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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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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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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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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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DUMMY

33화




견신이 가리키는 자리가 정검당과 서각 일행 입장에는 앞서 고려했던 자리이기도 하고 자리 주인인 견신이 워낙에 적극적으로 유도한 덕분에 새 손님들은 흔쾌히 자리 잡았다.


운하를 서쪽에 끼고 북쪽 기준, 산서상인, 세 호위, 견신, 정검당과 서각 일행 순.


부지불식간에 견신의 측면을 빼앗긴 세 호위는 심기가 불편했으나 그를 결정한 사람이 견신이기에 대응도 못하고 속으로만 앓을 뿐이었다.


[······.]


궁을 나왔고 각자가 신분을 감추고 있지만 그런 사정은 타인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 견신과 세 호위 사이의 간극은 궁에 있을 때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견신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혈족의 자손이었고, 세 호위는 그저 신하일 따름이었다. 그를 모르는 이들에게 견신과 세 호위 사이의 공기는 말 그대로 호흡을 위한 공기에 불과하지만, 당사자들은 그런 높낮이와 기류를 보고 있었다.


세 호위가 동료 없이 저 홀로 임무를 나왔거나, 아니면 서로 견제할 필요가 없는 일심동체를 이뤘거나.


그랬다면 견신과의 신분 차이를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은 일. 견신에게는 죄가 없고 권위가 있기에.


순쟁에서 증명했듯 그리고 종청산, 궁호상과의 인연에서 증명했듯 무욕하고 애민 정신이 투철한, 문자 그대로 영웅에 걸맞은 인물이니까.




권위는 모래로 쌓은 성 같은 것이었다. 동일한 모양이라면 저 혼자 스스로 쌓은 것이, 다른 사람 여럿이 쌓은 것보다, 여럿이 대신 쌓아준 것보다 더 많은 이의 인정을 받는 법이었다.


전자는 남들의 눈에 그만이, 그라서 해낸 독보적인 것 또 본보기가 되고, 후자는 누구나 으레 그 정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해낼 수 있는 완성물로 비칠 뿐이기에.


그리하여 독보적인 것은 문자 그대로 홀로 걷는 자의 성취.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자가, 인간의 본능과 습성대로 무리 짓고, 그 속에서 안온을 느끼는 자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업적이다.


지금 견신이 그런 독보적인 성취와 업적을 가진 인물이기에, 그 어떤 조력도 요구하지 않고 독보하는 사람이기에, 뭇 권위 중 가장 강력한 종류의 권위를 갖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들을 개살구라 부르면서 무시하는 사람이 초면의 인사들을 살갑게 맞이하며 측면을 내주는 모습을 보고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그에 모두 약속한 듯 주먹을 쥐거나 입술을 깨물었다.


꽈악—


견신의 예상 밖 파격에 놀라고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노와 질시를 느끼는 것.




아랫사람들이 자리를 마련하는 사이, 정검당 부당주 손문, 제남 서가의 서각이 자연스레 견신의 앞으로 와서 앉았다.


견신은 다시 기여를 세워 안은 채로 눈을 감은 모습. 손문이 그런 견신을 아래위로 찬찬히 훑으며 깨웠다.


“젊은 소협의 배포가 상당하군. 검회의 눈에 띄면 필시 곤란을 겪을 텐데.”


그에 진작부터 두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견신이 천천히 눈을 떴다.


“······.”


동시에, 잘린 나무 밑동 위의 가죽 깔개를 매만진 서각이 그런 견신을 곁눈질하며 손문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다 무슨 말이냐며 에둘러 묻는 것.


“읏차차. 손 대협, 무슨 말씀인지 해설을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아아, 서 대가께서는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검회라고, 강호의 검사라면 아니, 무사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결사(結社)가 있지요. 혹, 검자(劍子) 태대종사를 아시는지?”

“이 사람이 무공 한 초식 모르는 백면서생이긴 하나, 어찌 검자를 모르겠습니까. 천년제일검사,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불패를 이룬 무인이지 않습니까. 제남에도 검자묘가 여럿 있습니다. 천하무사불욕불수불인!”


견신이 전생 시절 남긴 명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을 낭송하는 서각의 눈과 입에서 일종의 호연지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 문장이 뜨겁고 또 격렬한 열기를 발산하는 느낌.


그런 서각의 반응을 접한 손문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천하의 무사는 모욕을 주지도 받지도 참지도 아니한다. 그 문장을 아시는구려.”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문장가로 자부하는 이는 다들 알 것입니다. 천하 영웅과 호걸이 남긴 문장이 많고 또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당대 문장가들은 검자의 문장을 으뜸으로 칩니다. 실로 무사의 비장한 기개가 돋보이는 명문 중 명문이지요.”

“그랬습니까. 역시 가슴에 포부를 품은 대장부라면 진가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문장이지요. 아무튼, 태대종사를 조사로 모시는 결사입니다. 태대종사의 검예를 연구하고 깨달음을 나누며 검의 극치를 추구하는 모임이지요. 이 강호를 호령하는 검사 대부분은 검회의 인물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허어···! 그렇습니까? 서생이 잘은 모르지만, 검 하면 남존무당, 적벽화산, 검조남궁이니 하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아아, 검회는 결사입니다. 검도 고수들이 출신 구분 없이 모인 것이지요. 물론 회주도 있고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만 회주와 부회주 등 일부 요인을 뺀 나머지 회원끼리는 평등합니다.”

“아하···! 무당파의 대협도, 화산파의 대협도, 남궁가의 대협도 다들 검회에 적을 두고 계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천산이나 흑회에서 온 자만 아니라면 출신은 가리지 않습니다.”

“허면, 우리 손 대협께서도 검회에 드셨습니까? 말씀하시는 바를 들으니, 검자를 극진히 예우하시는 듯한데.”


이어지는 그 대목에서 찰나 손문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구겨진 종잇장처럼.


“······.”


곧바로 그를 눈치챈 서각이 금세 긴장해서 다시 물었다.


“손 대협, 서생이 실수라도···?”

“크흠···! 검회는 회원으로 백 명만 받습니다.”

“아아···!”


서각은 그런 손문의 반응과 대답에서 검회에 들기에는 실력이 모자란 인물임을 깨달았다.


그처럼 민망한 듯 머뭇거리는 서각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한 손문이 조금 식은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 검회가 달가워하지 않는 행동이 하나 있지요.”

“무엇입니까?”

“여기 소협처럼 검자 태대종사를 모방하는 것이지요. 검집이 없고, 거무튀튀한 빛의 날을 벼리지 않은 검은 검자 태대종사의 애병인 신검 고(鼓)를 모방한 것입니다.”

“아하···! 그래서 직전에 소협이 검회 눈에 띄면 곤란을 겪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아무튼 젊은이. 흔쾌히 자리를 내주어서 고맙네.”


그처럼 호칭이 소협에서 젊은이로 바뀌고, 어조도 느슨해졌지만 어쨌든 비로소 대화 소재가 손문의 최초 목표인 견신으로 바뀐 참.


두 사람이 전생 시절의 그를 놓고 이야기할 때도 남 이야기 듣는 듯 무심한 기색이었던 견신을 손문과 서각이 다시 찬찬히 뜯어봤다.


그 눈빛에 호기심이 조금 묻어 있었다. 숙영지가 산서상인, 세 호위, 견신의 영역으로 구분돼 있음을 확인 후 견신이 홀로 길을 나선 나그네임을 깨달은 것. 그것도 소년의 태가 남아있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문이 견신을 고수로 여기는 건 아니었다. 견신 만큼 젊으면서 홀로 떠도는 과객이 발에 차일 만큼 흔하진 않으나, 아주 드물지도 않으니까.


천하는 넓고 사람과 사연은 많으며 그중에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세상 많은 것이 가만 두면 흩어지는 특성을 가졌으나 돈 만큼은, 부(富)만큼은 모여드는 특성을 가졌기에.


많은 이가 입에 풀칠할 만큼 가난했고, 극소수는 광활한 곳간에 공간이 없을 만큼 부유했다. 살 곳과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이가 많다는 이야기.


손문은 한참 어린 견신을 그저 그런 부류 중 하나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리 드물 것도 없는 사연, 세상에 흔하디흔한 사연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가진 나그네로.


“열다섯? 그쯤 되어 보이는데 홀로 풍진강호를 주유하다니, 배포가 정녕 남다르군. 어디 가는 길인가?”


일부러 끌어들이긴 했지만, 귀찮긴 귀찮다고 생각 중인 견신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항주로 가는 길입니다.”

“오오— 항주? 양회의 혼란을 일소하러 가는 길인가?”

“양회에 혼란이 있습니까···?”


견신은 짐짓 모른척했다. 종청산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양회의 혼란 때문에 간다고 대답하면 북경에서 보낸 녀석들이 파고들 수도, 귀찮은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어···! 이 사람 참. 그런 물정으로 어찌 이 험난한 강호를 주유한다는 말인가. 허면, 항주는 무슨 일로 가는가?”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기에 진정 그러한지 가보는 길입니다만.”

“허허···! 말이야 맞는 말인데 요즘은 그게 아닐 걸세. 외적이 판치고 있다 이 말이야.”

“외적··· 이라시면···?”

“가증스러운 왜구가 육지와 바다를 드나들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더군. 내 강호의 후배에게 자릿값 셈 치고 이야기 해줌세. 들어보게.”


잠시 손문이 종청산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세함이 모자란 설명을 늘어놓았고 그가 설명하는 동안, 견신의 눈길은 종종 서각에 닿고는 했다. 서각은 한 번씩 작게 웃곤 하는 기색이었는데 그를 보는 견신은 비웃음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길을 나선 참일세. 이 땅의 백성이 오랑캐에게 핍박받고 있는 것을 좌시할 수야 없지.”

“대단하십니다. 수천 리 떨어진 곳의 백성을 위해. 이 겨울에.”

“무사로서 불의를 일소하고 백성의 안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책무지. 어떤가? 항주로 간다니 자네도 함께 하지 않겠는가?”

“응당 그러해야 하나, 항주에 들렀다가 긴히 가야 할 곳이 있는지라.”


긴히 가야 할 곳은 사천성 성도다. 당벽호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중간에 고향도 들르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손문은 그저 기본적인 수법 몇 개를 주워 익히고 무사로 위장한 견신이 짐짓 자존심을 챙기면서 꽁무니를 빼는 것으로 간주했다. 싸움이, 왜구가 두려워서.


“이해함세. 아직 한몫을 하기에는 이르지. 왜구의 도법이 상당하다고 하니. 자네로서는 아직 무리일세. 그저 검을 든 자로서 의기가 어떠한지 듣고자 했을 따름이네.”

“이 친구는 그저 이 한 몸 지키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들었을 뿐입니다.”

“알고 있었네. 내 자네가 범부임을 알아봤지. 그 나이에 제 몫을 하는 무사는 아주 드물어. 아니, 할 수가 없지. 그래도 검은 바꾸는 게 좋을 걸세. 검회의 고수를 만나면 곤란한 일을 겪게 되기가 십상이니.”

“예, 새겨듣겠습니다.”


그처럼 손문의 오해가 깊어지는데,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나타났다. 홍소화와 지청명을 뒤에 세우고 나타난 소년, 고경신이었다.


“아닌데, 고 대협 고순데. 섬전도 조 백부를 일 합으로 꺾은 분인데.”


무(武)를 익힌 사람이라면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말인지라, 정검당 일행이 일제히 견신과 고경신을 번갈아 봤다.


홱—


[······?]


다들 곧바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고경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행수의 아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 사이, 술병과 소반들을 들고 온 홍소화와 지청명이 견신과 손문의 가운데 내려놓았다.


“이야기꽃이 만개하였군요. 폐행수도 조금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손 대협, 서 대가. 한 잔, 축이시지요. 행수께서 내셨습니다. 잡량주입니다.”


그에 곧바로 반응한 이는 서각이었다.


“오오— 사천 이가에서 담근 그 잡량주 말이오? 명주 중의 명주인데!”


왜구 이야기에도, 고경신이 한 말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선 것.


“네, 대가께서 이리 알아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덕분에 폐행수의 투자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알다마다! 잡량을 모르는 자, 어찌 술을 안다고 하겠는가. 허면, 사양치 않으리다. 이리 귀한 술을, 돈이 있어도 마실 수 없는 술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행수.”


잡량주는 원(元)대에서 획기적으로 발전한 양조 기술. 그 결정체 중 하나였다.


북방 유목 민족을 근간으로 하는 원나라는 송(宋)대와 비교하여 네 배, 다섯 배 이상 강한 주기(酒氣)의 술을 곧잘 빚어 마셨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받아들인 증류 기술로 강한 주기를 가진 술을 빚었고 그런 술로 추운 겨울에 몸을 데우는 풍습이 있었다.


반면 송대까지는 술이 전부 발효주인 까닭에 내포한 주기가 강하지 않았고 그에 몇 근씩 마시고도 명시를 썼느니 적장을 베었느니 하는 무용담들이 나올 수 있었다.


지금의 백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누군가 지금의 백주를 그만큼 마신다면 취하는 것을 넘어서 숫제 저승 문턱을 두드리게 될 테니까.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


아무튼, 잡량주는 사천성에서 증류 기술과 전통 양조법을 결합해서 빚어낸 백주 중 근래 두각을 보이는 명주였다. 그러니, 서각이 금세 알아보는 것.


“별말씀을. 혹 폐상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여부가 있겠소? 내 모름지기 산동 사람인데 거래는 산서상인과 해야지. 내 이 잡량의 우애를 기억하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문과 정검당의 신경은 고경신이 한 말과 견신에게 고정돼 있었다.


“누구···? 섬전도라면 며칠 전 창주에서 그 조규상? 같은 산서상인이라는?”


손문도 섬전도가 누군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창주에서 검자를 모방한 무사의 검에 명을 달리했다던. 병기에 공력을 투사할 수 있는 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기에 공력을 조금이나마 투사할 수 있는 실력자는 드물다. 그 정도 실력의 검사가 몇 년 더 축기에 매진하고, 상승의 초식을 익힌다면 검회 입회를 노릴 수 있다. 충분히.


그러잖아도 창주에서 그 소식을 듣고 놀란 참이었는데 행수 아들 녀석이 조규상을 꺾은 고수를, 그 자신을 형주 사람 고사로 소개했다던 고수를 잘 안다는 듯 말하고 있잖은가.


“네, 맞아요. 그 사람을 일 합으로 꺾으신 분인데.”

“누가 말이냐?”

“고 대협이요.”

“누구?”

“에—? 아직 서로 통성명하지 않으신 거예요? 여기 계시잖아요, 고 대협.”


느릿느릿 가리키는 손짓을 따라서, 마찬가지 천천히 돌아가는 얼굴들. 거기 아이의 손가락에 가상의 선을 잇고 나면 가장 먼저 맞닥트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견신의 얼굴이었다.


[!!!!!!]


검을 세워 안은 채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견신과 고경신의 손가락을 번갈아보는 손문과 정검당. 그들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아직 육신 곳곳에 소년 태가 역력한 사람이 무슨 수로 그 섬전도를 꺾는다는 말인가? 그것도 단 일 합으로.


이는 불가능, 언어도단, 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십정이나 오의의 인물이라고 해도 저 나이에는 어렵지 않겠는가. 이제 겨우 십대 소년이 병기에 공력을 투사하는 고수를 무슨 수로 상대한다는 말인가.


손문이 정검당을 대표해서 그런 불신을 입 밖에 꺼냈다. 눈으로는 고경신을 보고, 손으로는 견신을 가리켰다.


“소형제, 너 지금 농을 하는 게야? 이이가 그 섬전도 대협을?”


그처럼 거짓을 말하는 것이냐는 물음을 들은 고경신이 곧바로 얼굴을 바꿨다.


“고가 경신이 비록 어리지만, 거짓을 말하진 않습니다, 손 대협. 총행수와 어머니께서 가르치시기를, 무릇 상인의 생명은 신용이라 하셨고 신용의 첫걸음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허, 허면 저이가 그 형주 사람 고사란 말이냐?”

“네, 맞는데요? 그렇죠? 맞죠, 고 대협.”


그처럼 고경신이 돌아보며 물으니 이내 견신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사람이 그 형주 사람 고사이기는 합니다.”

“허헛! 그럴 리가···!”


밝혀진 진실 앞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사실 앞에서 손문과 정검당 검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헛바람을 삼키는 것. 그리고 발작하듯 물러서는 것. 그리고 앞에 고수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얕잡아 봤던 저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그 세 가지 행동뿐이었다.


화끈—


지금 놀라지 않는 사람은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홍소화와 지청명 그리고 세 호위.


마지막으로 세 명 더, 그러거나 말거나 잡량주에 정신이 팔려있는 서각과 그의 호위들이었다. 서각과 호위들은 알지 못했다. 견신이 종종 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도 그렇고.




그렇게 얼굴이 벌게진 손문과 정검당 검사들이 몸과 마음을 숨길 쥐구멍을 찾고 있을 때 또 견신의 무위와 조규상의 패전을 이해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견신이 불쑥 서각을 찾았다.


“서 대가, 근래 제남은 좀 어떻습니까. 아! 얼마 전에 수왕 전하께서 제남으로 가셨다던데 혹, 뵈셨습니까? 수왕 전하께서도 영걸이시지만 듣기로 수왕비 전하께서 가히 천상의 가인이시라고.”


짙은 향기의 술이 목구멍과 식도를 뜨겁게 데우는 감촉을 음미 중이었던 서각. 그가 흡족한 얼굴로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어으— 좋다— 당연히 봤지요. 서생이 제남 사람으로서 제남 땅의 큰 행사를 놓칠 수야 있습니까? 수왕 전하는 천하의 영걸이셨고, 수왕비 전하께서도 서생이 감히 논할 수 없는 가인이셨지요. 허허허—! 그나저나, 소협께서 며칠 전 창주를 떠들썩하게 만드셨던 그 분이었다니, 이거 서생이 금일 대단한 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


그처럼 한껏 흥이 오른 음성에, 별다른 대답 없이 맑게 웃기만 하는 견신의 머릿속 거기, 두 글자가 맴돌기 시작했다.


수왕— 수왕— 수왕—


다행이다. 진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홍소화나 지청명이 끼어들지 않아서. 그들보다 먼저 서각이 대답했고 덕분에 일이 틀어지지 않아서.


서각은 분명 수왕과 수왕비를 연달아 말했다. 이는 착각에 의한 답변이 아니라는 이야기. 진실로 수왕, 수왕비가 제남에 정착했다고 아는 것이다. 그리 믿고 있거나.


아니면, 덕왕인지 수왕인지, 잘 모르거나.


‘제남 서가에서 왔다? 네가 지금 고(孤) 앞에서 같잖은 재롱을 떠는가.’


틀렸다. 수왕 주견주는 지금 황궁에 있다. 얼마 전 제남에 정착한 황자는 수왕 주견주가 아닌 덕왕 주견린. 즉, 친형이다. 거기 더해 무예를 연성한 것이 태가 나는 손과 어설프게 감춘 호흡 그리고 보법까지.


이제는 확실해졌다. 서각은 속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온 인물. 틀림없이 시커먼 입에 보랏빛 혀를 가진 독사를 안고 온 자다.


‘이미 들려오고 있었으나, 노병이 이제 비로소 들은 것인가.’


이제 할 일은 이 속내를 모르는 홍소화와 지청명이 오류를 바로잡지 못하게 하여 서각이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대비하며 기다리는 것.


‘피에 절은 칼의 절규를.’


머잖아 들이닥칠 피바람을.

한 자루 도검에 내건 생애의 격돌을.

어쩌면 영영 소멸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은원, 그중 원한으로 맺은 인연을.

저 시린 달빛처럼 다가오는 전쟁을.


‘오라, 누구든. 내 기다릴 것이다.’


그를 알고 있으나, 능히 감당할 자신이 있으나, 이 마음에 못내 걸리는 것은 저기 전생의 그 소녀와 얼굴도, 성명도 같은 여인과 그이의 아들이었다.


잃지 않을 수 있나. 이번에는 지킬 수 있나. 검자여, 대답해 보라. 이번 생에는 그리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는지.


노병이여, 대답해 보라. 당산나무 서쪽 개울 건너 홍씨 집안 작은 꽃을 이번에는 지켜낼 수 있는지.


‘너 아니면 나, 죽어야 끝날 것을 내 알고 있으므로.’


너 윤회한 무사여, 대답해 보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작가의말

준비 마치는 즉시 드립니다. 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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