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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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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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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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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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40화

DUMMY

40화




태조 시절 축조한 왕성들은 태종이 등극한 이래 지어진 왕성들보다 크고 웅장했다. 성벽만 보더라도 높이 2장(丈) 남짓, 길이도 4리(里)에 달했다.


물론 자금성, 남경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자금성을 둘러싼 궁성 길이만 하더라도 왕성의 두 배가 넘는 약 10리. 거기 더해 정원과 호수, 중앙 관청 등을 아우르는 성벽인 황성의 길이가 다시 세 배에 달하는 약 27리다.


아무튼, 규모만 작을 뿐, 구조는 황궁과 흡사했다. 내정과 외정을 구분했고 종묘와 사직단을 배치했다.




그랬으나, 태종이 번왕제를 폐지한 이래 축조한 왕성들은 규모가 절반으로 줄었다. 규모는 곧 위상, 위상은 곧 권력. 규모를 축소함으로써 친왕의 권력을 제한한 것이었다. 아울러 친왕이 비밀리 사병을 육성할 가능성 즉, 반역을 도모할 가능성도 원천 차단하고.


그럼에도 궁호상 같은 범부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궁궐이었다. 높이 2장에 달하는 성벽과 한가운데 높이 3장에 달하는 성문 누각의 처마만 올려다봐도 오금이 저려올 정도.


웬만한 장정이라도 혼자서는 여닫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암적색 성문 앞에 도와 창, 갑주로 무장한 장수와 정병들이 마치 석탑인 듯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에 오가는 사람들 모두 멀찌감치 떨어져서, 성문을 외면하며 빠르게 지나칠 뿐이었다. 함부로 바라봤다가 봉변이라도 당할 것을 우려하는 듯이.


이는 왕부 성문에서 남쪽을 향해 수직으로 뻗은 대로와 왕부 앞을 가로지르는 대로, 그 교차점에서 망설이는 중인 궁호상 일행도 마찬가지, 견신이 창주에서 산 낭인들도 수문장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부를 지키는 장수이니만큼 성정도 손속도 엄할 테니까.


어젯밤 반점에서 물어물어 알아본 결과, 제남에서 린(潾)을 이름에 가진 사람은 덕왕 주견린 한 명뿐. 피휘(避諱)라고 하여, 린(潾)을 다른 이가 이름에 쓸 수 없다는 것도, 견린을 입에 담는 행위 역시 금지라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형주 사람 고사가 주견린을 찾아가라며 당부한 셈이 되는 셈인데···


이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나 말이다. 일개 떠돌이 소년 무사가 고관대작도 아니고 자그마치 친왕과 통하는 사이일 리가 있나. 만무한 일이잖은가. 무슨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처럼 어떤 착오가 있을 거라며 생각하다가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봄 새순처럼 싹 틔우기를 반복하는 게 지금 상황이었다.


수중에 은 3백 냥이라는 거금을 갖고 다니는 소년 무사. 섬전도 조규상을 제압한 고수. 거기 더해 나이대에서 보기 드문 경륜과 진중한 기상까지.


그런 이가 허튼소리를 했을 리 없고, 그런 사람이라면 친왕과 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봄비 그친 날 지렁이처럼 기어다녔다.




그렇게 궁호상 일행이 갈팡질팡하는 새, 줄곧 그들을 주시해 온 눈이 있었다. 다름 아닌 수문장의 눈.


수문장이란 직분에 걸맞은 체격, 인상의 소유자였다. 범종을 보는 듯 퉁퉁한 체구에 큼지막한 이목구비를 가진.


“······.”


둥근 철제 전립의 챙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는 정면 방향으로 고정했으나, 동공은 전방 좌우를 끊임없이 살피는 중이었기에, 거기 앞에서 서성거리는 궁호상 일행을 포착하고 수상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사는 셋. 나머지는 일가족 같은데.’


거리는 50보쯤. 도검을 휴대한 이가 셋. 뒤쪽 마차에 여인과 소년이 탔다. 그 둘은 아무래도 모자로 추정되고 도검을 갖지 않은 사내가 모자의 지아비로 보였다.


무사 셋으로는 아니, 전원이 무사라고 해도 저들로는 뭘 어쩔 수가 없다. 왕부는 대여섯으로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그 대여섯이 보기 드문 고수라고 해도.


따라서 지금처럼 경계할 필요가 없는 인사들일 수도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 심각한 위협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만에 하나 본론 전 서론이라면? 왕부 경계의 허점을 찾으러 온 이들이라면? 그를 위해 관찰 중이라면?


어제 천자께서 붕어하셨고, 다음 대의 천자께서 아니, 새 천자를 추종하는 세력이 충성 경쟁을 위해 신비 소생 친왕들의 제거에 착수할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저들이 그 소문의 시작일 수도 있는 거고.


경계는 과해도 지나치지 않는 법. 과유불급의 이치가 통하지 않는 일 중 하나다. 더군다나 곧 정오. 그들이 도착할 시각이다. 그러니 성문 주변을 정리해야 할 터.




판단을 마친 수문장이 군도를 뽑아 들었다.


촤—앙—


“거기!”


본래 수문장의 입은 성문과 닮았다. 함부로 열리는 법이 없다. 그런 입이 서슬을 한가득 담은 목소리를 내보냈으며 그 서슬의 주인이 겨눈 칼. 그 칼의 도첨이 궁호상 일행을 가리켰기에, 한순간 놀란 행인들 모두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서 궁호상 일행을 돌아봤다.


[!!!!!!]


지목당한 당사자, 궁호상 일행의 놀람은 다른 이들의 반응 그 배 이상이었고.


움찔—


그처럼 놀라고 당황한 궁호상 일행이 수문장과 저들을 번갈아 보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다시 수문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너희! 본관의 십 보 앞으로 오라. 너희 지금 거기서 일각이다. 일각 동안 왕부 앞을 서성인 까닭을 고하라.”


그에 궁호상이 놀란 나머지 조여오는 가슴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때, 노련한 낭인 하나가 얼른 대답했다.


“대인! 혹, 소인들을 말씀하시는?”


그는 직전 수문장의 지목 당시, 무심코 도파를 쥐려던 손을 빠르게 잘 멈췄다고,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너희다. 당장 이 앞으로 오라.”


그러고는 너무 놀란 탓에 숨이 가빠진 고용주를 진정시켰다.


“궁 형, 진정하시오. 일단 사실대로 설명하십시다.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잖소. 얼른 가지 않으면 경을 치르게 될 것이오.”

“아···! 예, 예!”


이내 궁호상과 낭인이 다가와 서자, 수문장이 재차 주문했다.


“고하라, 너희 일각 동안 왕부 앞을 서성거린 까닭을.”

“그, 그것이 소인은 창주 사람 궁가 호상이라고 하는데 소인이 창주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궁호상이 두서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견신과의 인연과 여기 오는 과정까지 전부.


이윽고, 줄곧 미간을 찌푸린 채 설명에 집중한 수문장이 자기가 들은 서사를 요약했다.


“그러니까 형주 사람 고사가 이름에 린(潾)을 쓰는 이를 찾아가라 했다는 말이더냐? 찾아가면 너를 살펴줄 것이라 하였고?”

“그, 그렇습니다, 대인.”

“흠···! 수상한 대목이 둘이다.”

“예? 대, 대인! 수상하다는 말씀은···?”

“형주 사람 고사? 이는 남악무열왕 전하의 아명이 아니냐. 전하로 위장하는 이들이 백년 세월 동안 한둘이 아니었을진저, 그 또한 분명 위장일 터. 또한 덕왕 전하께서 누구를 살펴주신다는 말이냐? 본관이 판단하건대 이는 필시 너희가 덕왕부에 잠입하고자 함이다. 누군가 너희를 덕왕부에 들여놓고자 하는 것이다. 당장 도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라!”

“대, 대인! 아닙니다! 자, 잠입이라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인!”

“조사하여 아무 죄가 없으면 방면될 터. 반항하면 그 즉시 추포할 것이고, 사십팔 일 뒤 참형에 처할 것이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대인! 믿어주십시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 듯 날카로운 예기가 목덜미를 따끔따끔 찌르자, 사색이 된 궁호상이 소변을 지리면서 무릎을 꿇는데 그때였다.


별안간 누각 위에서 외침이 들려오고.


[개문!]


곧바로 거대한 성문이 육중한 진동과 함께 제 속살을 내어주기 시작한 것은.


두드등—


그에 수문장까지 무심코 돌아보고, 성문 사이로 보이는 정병들 한가운데 그들이 있었다. 덕왕부의 주인 내외. 덕왕 주견린과 검조남궁의 ‘수(琇)’자 항렬, 그 둘째. 덕왕비 남궁수현이.


오조룡을 수놓은 홍룡포와 홍원삼. 그 위로 하얗고 두툼한 털옷을 걸친 주견린과 남궁수현이 빛을 뒤에 세우고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마치 성문 앞을 밝히는 느낌.


그를 목격한 수문장과 정병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머리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전하!]


그에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머금은 주견린이 일어서라는 듯 손짓하며 화답했다.


“평신.”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내 일어선 수문장이 얼른 달려가서 시립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아직이옵니다.”

“안다, 그저 때가 된 듯싶어 덕왕비와 마중 나온 것이다.”

“예, 전하.”


그처럼 인자한 얼굴로 아내와 눈을 맞추는 주견린의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 것은 궁호상이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음? 저들은 어찌 저러고 있는 것이냐.”


조금 전 지린 소변이 얼어붙어서 딱딱해진 바지춤이 한순간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아···! 행색과 거동이 수상하여 잠시 조사하려던 참이었사옵니다.”

“수상하다?”

“그렇사옵니다. 이름에 린(潾)을 쓰는 이를 찾아왔다고 하여.”

“···그는 고(孤)가 아니냐?”

“그렇사옵니다. 그에 일단 구금하여 조사하려던 참이었사옵니다. 저자가 고하기를, 그리 시킨 자가 형주 사람 고사라 하니, 이는 필시 정체를 위장한 것이옵고, 사특한 무리의 사주일···!”

“형주 사람 고사···?”


이름에 린을 쓰는 이를 찾아왔다는 대목에서 수문장과 마찬가지로 수상함을 느낀 주견린. 그가 형주 사람 고사를 듣고 묘한 느낌을 받은 그 순간, 돌연 소년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버지! 놔요! 아저씨! 이거 놔주세요!”


궁호상의 아들이 저를 제지하는 두 낭인의 손에 붙들려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마차에서는 창주에서 견신이 선물한 방카르가 주인의 심정에 공감, 옹골차게 짖기 시작했고.


캉— 캉—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왜요! 우리 아버지를 왜 잡아가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에 경황 중 깜빡, 마차를 잊고 있었음에 아차 싶어진 궁호상이 얼른 돌아앉아서 소리쳤다.


“내자와 아들놈을 바, 반점으로! 반점에 가 계시오! 어서!”


행여 아들과 아내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건 아닌지 염려하는 것.


그를 들은 낭인 둘이 얼른 아이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아비의 위기와 직면한 아이는 있는 힘껏 도리질 치며 그 손길을 피했다. 겁에 질렸으면서도 억울한 아이의 눈두덩은 어느새 벌게져 있었다.


“읍— 우리 용아를 데려간 그 형이 그랬단 말이에요! 제남에서 이름에 린을 쓰는 사람을 찾으라고! 가면 우리를 보살펴 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아이에게 아버지는 하늘이요, 어머니는 땅이다. 즉, 자식에게 부모는 곧 우주요, 세계인 것. 아픈 어미와 새로 사귄 강아지 그리고 아버지. 그렇게 넷이 낯선 땅에 왔다. 이미 낯선 땅이 어색하여 두렵고 초조한 가운데 느닷없는 칼이 아버지를 겁박하니 너무나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 울분이 터져 나올 수밖에.


장성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을 가진 어른이 우는 까닭은 각양각색이겠으나, 아직 심신이 여물지 않은 탓에 힘이 없고 그리하여 세상의 압제에 대항할 수 없는 소년은 억울하여 우는 법이다. 모든 아이는 미력하기에 종종 억울하기 마련이고 억울하여 운다.


끝에 가서는 그 울분이 고스란히 목소리에 섞였다.


“가서! 제남에 가서!”


뜨거운 눈물, 그 눈물이 비강으로 흘러 뒤섞인 침이, 악에 받쳐서 내지르는 고함이 주견린과 아이 사이 거기 봇물 터진 듯 쏟아졌다.


“여름날 공(公)이 능소화 만개한 서고에서 보내준 서책은 잘 읽었다!”


이어지는 그 대목에서 아이를 지켜보던 주견린의 눈꺼풀이 찰나, 활짝 열렸고.


“!!!!!!”


흠칫—


“그날이 좋았노라!”


곧바로 연달아 고막을 파고드는 음성이 이내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형상을 그려냈다.


“!!!!!!”


시야 가운데, 그 모든 경물을 덮고 또 선명해지는 그 형상은 다름 아닌 그리움. 살갗 안쪽 거기 혈관에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동기, 지난 15년 세월을 함께한 피붙이. 동생이었다.


능소화 만개한 서고는 황궁 내각 중 한 곳, 화개전(華蓋殿)을 이름이요, 서책은 이복형과 계모에게 핍박받던 동생이 친형에게 했던 유일한 부탁이었으며, 그 형이 가엾은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형 노릇이었다. 유일한.


‘너였구나, 신아.’


그랬구나. 내 아우야, 너였구나. 네가 보냈어. 너를 지켜보는 눈이 있기에, 올 수 없어서 이들을 대신 보냈더냐. 네 얼굴, 네 그림자 대신에 이들을 먼저 보냈느냐.


지금 어디쯤이더냐,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어느 땅 위, 어느 길 가운데를 홀로 걷고 있더냐. 길 위에서 인연을 맺은 듯 보여, 늘 외롭지는 않았을 듯하여, 우형의 마음이 참으로 기쁘기가 한량없다.


오냐, 네 말대로 하마. 저들을 잘 보살피마. 너는 부디, 내내 강건하여라, 강건하여 그 어느 날, 기어이 너를 기다리는 형과 형수에게 몸 성히 꼭 와주거라. 내 부탁하마.


“그리 말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엉엉—”


아우야, 내 동생아.




#




그 시각, 견신은 반점 1층 원탁에 앉아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놓고 생각을 정리 중이었다. 홍소화 모자와 행수 문국을 비롯한 산서상인 식솔들도 다른 원탁에 앉았고, 세 호위도 마찬가지였다.


세 호위는 며칠 전 흑회의 습격은 받은 날 밤 함께 나타나서 사형제로 위장한 이래, 매사 함께하는 모습. 견신이 방에 들어갔을 때를 제외하고 늘 한 사람 이상은 견신을 시야에 뒀다. 견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


지금은 셋 다 한 번씩 견신을 곁눈질하며 각자 할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유희는 음식을 입에 욱여넣는 중, 공손신정은 표지를 덧바른 서책을 읽으며 콧김을 뿜거나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었고, 마지막 조경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그 모든 풍경을 반점 2층 구석 난간에 앉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샛노란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야옹—




이내 공손신정이 다시 얼굴을 붉히며 콧김을 내뿜자, 조경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이, 사제.”

“음?”

“그 정도면 중독이다. 온종일 춘화만 보고 있으면 양기가 썩어질 텐데.”


춘화라는 말에, 유희가 씹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사제? 헤에— 그런 거였어? 춘화였어? 그런 거였네, 어쩐지 첫인상이랑 다르게 혼자 실실 잘 웃는다 싶더라니, 주야장천 춘화를 보고 있어서 그랬구나.”

“추, 춘···! 무슨 소리요, 사저. 사형, 이는 유가의 경전으로서···!”


당황한 태가 역력한 공손신정의 반박을 조경이 자르고 들어갔다.


“그래, 그러시겠지. 안면 몰수를 잘하든가. 아무튼, 이번에 구한 건 신경 좀 썼네. 저번 것은 겉에 몹시, 당당하게! 야관문(夜關門)이라고 쓰여있더니.”


곧바로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공손신정 대신, 유희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곱고 하얀 얼굴과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가 어울려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밤의 빗장을 여는 문? 제목 한번 묘한데? 사제, 그래도 웬만하면 방에서만 보자. 누가 보면 우리 사형제를 어찌 보겠어?”

“크흠! 어허! 지금 사람을 어찌 보고. 아니래도 그러시오. 그만하시오. 누가 들을까 무섭소.”

“이리 귀여운 구석이 다 있었네, 사제. 다 컸어, 성숙해, 우리 사제.”

“아니라니까!”




그처럼 세 사람이 실없는 이야기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조금 초췌한 안색의 견신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궁을 떠나기 전 어느 정도 아버지와의 인연을 정리한 덕분에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난 밤새 아버지와의 추억과 시간을 돌아본 것으로 충분했다.


궁을 떠나기 전에 부족하게나마 쌓은 정과 별개로 돌아볼 추억도 많지 않고 또 공유한 시간도 길지 않으니까.


문제는 아버지의 죽음이 불러올 일들이다. 천순제 주기진의 부재가 불러올 일들.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이복형과 계모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정왕 주견신뿐만 아니라, 주변인까지 노릴 수도 있다. 죄를 씌운 뒤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숙청은 주씨 일가의 피가 오롯이 간직하고 있을 기질. 따라서 주견심 역시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을 터다.


개국공신과 그 처족까지 여러 차례 숙청한 주원장 녀석도 그렇고 조카에게서 용상을 빼앗은 저를 찬탈자로 비난, 즉위 조서 작성을 거부한 명신의 입을 산 채로 찢고 그 십족을 참수한 일과 궁녀 삼천을 참수한 사례 등등 아비의 그것 못지않은 잔학성을 보여준 태종 녀석도 그렇고.




물론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조정과 지방까지, 천하가 새 황제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아는 설. 정왕 주견신 제거설로 인해 어려울 수도 있다. 정왕 주견신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새 황제와 새 황태후를 의심할 것이므로.


그를 다시 반박하면 그럼에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편이 낫다. 이복형과 계모 입장에야 정왕 주견신이 한번 죽고 나면 끝. 천하가 의심한들, 천하의 의심을 받은들. 진상이 밝혀지지 않으면 그만이고, 또 황제 황태후를 대놓고 의심하는 간 큰 관리는 거의 없을 테니까. 황제 황태후를 조사하는 건 더더욱 그럴 거고.


따라서 이복형과 계모는 명명백백하게 저들 모자가 사주한 것으로 밝혀지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 모종의 일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세 호위는 이쪽저쪽 모두에게 이제 계륵일 터였다. 녀석들이 때를 봐서 정왕 주견신을 시해하는 칼이 될 수도, 정왕 주견신 시해의 목격자가 될 수도 있으므로.


셋 모두 이복형과 귀비의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나 혹은 둘이 아니라면 그를 먼저 제거해서 입을 막거나 따돌리고 시해를 시도해야 할 테니까.


며칠 전 밤에 세 녀석의 정체는 확인했다. 홍일점의 정체는 창주에서 확인됐고 작은 미남은 동창 무환관이 확실. 마지막 덩치는 금의위 위룡천호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덩치가 실제 위룡천호고 이복형과 계모가 보낸 인물이라면 그들 모자가 하나 악수를 둔 셈이다. 위룡천호는 황제 곁을 지키는 수신 호위. 그런데 천순제 주기진의 붕어 이전에 황제 곁을 떠났으니, 이는 명백한 위법이다.


따라서 녀석이 정녕 위룡천호라면 존재 자체로 모자의 흠결이 되는 셈. 즉, 이쪽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이현에게 전갈을 보내···! 아니, 아니다.’


그에 순간 우군인 이현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이내 생각을 접었다. 아직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고, 만에 하나 녀석이 위룡천호라고 해도 녀석은 상전의 명령에 따라 여기 와 있는 것일 뿐.


이현에게 알리고, 녀석이 위룡천호로 판명되면, 녀석의 윗선은 즉각 꼬리를 자르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녀석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게 될 것이다.


‘덤으로 저 녀석이 아직 창을 겨누지 않은 것도 있고.’


아무튼, 용상의 새 주인과 그 어미의 횡포가 조만간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횡포의 첨병은 저기 어설픈 세 녀석 중 하나 이상이겠으나 동시에 모자에게도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거라는 점.


마지막으로 그들 모자가 관리 아닌 이들을 부려서 시도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친왕을 시해하라는 명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자칫 아무개에게 명령을 내렸다가 잘못 새어 나가는 날에는 천하의 공분을 살 거고 그 결과는 폐위일 것이므로.




사실, 진짜 문제는 품속의 물건 즉 연판장이다. 또 종청산이다. 친왕이 관리와 사사로이 접촉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국가 중대사를 넘겨받은 뒤 운송 중. 발각되는 순간 북경으로 압송당하게 될 죄다.


그리하여 지금 정왕 주견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그들 모자도, 저 세 녀석도 아닌 연판장이다.


지금이라도 보낸 사람의 정체를 감추고 별도의 인편이나 다른 수단을 마련하여 항주에 도착할 종청산에게 보내는 것이 합리적 조처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뒤탈이 없을 것.


물론 종청산이 정확히 언제 항주에 도착할지 알 수 없다는 점 등 여러 가지 난제가 있겠으나 잘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연판장이 잘못되면? 양회 지방 백성의 평안을 영영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그와 더불어 흑회가 항주에서 종청산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미 아내를 잃은 종청산이 잘못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연판장의 안위를 가장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은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정왕 주견신, 검자 고견신이다.


그러니, 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나도 어머니와 형제자매도 종청산도 양회의 백성도, 그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것인가.


‘혹, 그런 방법은 없는 것인가?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처럼 견신이 그 자신의 안위와 다른 이들의 안위. 그 사이 또는 그 외곽 그 어디쯤에서 번민하고, 난간 위 고양이의 세로진 두 눈이 그런 견신을 주시하고 있는데, 문득 반점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끼이이—


낡은 무명을 몇 겹 몸과 얼굴에 두른 사내아이는 고경신과 비슷한 열 살쯤. 털이 군데군데 빠진 털옷 두 개를 위아래에 두른 여아는 그보다 서너 살 어려 보였다. 둘 다 한겨울 추위에 언 코와 볼이 빨갰고 꾀죄죄한 얼굴 가득 솜털이 나 있었다.


여아와 달리 무명옷만 입은 사내아이는 추위에 혀가 굳었는지 말이 느릿느릿했다.


“희아야, 추웠지?”


벽난로와 화로들에서 어느 봄날 민들레 풀씨처럼 풀려나온 온기가 저를 감싸자 부르르 떠는 모습이었다.


“아냐, 오빠. 희아 괜찮아. 이제 오빠도 이거 입어.”


누이동생이 허리에 두른 털옷을 풀려고 하자, 오라비가 고개를 저었다.


“더 입고 있어. 이제 막 들어와서 희아 지금 벗으면 안 돼.”

“그래도.”

“이따가 더워지면 그때 줘. 배고프지?”

“으응. 배고파, 오빠도 배고프지?”


덕주에서 가장 큰 반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색의 남매, 우애가 깊어 보이는 남매를 잠시 지켜보는 견신의 고막으로 누군가의 푸념이 밀고 들어왔다.


“···이 녀석들이 또 왔군. 쯧!”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항상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는 없겠으나 그것이 어떤 서사든 분량을 포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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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3

  • 작성자
    Lv.58 A군이군
    작성일
    24.09.15 00:11
    No. 31

    그저 인연을 맺은 사람을 보호하려 형에게 보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형에게 자신이 지금은 갈 수 없지만 평탄하게 잘 있노라 서신 없이 보내는 서신이였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겨울벚꽃
    작성일
    24.09.15 02:20
    No. 32

    근데 숙청할거 예상가능한데도 친모인 신비, 동생들 냅두고 방랑?
    소중히 여기는데도?
    PTSD가 이리 무섭습니다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7 Letsbeo
    작성일
    24.09.16 10:44
    No. 33

    벌써부터 성화제가 먹일 고구마가 걱정된다..ㅋㅋㅋ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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