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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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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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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DUMMY

39화




천순 8년 겨울, 천하의 지배자였던 천순제 주기진은 대행황제(大行皇帝)가 되었다. 하늘 아래 인간 중 가장 존귀한 존재로 정해져 살아온 36년 세월. 어느 들녘 이름 모를 꽃처럼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지기를 반복했던 영욕도 죽음이란 소나기에 씻겨 사라졌다.


그의 죽음을 머리에 이고 품속에 갈무리한 파발들이 관도를 달리는 중. 또 다리에 전통을 묶은 비둘기들도 인간이 정해준 목적지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하여 최대 사나흘 내로 천하 전역에서 스물일곱 달에 걸친 장례, 그 대장정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황실과 종실 그리고 문무 관리와 처족은 스물일곱 달 동안, 나머지 백성은 스무날 동안 소복을 입어야 했다.


또 모든 관리와 그 일가는 백 일, 나머지 백성들은 한 달 동안 혼례가 금지됐고, 음주와 가무를 비롯한 일체의 향락 및 제사도 백 일간 금지 그리고 49일 동안 도축을 비롯한 살생 행위도 엄격히 금지됐다.


즉, 늦어도 사흘 뒤부터는 천하 전역의 사람들이 모두 소복 차림을 하게 되고 또 이유를 막론, 모든 살생이 금지되는 것. 사형 집행도 미뤄졌고, 예외는 없었다. 무림 강호도 예외가 아니며, 49일간은 정당한 살생 및 살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무튼 세상을 떠난 황제를 일컬어 대행황제로 불렀다. 생전 업적을 망라한 시호와 묘호의 제정 전에는 그렇게 불렀다. 제정 후에는 보통 묘호로 불렀고. 태조나 태종 같은.


황제의 시신이 놓인 관(棺)은 재궁(齋宮)으로 불렀으며, 사후 바로 능묘에 안치하지 않았다. 내정 깊숙한 자리, 빈전(殯殿)에 놓았고 그에 황제는 죽은 뒤에도 몇 달을 궁에서 보냈다. 한 예로 태종의 경우, 8월에 죽어서 12월에 묻혔다.


그처럼 몇 달 동안 관과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는 작업은 많은 재물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시신 아래 수시로 얼음을 채우고 숯이나 잿가루 그리고 대나무로 시신을 둘러싸서 공기와 습기를 차단해야 했다. 문자 그대로 죽은 사람이 황제이기에 가능한 형태의 장례인 것.




한편, 태자는 선황이 궁을 떠나기 하루 전 즉, 발인 하루 전 정식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즉위 전에는 계위황제로 불렸고.


물론 이는 형식상 절차일 뿐. 태자는 황제 사망 즉시 사실상 황제처럼 행세할 수 있었으며 또 황제로 대우받았다. 이는 권력의 특성 중 하나가 살아있는 숙주를 선호하는 것이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주기진이 죽었고 그의 장자인 주견심이 황후 소생이 아니기는 해도 이미 성년인 데다가 다른 결격사유도 없기에 주기진의 권력은 금세 주견심에게 옮겨갔고 곧바로 새 영혼과 육신을 핥으며 다음 기생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따라서 지금 주견심은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고 이제 천하의 지배자는 천순제 주기진이 아니라 계위황제 주견심이었다.




#




황제 즉위를 몇 달 앞둔 주견심이 홀로 빈전을 찾았다. 벽난로와 화로들이 텅 빈 탓에 빈전 안은 차갑고 또 어스름했다.


본래 열기와 습기는 부패의 주범. 그런 열기를 제거하기 위해 촛불마저 최소한으로 켠 빈전 그 오싹하리만큼 서늘한 실내에서 환관들이 죽은 주기진의 관을 옻칠 중이었다. 관을 이틀에 한 번 옻칠함으로써 시신과 관 자체의 부패도 막고 또 관의 강성을 도모하려는 것.




심약한 이들은 견딜 수 없는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붓이 관에 옻을 바르는 소리만이 허공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향 연기처럼.


스윽— 스윽—


환관들은 옻을 바르면서도 한 번씩 주견심을 의식하며 곁눈질하곤 했다. 새 황제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탓에 적잖게 신경이 쓰이는 것.


[······.]


그러거나 말거나 주견심은 노란 촛불과 씁쓰름한 향 연기 가운데 쌀을 입에 물고 잠든 아비와 그를 모시는 환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복잡다단한 상념 또 감정들로 가득했다. 슬픔, 후회, 연민, 원망, 증오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상념과 감정들이 봇물 터진 듯 쏟아지는 중.


“······.”


온종일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아버지는 그 녀석을 찾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견신.

-예, 폐하. 소자, 여기 있사옵니다. 강건하셔야 하옵니다, 폐하.

-···견신.

-예···?

-···견신. 내 아들 견신아.

-······.

-오지 마라··· 너만은 자유로이 살 거라··· 훨훨 날아가거라··· 내 아들···


당신께서 혼미한 와중에도 수없이 부른 그 이름. 그 녀석의 이름이 고막과 뇌리에 박힌 듯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지금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와 어울려 환청처럼 끊임없이 들릴 정도. 귀를 잡아 뜯어버리고 싶을 만큼.


견신— 견신— 견신—




지난 몇 달, 아버지와 그 녀석에게 시달렸다. 주기진과 주견심의 부자 사이 거기 불쑥 끼어든 주견신을 생각하면 울화가 솟구쳤다.


녀석이 황궁을 떠난 뒤, 태자 주견심의 16년보다 정왕 주견신의 1년이 각별하고 애틋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으나 화를 내면 인정하는 셈이라고 애써 무시해도 한동안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졸졸.


그에 그런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들을 모조리 참수하는 꿈을 꿨을 정도.


어느 날에는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털이 한 움큼 빠져 있었다. 또 몸 곳곳이 가려워지기도 하고 생전 처음 고뿔에 걸리는 등 이런저런 잔병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런 병치레보다 병치레의 원인이 신경 쇠약이라는 게 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정왕 주견신이 태자 주견심의 심신에 위해를 가했다는 뜻이니까.


일개 친왕이, 그 녀석 따위가. 감히.




생각해 보면 문제는 아버지에게도 있었다. 순쟁 이후 여러 차례, 주견신을 위한 유언과 조처를 남긴 당신에게도.


녀석이 그 아무리 날뛰었다고 한들 아버지가 현혹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끝.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녀석에게 현혹된 아버지에게도 적잖은 책임이 있는 셈이다.


‘소자도 이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대표적인 실책 세 가지만 꼽자면 첫 번째, 당신의 내세를 위해 반대를 주장한 태자의 충심과 효심을 저버리고 순장을 철폐한 것.


두 번째, 자손 한 명 낳지 못한 여인을 당신의 능묘에 함께 묻힐 정비로 못 박은 일. 후계자를 낳아준 아내를 외면하고.


마지막 세 번째, 지난 역사 통틀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유를 친왕에게 주었고, 그런 친왕을 경위황제가 대행황제의 장례에 불러들이는 일까지 금지한 일.


그 모든 처사의 공통점은 둘이다. 태자 주견심과 귀비가 바라는 바와 심히 어긋난다는 점. 또 당신 다음에 천하를 짊어질 두 사람의 위신을 땅에 떨어트렸다는 점.


‘아버지가 다 그르치신 겁니다. 그리 감싸고 도시니 없던 생각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거기 더해 목 위 머리가 온전히 달린 이라면 누구나 능히 그 속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처사다. 주견심이 아비 장례를 수단 삼아 이복동생을 해칠 거라는 생각, 그를 전제한 처사라는 것을.


‘아버지 덕분에 천것들까지 소자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형이 꼭 아우보다 나은 것은 아니라고.’


대체 그 얼마나 조정 앞에서 또 천하 앞에서, 태자 주견심과 그 어미의 위신을 훼손하는 짓이라는 말인가. 이제 천하 만백성이 새 황제 주견심과 황제의 어미를 어찌 보겠는가 말이다.


‘원망은 않겠습니다. 그저 편히 쉬시길. 하늘에서 두고 보세요. 소자가 어찌하는지. 소자가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지.’


그런 사정을 목 위 머리가 온전한 이들 모두 헤아리고 연일 입방아를 찧는다. 거기 더해 궁 밖에서는 그런 소문도 들려왔다. 이무기 주기진이 낳은 용은 태자 주견심도 덕왕 주견린도 아닌 정왕 주견신이었다고.


‘소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와 다를 겁니다. 소자는 아버지와 다를 겁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도 책임이 있다. 지금 주견심이 내린 결정에.


결정을 내리는 순간 아버지 곁에서 옻칠하는 환관 하나의 얼굴에 그 녀석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천순제 주기진의 생애와 태자 주견심의 생애 그 유일한 오점의 얼굴이.


‘그리 아끼시는 아들 녀석과 곧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저승에서 부자가 오붓하게 지내시기를.’


이내 돌아서는 주견심의 눈빛이 섬뜩했다.




이윽고, 주견심이 떠난 빈전에서 환관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 소리가.


“휴··· 갔군. 사람 뒤통수 따가워서 원.”

“봤어? 서슬이 오싹하던데.”

“그러게, 꼭 뭔가 저지를 분위기던데.”

“내 말이. 한데, 이번에도 않더군.”

“음?”

“곡을 안 해. 슬퍼하지 않는다니까?”


그들 포함, 환관들과 궁녀들 모두 알고 있었다. 주기진이 숨을 거두고 그에 모두 곡을 시작했을 때, 그중 일부는 주기진의 생애를 연민하며 진심으로 통곡 중일 때, 속은 평온할지언정 겉으로는 누구보다 슬퍼해야 할 태자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아, 불효막심한 일이지. 폐하께서 당신 떠나시기 전에 그동안 홀대한 아들 좀 몇 달 어여삐 여기셨다고 좀생이처럼 십수 년 부자의 정을 그리 내동댕이치나? 쯧쯧!”

“모르긴 몰라도 정왕 전하께서 여기 계셨다면 삼 일 밤낮 곡하셨을걸?”

“곡이 뭐야? 식음을 전폐하셨지. 전하께서 떠나시던 날, 동문 밖에서 한참 절하시고 우셨다는 이야기. 들었잖아? 아아···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리누나··· 우리 전하···”

“들었지. 참··· 인간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평생 애정을 받은 첫째는 아비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없고 평생 홀대받은 셋째는 부자의 의리라면서 순쟁에 목숨을 걸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이런 말이군.”

“그러니까. 조만간 피바람이 부는 건 아닌지 몰라.”

“···불겠지. 오늘 보니까 조만간 아우 잡아먹을 상이야.”

“전하께서 잘 숨어계셔야 할 텐데···”

“···폐하께서 살펴주시겠지. 마저 하자고.”


이내 다시 길게 이어지는 옻칠처럼 환관들의 걱정도 몸집을 불려 갔다. 점점 더 크게.




걱정이라는 것이 본래 천하의 강과 바다의 깊이, 너비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늘어나기도 또 불어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




한편, 산서상인이 운영하는 반점.

아직 겨울이 뒷심을 발휘 중인지라 벽난로와 화로가 맡은 바 일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으나, 얼어붙은 강처럼 흐르는 침묵이 또 정적이 데워진 공기를 무용으로 만들었다.


[······.]


모락모락 솟는 김에 군침이 도는 향기까지 품은 찜과 탕을 앞에 두고도 멍하니, 눈물만 흘리는 이들. 특히 둘만 살아남은 정검당 남녀는 넋이 나간 기색이었다.


시신들은 홍소화의 주도 아래 인근 장의사에 맡긴 상황. 입관이 끝나면 화장해서 유골을 유족에게 전달할 예정이고 흑회의 시신은 날 밝는 대로 화장할 계획이었다.


그날 밤 견신과 과도경전의 대화에서 흑회가 견신을 노리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지만, 원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시 끝에 가서 전후 사정이 밝혀졌을 뿐. 견신이 그 전에 축자뇌각의 수상함을 경고했다고 한들, 실수일 수도 있고 또한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한 정황만 듣고 그 누가 냉큼 믿었을 것이며, 만약 그 경고가 축자뇌각의 귀에 들어갔다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일이 틀어졌을 거고 그 결과는 더 큰 참사였을 테니까.


일부가 경고를 신뢰하여 자리를 떴다고 해도 목적지가 있는 남쪽으로 떠났을 터. 당시 조운선이 남쪽에서 왔으니 떠난 이들이 무사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아무튼, 결과론적 측면에서 본다면야 견신을 원망할 수 있겠으나 논리적으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물론, 더러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이유로 또 사고가 온통 친인, 지인의 죽음에 고립된 나머지 원망에 사로잡힌 이들도 있었으나 태를 내지는 못했다.


견신은 그 밤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우두머리요 영도자며,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이므로.




견신은 홍소화와 그녀의 아들 고경신 그리고 행수 문국과 함께 원탁에 둘러앉았다. 저녁에 주기진의 부고가 도착했고, 그 즉시 황제의 장례가 시작된 셈. 그에 모두 소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사사롭게는 오라비나 마찬가지였던 지청명을 잃은 홍소화도, 백부이자 우상을 잃은 고경신도 둘 다, 젓가락을 집어들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에 문국도 덩달아 한숨만 푹 내쉬는 중이었고.


그랬으나, 한 사람. 견신은 달랐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손놀림으로 음식들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 불상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에 머금은 것을 수십 번씩 보는 사람이 다 질릴 정도로 우직하게 씹고 나서야 비로소 식도에게 넘겨 주었다.


그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저작 중인지라 쩝쩝거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으나 오물오물 소리는 났고 덕분에 사람들 모두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식사 중인 사람은 견신과 하늘이 무너져도 끼니만큼은 거르지 않을 사람인 유희뿐이라는 것을.


주기진의 부고를 듣고 생각이 많아진 조경과 공손신정은 지금 상황에서도 태연히 먹는 것에 집중하는 유희를 질렸다는 듯 보다가도 견신을 곁눈질하며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문득 견신이 전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그에 우울한 감상의 밑바닥 어딘가를 허우적거리고 있던 홍소화와 고경신 등이 견신을 돌아보았다.


[······?]


견신의 눈은 여전히 부처의 그것처럼 가늘게, 무념무상의 빛으로 원탁의 중심을 관조하는 중.


“소형제, 한 번에 하나씩이다.”


그런 그에게 소형제로 불릴 사람이 고경신 하나이기에, 또 내용을 대번에 이해할 수 없기에 모두, 조금 의아한 눈길로 어린 소년의 반응을 주시했다.


“···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라는 이야기. 먹을 때는 먹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뜻이다.”

“아··· 대협··· 저 입맛이···”

“허면, 무사는 무리다.”

“네? 대협···?”


흠칫—


그날 하룻밤만의 인연으로도 충분했다. 세 호위와 정검당까지 모두 고경신의 꿈이 무사라는 사실과 소년의 우상이 지청명에서 형주 사람 고사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또 소년이 벌써 여러 해 그 문제로 어미와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데 지금, 견신이 저보다 더 어린 소년에게, 저를 우상으로 삼은 이에게 무사가 될 수 없다며 단정지어 말하고 있으니 놀라면서도 의아해할 수밖에.


[!!!!!!]


한순간 날아갈 뻔한 꿈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은 당사자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고.


“고 대협! 어째서···?”

“당장 반 각 뒤, 산서상인을 노린 적이 올 수도 있음이다. 세상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 그들과 사흘 밤낮 싸우게 될 수도 있을 거고. 지금 먹지 않으면 도검을 채 반 시진도 휘두르지 못할 터. 허나, 입맛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무사의 재목이 아닐밖에.”


그 대목에서 고경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랐다. 조경과 공손신정까지.


[!!!!!!]


그리고 원탁 중심을 관조하는 견신의 동공 그 빛이 아득해졌다.


“전장의 장수와 병사에게 밥은 천지신명이었다. 장수는 굶주린 군대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병사는 한 끼 굶으면 반나절도 넘기기 전에 적의 도검을 맞고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와중에도 아름다운 볼 여기저기 음식을 묻혀가며 먹는 데 열심인 유희의 경우, 견신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였고.


“쩝쩝— 암, 암.”


끄덕끄덕—


“배탈이 났어도, 이가 전부 부러져 잇몸만 남았더라도, 울면서라도 악착같이 또 꾸역꾸역 먹고 또 먹어야만 이길 수 있음을. 인세의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먹기 싫어도 먹고, 먹을 수 없어도 먹어야 전우와 형제를 지키고 언제인가 정녕 그 언젠가···”


끝에 가서 잠시 견신의 목소리가 허무해졌다. 아니, 그것은 비탄이었다. ‘그 언제’를 맞이하지 못한, 돌아가지 못한 자의 비탄.


“그리운 부모 형제, 자매, 아내, 자식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십중팔구가 돌아가지 못했거나 죽어서야 뼛가루로 아니면 혼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살아서 돌아간 하나둘은 모두 악착같이 먹고 또 먹었기에 자나 깨나 전투를 준비했기에 돌아갈 수 있었음이다.”


고경신과 마찬가지로 소년. 고경신보다 불과 네댓 살 많은 소년. 전쟁을 겪어봤을 리 없는 소년.


“먹어야 나도 지키고 전우도 지키고 부모 형제도 자매도 아내도 자식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을. 빈농의 아들, 가난한 목동, 똥지게, 백정, 점소이, 기녀의 아들, 어부 모두 첫 전투에서 깨달았지.”


그러나 처절하게, 생생하게 겪어본 사람처럼 뇌까리는 그의 모습에, 자조 혹은 회한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에, 사람들 모두 신음했다. 저들도 모르게, 비명처럼.


[으음···]

[아···]

“그리하여 너 무사는 무리다. 상인의 삶이 옳을 것. 또한 무사는 범부를 해하지 않음이니, 무사보다 상인이 오래 살아남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냉정하고 매정하기 짝이 없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하는 견신. 오물오물 씹는 소리가 유희의 그것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쩝쩝—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다 어느 순간, 누군가 젓가락을 집어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고경신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고쳐 쥔 소년이 눈물을 주렁주렁 매단 채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끅— 끅—”


모두, 소년이 다시 울기 시작하는 까닭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먹기 시작하는 까닭은 이해했다. 소년이 무사를 포기하지 않는 것. 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며칠 전 그 흉사를 겪고도.


그런 아들을 본 홍소화의 두 눈이 질끈 감기고, 탄식과 함께 거기 아들의 얼굴이 투영된 눈물이 떨리는 속눈썹 사이를 비집고 나와 떨어졌다.


“아아··· 정녕··· 신아야, 정녕···”


뚝— 뚝—


그녀 또한 깨달은 것이다. 이제 더는 아들을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그녀와 지아비를 반반씩 닮은 분신에게 무사의 길은 운명이었다는 것을.


사실 아들이 마침내 포기한 줄만 알았다. 그날 밤, 죽은 지청명과 수많은 시신을 보고 여태 구역질에 시달렸으니까.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 일쑤였고.


지청명과 식솔들, 사람들의 죽음은 커다란 불행이지만, 아들이 무사의 길을 접은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아니나 다를까, 고경신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견신을 돌아봤다. 밥알 버무린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다짐하듯 또 약속하듯 소리쳤다.


“끅— 진성 사람 고가 경신은 반드시 무사가 될 거예요! 끅— 무사가 되어서 어머니랑 식구들을 지킬 겁니다! 끅— 형주 사람 끅— 형주 사람 고사처럼!”


소년이 형주 사람 고사를 말하는 대목에서 무심했던 안색이 찰나 흐려진 견신.


멈칫—


젓가락질을 멈췄던 그가 씁쓸한 얼굴로 다시 밥알을 모으며 읊조렸다.


“···소형제, 한 번에 하나씩이다.”

“끅— 한 번에 하나씩입니다!”


그처럼 견신에게 인정받았다고 생각, 그에 격동하는 고경신. 그러나, 소년은 알지 못했다. 형주 사람 고사의 진실한 답을.


‘지키지 못하였다. 아무도.’




견신이 집으면 따라 집고, 씹으면 따라 씹고. 고경신이 견신을 복사(服事)하는 가운데, 젓가락 집어 드는 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산동성 제남.

마차를 탄 중년 사내 셋과 핼쑥한 안색의 여인 한 명. 그리고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품에 안은 남아 하나가 막 반점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나이 스물쯤 점소이가 안내한 반점 내실에서 남아가 꽁꽁 언 몸을 녹이는 사이, 중년 사내 중 한 사람이 주문을 받고자 돌아온 점소이에게 물었다.


“일단 따뜻한 차를 내오겠습니다. 오다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자 폐하의 장례가 시작되어 금주령이 떨어졌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혹, 하나 여쭤도 될는지요?”

“아이고, 대가. 그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얼마든지 여쭈시고요.”

“혹, 제남에서 함자에 린(潾) 자를 쓰시는 분을 아십니까?”

“예?”

“그리 찾으면 찾을 수 있다기에···”


점소이는 당황스럽고,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름 한 글자 갖고 사람을 찾다니. 그렇게 하라고 알려준 사람도 그렇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도 그렇고.


둘 다 희한한 사람들,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린이요? 송구스럽지만, 대가. 한 자만 듣고 어찌···”


그러다 문득 손님이 말한 글자가 뇌리에서 다시 선명해졌다. 한 획, 한 획 그어졌다.


린(潾). 맑은 물 혹은 돌과 돌 사이로 새어 나오는 석간수를 의미한다. 저잣거리에서 듣기 어려운 글자고.


맑다는 뜻의 글자는 얼마든지 있는데 린은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려운 글자니까. 누구나 살다 보면 자기 성명을 쓸 일이 많은데 번거롭게 어려운 글자를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린은 쓸데없이 획이 많다.


‘왕공대신도 아니···!’


자연스레 그런 글자는 왕공대신이나 쓸 법한 글자라며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그 사람의 성명이 떠올랐다. 얼마 전 제남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내의 성명이.


“아···? 대가, 정녕 린(潾)이 맞습니까?”

“예? 예. 맞습니다. 아십니까?”

“그리 물으면 찾을 수 있다 했고요?”

“예에···”


그런데, 그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누구라고 감히 이처럼 턱턱 찾아가라며 알려줬겠는가. 어쨌든 그 사람이 있으니, 답을 주기는 줘야 할 것 같았다.


“허어··· 이는 아닐 것 같은데··· 아무튼 여기 제남땅에서 함자에 린(潾)을 쓰시는 분이 딱 한 분 계십니다.”

“아! 그렇습니까? 혹, 어디 사시는지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덕왕부의 주인이십니다.”

“예···?”

“덕왕 전하께서 견 자, 린 자를 휘로 쓰십니다. 전하의 휘인지라 제남땅에서는 아무도 린(潾)을 이름에 쓸 수 없지요.”


얼마 전, 창주에서 귀로를 견신에게 판 사내, 궁호상의 눈과 입이 썰물 때 바닷길처럼 열렸다.


“예에—?”


작가의말

skinscuba님, 꼬반님 정성 어린 추천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k234_disaqua님, 곰토님, 검은추기경님, 조용한베어님, 검머짐님, 아리샤님, 허어어어얼님 후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신 독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프로가 못되는지라, 손이 느리고 이런저런 잔병치레에 시달리는 지라, 종종 지연되거나 원하는 서사가 나오지 않아서 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한 편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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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무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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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4화 NEW +12 11시간 전 2,544 177 19쪽
44 43화 +62 24.09.19 5,270 386 16쪽
43 42화 +53 24.09.13 8,849 458 18쪽
42 41화 +63 24.09.11 8,776 486 18쪽
41 40화 +33 24.09.10 8,840 433 22쪽
» 39화 +43 24.09.09 9,145 495 22쪽
39 38화 +47 24.09.03 9,871 505 21쪽
38 37화 +17 24.08.30 9,003 385 18쪽
37 36화 +21 24.08.29 9,363 409 21쪽
36 35화 +15 24.08.27 9,265 403 19쪽
35 34화 +12 24.08.26 9,317 372 23쪽
34 33화 +18 24.08.23 9,694 427 20쪽
33 32화 +15 24.08.21 9,626 379 20쪽
32 31화 +25 24.08.20 9,743 382 18쪽
31 30화 +24 24.08.16 10,334 437 16쪽
30 29화 +21 24.08.15 9,873 484 21쪽
29 28화 +34 24.08.13 10,236 370 21쪽
28 27화 +25 24.08.12 9,948 394 20쪽
27 26화 +26 24.08.09 10,219 446 20쪽
26 25화 +20 24.08.08 10,704 388 18쪽
25 24화 +23 24.08.07 10,459 430 20쪽
24 23화 +20 24.08.05 10,437 390 21쪽
23 22화 +25 24.08.02 10,579 457 21쪽
22 21화 +14 24.08.01 10,862 390 18쪽
21 20화 +16 24.07.31 11,086 401 21쪽
20 19화 +21 24.07.30 11,036 464 18쪽
19 18화 +16 24.07.29 11,447 431 21쪽
18 17화 +32 24.07.26 11,380 58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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