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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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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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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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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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DUMMY

24화




산서상인(山西商人)의 행수이자 선주, 양성은 견신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이것저것 가져다가 문 앞을 막아놓고 벌벌 떨고 있던 그때, 문 너머로 들었다. 자객 수괴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정황상 수괴의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를.


-···네 뒤 저 자에게 우리 물건이 있다. 그것만 받으면 이대로 물러나지.


대답하는 목소리도 있었던 것 같으나 희미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후, 소름 끼치는 살육의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고 잠잠해져서 문을 열고 나갔을 때는 선실 전체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콧속을 찌르는 피 냄새가 자기 전에 먹은 것을 다시 확인하게 했다.


암흑 속에서 꺼져가는, 멎어가는 숨소리만이 들려올 따름이었고 당시 보이는 거라고는 맨 앞 선실을 쓰는 세 남녀가 바로 앞 복도 양쪽 모퉁이에 숨어서 복도를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개구쟁이 소녀의 아비가 횃불을 찾는 통에 다시 불을 붙였을 때 본 광경은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맨정신으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둘 혹은 그 이상으로 조각난 사체들이 복도 끝까지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 뒤로 바로 앞 선실의 흑의 소년이 여인을 무슨 해괴한 방법으로 살려보려다 실패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고.




소녀의 어미가 죽은 뒤, 아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자객들은 누가 해치운 것인지 등 자세한 사정을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랬으나,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당시 선실 구석에서 넋두리하듯 불경 구절 같은 글귀를 외던 흑의 소년. 온몸이 피에 절어 있었다. 선실 한가운데 꽂혀 있었던 검도 그렇고.


물론, 소년 무사가 자객들을 해치웠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스물이 넘는 자객을 아직 뼈도 덜 여문 소년이?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일.


그러나 자객들을 해치운 자와 연관이 돼있으리라고, 목격했으며 또 알고 있으리라 본다. 자객들을 해치운 자와 수괴가 말한 물건을 가진 자를.


모종의 이유로 그를 숨겨 주고 있는 게 분명하고 이는 지금 상황에서는 가소로운 일이다. 정6품 백호가 나섰으니 사실대로 털어놔야 할 거고, 또 적에게 쫓기는 것을 숨긴 채 배에 탑승함으로써 상회에 입힌 피해를 보상해야 할 터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세상에 사연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나. 사연보다는 먹고 사는 돈이 중요한 법이다. 이와 같은 중대한 손해를 입히고도 모르쇠로 숨으려 들다니. 이는 산서상인은 물론이고 상인과 상계 전체를 장기판 졸쯤으로 여기는 처사다.


죽은 무사들과 그 유족에게 지급할 위로금도 그렇거니와 상행 지체로 인해 발생한 위약금도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 다 받아낼 것이다. 전부.




양성이 대강 요약한 이야기를 들은 백호가 갑판에 대고 소리쳤다.


“순천부 통주에서 탄 고사(高四)는 본관의 앞으로 오라. 물을 것이 있다.”

[······.]


대답은 없었다. 갑판에 집합한 생존자들은 겨울 새벽의 냉기에 몸을 떨 뿐이었다. 그에 다시 백호가 재촉하는데 때마침 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사! 본관의 말을 듣지 못···!”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옆, 배 아래 나루터에서.


“거기 있었는가. 물을 것이 있으니 서두르라.”




견신은 머리와 손에 묻은 강물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일어서서 천천히, 다리를 통해 갑판으로 올라갔다. 털어내지 못한 물기는 그대로 얼어붙어서 그의 머리칼과 옷에 고드름처럼 매달렸다.


조금 전 선주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쿵저러쿵해서 수상하다고 하는 말을.


“하문하십시오, 대인.”


선주가 지금 움찔거리는 까닭도 자기가 한 말을 이쪽이 다 들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


저이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려고, 저와 백호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서 나루터로 내려갔었다는 것을.


“여기 선주가 자객들의 시체 대부분이 네 선실과 주변에 있었다 한다.”

“그렇습니다, 대인.”

“자객들을 제압한 자를 보았느냐?”


보아하니 백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인물이 자객들을 처리했을 거라고, 어린 소년이 스물에 달하는 자객들을 제압했을 리가 없다며.


“보았습니다.”

“누구냐? 선주가 본관에게 말하기를 너도, 같이 있었던 청산도 답하지 않았다 하였다.”


청산(靑山)은 소녀의 아비다. 그이가 선주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까닭은 이쪽에서 당부했기 때문이고.


아무튼 조운선이 습격받았을 당시 예상했었다. 지금처럼 백호 또는 천호가 오리라고.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우선은 무고한 백성들을 살리고 봐야 한다며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선 거고.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되든 사실대로 순순히 말해줄 생각이었다.


말을 믿고 믿지 않고는 사람의 자유. 나라에서 나온 녀석이 믿지 않으면 이쪽의 신분을 추궁할 거고 그때 신분을 밝히면 그만이다. 그렇게 하면 백호든 천호든 이쪽이 하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아도 믿게 될 거고, 또 믿어야만 할 테니까.


잠시 이목이 쏠리고 소문도 나겠지만, 귀찮은 일이 생기겠으나 그것도 다 한때일 것. 배에서 내려서 사람 사이로 스며들면 머잖아 잊힐 터다. 사람은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존재들이니까.


그런데, 그 녀석들이 정말이지 괘씸하게도 나서지 않았을 때 그때 생각을 바꿨다. 지금처럼 하기로.


“저분들입니다. 저분 대협들께서 자객들을 처단하셨습니다.”




그런 견신이 차례로 가리킨 사람들은 갑판 구석에 흩어져 있는 세 사람, 조경과 공손신정 그리고 유희였다.


[!!!!!!]


예상 밖 지목을 당한 조경은 순간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을 지었고 공손신정은 당황한 듯 동공이 흔들렸으며, 유희는 그 아름다운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거기, 세 사람. 본관의 앞으로 오시오. 잠시 조사할 것이 있으니.”


그처럼 황당한 얼굴의 세 호위를 불러들인 백호가 다시 견신을 돌아봤다.


“통주에서 온 고사, 자네는 일단 가서 쉬고 있게. 다시 부를 수도 있음이네.”

“예, 대인.”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예법을 취한 견신은 썩은 과일을 베어 문 얼굴로 걸어오는 세 호위를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지나쳤다.




이윽고, 백호에게 불려 나온 세 사람은 백호의 추궁에 이러쿵저러쿵 서로 손발이 맞지 않는 답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답답하구려, 사실은···”

“아니—이. 그게 아니라···”


그를 수상하게 여긴 백호가 강하게 추궁하자 어느 순간 백호를 선실로 데려갔고, 데려가서는 곧장 철패를 들이밀었다.


“창(廠)에서 나왔다. 예는 생략. 목소리도 낮추도록.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혀끝이 지나치게 길더군. 잘라줄까? 내 사연이 있는 사람인지라, 뭐든 잘 자르는 편인데.”

“금군 천호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본관의 결론은 우리 세 사람도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 일단 적당히 정리하지.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본관은 우첨도어사. 내 고생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도 답답해서 미칠 것 같거든? 그러니까 이 건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고. 하아··· 진짜 그 상황 참 피곤하게 돌아가네. 봐, 이거 맡는 게 아니었다니까.”


그처럼 부지불식간에, 말로만 듣던 자금성 3대 권력과 한자리에서 대면한 백호.


“예? 아···! 예예! 허면, 소관이 앞으로 어찌 하면 될는지···”


꿀꺽—


식겁한 그의 투구와 갑주 안쪽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새벽의 필연은 아침이다. 새벽 뒤 아침은 반드시 온다. 아무리 어두컴컴한 새벽일지라도 아침은 기어이 밀어내고야 만다.


검기만 하던 하늘은 명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파랗게 변해가고 그러다 지평선이 노랗게 물들어 가다가 어느 한순간, 빨간 태양이 얼굴을 내밀며 하늘과 땅 사이를 밝혔다.


조운선은 상회의 보강 인력이 도착할 때까지 백호소의 호위 아래 대기 중이었다. 승객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누였고, 선원들은 시체들을 수습해서 백호소에 인계한 뒤 갑판과 선실을 청소했다. 선실도 방수 처리를 잘 해둔 덕분에 시체의 부산물을 씻어내는 작업은 수월했고 비릿한 피 냄새도 퍽 가셨다.




맨 앞 선실에서는 백호의 추궁에서 벗어난 세 호위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 시작부터 이어진 두 사람의 타박을 조경이 볼멘소리로 받아쳤다.


“그럼 어찌해야 했지? 너희들 말은 사실대로 말했어야 한다는 이야긴가?”


실은 정왕 주견신이 다 죽였다고 말했어야 했냐는 물음에 당장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한 공손신정과 유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아··· 시작부터 꼬이네.”


조금 전 갑판에서 백호에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횡설수설 중에 결국 관직과 품계로 찍어 누른 세 사람. 이들은 임무의 첫 시작부터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치를 떠는 중이었다.


“그것보다 확실한 건 이거야.”

“뭐가.”

“뭔데?”


조경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다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전···! 아니, 그분의 실력.”

“···그래, 그 말은 옳다.”

“맞아, 그간 속여오신 거야. 모두를. 정녕 무서운 분, 소름 끼칠 정도야. 이봐, 피로유발자. 창도 몰랐던 거 확실해?”


이들은 지난 새벽에 본 것과 느낀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정왕 주견신이 자객 스물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해치우던 모습을.


셋 다 견신의 수법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견신이 소이신천을 처치할 때 보인 초광은 너무 빨랐고 그 뒤 견신이 복도의 자객들을 처리할 때는 먼저 횃불을 꺼트렸기 때문.


다만, 단편적인 순간순간의 모습은 똑똑히 봤기에 견신이 자객들을 처리했다는 건 확신했다.


“몰랐다. 전혀. 알았다면 걱정하지도 않았겠지.”


조경의 답을 들은 공손신정이 눈빛과 어조에 강한 불신을 담아 반문했다.


“그럴 리가 있나. 창이 그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 말이. 근시환관들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데, 이게 말이 안 되지 않나? 역시··· 피로유발자가 숨기는 것이 많다고 봐야 하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해라. 내 뭐라고 답하든 어차피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할 게 아닌가?”


조경은 실제로 몰랐다. 장인태감부터 제독동창과 병필태감, 수당태감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언질을 주지 않았기 때문.


‘내게도 감췄다. 왜···? 나를 믿지 않는다? 허면, 왜 나를?’


신비의 근시환관 수당태감 만영.

정왕의 근시환관 태감 신득.


그중 만영은 몰랐더라도 신득은 알았을 것이다. 조금 전 유희의 말마따나 신득까지 모른다는 건 진실로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아니, 말도 아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신득이 창을 상대로 감췄거나, 사례감과 창의 수뇌부가 감승 조경에게 감춘 것. 그 둘 중 하나다.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고.


아무튼,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지금 공손신정이 한 말처럼.


“···무서운 분이다. 장장 십 년 동안 궁을 속여오셨다니. 또한 과연, 황룡 일족이다. 심법을 익히지 아니하셨음에도 그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창을 섞어본 건 아니나, 예사 놈들이 아니었다.”

“그러게. 그 나이 때 그런 판단과 배포가 가능하긴 한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심법을 익히고 계셨던 거 아니야?”

“구룡분승을 말함인가?”

“그래. 그것도 숨기신 거 아니냐고.”


반박은 조경이 먼저 했다.


“그건 아닐 것이다. 무맥의 전수 중지 결정은 폐하께서 하신 것. 그분이 몰래 익히셨다면 둘 중 하나 반역 아니면 천자께서 허언을 하신 것이 된다. 어느 쪽도 그럴 리가 없어.”


그의 논리를 인정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게 생긴다. 새벽에 본 정왕 주견신의 실력.


그를 인지한 공손신정이 그 자신에게 묻듯 뇌까렸다.


“심법이 없이··· 그게 가능한가···?”


그가 생략한 말은 그 짧은 순간에 무려 스물에 달하는 자객들을 짐승 도축하듯 해체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과 판단은 유희의 것이기도 했다.


“불가능이지. 토납법을 한 갑자 익히면 가능할까? 안 될 것 같은데? 토납법을 십 년 익힌 몸으로 말하자면 순수한 육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했다? 그게 금일 나온 말 중에 가장 말이 안 돼, 언어도단이라고. 근데, 다들, 이거 놓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뭘? 말코, 쓸데없이 뜸 들이지 말고 이야기해.”

“이번엔 또 뭔가?”

“개살구.”


세 글자 한마디가 견신의 뛰어난 실력으로 인해 달아오른 조경과 공손신정의 이성을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아··· 그거.”

“흠.”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었을까. 찜찜해.”


두 사람은 자연스레 유희의 유도에 이끌렸다. 그때 들었던 문장, 어조, 목소리, 분위기, 복도 공기의 온습도와 피 냄새까지 전부. 떠올렸다.


-개살구들이군. 시체나 치우라.


거기서 이들은 개살구를 주목했다. 그보다는 치우라는 어조를 주목했어야 했음에도.


“개살구···”

“개살구는 맛없는 살구인데···”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럽게 보이는데, 막상 먹으면 보면 맛이 없는.”


그처럼 저마다 개살구를 해석하던 중 유희가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사뭇 긴장한 얼굴이 돼서 물었다.


“혹, 그건 아니겠지?”

“······?”

“······?”

“우리 정체를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런 유희의 답을 기다렸던 조경과 공손신정이 한숨에 곁들여 고개를 내저었다.


절레절레—


“말코, 너는 가끔 보면 상상이 지나쳐. 어지간한 궁녀들보다 더하다고.”

“동의한다. 도찰원은 평소 상상으로 조사하나?”


그런 두 사람의 타박을 들은 유희가 안도 절반, 부끄러움 절반을 담아 대꾸했다.


“그렇지? 아니겠지? 그래, 이건 내가 봐도 과했네. 너무 많이 갔어.”




#




같은 시각, 종청산 가족의 선실.

한쪽 벽에 흰 천을 덮은 아내를 누인 종청산이 견신과 마주 앉았다. 소녀는 울다 지쳐서 잠든 상태였다. 아비의 품에서.


종청산이 품에 안긴 딸아이를 도닥이며 운을 띄웠다.


“소인 실은 정주(鄭州) 사람, 종가 청산이라 합니다. 이 목숨값 이상의 막중한 책무를 맡은 바 있어 감췄으나 은인께 진실한 성명을 숨기는 것이 예도, 도리도 아닌 듯하여.”

“형주(荊州) 사람, 고사입니다.”

“과연! 한수정후를 배출한 무(武)의 본산입니다. 대협과 같은 영웅호걸을 천하에 또 내놓았으니.”


종청산의 얼굴에 불행 중 기쁨이라는 기색이 가득했다. 형주가 아는 곳이기에, 그래서 한마디 보탤 거리를 발견한 데서 비롯된 기쁨이었다. 한수정후는 관우의 시호다.


이번에는 견신이 물었다.


“부인의 일은 거듭 사과드립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더 도울 것은 없겠습니까.”

“소인 또한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자의 일은 대협의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절대로. 소인의 내자가 이리된 까닭은 모두 소인이 가진 물건 때문입니다.”


종청산은 사실대로 털어놨다. 견신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선한 사람이라고.


세상에 어떤 사람이 뱃멀미약 하나 받았다는 이유로 제 목숨 바쳐서, 그것도 스물이나 되는 자객들과 맞서겠는가.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지언정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였으나 그저 평범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군자는 다르다.


군자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니, 그의 겉만 제대로 보면 한 길 아니라 열 길 속도 능히 헤아릴 수 있다. 형주 사람 고사는 천하의 군자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다. 제 아내도 지키지 못한 샌님 대신 물건을 항주까지 운반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제국 남동부 해안에 싹튼 거대한 불의를 타개하는 데, 결정적 또 지대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 소년의 몸으로 능히 하늘과 땅 사이를 종횡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물건은 한낱 샌님에 불과한 종청산이 죽음으로 옮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니와, 이제 종청산은 죽을 수 없게 됐다. 아내가 죽었기에, 딸아이가 있으므로.


종청산은 아내의 유지를 받들고 또 아내가 남기고 떠난 딸아이만큼은, 아내의 분신만큼은 지켜야 하기에,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아니 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그 욕심을 대의와 명분으로 포장하고 치장해서 눈앞의 소년에게 내밀 것이다.


눈앞의 소년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저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뱃멀미약 한 알에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결하는 사람.


이 생애 처음 만나본 존재.

즉, 무사이므로!


“수괴가 말한 그 물건인가 봅니다.”

“대협, 소인이 염치없으나 하나 청을 드려도 될는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종청산이 곤히 자는 아이의 앞섶에서 어른 손가락 두께, 반 척 길이의 죽통을 꺼냈다.


“우선 이것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견신이 받아 들기 전에 물었다. 이런 물건은 한 번 받으면 끝인 물건. 행여 보은의 의미로 종청산과 죽은 아내에게 있어서 소중한 물건을 주는 것이라면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받기 전에 물었다.


“연판장입니다.”

“연판···장···?”


연판장(連判狀). 잇닿을 연, 판단할 판.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어떤 목적을 명시한 문서 혹은 기타 기록물에 연달아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은 문서다.


“이 연판장을 허약한 범부 대신 잠시 보관해 주시겠습니까? 소인이 지난 새벽에 일을 겪고 나니 이를 항주까지 무사히 가져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내자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흰 천을 덮은 채 말없이 누워있는 아내를 보는 눈빛이 음울하게 보였다. 먹구름 낀 하늘처럼.


그 사이, 그런 종청산을 따라 죽은 여인을 곁눈질한 뒤 바닥에 놓인 죽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견신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심상치 않은 느낌이, 검은 안개가 세를 넓히는 중이었다.


“무슨 연판장인데 그 먼 항주까지.”

“그 연판장에 제국 남동부 해안에 사는 백성들의 안녕과 명운이 달렸습니다. 대협, 혹 흑회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흑회(黑會)···? 모르겠습니다만···”

“소인도 며칠 전 이 연판장을 받은 뒤에야 알았습니다. 항주에 근거하여 유도(留都) 일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도당이라 합니다. 청컨대 연판장을 보아주시겠습니까.”


유도는 과거 제국의 도읍인 남경을 의미한다. 제국 두 번째 도읍. 게다가 백성과 고혈. 거기까지 들었을 때 견신은 머릿속에서 세력을 넓히는 중인 검은 안개의 정체를 비로소 눈치챘다.


그에 죽통을 여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한 번 발생한 검은 안개. 즉, 운명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그를 전생 시절 온몸과 영혼으로 체험했다는 것을.


운명과의 조우는 거부할 수 없고 한 번 정해진 운명은 정해진 자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때로는 지금처럼 진작에 만났으나 뒤늦게 깨달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어제 낮에 소녀가 산해박을 건넸을 때, 주견신이 그 산해박을 받았을 때 그때 이미 지금 느끼는 이 운명이 시작됐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이는 운명과의 조우.

천천히, 죽통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 연판장이 대협께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는 모르나 소인은 처음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유도, 항주 일대의 관리들이 불온한 무리와 결탁하여 도당을 결성하고, 제국 해안을 외적에게 내준 채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

“소인, 그 연판장을 항주까지 무사히 전달하라는 명을 받은 신임 항주 지주입니다.”


종청산이 제 앞섶에서 꺼낸 임명장과 명령서. 임명장에는 아버지의 국새가 찍혔고, 거기 명령서 가장 아래 찍힌 도장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그처럼 견신이 알아본 도장의 주인, 그 이름을 지금 종청산과 견신이 이구동성으로 말할 예정이었다.


“명령은 제국 태자태사 겸 문연각···!”

“···이현.”

“대협? 이 공을 아십니까?”




운명은 견신이 몸과 영혼으로 경험한 바처럼, 지금 두 사람의 이구동성처럼 반드시 만나게 되는 법이었다. 반드시.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어제 새벽부터 시작된 개인 일정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시간도 부족하고 피로도 쌓여서 마음에 드는 글을 완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또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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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21 24.08.07 9,572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32 369 21쪽
23 22화 +23 24.08.02 9,660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5 367 18쪽
21 20화 +15 24.07.31 10,109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4 440 18쪽
19 18화 +16 24.07.29 10,414 409 21쪽
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17 16화 +16 24.07.24 10,540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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