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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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최근연재일 :
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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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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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0화

DUMMY

20화




우리는 그날 한 번 만났사옵니다.


어떤 인연은 일생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의 조우에 그치기도 하고.


또 어떤 인연은 내내 잊지 못 하면서도 아니 만나고 지내기도 한다고 하옵니다.


우리는 두 번 만나는 인연이기를 바라옵니다.


만일 전하께서 그날 그 한 번의 조우로 족하다 하시면, 연화는 그날 전하를 아니 만난 것으로 하겠사옵니다.




#




며칠 맹위를 떨치던 삭풍이 잦아든 날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파란 하늘이 선실에 틀어박혔던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개인 선실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언제 사람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까닭에 줄곧 축기를 하지 않고 심법 연구에 몰입했던 견신도 밖으로 나왔다. 파란 햇볕을 쬐고 조금은 부드러워진 공기를 가슴에 불어 넣었다.


선원을 제외, 스무 명 남짓한 승객 중에는 무사가 일고여덟쯤 있었다. 그중에는 무사로 위장한 범부도 있을 테니 실제로는 대여섯이거나 그 아래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승객은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구성이 다양했다.


대부분 뱃머리 근처에 앉아서 늙은 선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몇몇은 견신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때 견신은 꾸준히 밀려나는 물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래 보고 있으니 수면 아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십수 년 전 전쟁에서 이별한 얼굴들이.


배에 오른 뒤, 운하를 접한 뒤 지난 며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 때문에.


파양호에서 주원장과 진우량이 명운을 걸고 격돌했던 전투. 그 대전에서 참으로 많은 전우들이 강바닥으로 가라앉은 뒤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이내 강물이 용골과 부딪혀 갈라지는 소리가 그날의 아우성처럼 들려왔다.


-도원수—우—

-살려주십···! 컥—!

-아아악—!

-안 돼! 안 돼! 제발! 제발 살려···! 으극—

-오, 오지 마! 오지 말라···! 컥—!


화살을 맞고 강으로 침몰하던 이.

적의 칼을 배에 맞고 애원하다 다음 칼에 목이 뚫리던 이.

적군의 칼에 전신이 난자되던 이.

칼로 찍어 내리는 적군의 아래 깔려 그 칼을 밀어내려다 힘에 부친 나머지 천천히 심장을 내어주던 이.

겁먹고 뒷걸음질 치다가 배나 등을 꿰뚫리던 이.


그 얼굴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그날처럼.

그러다 한순간 수면 위로 손을 뻗어왔다.


쑤욱—


-도원수! 나를 살렸어야지!

-살려줬어야지! 할 수 있었잖아!

-왜 나를 포기한 것이오!

-도원수! 왜 도원수만 살아있는 것이오!

-도원수가 우릴 죽인 것이오!

-도원수—우—!


핏발 선 눈으로, 부서지고 으깨진 얼굴로 잘려 나간 팔다리로, 절망 가득한 어조로 영영 해소해 줄 길이 없는 원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처럼 견신의 의식이 점점 더 강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그때, 그런 그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허이— 거 젊은 친구 조심하시오. 여차하면 풍덩하겠소. 멀미로 잠을 설치셨나 보군. 선실에 가서 누우시오.”


그러면서 곁을 지나치는 사내였다. 사내치고 작은 체구지만 가무잡잡한 얼굴의 이목구비가 여인의 그것처럼 고운 모양새의 미남이었고 연배는 한참 위처럼 보였다. 적게 잡아도 스물쯤.


“이런 날에 빠지면 반 각도 되기 전에 그대로 요절이지, 암.”


내심 깜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난 견신은 사내의 등에 대고 조용히 뇌까렸다.


“···고맙습니다.”


사내는 대답 없이 손을 들어 휘휘 저은 뒤 뱃머리로 가서 앉았다. 그 사내의 걸음걸이와 옷 밖으로 드러난 손을 잠시 지켜보는 사이, 늙은 선원의 옛날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이 대운하는 말이야. 태종 폐하의 유산이에요. 원래 몽골 오랑캐들이 놓은 것인데 오랑캐들이 쌈박질이나 할 줄 알았지, 다른 재주가 있었겠어? 툭하면 막혀서 그 쓸모를 잃고 마는 것을 우리 태종 폐하께서 완성하신 게야.”

[오오—]


귀를 기울이던 승객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선원의 이야기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태종을 공경한 것이다.


“역시 태종 폐하세요!”

“와— 운하도···! 대체 태종 폐하께서 살피지 않으신 것이 무얼까요?”

“그런 게 있기는 있을까요?”

“그때가 살기 좋았지. 그때가···”


도읍 북경과 나라의 경제 중심지, 장강 하류의 항주를 잇는 대운하는 선원의 말마따나 태종의 유산이다.


“제국의 대운하는 봄이고 가을이고 막힘없이 이리 잘 흐른단 말일세. 천하 물산이 반절 넘게 저기 강남에서 다 나는데 이 운하로 다 실어 나르는 게야.”


사실 시작은 오래전 수문제가 기획하고 그의 아들 수양제가 완성했으나 그 당시는 황하와 회하, 장강을 연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북경을 기준으로 한참 서쪽에 있는 낙양 일대를 거쳐서 다시 동남진하는 식.


당시는 물의 흐름과 양을 조절하는 기술이 부족하여 강을 직선으로 팔 수가 없었고, 그에 총길이가 자그마치 7천 리에 달했다.


지금의 대운하는 4천 리.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까지 5개 수계를 연결, 항주까지 직선으로 뚫었다.


북경을 도읍 삼았던 원(元)이 기초를 놓았으나 기술 부족으로 종종 막히고 기능을 상실하던 것을 먼 훗날 태종과 공부상서 송례가 완성한 작품이다. 원대 운하와 달리 사시사철 제 기능을 다했고 덕분에 수송량이 40여 배나 증가했다.


“운하가 없었다면 한겨울에 북직례도 그렇고 북쪽은 지금까지도 여럿이 배곯고 살았을 것일세. 물론, 그리됐다면 태종 폐하께서 천도하지 않으셨겠지.”


선원의 설명에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열두어 살 돼 보이는 소녀 하나가 끼어들었다.


“노야(老爺)! 바다는요? 바다도 배가 다니잖아요?”

“오? 신통방통일세? 두 분 대가 대고는 좋으시겠소. 영특한 여식을 두셔서.”


자식을 향한 칭찬은 빈말이라도 부모를 기쁘게 하는 법. 부부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하하하! 노야, 고맙습니다. 여식이 제 아비를 닮아서 영특하긴 합니다.”

“가가, 집에서랑 말씀이 다르시네요? 언제는 소첩을 닮아서 그렇다더니.”

[하하하—]

[호호—]


선원의 노련한 말솜씨에 사람들을 둘러싼 공기가 한층 따뜻해졌다. 배 밖은 겨울이었으나 뱃머리는 잠시 봄이었다.


“바다로도 나르고 있기는 한데, 바다가 운하를 이길 수는 없단 말이지?”

“어째서요? 노야?”

“그놈의 해적, 왜구 때문이지.”

“해적? 왜구? 도적 같은 거예요? 나쁜 놈들?”

“그렇지, 그렇지. 바다의 도적을 해적이라 하는 게야. 바다에는 종종 안개가 끼는데 그놈들이 그때를 틈타서 뱃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하는 게야. 배도 빼앗아 가고.”

“나쁜 놈들!”


분개한 소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자 선원이 기특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쁜 놈들이지. 바다는 그처럼 사람과 물건을 다 잃게 될 여지가 많아요. 여차저차해서 해적을 이기고 옮긴다고 해도 나루터에서부터는 말이나 나귀, 소로 수레를 몰아서 고을까지 옮겨야 한단 말이지? 바닷가에서 육지 깊은 곳에 있는 고을까지 옮기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야.”

“아아···! 너무 멀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 그러니 어지간한 것들은 다 운하로 옮기는 거고 그에 사람들이 운하를 천하 동쪽의 핏줄이라고 부르는 게지.”

“노야! 여긴 도적이 없어요? 여기도 있을 것 같은데.”

“있지. 그래서 우리 배에 저처럼 무사님들이 계시지 않느냐.”


선원이 뒤를 눈짓하자 소녀와 사람들이 돌아봤다. 거기 고물까지 갑판 곳곳에 도를 찬 무사들이 서서 강둑을 경계 중이었다.


“중간중간 나루터마다 제국의 병사들이 마중을 나오기도 하고 또 여기서 노략질해 봐야 저들도 결국 수레를 써서 옮겨야 하니까, 누가 나서면 금방 따라잡히고 마는 게야.”

“그렇구나. 바다는 배 타고 쫓아가야 하니까 못 잡는데 여기는 말 타고 쫓아가면 되니까.”

“그렇지. 우리 같은 상회 물건이면 모를까 나라 물건을 노략질했다가 잡히면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거고.”


풍비박산을 상상한 소녀가 두려운 듯 몸을 움츠렸다.


“으으···! 무서워요.”

“이제 알겠느냐? 운하가 왜 중한지?”

“네! 노야!”




잠시 듣고 있던 견신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 이것저것 꽤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


그처럼 알고 있는 사실인지라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이번엔 과거 회상이 아니라 승선 후 줄곧 매진 중인 심법을 주제로 삼았다.


황궁을 떠나기 전 토납법에 강해선하(江海善下) 즉, 강과 바다가 가장 낮은 곳이고자 하는 이치를 더했고, 이제 단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해(氣海). 기의 바다가 되었다.


육신의 경락과 혈도 중 가장 낮고 깊은 바다가 됐고 그 안에 머무는 기운은 아주 느리게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였다. 그리하여 저를 끌어당기는 다른 경혈과 오장육부의 힘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았다.


승선한 이후 선원 포함 불특정 다수의 방문을 고려해서 기를 쌓는 것을 보류 중이지만 안전이 확보되면 축기를 재개할 생각이었다.


일단 기운을 기해에 잡아뒀으니 다음 순서는 기운을 손과 발 등 사지육신 원하는 부위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기해를 이룬 뒤 몇 번 시도했으나, 단전을 벗어난 기운은 통제 불능이었고 금세 흩어져 버렸다. 그에 한 번쯤은 구룡분승심법을 봐두었어야 했다고, 기를 손발로 보내는 법을 봐뒀다면 좋았을 거라며 생각하기도 했다. 이내 다시 그 생각을 버렸지만.


아무튼, 의미 없는 손실은 아니었다. 흩어진 기운은 경혈과 오장육부의 강화에 쓰였을 테니까. 당장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므로.


내공이 무도의 전부는 아니다. 천 년 전에도 그러했고 백년 전에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도 이뤄볼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기해를 벗어난 기운을 의도한 대로 움직일 수 있는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가.


일단 손으로 보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손으로 가는 길은 경락과 혈도일 거고, 그 경락과 혈도 주변에 포진한 오장육부는···!




그처럼 실마리 같은 무엇이 뇌리를 스치던 그 순간, 견신은 그늘이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그에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전에 선원과 문답을 주고받던 소녀가 동글동글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사님? 뱃멀미했어요? 얼굴이 안 좋으세요···”


견신의 옆에 놓인 기여를 보고도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소녀의 부모와 다른 이들은 늙은 선원과 계속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 중이었다. 조금 전 견신의 상념을 깨운 사내를 포함 몇몇은 빼고.


“······?”

“무사도 뱃멀미하는구나··· 처음 알았어요. 아빠가 무사는 천하무적이라고 했는데. 무사님, 이거.”


소녀가 말끝에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손톱 크기 작은 환 하나를 내밀었다. 말린 약초를 빻아서 뭉친 듯 알싸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산해박인가? 영웅초랬나? 아무튼, 멀미에 좋은 거래요. 차로 우려서 마시면 좋대요.”


견신은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환과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소녀는 마치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싱긋 웃고 있었고 그 미소와 얼굴이 말해줬다. 한 점 티 없이 그늘 없이 맑고 밝은 마음을 가졌다고.


그처럼 아무 사심 없는, 순수한 미소가 며칠 상념에 지친 견신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고맙소.”

“와아···! 무사님 목소리···! 특이해요···!”


곧이어 주 씨 사내 특유의 목소리에 찰나 매혹된 소녀의 감탄사가 주변 이목을 끌어당겼고 그에 외동딸을 발견, 흑색 일색의 소년 무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부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아야! 무사님, 송구하게 됐습니다. 딸아이가 워낙에 사람을 좋아해서.”

“무사님 방해하면 못써! 이리 와! 얼른!”


기겁하며 얼른 달려온 부부가 소녀를 낚아채듯 잡아당겨서 저들 뒤로 감췄다. 만에 하나라도 견신이 해코지할 것을 염려하듯이.


“아이가 쉬시는 데 방해해서 송구합니다.”

“그러지 않도록 주의를 주겠습니다.”


범부들이 무사를 대하는 아주 일반적인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아닙니다. 멀미에 좋은 약을 받았습니다.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럼.”


그러나 그런 걱정과 달리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일어선 견신이 멀어지자 그런 견신의 등을 일가족과 사람들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


정체불명의 소년 검사.

가장 안쪽 선실을 홀로 사용 중인 흑의 무사는 조운선 전체가 조금 궁금해하는 인물이었다. 무사를 향한 관심이 아니라 한 인간을 향한 관심이었다. 승객 중 아무도 소년을 고수로 여기지 않았고 고수를 상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인간의 사연이 궁금한 것이다. 선실에 틀어박혀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사람. 나이 스물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 그 나이에 검집도 없는 검을 차고 이 겨울에 항주까지 홀로 여행하는 인물.


그런 인물의 긴 목소리를 오늘 처음 들었고, 그 목소리가 꽤 특별하다는 점을 알았으며 소년이 무사든 무사로 행세하는 사람이든 범부에게 공대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볼수록 기묘한 사람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신비롭게 여길 것도 없는 사람이고 흔하디흔한 소년인데 기분 탓인지 아니면 오지랖인지 육지보다 사람이 적은 배인지라 사람이 귀하게 느껴져서인지. 아무튼 이상하게 관심이 가는 인물이었다. 괜스레, 묘하게 관심을 끄는.


[······.]




그처럼 사람들은 저들 관심의 근원이 견신의 독특한 분위기, 품격임을 깨닫지 못했다.


소년의 몸으로 홀로 천하를 누빌 수 있는 검자 고견신의 자신감이요, 천년 내 제일 검사이자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사람의 고독과 허무이며 대제국의 친왕이 가진 특유의 고상한 기질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뭇짐승들이 용의 존재를 느끼지만 제대로 알아보진 못하는 이치와 같은 이치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




선실 세 모퉁이를 한 곳씩 점거하고 앉은 남녀는 오늘 역시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낡은 선실을 삼등분한 채로.


[······.]


그중에는 조금 전 갑판에서 견신의 상념을 깨운 사내도 있었다. 작은 체구 미남은 가부좌를 틀고 실눈을 뜬 채 무언가를 암송 중인 모습이었다.


“······.”


다른 사내는 앉아있는 모습만 봐도 일어서면 6척(尺)은 가뿐히 넘길 듯한 체구에 굵직하고 시원시원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


그는 조금씩 흔들리는 배, 선실 벽에 종이를 붙인 뒤 거기 얇은 붓으로 대나무를 치는 중이었다.


사내들은 둘 다 머리를 정수리에 단정하게 틀어 올린 뒤 작은 철관을 꽂아 고정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작은 체구 미남은 승려의 복식인 잿빛 두툼한 장삼(長衫), 영웅상의 거구는 선비들이 즐겨 입는 심의(深衣) 차림.


마지막 여인은 작은 체구 미남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체격에 희고 둥근 이마를 내보이고 흑발을 뒤쪽으로 틀어 올린 뒤 세로로 비녀를 꽂은 모습. 사내라면 눈여겨 보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이지적인 느낌을 발산하는 미인이었다.


“······.”


그녀는 선비들도 종종 입지만 도사들이 가장 즐겨 입는 도포 차림이었다. 음양이 새겨진 동전을 바닥에 던지고 줍기를 반복하면서 고심 중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며칠째 변함없는 모습이 오늘도 온종일 반복 중이었는데···


[······.]


그러던 그때였다. 굳게 닫혀서 열릴 줄 몰랐던 세 남녀의 입술이 동시에 하얀 이와 말캉한 혀를 내보인 것은.


작은 미남, 영웅 거구, 하얀 미녀 순.


“둘 중 누구요?”

“피차 경계는 여기까지 합시다.”

“아우! 답답해!”


셋 다 동시에 말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살짝 놀란 눈초리로 다른 이들을 번갈아 봤다.


[!!!!!!]


그러다가 다시 작은 미남부터 캐물었다.


“둘 다요?”

“뭐가 말이오?”

“우리 까놓고 이야기해요. 아닌 척은 그만하고.”


여인은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달리 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그녀는 먼저 작은 미남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쪽이 창(廠) 같고.”


다음은 영웅 거구.


“이쪽이 위(衛) 같은데.”


그에 작은 미남과 영웅 거구가 차례로 대꾸했다.


“원(院)이군.”

“귀하가 원에서 나온 사람일 것 같았소.”

“원에서 나왔어요. 작은 쪽이 창, 큰 쪽이 위. 맞죠?”


순간 발끈한 작은 미남이 날 선 목소리로 받아쳤다. 작음, 없음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말조심하지? 작다니?”

“맞소. 위에서 나왔소.”

“뭐? 하지? 지금 막가자는 거지?”


그러자 여인도 금세 어조를 바꿔서 반격했다. 그녀는 사내의 막무가내식 하대나 같은 맥락의 행동을 혐오하는 편이었다.


“아니꼬우면 너도 그러든가.”

“그래, 그럼. 어차피 다들 흑색 임무로 나온 거, 피차 품계는 떼고 하자고.”


영웅 거구가 두 남녀 사이 튀는 불꽃에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그럽시다. 그래도 누군지는 알자고. 본관은 천호(千戶) 공손신정(公孫信政)이다.”

“흥! 위에서 무리 좀 했군. 높으신 나리를 보냈어. 감승(監丞) 조경(趙敬)이다.”

“하! 역시 한쪽은 흉악하고 한쪽은 음흉하네. 이런 일에 정오품을 내보냈다고?”


휘하 1,120여 명을 지휘하는 정천호는 정5품, 감승 역시 정5품직이다. 정1품부터 종9품으로 나뉜 품계의 중간쯤, 중견급 품계고.


다만 두 사내가 천호와 감승치고는 터무니없이 젊으니 어마어마한 고관이라고 보는 게 옳다. 둘의 나이를 고려할 때 공손신정은 정1품 도독까지 갈 가능성이 충분하고, 조경도 정4품 태감까지 두 계단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조경은 그 끝이 정4품 태감이니 보잘것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생각은 틀렸다. 사례감 태감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다.


우선 환관 조직의 우두머리 사례감 장인태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다음 같은 품계의 제독동창을 포함한 병필태감, 수당태감도 사실상 2품관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쪽은?”

“기껏해야 종육품이겠지. 정칠품이거나.”



두 사내와 여인의 품계가 같을 수는 없다. 조정을 주로 감찰하고 지방도 감찰할 권한을 가진 도찰원 직제에는 5품관이 없으니까. 정4품 첨도어사에서 종6품 경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조경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을 종6품 경력 혹은 정7품 감찰어사로 보는 것. 이는 공손신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랬으나 그런 예상은 정답을 완전히 빗나갔다.


“우(右)첨도어사 유희(柔熹).”


유희가 자기 정체를 밝히는 순간, 두 사내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곧바로 움찔거렸다.


흠칫—


“허언 하지 마···! 시오.”

“헛소리! 네가 그 유···희시란 말이오···?”


둘 중 조경은 황궁을 나서기 전에 유희라는 성명을 본 적이 있었다. 도찰원에서 붙일 사람이 누군지 추려내는 과정에서.


봤지만, 언뜻 본 것에 불과했다. 도찰원에서 정4품 이상 고관을 보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경력이나 감찰어사 중 뛰어난 인물을 보내리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무려 첨도어사를 내보내다니. 정4품 첨도어사가 이처럼 새파랗게 젊은 여인이었다니. 아무리 봐도 같은 연배인데 정4품 관모를 씌워줬다? 그것도 여인에게? 말도 안 되는 일,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당시 신상 명세를 제대로 봤다면 나이와 출신 등 여러 가지를 기억했겠지만, 대강 봤기 때문에 성명 외 다른 건 알지 못했다.


“뭐? 네가? 네가—아—?”


유희가 짓궂은 얼굴로 목을 쭉 내밀자, 순간 받아칠 방법을 찾지 못한 조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못 믿겠어? 창에 연통을 넣어보든가. 본관은 금방 발각될 허언을 늘어놓을 바보가 아니야. 할 리가 없지. 안 그래? 공손신정?”

“크흠···!”


공손신정은 난처한 듯 유희의 시선을 회피했으나, 직전 조금 당황했던 조경은 뭔가 작심한 사람처럼 유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됐고, 먼저 품계 떼고 하자고 한 건 그쪽이다.”

“뭐, 그러자고. 본녀의 입으로 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으니까. 두 사람에게 공대받아서 임무에 좋을 것도 없고. 그래도 버르장머리 간수는 잘해. 임무에 필요해서 위장하자는 거지, 진실로 위아래 없는 사이가 되자는 건 아니니까. 특히, 너. 버르장머리 불안한 내신.”

“···접수. 그리 접수하지. 시원시원한 성미는 마음에 드는군. 허면, 통성명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그쪽도 명을 받았나?”

“무슨 명? 그리고 그쪽 ‘도’ 라니?”


조경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유희가 공손신정을 곁눈질한 뒤 다시 눈을 맞춰오자, 조경이 음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용을 추락시키라는 명령.”


이는 곧 흉험한 경고, 일촉즉발의 시사.

공손신정과 유희를 번갈아 보는 조경의 흰자위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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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4화 +9 24.08.26 8,507 356 23쪽
34 33화 +17 24.08.23 8,866 407 20쪽
33 32화 +14 24.08.21 8,801 359 20쪽
32 31화 +23 24.08.20 8,871 360 18쪽
31 30화 +21 24.08.16 9,430 412 16쪽
30 29화 +20 24.08.15 9,011 456 21쪽
29 28화 +29 24.08.13 9,353 349 21쪽
28 27화 +23 24.08.12 9,087 373 20쪽
27 26화 +25 24.08.09 9,350 422 20쪽
26 25화 +20 24.08.08 9,773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68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29 369 21쪽
23 22화 +23 24.08.02 9,658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2 367 18쪽
» 20화 +15 24.07.31 10,108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3 440 18쪽
19 18화 +16 24.07.29 10,412 409 21쪽
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17 16화 +16 24.07.24 10,539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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