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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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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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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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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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DUMMY

34화




길 위에서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름 소나기와 겨울 눈처럼 자연스러운.


지독하게 또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독해져서 만남을 원하고 또 기대해도 사람 그림자 하나 만나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다른 날에는 콧속으로 스미는 냄새처럼 연거푸 들이닥쳤다. 저항도 거부도 할 수 없이 마주해야 했고. 선인과의 만남이든, 그 반대든.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힘이 강역 구석구석까지 장악하진 못한 실정이고 또 그 장악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따라서 고을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맨 먼저 길 위에서의 죽음 그 가능성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므로 길 위의 나그네에게 필요한 생존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방법이었다. 악인을 조기에 식별하고 피할 수만 있다면 생존율을 크게 높일 수 있으니까. 그 방법이야 다양하고 천차만별이겠지만 핵심은 사람을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 바꿔 말해서 사람을 불신하는 것이었다.


즉, 불신이 생존법이 되는 세상인 셈.




그런 이치로 홍소화 일행은 물론이고 정검당도 서각 일행도, 그들이 처음 인사를 건넨 당시부터 의심했었다. 의심으로 친 그물망에 서각이 걸려든 거고.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손 대협. 제남에서 온 보잘것없는 유생 서가 각이라 합니다.


제 딴에는 자연스러운 인사로 자평 중인진 모르겠으나 손이 망쳤다. 정확하게는 엄지와 검지 그리고 손바닥이.


붓을 쥐고 살아온 손과 도검을 쥐고 산 손은 겉은 물론 속까지 다르다. 도검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위로 또 궤적의 변화에 빠름과 힘의 조절까지. 그를 곁들여 휘두르는 과정에서 발달하는 근육과 변형되는 관절, 피부 등은 무사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특히 도검을 다루는 무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손가락인 엄지와 검지에서 그런 특징이 두드러지고.


-이 사람이 비록 무공 한 초식 모르는 백면서생이긴 하나 어찌 검자를 모르겠습니까.


그처럼 무사의 엄지와 검지를 가진 사람이 연거푸 백면서생임을 강조하니, 의심할 수밖에.


방점은 제남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이라며 저를 소개한 작자가 얼마 전 제남에 정착한 황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점이고.


“허허허— 행수, 천천히. 이 밤은 기니까 천천히 마십시다. 이 사람이 술은 즐기는 편이나, 아쉽게도 주량이 세질 않아서.”


술도 아주 흥분해서 눈깔을 까뒤집고 달려든 사람치곤 지나치게 절제하는 중. 이는 이성과 신체를 정교하게 유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즉,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이야기.




그런 서각을 추려내고 보니 갖가지 생각이 우후죽순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검당은? 목적은? 산서상인은?’


함께 온 정검당은 한 패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산서상인 측이나 양성 측에서 홍소화에게도 정체를 숨기고 보복차 투입한 자객은 아닌지, 북경에서 세 호위 모르게 보낸 자객은 아닌지 등등.


복잡하고 다양하게 명멸하던 온갖 가능성은 결국 하나로 귀결됐다. 강물이 결국 바다로 모여들 듯이.


‘아무래도 연판장인가.’


조운선에서 종청산을 노렸던, 악연을 맺었던 놈들이 추가로 보낸 자객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연판장을 쫓아온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물론, 홍소화 일행에게 볼 일이 있는 이들일 수도 있겠으나 연판장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뭐랄까, 연판장이 품에서 경고하는 느낌. 저를 노리는 자가 왔다며.




이러나저러나 확인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당장은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홍소화 일행과 정검당 무리까지 보고 있는 마당에 정체를 감췄다는 정황만으로 섣불리 위력을 행사할 순 없으니까. 서각 입장에야 손은 잡아떼면 그만이고, 황자 문제 역시 착각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일 것이므로.


북경에서 보낸 세 녀석이 가장 큰 문제다. 정왕 주견신이 무고한 신민에게 위력을 행사했다며 북경에 알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그럴 목적으로 파견한 녀석들이고.


물론 며칠 전 밤의 일은 예상을 벗어난 일이기는 했다. 홍일점이 이쪽을 도운 일은.


그날 밤 창주의 관리들이 나누던 이야기에 따르면 홍일점이 정4품 도찰원 첨도어사다.


-세상에 첨도어사께서 납실지, 다 보셨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고 보면 저이 고사랬나? 참 운이 좋아. 운이 좋은 인사야.


금의위에는 여성이 없고, 동집사창에는 있지만 말단 첩자에 불과하니만큼 그날 마장에서 있었던 일을 지청에 알린 사람. 즉, 첨도어사는 홍일점일 수밖에 없다.


홍일점 녀석이 예상 밖 호의를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믿었다가는 발등 찍히기 십상. 나머지 두 녀석과 합의된 행보인지 독단 행동인지도 의문이고 세 녀석의 실제 관계도 전혀 모르는 상태.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도 많으니만큼 계속 경계함이 이쪽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아무튼, 서각의 이후 행동 양상은 크게 보면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정검당이 한패든 아니든 여기 있는 인원들로 결행하는 것.


두 번째, 추가 증원을 기다리는 것.


그중 두 번째 경우는 서각이 지금 접근 중일 증원 인력에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는 경우고 증원 인력의 접근로는 다섯 개. 육지 북쪽과 남쪽, 운하 북쪽과 남쪽, 마지막 운하 건너에서 이쪽으로 도강이다.


문제는 역시 두 번째 경우다. 만일에 대비하여 서각을 홍소화 무리에서 떨어트려 놓았고 덕분에 홍소화 무리의 안전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는 첫 번째 경우와 달리 두 번째 경우는 증원의 수효, 접근로 등 확인되지 않은 변수가 너무 많다.


어쨌든 서각이 꿍꿍이를 드러내기 전에는 녀석을 어쩔 수도 없고 지금으로서는 변수도 너무나 다양하니만큼 지금 할 수 있는 건 때를 봐서 홍소화 일행을 대비시키는 것.


대비는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해야만 비로소 충분함에 이를 수 있는 법. 따라서 두 번째 경우를 상정하고 대비해야 할 거고.




그처럼 견신이 앞으로의 대처를 고심 중이던 그때, 견신의 정체를 알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손문 대신 홍소화, 지청명 등과 어울리던 서각이 불쑥 잔을 권했다.


“대단한 무인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뵈었습니다. 소생이 사죄의 의미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홍 행수께서 내신 술로 생색내는 것이 염치없기는 합니다만, 허허—”


“마음만 받겠습니다. 술을 잘 못하는 사람인지라.”

“허허— 날도 추운데 가볍게 한잔만 해보시지요. 몸이 아주 뜨끈해집니다.”

“괜찮습니다. 제 몫까지 드십시오.”

“···그러십니까. 서 모가 대단한 고수와 명주를 곁들여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기회인 줄 알았으나, 그런 복이 소생을 따르지 않는 듯하여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쉽다며 입맛을 다신 서각이 이번에는 세 호위를 돌아봤다.


“거기 세 분도 오셔서 명주와 함께 하룻밤 인연을 나눠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에 홍소화와 지청명 그리고 고경신이 일제히 세 호위를 돌아보았다.


[······?]


공손신정은 가끔씩 견신을 힐끔거리면서도 책을 읽으며 히죽히죽 웃는 중이었고 조경은 염주를 굴리면서 작게 법문을 외는 중. 마지막 유희는 음양을 형상화한 조각들을 바닥에 던졌다가 도로 거둬들이기를 반복, 무언가를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그중 유희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면서 조금 고무된 목소리로 대답하려는 것을 조경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술은 충분한···!”

“말씀은 고마우나 괜찮소. 길 위에서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사저, 정신 차려.”

“그··· 한두 잔은 괜찮···”


유희가 아름다운 입술 끝에 침을 미련처럼 달고 얼버무려봤지만, 조경이 째려보자 침도 미련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쓰읍.”

“하··· 알았어.”


그에 유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사내들 모두 약속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상 무사로 보이는 유희고 강호에서 여인과 아이는 조심하랬다고 섣불리 말을 붙이기가 어려운 인물이지만 그런 장벽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게 만드는 미색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정검당도 견신의 정체를 알고 위축되지 않았더라면 공손신정과 조경의 서슬을 뚫고 유희에게 말을 붙여봤을 터.


“치··· 한 잔은 괜찮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마치 아이처럼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그런 사내들의 심기를 다시금 뒤흔들었다.




아무튼 서각을 포함한 대다수 사내가 모르고 있었다. 견신이 직전에 수왕 주견주로 함정을 파고, 그 함정에 서각이 걸려든 시점부터 세 호위 역시 서각을 주목하고 또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




이른 새벽, 달이 아직 지평선 근처에 걸려 있으나 물안개가 운하를 중심으로 낮게 깔리는 탓에 시계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더운 피조차 곧바로 얼어붙고 마는 설원에서, 시체의 산과 피바다 위에서 견신이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누런 이 너머에 거친 욕지기 아니면 묵은 침을 한 움큼 머금은 병사들이 견신을 에워싸고 그의 전진을 저지하고 있었다.


-죽어랏! 귀신호(鬼神虎)!

-초원의 영광을 위하여!

-몽골은 결국 승리할 것이다!

-대원(大元)의 전사들이여!

-귀신호가 여기 있다!

-귀신호를 죽여서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전사들의 넋을 위로하자!


목을 베고, 머리를 쪼개고, 쇄골부터 골반까지 가르고, 찌르고 또 베고, 죽이고 또 죽여도 끝없이 몰려들었다. 집을 공격 당한 말벌 떼처럼.


쏟아진 피와 뇌수가 눈과 엉겨 붙고, 산을 이룬 시체 정상에 꽂힌 깃발처럼 섰을 때 마침내 공격이 멈췄다. 저기 멀리 지평선까지, 보이는 것은 온통 시체뿐. 적군도 아군도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뻘건 피와 허연 뇌수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심장을 토할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견신.


“후욱— 후욱—”


지칠 대로 지친 그가 시체의 산꼭대기에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털썩—


그러고는 휘하 장수들을 찾았다.


“후욱— 상장군! 후욱— 어디 있는가!”


가— 가— 가—


그의 목소리만 메아리칠 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 견신이 다시금 숨을 몰아쉬며 호명하는데.


“후욱— 상장군 이충서! 후욱—”


거꾸로 짚은 검에 체중을 실은 채 숨을 몰아쉬는 그의 시야, 무릎 아래 그가 있었다.


상장군 이충서가. 죽은 채로.


“이충서···? 어찌 네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보니 온통 아군, 형제들의 시신이었다. 저기 저 멀리 지평선까지.


죽은 지 한참 지났다는 듯 파리 떼가 들끓고 구더기들이 살점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어찌···? 너희들이 어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간담이 타는 고통이 전신을 조각내듯 작렬하면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 된다···! 이충서! 정보! 장천목! 아니 된다고 하였다! 어찌 이리 누워 있는가!”


그 눈물이 죽은 이충서의 얼굴에 떨어지는 그때 별안간 천지가 뒤바뀌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어둠으로.


“!!!!!!”


그에 다시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둠 속 조금 멀리 거기, 홍소화와 고경신이 나타났다.


“홍소···! 행수···?”


그리고 두 사람의 뒤로 놈이 나타났다. 서각이.


“서각···?”


그리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머금은 놈이 어느 한순간 도(刀)를 휘둘렀다.


“이 노—오—옴—!”


그런 놈을 인식함과 동시에 팔문 일식, 초광을 전개했으나 몸은 의지를 배반했고 느릿느릿하기만 하여 놈에게 닿지 못했다.


“홍소화—아—! 고경시—인—!”


그에 홍소화와 고경신의 목이 떨어지고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검자 고견신, 아니 정왕 주견신을 보았을 때, 천지에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




악몽을 헤매는 견신을 깨운 건 귀로였다.


“허억— 허억—”


나무에 기대앉아 기여를 안고 깜빡 선잠에 든 견신. 한겨울 시린 공기에도 불구하고 얼굴과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는 그의 머리를 귀로가 입술로 깨물었다. 괜찮냐며 묻듯이.


“···괜찮아, 나는 괜찮다. 귀로. 고맙다.”


그에 견신이 비로소 현실 세계를 자각하며 귀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푸르릉—


정말 괜찮냐며 묻는 듯 투레질하는 귀로를 다시금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운하를 중심으로 형성된 희뿌연 안개가 점점 세력을 넓히는 중이었다.


모두 잠든 듯 모닥불 타는 소리.


타닥— 타닥—


고른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 강물 흐르는 소리가 혼재돼서 들려왔다. 깜박 잠든 새 일이 터지지는 않은 것 같았고.




아니, 누군가 몇 걸음 앞에 강둑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곧바로 기여를 힘껏 쥐었다가 점차 확대되는 체구, 옷차림새를 보고 맥이 풀렸다.


“···홍소화.”


얼굴 가득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고 다가오는 사람은 홍소화였다. 직전에 꿈에서 깰 때 이쪽의 인기척을 들은 모양.


“고 대협···?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악몽이라도 꾸신 게 아닌지···”

“···괜찮습니다, 행수. 밤이 깊었는데 아직 잠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리되었습니다.”

“무슨 염려하실 거리라도 있으신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묻지 않았겠으나, 홍소화이기에 물었다. 날이 밝고 언젠가 길이 갈리게 돼서 헤어지면 다시 못 볼 수도 있으므로.


홍소화가 전생 시절의 그 소녀와 닮았다는 게 기억의 왜곡과 오랜 바람에 기인한 현상일 수도 있으니, 그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이이의 성명 그 세 글자만으로 충분한 일이다. 주견신의 배려를 받기에.


“그게··· 아닙니다, 대협.”

“가끔은 털어놓음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더 나은 이야기 상대일 때도 있고.”

“···뵐수록 기이하십니다. 종종 폐행수보다 노숙하신 듯 느껴지니. 실은 아들 때문에 생각이 많은 금일입니다.”


홍소화가 고경신의 문제를 설명했다. 요약하면 섬전도 조규상을 꺾은 소년 고수를 오늘 직접 보게 되면서 아이 마음속 무사의 길에 대한 열망이 더 커졌다는 이야기였다.


“이 사람이 걱정거리를 안겨드린 셈이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대협. 그렇지 않습니다. 대협을 탓할 마음에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저희 모자의 문제일 뿐, 어찌 대협이 문제겠습니까.”

“···무사의 길을 반대하시는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어렴풋이나마 내력을, 아이 아비와 연관된 사연임을 짐작하지만 그럼에도 물었다. 주견신이 불씨에 부채질한 셈이니, 물을 수밖에. 어쩌면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므로.


“지아비도 폐상의 무사였습니다. 폐행수와는 소싯적부터 한마을에서 자란 단짝인데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뒤 상행 중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삼가 부군의 명복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대협. 박복한 여자가 지아비를 그리 잃었는데, 아들마저 그리 잃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제 아비가 병을 얻어서 죽은 줄만 알고 또 무사의 길을 걷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폐행수의 생각에는 아닙니다. 아이는 험한 싸움 피 튀기는 싸움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요.”

“아무래도 산서상인이니 커다란 흉사는 드물겠지요.”

“네, 서로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거나 어쩌다가 아주 조금, 다치는 수준으로 피를 보는 일이 대부분이니 딱 그 정도만 겪어본 셈입니다. 얼마 전 양성이 천진 인근 운하에서 당한 습격도 수년 만의 일이고. 무사와 행렬이 몰살당하는 흉사는 전혀 겪어보지 못했지요.”

“혹, 부군의 흉수는···?”

“모릅니다. 미궁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행렬이 몰살된 데다가 흉수들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탓에···”

“흠.”

“흑회나 신안상인,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흑회, 그 이름이 오늘만 해도 두 번 등장했다. 종청산에게 최초로 들은 그 이름이.


“흑회··· 흑회 역시 산서상인과 경쟁하는가 봅니다.”

“경쟁만이 아니라 사실상 서로 적대시합니다. 염인(鹽引)은 폐상과 신안상인만 갖고 있는데, 흑회가 염인을 노리고 있고 그전에 양회의 염장 일부를 강탈한 상황인지라.”


염인은 바다에서 나는 금인 소금을 도소매할 수 있는 권리. 나라에서 부여하고 관리하는 권리고, 소금은 나라 세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물산이었다.


또 양회 지방에는 천하 최대 염장이 있다. 천하 소금 대부분이 양회 지방에서 생산된다는 이야기.


“흑회가 소금을 밀매하고 있다는 뜻.”

“네. 거기 남경 조정이 방조 혹은 동조 중인지라, 폐상의 상황이 조금 어렵습니다.”


그 뒤로 잠시 종청산의 설명과 대동소이한 내용이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아이 아비가 소금을 운송 중 변을 당한 것입니다.”

“혹, 연이 닿아 다음에 뵙게 되거든. 그때 흉수를 찾아내셨거든 알려주십시오. 그 은원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흑회든 신안이든 괘념치 않을 테니 알려주십시오.”


홍소화가 순간 놀라면서도 감동한 듯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협,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진실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과 같은 성명을 쓰셨다고 하니, 그리 마음이 쓰입니다.”


그러다가 돌연, 전혀 예상치 못한 사연 하나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다행입니다. 지아비가 오대조 숙조부님의 함자를 빌려서. 덕분에 이리 고 대협의 호의를 얻게 되었으니.”

“···예?”

“실은 저희 부부의 성명에 얽힌 사연이 조금 재미있습니다. 지아비는 오대조 숙조부의 함자를 빌렸고, 폐행수는 오대조 조모의 함자를 빌렸습니다. 양가 어른의 뜻이었지요.”


고막을 파고든 사연은 곧바로 뇌리까지 치달렸고 장악했다. 순식간에, 완벽하게.


오대조 숙조부, 오대조 조모. 오대조면 지금으로부터 백년 남짓 전 시기의 인물일 터. 부부의 출신지가 진성 그 이전에는 합비였다는 점만 제외하면, 딱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가.


저녁 무렵에는 후손이 아니라고 지극히 우연하고 또 공교로운 인연이라며 결론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구름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꺼질 듯 위태로운 불씨가 적당한 바람을 만나서 강렬하게 되살아나듯이.


“오대조 숙조부의 함자를 쓰셨다는 말입니까? 피휘가 보통일 텐데···?”

“조금 흥미로운 일이지요? 다들 그리 말씀하십니다. 듣기로 시가의 오대조 숙조부께서 집안을 위해 큰 희생을 하셨다고 합니다.”

“희생이라면···?”

“자세한 건 모릅니다. 세세히 말씀해 주시지는 않으셨다고 들어서. 아무튼, 정녕 흥미로운 점은 시가의 오대조 숙조부와 폐행수의 오대조 조모께서 그 당시 혼약을 맺었었는데 혼례를 몇 달 앞두고 그만 숙조부께 일이 생겨서 영영 혼례를 치르지 못하셨다 합니다.”

“!!!!!!”


그렇게 홍소화를 보고 이야기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심신을 인식하는 그때, 문득 꿈에서 본 서각이 떠올랐다. 옅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홍소화의 뒤로 꿈속에서 본 서각이 겹쳐 보였다.


그에 얼른 정검당과 서각 일행을 돌아보니 정검당에서 세운 보초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서각 일행은 자는 듯 보였다.


만약 첫 번째 경우라면 서각이 아직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고 두 번째 경우 즉, 증원을 기다리는 경우라면 마찬가지 아직 신호를 보내지 않은 것일 터.


다들 곯아떨어졌으니, 일단은 안심할 수도 있겠으나, 조금 전에 꾼 악몽이 마음에 걸렸다. 짚고 따져봐야 한다. 반드시.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질 않는, 빌어먹을 삶이니까. 단 한 번도.


“행수, 다른 이야긴데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를 낮추자 의아한 얼굴이 된 홍소화도 따라서 목소리를 줄였다.


“네? 아···! 말씀하세요, 대협.”

“깨어계시는 동안 혹, 서각 일행이나 정검당 일행 중 누군가 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습니까?”

“자리를··· 폐행수의 기억에는 없었던 듯합니다. 한데, 그건 왜···?”

“흠. 알겠습니다.”


홍소화는 잠들지 않은 셈이니 그녀의 말대로일 것이다. 서각이나 다른 누군가 어떤 물건이나 소리를 통해서 신호를 보내는 등 특이한 행동을 했다면 그 또한 이야기했을 터. 별일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 서 대가께서 아까 조금 고생 하시긴 하셨습니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생이라면···?”

“그 아무래도 취기 때문에 게워 내시느라 조금 오래 힘들어하시기는 하셨습니다. 그리 많이 드시진 않은 것 같았는데··· 말씀마따나 주량이 약하신 듯합니다. 잠드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 보기에도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다.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이면 모를까 오래 시달릴 만큼은 아니었다.


일단 악몽을 꾸던 중 녀석의 토악질 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면 깼을 터. 그러나 듣지 못했으니, 이는 필시 서각이 꽤 멀리 다녀왔다는 뜻.


“혹, 그때가 언제쯤인지 기억하십니까? 어느 쪽으로 갔었는지도?”


연거푸 진지하게 물으니 어떤 낌새를 느꼈는지 홍소화도 안색을 흐렸다.


“그게··· 반 시진은 안 됐을 겁니다. 이 각쯤 다녀오셨고. 자세히 보지는 않았으나, 운하를 따라서 조금 가신 듯하였습니다. 대협, 한데 이런 건 왜···?”


이각 동안 사라졌었다면 최대 일각 거리를 다녀왔다는 뜻. 번역하면 증원이 있다고 가정 시, 최대 일각 거리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아직 들이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가 잠들었을 시각 즉, 깊은 새벽을 노려서 은밀하게 일거에 해치울 심산일 터.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다.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당장.


마침 대다수가 잠든 상황이고 서각이 실제로 잠들었든 잠든 척을 하고 있든, 좌우지간에 여기 누웠으니 이제 신호할 수 없다.


놈이 깨어난 척 일어나서 대비하는 낌새를 눈치채고 신호 하기 위해 자리를 뜨려 하면 붙잡을 테니까. 무슨 일이든 그냥 근처 강둑에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그러지 않고 바로 이빨을 드러내면 고마운 일이고. 그 자리에서 처리하면 되니까.


“행수, 일단 세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조용히 식솔들을 깨우시고 수레와 마차의 대형은 이 사람이 다시 세우겠습니다. 우선 말과 나귀를 잘 다루는 자, 하나. 실력 좋은 무사, 둘을 골라주십시오.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렇게 견신과 홍소화가 대비에 착수한 그 시각, 운하 남쪽 조금 멀리서 커다란 조운선 한 척이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달이 저물고 물안개가 더 짙어진 새벽, 컴컴한 새벽에 모든 등불과 횃불을 끄고 이동 중인 조운선이.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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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97 맛있는새우
    작성일
    24.08.26 20:40
    No. 1

    캬 재밌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최고의망상
    작성일
    24.08.26 20:51
    No. 2

    즐감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한사
    작성일
    24.08.27 09:21
    No. 3

    좋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4 se******
    작성일
    24.08.27 11:25
    No. 4

    드디어 이야기 진행이 되는것 같아 기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차돌초롱
    작성일
    24.08.28 12:38
    No. 5

    잘 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18:31
    No. 6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아직
    무공을 완성하지도 않았는데 웬놈의 위기는
    씨리즈로 몰려드냐. 재미 없게시리...ㅉ

    찬성: 1 | 반대: 5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19:42
    No. 7

    정왕과 일단의 무리는 강을 따라 내려가던중에
    야영을 하고있는 상태인데 무슨 조운선인지 하는
    괴선박은 아래에서 강을 거슬러 북상중이다.

    어떻게 머나먼 남쪽으로 전갈을 보낸걸까?
    설사 보냈다치고, 그리고 도중에 습격하기로
    모의를 했다치자, 목표물의 위치를 어떻게 아나?
    핸드폰으로 연락을? ㅎㅎㅎ

    그래, 불을 피워 알린다치자,
    그러면 불만 피우지 못하게 하면 습격선은 모르고
    그냥 지나쳐야한다. 강이 얼마나 긴데 어딘줄
    알고 정선을 하겠나.

    그러니 병법이고 진법이고 다 필요없다.
    서가 일당만 묶어서 재갈을 물리면 만사형통.
    싸울 필요도 없다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rl****
    작성일
    24.09.09 15:05
    No. 8

    건필하세요 재미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djsejr
    작성일
    24.09.11 01:16
    No. 9

    인연이 이렇게 닿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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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5화 +13 24.08.27 8,478 385 19쪽
» 34화 +9 24.08.26 8,508 356 23쪽
34 33화 +17 24.08.23 8,866 407 20쪽
33 32화 +14 24.08.21 8,802 35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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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0화 +21 24.08.16 9,430 412 16쪽
30 29화 +20 24.08.15 9,012 456 21쪽
29 28화 +29 24.08.13 9,353 349 21쪽
28 27화 +23 24.08.12 9,088 373 20쪽
27 26화 +25 24.08.09 9,351 422 20쪽
26 25화 +20 24.08.08 9,774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68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29 369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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