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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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최근연재일 :
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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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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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42화

DUMMY

42화




커다란 물통을 여럿 실은 달구지가 울퉁불퉁한 길을 어렵사리 나아가는 중이었다. 겨우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움푹 꺼진 땅이 종종 바퀴를 붙잡을 때마다 늙은 소는 힘에 부친 듯 울어댔다.


머—어어—


그처럼 땅과 달구지 또 물통은, 늙은 소가 목뒤에 얹은 멍에의 연장인 듯, 마치 한 몸인 듯 보였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결코 벗을 수 없는.


구덩이의 사면이 완만했으나, 늙고 지친 소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그 모습이 하늘 아래 뭇 인생들과 또 달구지 주변 세 사내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늙은 소와 세 사내의 삶은 다르지 않았다.




이내 맨 앞에서 소를 끄는 중년 사내가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며 채근했다.


“웃쌰— 가자, 이놈아. 이제 다 끝났다.”


그는 덕주 시전에 물을 길어다 대고 또 각종 물목을 옮겨주는 사람이었다. 시전 한쪽에 자리한 양조장에서 일했고, 그 양조장은 산동의 한 유력 무가(武家)가 소유한 점포였다.


“아우들, 힘 좀 써보시게.”


이어서 그가 뒤를 돌아보며 주문하자, 그보다 조금 젊은 사내 둘이 달구지를 붙잡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 둘! 헙—]


그에 아슬아슬하게, 다시 사면을 오르기 시작하는 달구지.


왼쪽 사내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왼손은 힘을 곧잘 댈 수 있는 손바닥으로 달구지를 미는 중이지만, 오른손은 손가락으로 미는 중. 무거운 수레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손가락을 펼친 모습이었다. 흡사 다른 이의 손을 가볍게 쥐듯 살짝 구부린 모양.


사내의 깡마른 몸도 그렇지만, 제아무리 장사라도, 설사 무사라도 손가락으로 수백 근에 달하는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그러니, 퍽이나 기이한 일. 또 손가락이 전부 헤진 면포로 친친 감겨 있었다.


어쨌든 수레가 가까스로 경사면의 끝에 다다르는 그때였다. 싣고 내리는 과정에서 조금 넘친 물이 얼어붙은 수레 바닥을, 물통이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은.


스윽—


용을 쓰느라 그를 보지 못한 사내 대신 다른 두 사내가 목격, 기함했다.


“어어—! 물통! 떨어진다!”

“장 아우! 조심!”


물통의 무게는 개당 50근(斤) 이상. 행여나 발 위로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무엇보다 다시 길어와야 하고, 그렇게 되면 하루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물론, 일 끝내는 시간을 조금 늦추면 그만. 사람이 다치지 않으면 그만이고,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만 재수 없으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물을 기다리는 점포가 이 덕주에서 가장 큰 반점, 덕천(德泉)반점이기에.


반점은 다른 점포와 비교, 물을 배 이상 많이 또 빠르게 소모했다. 마시는 차와 음식 그리고 투숙객들이 씻는 데 물을 써야 하니, 문자 그대로 밑 빠진 독. 덕천반점처럼 큰 반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곧바로 왼쪽 사내가 오른손을 뻗어서 물통을 먼저 받친 뒤 몸을 있는 힘껏 들이밀면서 체중을 실었고, 한순간 사내의 오른손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뚜둑—


그랬으나, 다행히 수레는 경사면 위로 올라섰고, 물통도 수레 끄트머리에 다다르기 직전 멈췄다.


중년 사내가 안도하며 왼쪽 사내를 살폈다.


“장 아우?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형님.”


땅바닥에 떨어진 의수 잔해를 대수롭지 않은 듯 수습하며 대답한 사내, 장선이 왼손으로 물통을 조금 더 밀어 넣었다. 깡마른 체구와 고집 센 인상 그리고 건조한 목소리가 서로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또 못쓰게 됐구먼. 튼튼한 걸로 하나 맞추라니까. 뻑 하면 못쓰게 되는 거 만날 나무 깎는 것도 일이고.”

“머리도 식힐 겸 겸사겸사 깎는 겁니다. 나무야 지천이고. 가시죠. 늦겠습니다.”

“그러세. 이랴, 가자, 이놈아. 이제 다 끝났다.”


늙은 소가 답으로 더운 울음을 길게 내뱉으며 다시 울퉁불퉁한 길을 나아갔다.


머어—어—


다시 움직이는 달구지를 따라 걷기 시작한 장선은 물통 사이 사이로, 이리저리 덜컹거리는 의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이리 채이고 저리 튕기는 모습이, 볼썽사납게 요란스레 나뒹굴고 있으나,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 모습이 닮아 보였다. 이 세상에 아무 소용이 없는, 효용을 잃은 무용한 사람, 아무도 찾지 않는 덕주 사람 장선과.


문득 잘린 손목이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종종 불쑥 환상처럼 찾아드는 통증이 아니라.


이내 그 통증이 기억 거기 어느 구석에 묻어둔 여름날을 끄집어냈다. 아무리 깊이 파묻어도 금방 뚫고 나오는 그날을.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죽음이 하늘 위 매처럼 사람을 내려다보는 가운데, 불과 한 달 전 처음, 창(槍)으로 불리는 물건을 엉겁결에 잡아본 촌뜨기들. 북직례 인근 전역에서 모여든 촌부들은 비로소 익숙한 일을 하는 중이었다. 흙과 돌을 나르고 쌓는 일을.


갈증과 허기, 땀과 피로 그리고 고향 노모 생각이 종종 적군처럼 들이닥치는 까닭에 흙과 돌의 무게를 느낄 새도 없었다.


흰 조각구름 드물게 떠다니는 하늘에서 뜨거운 햇살이 창처럼 꽂히고, 달아오른 바위는 살을 짓무를 듯 뜨거웠으며, 마른 흙은 쌓고 돌아 서면 허물어지기 일쑤. 촌뜨기들 모두가 진짜 적은 태양, 바위, 흙이라고 생각했다. 오이라트가 아니라.


하나 더 있다면 갈증, 진 주변에 물을 구할 하천이 없었던 것. 마지막으로 사례감 장인태감 왕진.


간밤에 장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왕진이 녀석의 고향땅 유린을 피하겠답시고 철군 길을 비튼 탓에 여기 몰렸다는,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장성 자형관, 거용관 일대에서 수성전에 돌입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토목보는 마실 물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진의 사정이 수십만 대군을 수용하기에 넉넉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물론, 입신양명한 사람이 고향을 챙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그러지 않으면 고향 사람들은 물론이고, 온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맞게 된다.


그러나, 골백번 양보하더라도 일개 환관이, 병법도 익히지 않은 고자가, 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전쟁을 지휘하고, 그런 도리를 들먹여서 군대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지렁이들도 문자를 써가며 왕진을 욕했다. 비천한 고자 따위가 천자를 능멸하고 또 국기를 문란케 한다면서.


그렇게 환관 놈을 건포 삼아 주린 배를 달래고 있을 때 토성 위로 그가 나타났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 그러나, 촌뜨기, 일자무식, 무지렁이와 달리 하늘의 뜻을 받고 이 땅에 온 사람. 사람 위의 사람. 정통제 주기진이.


징집 당시 배운 대로 재빨리 엎드리자, 이내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저벅저벅—


죄지은 것도 아닌데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그 얼마나 빠르게 뛰던지, 마치 땅이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허기져선지, 목이 말라선지, 아니면 긴장해선지, 아무튼 현기증이 날 때쯤, 걸음이 바로 근처에서 멈추는 기척과 뒤통수 위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텁고 깊은 울림의 목소리가.


“이름이 무엇이냐.”


순간 몸이 멋대로 떨리기 시작하면서도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궁금해져서 살짝 고개를 들어보니, 해를 등지고 선 그의 두 눈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촌뜨기 장선의 반응은 발작하듯 자지러지는 것이었고.


“허헉—!”


그러자, 그의 옆에서 금의위 지휘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 폐하의 하문을 듣지 못하였느냐! 어서 고하지 못할까!”

“자, 장가 서, 선이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적의 칼이 아니라 금군의 칼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얼른 대답하고 보니, 이내 주기진이 지휘사를 나무랐다.


“대명과 짐을 호종하는 백성이다. 지휘사는 과히 책망치 말라. 곧 싸울 병졸에게 겁을 줘서 무엇할까.”

“황공하옵니다, 폐하.”

“장가 선(線)이라. 퍽 잘 지은 이름이다. 이리 짐이 골랐으니.”


선(線)은 달리 인연이란 뜻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가 많고 많은 병졸 중 꼭 덕주 사람 장선을 고른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마, 망극하옵니다, 폐하!”

“올해 몇이더냐.”

“스, 스물둘이 되옵니다, 폐하!”

“오호? 그러하냐. 짐과 같구나. 어디서 왔더냐?”


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그때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으나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외로움. 주기진이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었다. 금군 장수들과 동창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그가 외로워 보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쩌면 그 사실을 들어서일지도. 아홉 살에 아비를 여의었다는 사실을.


동복 동기도 누이동생 하나뿐. 이복아우 하나와 이복누이 하나가 나머지 전부고.


“산동 덕주에서 왔습···! 아, 아니···! 왔사옵니다, 폐하!”

“산동! 덕주! 내 덕주는 아니 가보았음이다. 덕주는 어떠하더냐. 물은 맑고 산야는 살쪘더냐? 풍물은 어떠하더냐, 부모는 안녕하더냐?”


그처럼 흥이 오른 듯, 연달아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는 주기진을 그놈이 제지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왕진이.


“폐하, 성벽의 채비가 심히 급하옵니다. 이만 치하하시어 사무를 수행케 하시옵소서.”


나중 이야기지만 당시 모두가 놀랐다. 세상에, 대명천지에 일개 환관 아무개가 감히 천자에게 이래라저래라하다니. 미친놈이 아니냐며,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며 한탄했다.


“···크흠. 장선, 팔을 이리 내 보거라.”

“예···? 아···! 예! 폐하!”


그리고 그때였다. 완갑을 받은 것은.


“짐과 대명을 위해 잘 싸워다오. 짐이 믿고 있음이다.”


그때 받았다. 그 뒤로 양팔이 다 잘릴 위기에 처한 촌뜨기를 살린 완갑을.


그 완갑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먼 귀환이긴 하지만, 어쨌든 환향할 수 있었다. 완갑을 판 돈으로 노모의 장례도 늦게나마 치를 수 있었고.


돌아와서 보니 노모는 장성으로 끌려간 외아들 걱정에, 화병으로 귀천했다고.


장례 치르고 남은 돈으로 집과 소를 얻은 덕분에 병신이, 제 분수에 넘치는 참하고 선한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몇 해 뒤 딸을 낳으면서 반려와 아들딸 곁을 떠났지만.




그처럼 오래전 그날의 토성에 엎드려 있는 장선을, 중년 사내의 음성이 일으켜 세웠다.


“보아라, 이놈아. 다 왔잖으냐. 저기 덕천반점이다.”


머어—어—


현실로 돌아온 장선은 토목보가 있을 거기,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계절은 다르지만, 하늘은 그날 그것과 비슷했다. 하얀 조각구름이 몇 개, 푸른 하늘에 걸려 있었다.


하얀 구름은 그날처럼 말없이 흐르고, 푸르른 하늘도 그 옛날 창공과 변함이 없건만, 오직 사람만 변하고 있었다. 하늘 아래 사람만.


오늘도 아내는 하루만큼 멀어졌고, 외팔 홀아비는 하루만큼 지쳤으며, 이 세상살이의 풍진은 하루만큼 가까워졌다.


문득 집에 있을 아이들이 그리워졌다. 오늘은 딸아이의 생일이다. 딸아이가 며칠 전 또래 소녀에게서 듣고 온 음식을 싸갈 것이다.


덕천반점의 황민계를.




그러던 그때, 세 사내의 반대편에서 덕천반점을 향해 오던 남녀들이 소를 치던 중년 사내를 알아보고 손짓했다.


“여어, 오랜만이군.”

“엇? 공자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


중년 사내를 부리나케 달려가게 만든 그들은 양조장 주인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




견신은 접시에 코를 박고 먹는 장보, 장희 남매를 보며 천천히, 젓가락을 놀렸다. 평소처럼 조금 머금고 수십 번을 씹은 뒤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경계심을 허문 남매는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듯 한참 덜 여문 위를 가득 채우기에 열심이었다.


우걱우걱—


그런 장보 바로 옆에 홍소화의 아들, 고경신도 있었다. 고경신과 장보는 동갑내기.


그리고 견신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홍소화와 문국, 점소이 등이 주변 원탁에서 견신과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줄곧 견신을 지켜보던 고경신이 견신을 불렀다.


“대형.”


어제 한 번에 하나씩이라는 가르침을 주고받은 뒤, 고경신이 견신을 부르는 호칭은 대협에서 대형으로 변모한 생황.


“음?”

“왜 그렇게 드시는 거예요?”

“무엇이 말이냐.”

“소제가 궁금해서 한 번 세어봤거든요? 정확하게 백팔 번. 딱 백팔 번이더라고요.”


그 대목에서 견신은 고경신이 묻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으나, 잠자코 끝까지 들었다. 그처럼 기이한 도입부가 장씨 남매는 물론, 다른 이들의 이목까지 끌어당겼고.


“어김없이 백팔 번. 만날 백팔 번 씹고 삼키시더라고요. 신기해서···!”

“오래, 많이 씹으면 탈이 나는 법이 없다. 과식을 막고 위장을 거든다. 또 빠르게 허기를 면할 수 있고 그만큼 일찍 힘을 주지.”

“헤에— 한 번에 하나씩이랑 비슷한 이유네요? 언제든 싸울 수 있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견신의 설명에는 하나가 빠졌다. 먹으면서 잡념과 번뇌를 잊기 위함도 있다는 설명이.


그랬으나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특히, 산서상인 표사들의 반응이 두드러졌다.


[!!!!!!]


부르르—


“그런 이유가···!”

“···정말이지, 놀라운 사람이군.”

“대체 사문이 어디기에 저런 자세를···!”


흡사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처럼 놀란 기색들. 그들에게 형주 사람 고사는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런 심정을 고경신이 대변했다.


“와···! 이래야 고수가 되는 거구나··· 이래서 고수구나. 생각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전부 잘 싸우기 위해서···!”


그처럼 모두의 이목이 몰려들었지만, 견신은 달리 대답하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씹고 또 씹을 뿐.


“나도 따라 해야지.”


이내 고경신이 견신을 그대로 복사하는데, 문득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남녀가 찬바람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범상찮은 기류를.


끼이이—


보는 순간, 그 기류를 감지한 이들이 일제히 그들을 돌아봤다.


[······?]


마흔 줄 남녀가 둘에 이십 대 남녀 넷. 사내나 여인이나 하나같이 보통 이상의 체구에 윤기 도는 황갈색 비단 도포, 산양 털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걸쳤고, 머리에 각각 금관과 금비녀를 꽂았다. 체구만큼 날이 길고 폭이 넓은 검을 허리에 찼고.


그러니, 그들이 무사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견신도 예의 그 습관대로 관심을 뒀다. 잠시 한 명 한 명, 찬찬히 훑은 뒤 이내 다시 장씨 남매와 먹는 데 집중했다.


“소형제, 소매. 모자람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씀해 주시오.”


남매는 대답할 새도 없다는 듯 우물거리다 얼른 고개를 젓고는 이내 저들끼리 눈을 맞추며 웃었다. 말갛게.


[헤헤헤—]


헤실헤실, 울긋불긋 양념 묻은 두 입술에서 피어나는 작디작은 꽃. 겨울 반점의 풍경을 슬며시 바꿔놓는 그 밝음이 눈부셨다.


사람에게서도 꽃이 핀다. 거기 가슴에 순수하고 선한 또 온유하며 촉촉한 마음을 씨앗으로 심은 사람에게서는 능히 세상을 밝히는 꽃이 피어난다.


견신은 그처럼 꾸밈없이 웃는 남매에게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전생의 형제자매를.


천지에 하얀 눈꽃이 만개한 날. 낡은 부뚜막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어머니가 구워주는 보리떡을 나눠 먹던 형들, 누나들.


-앗! 뜨거워!

-야호! 떨어트렸으니까, 이제 내 거!

-아! 내놔—아— 내 거야!

-한 번 떨어트렸으면 끝이지!

-아버지! 어머니! 내 거 뺏어가요!


어린 막내가 뜨거워하는 것을 보곤 가만히 손을 얼음장 같은 물에 담갔다가 갓 구운 보리떡을 얼른 받아 들고 호호 불어주던 아버지.


-막내야.


아이들 몰래 허리 뒤 다른 손에 막내 몫의 한 장을 구워 들고 조금 식기를 기다렸다가 눈짓하며 건네주는 어머니.


끔뻑—


그 뜨거운 보리떡을 오래 쥐고 있을 수 있었던 손을, 거기 살갗을 뒤덮은 삶의 고됨과 힘겨움을 본다. 백년이 늦은 지금에서야.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얼굴은 갈수록 더 흐릿해지는데, 그리움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은 뾰족해져서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만다.


영영 해소할 길이 없는 이 그리움은, 너무 아픈 그리움은 그리움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처럼 백년 전의 풍광을 보고 있는 견신. 불현듯 그의 의식을 잡아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인은 황보신고(皇甫晨高)요.”


음성의 주인은 조금 전 반점에 들어온 무리 중 마흔 줄 사내. 그 순간, 반점 내 모든 경물이 그대로 굳었다.


[!!!!!!]


황보(皇甫). 산동 강호의 맹주, 천추황보가(千秋皇甫)의 성씨다. 천년도 전에 후한의 삼공(三公) 태위를 지낸 황보숭을 중시조로 하는 바로 그 가문의 성씨다. 그리하여 가문의 별칭이 천추(千秋)다. 무가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에.


당시 무쌍의 창법, 통왕태평적로를 창안한 대종사, 인중룡 여포의 손에 동탁이 죽은 뒤 동탁 일족을 멸족한 사람이 곧 황보숭. 우람한 체격으로 검과 권각을 구사했고, 그 또한 여러 외공과 내공 기예를 창안한 종사였다.


본래 양주(涼州). 지금의 섬서 서북쪽 끝자락에서 살았으나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과정에서 산동 제남의 태산 자락으로 옮겨 왔다.


“여기 형주 사람 고사라는 분이 계신다고 하여 왔소.”


견신을 찾으러 왔다는 말을 들은 이들 모두 발작하듯 견신을 돌아보는 그때, 다시 반점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한쪽 손목 아래가 없는 사내, 장선이.


“무사님들,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그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황보신고 일행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으며 애원하는 장선의 뒤로 초로의 장년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천천히 들어서는 순간, 흡사 반점에 산악이 들어차는 듯 압도적인 기세의 소유자를 돌아본 홍소화, 문국.


[!!!!!!]


보는 즉시 알아본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마치 비명처럼.


[화, 황보문충(皇甫雯忠)!]


그런 비명은 더 있었다. 곧바로 두 사람의 외침이 닿은 반점 곳곳에서, 화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


[백호검사(百號劍士)!]


장년 검사, 황보문충이 검회의 인물임을 시사하는 목소리가.


작가의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민니님, 교리패인님, whitefoggy님, 홈랜더님, girllim님, seng2006님, ansquddnr님, HONGGYU님, k485727l님, 배드문님 후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사를 준비하는 데 작가의 양심과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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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할수록 주 3회로 연재 주기를 변경해야 하는지, 고심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자고 깨기를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앉아 있었는데 오래 걸렸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작가가 주 3회에 안주할 수 있고 그를 우려하여 일단은 지금 주기를 유지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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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실력이 부족하여 앞으로도 종종 지연이나 휴재를 말씀올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러나, 충분히 작업할 수 있는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오락이나 여가를 위해 지연과 휴재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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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패턴이 운동 부족인지라 공휴일에는 반드시 운동을 해서 몸을 챙기려 하고, 연휴 기간에 고향과 성묘를 다녀와야 하는 관계로 하루 내지는 이틀 이상 휴재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작품을 시작할 때 공휴일은 쉬려고 했으나,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이 많기에, 지금부터 주말까지 최대한 준비해보고자 합니다.

연휴 중 너무 기다리지 마시고 게재되면 시간 나실 때 찾아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즐거움과 행복으로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작가가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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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1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14 16:27
    No. 31

    세세한 묘사는 나쁘지않지만 진행이 너무
    느리다는게 좀...ㅉ

    달고다니는 혹 3개는 떼어내서 버린건지?
    차라리 없는게 속 시원...

    찬성: 0 | 반대: 1

  • 작성자
    Lv.55 구도비빔
    작성일
    24.09.14 18:46
    No. 32

    정말 좋은 글입니다. 끝까지 가셨으면 좋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djsejr
    작성일
    24.09.14 18:56
    No. 33

    헤실헤실부터 이어지는 두문단. 사람의 얼굴에서 꽃이 피어남을 묘사하는 대목. 기억에 꼭 담아두고픈 명문입니다.
    장線의 서사에서 인연을 언급한 점도 탁월한 암시 같구요. 순문으로 쓰여지는 전쟁물이라니.
    윤회무사. 작가님을 기억할 수 있을 역작이네요.
    건강 잘 챙기셔서 이 글 꼭 완결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djsejr
    작성일
    24.09.14 19:24
    No. 34

    얼굴은 흐릿해지는데 그리움은 선명해져가는 그래서 이젠 그리움 보다는 회한이 더 어울리는 기억들.
    다시 한 번 읽으며 감탄합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9 루시오엘
    작성일
    24.09.14 23:39
    No. 35

    드디어 검회 등장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3 팔괘
    작성일
    24.09.15 01:50
    No. 36

    필력이 필력인지라 순위권에 충뷴이 올라가겠지만…예전 고무림시절이었다면… 무조건 1위할 글인데…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홍곡
    작성일
    24.09.15 05:46
    No. 37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9 1990Rna
    작성일
    24.09.15 14:37
    No. 38

    옛날 무협느낌 물씬나서 어느새 다봤네요..글 너무 멋지게 쓰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클래식스
    작성일
    24.09.15 15:06
    No. 39

    재밌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핏빛여우
    작성일
    24.09.15 17:18
    No. 40

    사람들 말하는거 좀 웃겼음 요리왕비룡인줄...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0 gi*****
    작성일
    24.09.15 17:55
    No. 41

    짧게라도 좋으니 매일 운동을 거르지 마시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천천히 드십시오. 술은 조금 드셔도 좋으나 담배는 마시고요. 그것이 장기연재의 필수 덕목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응원 드립니다. 작은 욕심을 부리자면은 좋은 글 오래 보여주시고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마루함야프
    작성일
    24.09.16 01:17
    No. 42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4 헬란
    작성일
    24.09.16 02:02
    No. 43

    개인적으로 한 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는 요즘 글들에 흥미를 못느끼고 계속해서 뒤적이며 뭐 없나 찾던 와중에 정말 깊이 있는 글을 읽게 돼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6 네메시스81
    작성일
    24.09.16 02:12
    No. 44

    작가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4 혜라
    작성일
    24.09.16 08:16
    No. 45

    유료화를 생각했을때에 글의 밀도가 높아서 작가님의 부담이 적지않을것같습니다 요새 아무리 슥 읽고 마는 글들이 인기가 많다한들 저는 결국 끝까지 따라가서 읽게되는 글은 이런 글들이 끝까지 따라 읽게되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3 아사나
    작성일
    24.09.16 14:02
    No. 46

    재밌네요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똘망아빠
    작성일
    24.09.16 17:00
    No. 47

    정말좋은 글입니다,어떤 미사여구도 필요없네요,,다만 작가님의 건강과 연중을 걱정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2 slut
    작성일
    24.09.16 22:58
    No. 48

    왜 안올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니케s
    작성일
    24.09.18 10:40
    No. 49

    와 잼나는데 다음화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3 Sabee
    작성일
    24.09.18 18:23
    No. 50

    작가님의 글에는 힘이 있습니다. 항상 글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그런 글을 쓰시려면 그만큼 큰 힘이 들거라 생각합니다. 몸관리 잘 하시구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1

  • 작성자
    Lv.38 그이드가이
    작성일
    24.09.18 20:26
    No. 51

    너무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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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 +23 24.08.12 9,093 373 20쪽
27 26화 +25 24.08.09 9,355 42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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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화 +21 24.08.07 9,572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32 369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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