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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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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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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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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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6화

DUMMY

26화




지금처럼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다. 틀림없는 그 녀석이다. 아할테케, 한어로는···


“한혈마.”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천 리를 달리는 녀석. 한혈은 살갗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벌레로 인해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는 뜻. 동시에 한나라 백성이 35년 긴 세월 피 흘린 끝에 얻어낸 말이라는 의미다.


섭식에 문제가 있었는지 털이 군데군데 빠졌고 색도 황금빛이 아니라 짙은 흑색이지만 녀석의 이마에 창날처럼 뾰족한 모양의 누런 털은 사실 금빛 털이다. 한혈마 특유의.


갈비뼈가 보일 만큼 여윈 몸. 그러나 어깨높이가 언뜻 봐도 5척이 넘고 고삐를 쥔 아비의 신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유려하게 빠진 다리와 길고 곧은 목, 뾰족한 귀, 선명한 힘줄까지, 틀림없는 순혈의 녀석이다.


백년 전 상장군이 돼서 고향으로 가는 길에 곽천서가 선물로 줬던 그 녀석과 같은 조상을 둔 녀석이 틀림없다.


이름이 여로, 방랑의 길이었던 그 녀석과.


“여로(旅路)···”


우연히 발견한 한혈마는 단박에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고 끌어당겼다.




견신이 우는 아이의 아비가 말고삐를 놓고 아들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말은 계속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만히.


이윽고 견신이 아비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대가, 이 친구.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비는 흑색 일색 차림새에 기다랗고 거무튀튀한 검을 쥔 견신을 발견하곤 순간 움찔거렸다.


흠칫—


고래고래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췄고.


딸꾹—


검의 힘, 무사의 위력이다.


“친구···? 아, 이 녀석 말씀이십니까? 예. 소인이 급전이 필요해서 주인을 찾아보는 중입니다, 무사님.”


아이의 아비 궁호상은 눈앞의 소년을 일단은 과객으로 여겼다. 무사인지 그 여부는 판단을 보류했고 그 목적이 유람인지 방랑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그네라고 생각했다.


옷차림새가 그랬다. 두툼한 털가죽을 엉덩이 아래까지 걸치고, 목부터 코까지 가린 것을 보면 잠깐 밖에 나온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 분명 먼 길 떠날 사람의 차림새다. 아니면 먼 길 거쳐 막 창주에 도착한 사람이거나.


더불어 그처럼 홀로 길을 걷는 사람치고는 퍽 어려 보이는 모습이 어떤 사연을 가진 듯 보였다. 어린 나이에 홀로 또 나그네여야만 하는 사연을.


그런 나이를 고려하면 이제 갓 무사의 길에 들어섰거나 범부가 여행의 편의를 위해서 무사로 위장한 듯 보였다.


어쨌든 비쩍 곯은 말 팔러 나온 사람을 자그마치 대가로 불러줬으니만큼 이쪽 역시 그만큼 공손해질 수밖에 없다. 만약 소년이 진실로 무사라면 더더욱 그래야 할 거고.


차림새와 묻는 분위기를 보면 싼값에 말을 구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비쩍 곯은 말을 헐값에 살 수 있을지 하는 기대를 품고서.


“얼마를 받고 보내실 생각이신지.”

“아··· 그것이···”


역시나, 말값을 묻는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값을 물어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그러면 팔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공치는 것이고.


집에 누워있는 아내를 생각해서 어떻게든, 거짓을 말해서라도 팔아야 할까?


그러자니 양심이 뇌까린다. 정중히 다가온 소년에게, 사연을 가진 듯 보이는 소년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냐고.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라며.


소년이 흑룡을 다룰 수 없는 사람임을, 흑룡이 소년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잘 알지 않냐며, 그걸 알면서 소년에게 파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소년을 등쳐먹는 셈이라고. 정녕 그럴 수 있냐며 뇌까린다.


그러나, 아내는? 오늘도 팔지 못하면 아내는 어찌한다는 말인가. 벌써 한 달째 날마다 장에 나왔지만, 팔지 못했다.


사겠다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그러나, 흑룡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고, 흑룡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그 자리에서 거래를 취소했다. 욕설을 퍼붓는 이들도, 더러는 사기를 치려 한 거냐며 매질하려 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째 되는 날이다.


오늘이.


이미 여기저기 빌린 돈도 많고, 그래서 이제 더 빌릴 곳도 없다. 조만간 빚에 눌려 죽을 판. 그러니, 오늘 흑룡을 팔지 못하면 아내는 죽고 말 것이다.


반드시 팔아야 한다. 어린 아들 녀석이 울고불고 해도 팔아야 한다. 아들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것이다. 돈이라는 게 떼를 쓴다고 해서 구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것이 돈이라는 진리를.


“대가, 무슨 문제라도···?”

“예?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소인의 아들놈이 애지중지 해온 녀석인지라···”


결국 양심과의 줄다리기 끝에 내린 선택은 사지 못하게 하는 것. 다른 구매자를 기다리는 것.


소년이 치를 수 없는 값을 내밀 생각이다. 그러면 거짓을 말할 필요도 없고, 양심을 거스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차피 떠돌이 소년의 전낭 사정이야 뻔하지 않은가. 비쩍 곯았다고 해도 흑룡은 일개 소년이 살 수 있는 짐승이 아니다. 말이 그 얼마나 귀한 짐승인데.


아무튼 얼마를 부를지 생각하다가 원래 팔려던 가격의 두 배를 불렀다.


“은으로 백 냥은 받아야···”

“백 냥···”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반응이 나왔다. 신음 같은 목소리다. 그와 동시에 주변 마주들의 비아냥도 들려왔고.


“양심이 쪼그라들어서 점이 된 건가. 하다 하다 이제 스물도 되지 않은 사람을 등쳐먹으려고. 보니까 우리 아들 연밴데. 열네다섯쯤 됐으려나?”

“쯧쯧! 돈이 뭔지, 종이야 귀한 종인 것은 인정하지만 저리 병들고 성질도 더러운 녀석을 누가 사?”

“애초에 저놈 저거 잡종이라니까 그러는구먼. 내 물건이 순종이고.”

“백번 양보해서 판다 치자고, 근데 백 냥? 한밑천 뽑아 먹으려고 작정했네, 작정했어.”

“저쯤 되면 팔 생각이 없는 거지. 어딜 봐서 백 냥씩이나 들고 다니게 생겼냐고.”

“그러게나 말이야. 딱 보니까 말도 병들었겠다, 싸게 한 마리 살 수 있을까 싶어서 온 거지. 말값도 모르는 것 같고.”


마음대로 멋대로들 지껄이라지. 너희도 언젠가 곤궁을 겪을 날이 있을 테니까. 그때가 되면 내 심정을 이해할 거고, 오늘 너희들이 그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말들을 뱉어냈었는지 깨닫게 될 테니까.


그런데 지금 알고 보니, 소년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백 냥이면 되겠습니까?”

“예?”


흑의 소년은 여기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었다. 완전히.


“전표로는 지금 드릴 수 있고 은은 전장에 다녀와야 합니다.”

“저, 정녕 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데려가겠습니다.”


그처럼 궁호상이 예상과 정반대의 전개에 당황하는 찰나, 줄곧 흑룡의 다리를 잡고 지켜보던 아이가 소리쳤다.


“우리 용아 안 팔아! 용아는 내 동생이야! 안 판다고! 아버지가 마음대로 파는 거야!”


동생 혹은 벗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데서 비롯된 두려움인지, 소중한 존재를 앗아갈지도 모르는 이에 대한 적개심인지, 하여튼 붉은 기운이 두 눈에 가득 차 있었다.


그처럼 작은 몸으로 말을 가리고 노려보는 아이를 곁눈질한 견신이 다시 궁호상을 돌아봤다.


“아이와 견해차가 있나 봅니다. 정녕 보내실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 혹, 아이와 견해가 일치되면 마장 앞 반점으로 고사를 찾아주십시오. 하루쯤 유하겠습니다.”

“아이 때문이 아닙니다.”

“허면···?”

“실은···”


궁호상은 사실대로 설명했다. 역시 소년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한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무사님. 소인이 워낙에 사정이 급해서 잠시 돈에 눈이 멀었습니다.”

“괘념치 않습니다. 데려가게만 해주신다면 이 사람이 데려가겠습니다.”

“예? 허나, 어째서···?”

“저 친구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

“저 친구는 바람의 영혼입니다. 달려야 사는 영혼입니다. 한없이 또 끝없이 달리는 일을 업으로 안고 태어난 영혼입니다. 이 사람과 같은.”


궁호상은 한참 어리디어린 소년이 하는 뜻 모를 이야기에, 홀린 듯 흑룡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머물지 못하는 영혼인지라 이리 떠돌고 있습니다. 어디 가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여정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

“아무튼, 저 친구도 그래서. 이 광활한 천하 저 지평선 끝이 어딘지 알고 싶어서 거기까지 달리고 싶어서, 달리지 못해서 저리 여위었을 겁니다.”


소년의 이야기는 어떤 고대의 시조나 노래 같은 설화나 민담처럼 들렸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그러나, 확실한 느낌은 있었다. 흑룡이 새 주인을 만나야 한다면 눈앞의 소년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은.


흑룡을 말이라는 동물을 넘어 하나의 존재로서 또 인격체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느낌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고 흑룡을 돌아보자, 그 찰나 머리와 가슴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단절음이 들여왔다.


뚝—


아마도 흑룡과의 인연의 끈이었을까. 때마침 녀석도 앞발을 구르며 숨을 내쉬었다.


툭— 툭—


저도 헤어질 준비가 됐다는 듯, 저를 이해해 주는 소년을 따라가겠다는 듯 그렇게.


“무사님께서 괜찮으시다면 팔겠습니다.”

“아버지! 안 돼! 안 된다고! 팔지 마요! 우리 용아, 팔지 말란 말이에요! 으아아—”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금세 울음을 터트린 아이가 겨울 차디찬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이미 결정한 것. 소년도 좋다고 했으니 이제는 흑룡을 떠나보내고 아내를 살릴 순서였다. 아이의 원망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만 있다면 좋겠으나, 그보다 아내의 목숨이 더 급했다. 훨씬 더.


“제 아들놈은 괘념치 마십시오. 소인이 반점까지 모시겠습니다. 거기 매두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무사님.”


지금 막 말을 이끄는 아비를 멈춰 세운 견신이 천천히 아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소형제, 나는 저기 멀리 형주 사람, 고사라 한다.”

“안 팔아! 형한테 안 팔 거라고! 아무한테도 안 팔아! 가! 가라고!”

“소형제, 용아 지금 아프다. 많이. 알고 있느냐?”

“아냐! 배 고파서 그래!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 먹어서 그래!”

“돈이 있을 때도 먹지 않았을 걸.”

“···그, 그건! 아버지가 맛없는 것만 사 왔으니까···! 그러니까···!”

“소형제, 용아는 말이다, 달리는 말. 달려야 살고, 달리고 싶고, 달려야 병이 나지 않는 말. 마음껏 달리고 싶어서, 있는 힘껏 달리지 못해서 지금 아픈 거야.”

“···아냐. 아니라고. 용아, 아니지···? 내 말이 맞지?”


벌떡 일어서서 돌아보며 묻는 아이를 흑룡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빤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크고 둥근 눈 끝에 굵은 눈물 한 방울을 달고.


“이 형아가 한 말 틀렸지? 아니지? 형아가 거짓말한 거지? 그치? 거짓말이지?”


짐승도 때가 되면 우는 법이다. 감정이 있어서 분노도 슬픔도 느끼는 법이다. 제 새끼 팔려 가는 날, 어미 소는 눈물 흘리는 건 물론이고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말이라고 다르겠는가. 말도 어린 주인과의 이별이 슬프고 또 아프다. 그러나 생명은 무엇이든 자기 본성과 본능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래야 탈이 나지 않는 법이다.


말은 달려야 한다. 달리고 싶다. 그 모든 속박과 구속을 벗어던지고 초원과 사막 지평선 끝까지 달리고 또 달리고 싶다. 늙고 지쳐 더는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올 때까지, 언제나 또 언제까지나. 그저 달리고 싶다.




그 대목에서 아이가 자기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견신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 녀석이 떠올랐다. 마장으로 오는 길에 봤던 녀석이.


좋은 방법,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았다.


“대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이 마음을 좀 달래주고 계십시오. 한 각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예? 예예! 그러겠습니다.”




#




반 각(刻) 뒤, 아이는 잠잠해졌다. 어린 나이임에도 견신이 해준 말을 이해한 모양. 지금은 흑룡을 계속 쓰다듬으며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미안해··· 용아. 네가 그런 줄도 모르고··· 가서 잘 지내야 해? 아까 그 형아 좋은 형아 같아. 부탁할게. 이번에는 성내지 말고 따라가. 나보다 너한테 잘해줄 사람 같아.”


사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흑룡은 제 얼굴을 아이의 얼굴에 비비고 입술로 아이의 머리칼을 물고 놓기를 반복했다.


만약 흑룡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리 말했을 것이다. 그동안 떠나지 않은 것은 슬퍼하는 너를 위해서였다고.


그처럼 궁호상 부자와 흑룡이 견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마장에 들어선 한 무리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맨 앞 초로의 사내는 산서상인의 행수, 양성이었다. 괜찮은 말이 없나 하고 마장을 쭉 살피던 그가 흑룡을 발견하더니 얼른 달려왔다. 새로 파견된 산서상인 소속 무사들이 뒤를 받쳤고.


그러고는 흑룡을 샅샅이 훑으며 감탄을 연발하기 시작했다.


“오오— 오오—”


그를 궁호상 부자가 어리둥절해져서 보자, 양성이 대뜸 궁호상의 손을 낚아채며 주문했다.


“이 녀석 내게 파시오. 내 값은 후하게 쳐 드릴 테니.”

“예?”


이어서 앞섶에서 꺼낸 철패를 들이밀었다. 도장 겸 상회에서의 신분을 증명하는 철패에 산서(山西)가 양각돼 있었다.


“이 몸은 산서상인 행수요. 보증이 확실하지. 값은 예서 바로 치르리다. 내게 파시오. 응?”

“이미 임자가 결정된 터라···”

“응? 얼마에?”

“은 백 냥에··· 보시다시피 병들고 여윈 상태라···”

“백 냥? 예끼! 그 사람 참 도둑 심보일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혈마를 은 백 냥에? 안 될 말이지, 안 될 말이야.”


흑룡을 발견하고 흥분한 나머지 임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둑 심보라며 비난하는 양성. 이는 노련한 상인이라면 평소 절대 하지 않을, 작지 않은 실수였다.


임자가 견신이 아닌 다른 무사거나, 더 나아가 관리였다면 그것도 성질 괄괄한 사람이었다면 양성은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만 했을 거고, 심하면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 삼백 냥 드리겠소. 그 거래 무르고 내게 파시오.”


무려 삼백 냥이라는 거금 앞에서 궁호상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흑룡을 이해하고 아이를 달래던 형주 사람 고사를 떠올리며,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


“허나, 이미 약조한 거래를 어찌 무르겠습니까. 상인이 아닌지라 잘은 모릅니다만, 상도의가 아닌 줄로···”

“본디 돈질 앞에 무너지는 것이 상도의지. 그 임자는 어디 있소?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내 그이와 이야기 하리다. 이야기가 되면 내게 파시겠소?”

“이야기가 된다면야··· 아무튼, 곧 오실 겁니다. 돈을 바꾸러 가셔서···”

“좋소이다. 내 그이와 이야기하리다. 이야기만 되면 파는 거요? 응? 이야, 이놈 참 물건이로세. 물건.”


그처럼 득의양양한 양성이 재차 흑룡을 살펴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그때였다.


조금 멀리, 견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행수에게 파십시오, 대가. 백 냥을 삼백 냥에 댈 것은 아닙니다.”


그에 양성과 궁호상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고 그중 양성이 견신을 대번에 알아봤다.


“저분이 임···? 가만···? 그쪽은···?”


견신도 마찬가지, 양성을 알아봤다.


“행수. 또 뵙는군요.”


똥 씹은 사람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양성은 꼴 보기 싫은 흑의 소년이 조금 전, 어인 일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며, 얼른 말을 데리고 자리를 뜨고자 했다.


“자, 여기 우리 산서상인의 전표 석 장이오. 자, 그러면 데려가리다?”

“아···! 그게···”


그처럼 궁호상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순식간에 진척되는 상황에 또 견신을 향한 도의적인 죄책감에 갈등하고 있을 때.


견신은 양성을 본체만체하며 아이 앞에 가서 쭈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털가죽 장포 안쪽에 품고 온 녀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를 보는 아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거기 검은 털이 복슬복슬한, 눈 위에 금빛 둥그런 점을 박은 듯 노란빛 털이 난 강아지 한 마리가 분홍색 혀를 내밀고 있었다.


“발음이 어려울 것이다. 이 녀석은 방카르라 하고 몽골 초원에서 온 녀석이다. 용맹하고 충직한 친구지. 도마(刀魔) 칭기즈칸이 온 천하를 정벌할 때 가는 곳마다 이 녀석을 데리고 다녔다 한다. 늑대, 호랑이로부터 말과 소, 양 따위를 지켰지. 말이 없으면 싸울 수가 없고 호랑이한테 소, 양을 빼앗기면 병사들이 굶게 되거든.”

“방카르···? 근데, 몽골은 오랑캐잖아?”

“오랑캐지. 허나 이 녀석은 개다. 개와 오랑캐는 아무 상관이 없지.”

“그래도···”

“흑룡은 근본이 서역에서 온 녀석이다. 허면, 흑룡도 오랑캐의 말이냐?”

“아니! 용아는 아니야!”

“이 녀석도 마찬가지다. 이 녀석이 앞으로 네 친구가 돼 줄 것이다. 용아 대신.”

“친구···? 내 친구?”

“그래, 네 친구. 벗이 되어줄 것이다. 몽골은 키우던 짐승 중에 오직 이 녀석에게만 이름을 붙여주고, 사람 아닌 짐승 중 유일하게 가족으로 여겼다.”


견신의 설명을 들으며 또 방카르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 그런 아들의 얼굴을 보는 궁호상. 그는 눈시울과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의 마음 씀이 너무도 고마웠다. 돈을 마련하러 간 줄 알았더니 흑룡을 떠나보내고 울적해질 아들놈을 위해 친구를 구하러 다녀온 것이었는가.


한참 어린 소년이 어떻게 그처럼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을 다 했을까. 아비도 하지 못한 생각을.


“가족··· 내 동생···”

“몽골은 방카르가 죽으면 사람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다. 죽으면 높은 산에 올라가서 사방이 잘 보이는 곳에 묻었지. 사람들이 방카르를 밟지 못하게, 그래서 온전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또 천지신명과 가까운 곳에 살라는 뜻에서 높은 곳에 묻었다. 새하얗기에 순수를 상징하는 소젖을 무덤 주변에 뿌려서 잡귀를 쫓아내고 산신령에게 빌었지. 방카르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겨울 추위에도 혀를 내밀고 또랑또랑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방카르. 아이는 그런 방카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몇 살 위 형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다.


“그리고 방카르의 꼬리를 잘라서 머리맡에 두었다. 꼬리가 없으니 더 이상 개가 아니라는 뜻이지. 마지막으로 부유하게 태어나라고 입에 소젖을 굳힌 것을 물려준 뒤, 저승길에서 굶지 말라며 주변에 쌀을 뿌려줬다.”

“헤에···”

“그리하여 사람과 방카르가 영원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멀지 않아 사람으로 태어난 방카르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전생 시절, 원(元)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이야기를 마친 견신은 방카르를 아이의 품에 안겨주며 일어섰다.


“이제 네가 안아주어라. 아직 어려서 날이 추울 것이다. 네 벗은 네가 지켜줘야겠지.”


품에 가득 안겨 오는 따뜻한 감촉을 느낀 아이가 방카르처럼 동그란 눈으로 견신을 올려다봤다.


“그 옛날 유비 관우 장비는 복숭아나무 아래서 결의를 맺었음에도 헤어지고 말았으나, 너와 방카르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 터다. 네가 방카르를 용아처럼 아껴준다면. 이름은 네가 지어주어라.”


거기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처럼 침침했던 하늘이 파랗게, 맑게 개어 있었고 영롱한 빛줄기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난 형을,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해준 은인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부터 너의 벗이다.”


작가의말

주인공이 종청산과 통성명하는 과정에서 출신지로 밝힌 상산의 실제 위치를 작가가 오해하여 형주로 수정하였습니다.

작품을 즐기시는 데 참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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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485727l 독자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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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2화 +23 24.08.02 9,658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2 367 18쪽
21 20화 +15 24.07.31 10,108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4 440 18쪽
19 18화 +16 24.07.29 10,412 409 21쪽
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17 16화 +16 24.07.24 10,539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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