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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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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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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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DUMMY

35화




이 밤의 보초는 조경이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견신과 홍소화를 주시하고 있던 그는 견신이 다가오자 재빨리 조는 척 코를 골았다.


쿨— 쿨—


그랬으나, 견신의 판단을 교란하지는 못했다. 견신 역시 다가가면서 조경을 주시 중이었기 때문.


“눈 깜짝할 새 잠드는 수법이라도 익힌 것이냐. 자리를 옮긴다, 조용히.”


깨어있다는 걸 안다는 듯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산서상인 일행에게로 걸어가는 견신. 그에 조경이 실눈을 뜨며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쩝.”


나머지, 두 사람 역시 막 견신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둘 중 공손신정이 먼저 허리를 세웠다.


“···사형, 일이 일어난 거요?”


기지개를 켠 유희도 짚이는 구석이 있기에 목소리를 낮췄다.


“하암— 으··· 추워. 놈이 일을 벌였어? 아니면, 조만간 벌일 거라셔?”

“아직 몰라. 행수와 잠시 말씀 나누시더니 자리를 옮기시겠대.”


답을 들은 공손신정이 조금 불만이라는 듯 뇌까렸다.


“무언가 단서를 잡으셨다는 건데··· 아무튼 행수를 믿으시는 거군.”

“봐, 내 말했지? 생색을 냈어야 했다니까. 창주에서 우리가 한 일을 아셨어야 한다고.”


견신이 관리도 아닌 홍소화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녀와 일을 도모한다는 데에 질투심과 시기심을 느끼는 것.


“너희들 같으면 믿겠냐? 빨리 준비나 해.”


이어진 조경의 타박에, 다들 조용히 짐을 꾸렸다.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게 정리를 해둔 덕분에 준비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러고는 서로 앞장서라며 떠밀면서 주춤주춤 견신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온종일 견신만 주시하는 세 사람은 진작부터 견신이 서각을 의심 중이라며 확신했었고 덕분에 지금 서각이 일을 벌였거나 결정적인 단서를 내준 상황일 거라며 짐작했다.




그랬으나 막상 준비를 끝내고 일어서니 다시금 그 생각이 뇌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북경에서 내려온 명령 즉, 정왕 주견신을 시해하라는 명령이.


그 명령은 지독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왕 주견신이 홍소화 등에게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을지 하는 의심으로 의식을 연결하고 이어서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지금 거사를 도모할 순 없다고, 자칫 친왕을 시해한 사실이 발각될 수도 있다며, 그렇게 되면 금의위와 동집사창, 도찰원은 모르쇠로 일관할 테니 개죽음이 되는 셈이고, 그게 아니라도 다른 둘을 떨어트려 놓고 일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 등등.


온갖 복잡다단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성질을 가진 탓에, 오늘처럼 심하게 시달린 날에는 심력이 쇠하는 기분까지 느끼곤 했다. 금방이라도 심마(心魔)가 찾아들 것만 같은 기분을.




아니나 다를까, 그러한 무게는 마치 실재하는 무게인 듯 세 사람의 발걸음도 점점 더 느려졌다.


운무는 이제 서리 안개처럼 짙게 내려앉았고 덕분에 세상은 불과 몇 걸음 전방도 보이지 않을 만큼 혼탁해졌다. 세 호위의 머릿속처럼.




#




이윽고 견신에게 간략한 상황 설명을 들은 산서상인이 지청명의 지휘 아래 이동 준비에 돌입한 사이, 견신과 홍소화 그리고 세 호위가 한창 곯아떨어진 정검당 일행을 깨웠다.


홍소화 일행은 아예 남진을 개시하는 방안과 전투태세를 갖추는 방안. 두 가지 방안을 놓고 잠시 고심하다가 전투태세를 선택했다.


진실은 모르지만 만약 적이 근방에서 습격준비를 마친 상태라고 가정하면 남진 보다는 전투태세가 더 유리한 선택이니까.


적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모를까. 이동 중 불특정한 시간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습격받는 경우와 비교적 유리한 지형에서 태세를 갖춘 상태로 방어하는 경우 중 후자가 더 생존에 유리한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므로.


근방 거점인 요성과 제남에 전서구도 띄웠고 만일을 대비해서 창주로 사람도 보냈다.




서각 일행도 주섬주섬 깨어났고 지금은 정검당 부당주 손문이 홍소화와 이야기 중이었다. 손문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지는 않았기에 취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홍소화가 견신과 이야기한 대로 준비한 미끼를 꺼냈다. 손문이 덥석 물 가능성이 높은 미끼를.


“흑회의 습격에 대비하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해서 지금 급히 채비 중입니다.”

“뭐라! 흑회가···?”


미끼는 흑회였다. 손문과 정검당 제자들이 길을 나서게 만든 근원이자 그들의 목표. 양회 지방의 해안선에 출몰하는 왜구. 그 뒷배로 알려진 그들.


서각 일행과 동행한 손문과 정검당이 서각과 한패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서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한패라면 서각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거고, 아니라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테니까.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행수와 폐상은 예서 수비하고자 합니다. 동이 틀 때까지 한참 남기도 했고 시정도 좋지 않아, 이동보다는 수비가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고 대협과 세 분 대협께서도 힘을 보태주시기로 하셨고.”


역시나 예상대로 손문은 미끼에 반응했다.자리를 피하겠는지 아니면 함께 맞서 싸우겠는지를 묻는 홍소화에게 불쾌하다는 듯 받아쳤다.


“어찌하긴? 행수는 본당을 어찌 보는 것인가! 정검당의 제자들은 들었느냐? 흑회의 졸개들이 온다고 한다. 그 간악한 흑회 놈들에게 천진 정검의 기상을 알려줄 때가 조금 일찍 온 듯하니, 모두 채비하라.”

[예! 부당주!]


그러면서 견신을 곁눈질하는 모습이 섬전도 조규상을 꺾은 고수에게 질 수 없다며 호승심을 과시하는 듯 보였다.


“행수는 놈들이 어느 방향에서 오는 줄 알고 있소?”

“북쪽에서 오는 줄로 압니다.”

“북쪽··· 규모는?”

“아직 모릅니다. 폐상의 규모가 있으니 두 배 혹은 세 배가 아닐까 합니다.”

“두 배 혹은 세 배라··· 본당이 가세했으니 두 배도 세 배도 아니 될 테지.”

“그렇습니다, 손 대협. 폐행수는 정검당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는 이 땅에 기생하는 벌레들을 격퇴한 뒤에 받겠소.”


그처럼, 손문이 수염을 쓸며 호언장담하는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서각은 내심 놀랐으면서도 실소 중이었다.


‘어설픈 것들. 점쟁이가 때려 맞추는 것도 아니고.’


흑회가 북쪽에서 온다니, 우스울 따름. 북쪽만 보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더불어 이 손에 들어오는 물건의 모습도.


“허면, 정검당도 자리를 옮기시지요.”

“자리를?”

“이 자리는 수비에 유리한 지형이 못 되는지라, 옮기기로 했습니다. 폐상은 옮길 채비를 거의 끝냈습니다.”

“산서상인···! 과연···! 대상은 다르군. 지형까지 고려한다는 말인가.”

“이는 고 대협의 판단입니다.”

“고 대···! 흠!”


허튼소리! 자리를 옮기겠다?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들이···! 고사의 판단이다? 어디로?’


이 자리에 맞춰 준비를 끝낸 상황. 자리를 옮기게 되면 일이 다 틀어질 수 있다. 멀지 않은 곳, 비슷한 조건인 강변으로 옮기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운하에서 멀어진다면, 짙은 물안개로 인해 이쪽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




그처럼 당황한 서각이 견신의 판단이란 말을 듣고 조용해진 손문 대신 끼어들었다.


“저···! 행수.”


그에 모두 서각을 돌아보았다.


“말씀하세요, 서 대가.”

“시간이 충분치 않을 수도 있는데 예서 얼른 채비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서 대가. 허나, 이미 그와 관련하여 여기 고 대협, 세 분 대협과 논의를 마쳤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흑회의 규모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가지 조건 또한 모르는 상황입니다. 하여, 조금 이른 시간보다는 수비에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고 대협.”


견신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율배반적이기는 하지만 또 세 호위는 무슨 이유로 견신을 어려워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모두가 공통으로 가장 어려워하는 인물이 견신이라고 생각하는 홍소화.


그런 그녀가 대화의 주도권을 건네자 견신이 속내를 감추고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손자병법 지형편에서 이르기를 병법의 축은 사람이 맨 먼저, 그다음이 지형이라고 하였소. 이는 시간이 지형 다음이라는 의미요. 대가께서도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이시니 아실 거고.”


이 자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서각의 심리를 꿰뚫어 본 속내를 숨기고.


“크흠···! 그야 그렇지만···!”


서각은 손자병법을 읽지 않았다. 그랬으나 제남 서가의 자손으로 위장한 상황인지라 손자병법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반면 장수로서 손자병법을 끼고 살았던 공손신정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처럼 견신을 인정했다는 점을 깨닫고 놀라는 참이었다.


멈칫—


그 옆에 조경과 유희는 서각과 마찬가지로 손자병법을 모르지만, 견신의 황자다운 모습을 접하고 조금 놀란 상태였다.


[!!!!!!]


그 사이, 서각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견신이 모두를 재촉했다.


“그럼 그러는 것으로 하고 준비하시지요.”


그에 홍소화와 손문이 차례로 화답하며 견신을 따라나서는데.


“네, 고 대협.”

“흠! 가자.”


이미 다급해진 서각이 홍소화를, 실질적으로는 견신을 불러 세웠다.


“행수, 그··· 이 사람은 아시다시피 백면서생인지라··· 아무래도 지금 얼른 떠나야겠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견신이 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이미 늦었을 공산이 큽니다. 흑회가 포위망을 형성하고 다가오는 중일 터. 이대로 떠나시면 놈들의 그물에 걸려들 것입니다.”

“호위 둘이 있으니···!”

“또한 어차피 산서상인에도 무(武)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행수.”


척 하면 척이라고, 홍소화는 마치 오랜 부부처럼 견신과 곧잘 보조를 맞췄다.


“그렇습니다, 서 대가. 폐행수와 산서상인은 이런 일에 이골이 나 있으니 진형 가운데서 호위를 받으시지요.”

“아니,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서 가세들.”


그처럼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자리를 벗어나야만 하는 서각이 연거푸 사양하자 견신이 별안간 지금껏 보인 태도와는 완전히 반전된 태도로 질책했다.


“불가라고 했을 텐데? 잡량이 천하의 명주라면서 맨입으로 얻어 마실 때는 언제고, 그 술로 한밤의 인연이니 흉금을 나누니 어쩌니 온갖 생색을 다 낼 때는 언제고 상황이 이리되니까 한 손을 보태기는커녕 꽁무니를 빼시겠다? 제남서가의 가풍은 그러한가?”


그의 하대가 시작됐을 때, 그 순간 주변을 에워쌌던 안개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


진실을 공유한 홍소화와 세 호위는 비교적 차분하게 서각을 주시했지만, 견신이 섬전도 조규상을 꺾은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위축된 손문과 정검당 검사들은 숫제 경악한 모습.


[!!!!!!]


그리고 마지막. 당사자 서각은 예상 밖 상황과 연거푸 맞닥트린 나머지 곧바로 대응을 결정하지 못하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산서상인의 전갈 덕분에 알게 된 것은 사실이나, 흑회의 목표가 산서상인지 제남서가의 자손인지, 정검당인지, 형주 사람 고사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서각과 두 호위의 귀로, 견신의 사나운 질책이 연달아 쇄도했다.


“만에 하나 제남서가의 서각을 찾아왔다면 너는 적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달아나는 셈이 되는 것. 그도 문제거니와, 달아나다가 흑회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지금 꽁무니를 내빼려는 성품으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고도 남음이 있을 것.”


홍소화도 그 대목에서는 지금껏 경험한 바와 격을 달리하는 고상한 어조 특히 위엄을 접한 나머지, 만면에 이채를 띠었고.


“거기 더해 흑회가 이만한 간격을 두고 쫓아왔다는 건 우리 중 흑회를 끌어들인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니. 너 아니라 여기 모두,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까닭은 그처럼 한둘이 아니다.”


정검당은 희박한 수준으로 보기 드문 소년 고수가 겸손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사자의 발톱, 범의 이빨을 감춘 야수였음을 깨닫고 다시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 허튼소리 말고 손을 보태도록. 이는 명이다. 그래도 기어이 가야겠다면 내 더는 말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목 위의 물건은 놓고 가야겠지.”

[!!!!!!]


마지막 견신의 실체를 아는 세 호위는 마치 얼마 전 순쟁 그 당시의 황궁, 그날의 봉천전 광장으로 돌아간 듯 몸을 떨었고.


부르르—


그처럼 천년 내 제일가는 검사이자 황자의 위엄을 거침없이 드러낸 견신.


“네 목숨도 중하겠으나, 공동의 위기 앞에서 제 목숨 소중한 줄만 알고 불의를 방관하며 의리를 저버리는 소인배의 목숨보다는 양회 지방의 혼란을 일소하기 위해서 한겨울에 먼 길을 나선 정검당과 오랫동안 나라 살림을 도운 산서상인. 이들 백성의 목숨이 백배 천배는 중할 것이므로.”


부지불식간에 정검당과 산서상인을 치하함으로써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그가 사자의 마음, 범의 눈으로 서각을 조명하고 있었다.


“내 필요하다면 너를 죽여 이들을 보할 것이다.”




#




서각은 찰나, 고민 끝에 본색을 드러내지 않기로, 인내하면서 어떻게든 본대를 유도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물건을 회수하고 싶었고 방해자만 없다면 그럴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천진 사건, 창주 마장 사건에서 형주 사람 고사가 발휘한 무위를 전해 들은 것도 있고 거기 더해 정검당과 산서상인의 표사들 그리고 정체불명의 세 남녀까지 잠재적 방해자가 수두룩하니, 단독으로 물건 회수를 시도하기에는 변수가 많았다.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면 여기서 살아 나가더라도 조직에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처럼 서각이 어떻게 신호를 보낼지를 놓고 고심 중일 때, 무리는 원래 자리에 있던 나무에 척후를 남겨두고 본대는 일 리(里)쯤 북쪽 구릉에 자리 잡았다. 지금은 견신의 지휘 아래 마차와 수레 그리고 인력을 배치하는 중. 산서상인과 정검당은 소년이 술술 꺼내는 지식, 자신감에 감탄하고 또 홀린 나머지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서각 일행이 견신의 시야 가까운 데, 측면에 우두커니 섰고 그 뒤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세 호위와 정검당이 서서 산서상인의 준비를 관전 중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던 차에 문득 공손신정이 유희와 조경에게 들으라는 듯 뇌까렸다.


“천혜의 지형이다.”


그를 들은 정검당 일행이 일제히 돌아봤지만, 맨 먼저 반응한 이는 유희였다.


“여기가? 그런 거야? 사제?”

“주변보다 확연히 높다. 이 안개만 없었다면 사방 멀리 조망됐겠지. 그게 아니라도 육로를 이용하는 공자와 운하를 이용하는 공자 모두에게 불리한 지형이다.”

“불리하다고? 둘 다?”

“강폭이 넓고 강둑은 절벽처럼 높다. 도하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건너편에서 화살을 쏴대는 방법이 있겠지만 이쪽은 수레와 마차가 있으니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 거리를 벌려도 되고.”


유희가 몇 걸음 뒤, 강둑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아, 그렇겠네. 큰 배를 타고 와도 여길 바로 올라올 수는 없을 것 같고.”


수면까지 어림잡아 이 장(丈)이 훌쩍 넘는 높이. 보통 조운선의 높이가 흘수선 아래까지 포함해서 보통 일 장 남짓이니 종사급 고수라면 모를까, 배에서 바로 구릉을 넘볼 수는 없는 높이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나은 지형은 드물 것이다.”


조금 전의 유희처럼 고개를 끄덕인 공손신정은 뒷말을 삼켰다.


‘오는 길에서 본 바를 다 기억해 두셨다는 이야기. 그래서 여길 고르신 것이고. 놀랍군. 진정으로.’




그러는 사이, 홍소화를 비롯한 산서상인의 식솔들이 견신의 앞으로 모였다.


“가장 먼저 이 사람이 가리키는 자리에 수레와 마차를 배치할 겁니다. 우선 그전에 말과 나귀를 잘 다루는 자와 그를 지킬 무사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대답은 지청명이 했다.


“준비했습니다. 한데, 고 대협. 말과 나귀도 방패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아시겠지만 폐상 또한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훈련하였습니다.”


사실이다. 산서상인은 천하를 무대로 삼는 초거대 상회. 이름난 방문파가들과 견주어서 적어도 숫자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많은 무사를 양성 및 보유하는 점도 그렇고 도적의 습격에 대비, 여러 가지 전법을 고안해서 적용 중이었다.


수레와 마차로 원형진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 말, 나귀 그리고 비전투원을 두어서 외곽을 표사들이 수비하는 전법은 꽤 효과적이었다. 지청명이 그를 시사한 것.


경청 끝에 고개를 끄덕인 홍소화가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대협. 사람과 전서구를 보냈으니, 말과 나귀도 더 올 것입니다. 우리 식솔을 살릴 수만 있다면야 폐행수와 산서상인은 그런 손해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때 견신이 뒤쪽에서 가만히 경청 중이었던 공손신정을 재차 놀라게 했다.


“말은 군대의 공력이다. 말을 잃은 군대가 무엇으로 천하를 도모하겠는가. 군대가 빠름을, 기동력을 잃으면 이미 진 것이나 마찬가지. 한 번 지지 않기 위해 말을 내준다면 두 번째는 쉬이 따라 잡히고 세 번째는 필시 지게 되는 법이니.”

“!!!!!!”


그 허무하면서도 장중한 목소리를 매개로 세상에 출현한 군대의 공력. 다섯 글자를 듣는 동시에 확장된 동공이 다시 작아질 줄을 몰랐다.


“말을 지켜서 빠름을 견지하고 빠름으로써 이 천하를 수유에 관통하여.”


그처럼 놀란 그가 홀린 듯 견신의 말을 받았다. 읊조렸다. 나지막이.


“···천 년 열성조의 땅, 저기 중원에 새 나라의 깃발을 꽂을지니.”


그런 그를 조경과 유희가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고, 그가 기억하는 건 그 대목이 끝이었으나, 견신의 목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형제들이여, 칼을 들라.”

“······?”


아득해진 동공 속 거기 백년 전 전장의 풍광을 그리는 견신. 그가 주인이 남기지 못한 탓에, 역사와 기록에 남지 않은 비사를 풀어놓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사검의 선봉기 아래 말을 집결시키라.”

“!!!!!!”


이는 검자 고견신의 서사가 아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살아서 이 땅을 벗어날 것이다.”

“헉!”


이는 그의 서사다. 형주 사람 고사처럼 찢어지게 가난했던 호주 종리현 사람, 소년 목동의 이야기다.


“따르라. 천년제일검사를 따라서 중원으로 갈 것이다.”


급기야 주체할 수 없는 격동에 떠는 공손신정. 그를 본 유희가 공손신정의 어깨를 짚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왜? 왜 그래, 사제?”


이는 말과 나귀를 치던 코흘리개에서 훗날 제국 개국공신의 자리에 올랐으나 오랜 전우처럼 긴 전쟁의 폐해를 온몸 온마음에 입고 끝내 병을 얻어 명을 달리한 무사의 유산.


“대명제국 개국공신 중산무저왕 서달.”

“뭐?”


공손신정은 비로소 깨달았다. 견신이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는 금의위는 물론 전군의 장수가 필수로 익히지만 원전이 실전된 비기. 많은 문무 명신이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복원을 위해서 힘썼으나 여전히 최초의 그것에 이르지 못했다고 알려진 병법이었다.


“중산호마전법(中山頀馬戰法).”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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