다. 금의위가 황명을 거부한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정왕이 죽어야 용상이 굳건해진다.’




그러나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놓였던 일가족에게 은을 내어주고 장남을 대명 동집사창 환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 일족과의 의리를 저버릴 순 없노니.


주기진의 죽음이 너무 이르다. 동집사창이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기 전에 귀비와 태자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씨가 마를 수도 있노니. 이는 모두 과거 천순제 주기진을 손에 쥐고 흔들다 패망한 환관 왕진의 몰락 당시 한 차례 씨가 마를 뻔한 탓이다.


‘이 눈으로 일족의 마지막 순간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뭇 사내들의 배 아래 깔려 교성을 뱉어내는 창기가 될 예정이었던 여아를 시궁창에서 끄집어내고 어엿한 도사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무인으로 성장시켜 준 사문과 사형제가 터럭만큼이라도 위험해지는 꼴을 어떻게 감당할까?


무당이 전진과 화산을 넘어 남존무당이 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 태조 주원장과 태종 주체의 후원 덕분에 가능했다.


만약 용상을 차지한 태자가 전진이나 화산에게 남존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리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야 낮겠지만 말도 안 되는 구실을 만들어서 남존무당의 멸문을 획책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집요하기 짝이 없는 귀비라면?


‘빌미를 줘서는 안 돼, 절대.’




그렇게 오늘도 번민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거기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휘영청 빛나던 보름달을 삼키고 천지에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이 밤이 어젯밤보다 훨씬 더 긴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




잠시 후, 저녁 식사를 마친 홍소화가 소년을 데리고 견신을 찾았다. 열 살 남짓, 소년의 얼굴에 홍소화의 얼굴과 다른 이의 얼굴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대협, 폐행수의 아들입니다. 대협께 인사드려, 아들. 섬전도 백부를 꺾으신 분이셔.”

“헤에? 어머니, 정말로요? 이 형···! 아니, 여기 대협께서 섬전도 백부를 이겼다고요?”

“그렇대도. 엄마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견신이 섬전도 조규상을 꺾었다는 말을 듣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이.


견신이 그 얼굴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고 있을 때 아이가 그런 그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인사말을 건네왔다.


“산서 진성의 고(高)가 경신(硬信)이 고 대협을 뵙습니다. 선친과 같은 함자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작가의말

격려하심과 애독하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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