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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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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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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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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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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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DUMMY

18화




절정이었다. 꼬챙이처럼 첨예한 공기가 살갗을 찌르고 뱉어낸 숨이 입술을 벗어나기도 전에 얼어붙는 한겨울이었다.


절정으로 치달은 겨울은 한 마리 산군처럼 땅위 모든 것에 군림했다. 산야도 거리도 텅 비었고, 살 에는 냉기에 겁먹은 짐승들도 사람들도 좀처럼 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정은 황궁도 마찬가지였다. 전각 밖에는 부지런히 쌓인 눈을 치우는 환관들뿐. 전각과 주변 통로를 청소하는 직전감(直殿監) 환관들이 눈 치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쓱— 쓱—


그들마저, 그 소리마저 없었다면, 황궁도 바깥세상처럼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적막했을 것.


물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각 안쪽은 공기도, 상황도 따뜻하거나 뜨거웠고, 석신사(惜薪司)의 환관들이 가을 내내 부지런하게 비축한 땔감과 숯이 제 몸을 희생하여 데운 공기 가운데서 벌어지는 일은 치열했다.




귀비의 침궁.

귀비와 태자는 며칠째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모자의 머리 위로 기이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중. 살을 에는 삭풍도 모자의 가슴을 식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귀비는 난과 분재를 다듬고 태자 주견심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풍경이었다. 그런 모자를 황실 스승과 문무백관 중에서 으뜸인 정1품 태사(太師)를 포함한 고관대작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주시 중. 환관들과 궁녀들은 없었다.


화의 근원은 정왕 주견신이었다. 며칠 전, 그날만 황후의 위임을 받은 태자가 주재 중인 조회에 주견신이 출현했고 모자의 입장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전하기 전 분위기는 친왕이 허락도 없이 어디를 감히 조회에 난입하는 것이냐며 따지는 분위기였지만, 주견신이 가져온 소식이 그런 분위기를 일소했다. 너무도 쉽게.


-금일 폐하께서 문안 중 명하신 바를 전하고자 왔을 뿐, 정사에 관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안심들 하시지요.

-문연각대학사 이현이옵니다. 황명이 무엇이었사옵니까?

-들어라! 황상께서 명하셨다.

-황상 명(命)!

-황후는 천추만세의 황후다. 죽은 뒤 마땅히 짐의 곁에 묻혀야 할 것이다.

-!!!!!!


예기치 못한 시점에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훗날 용상의 주인이 바뀌면 줄곧 눈엣가시였던 황후를 뒷방 퇴물로 만들어서 치워버릴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을 한때의 헛생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감히.




허옇고 풍성한 수염에서 연륜과 노회한 기운을 잔뜩 발산 중인 태사가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비 전하, 태자 전하. 송구하오나 그 문제는 이쯤에서 잊으셔야 하옵니다. 유훈이옵나이다. 또한, 정왕이 전달하였으니, 이는 불변이라 할 것이옵나이다.”


그에 분한 얼굴의 귀비가 날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압니다, 태사. 허나, 이 사람의 마음이 이리 분한데 어찌 쉬이 잊겠습니까. 이 원한을 풀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미력한 소신이 어찌 비 전하의 심경을 다 헤아릴 수 있겠사옵니까. 소신은 그저 비 전하께서 뒤집을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귀한 심력을 허비하시는 것은 아닌지 염려 또 염려 중일 따름이옵니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겝니까? 정녕?”

“그렇사옵니다. 황상께서 미령하신 가운데 남기신 유훈이옵나이다. 그를 정왕이 전하여 의심하는 자가 없사옵고 유훈이 법도와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사옵니다. 또한, 과거 선황의 유훈을 거역한 사례는 한 번뿐이옵니다.”


사례가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회가 동한 귀비가 얼른 물었다.


“누굽니까? 언젭니까?”

“환관이 정사에 관여하지 않게 하라, 태종 폐하께서 거역하셨사옵니다.”


태종은 번왕 시절부터 아비를 도와 변경을 수비하고 원(元)의 잔당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그러다 조카의 삭번(削蕃) 정책 즉, 번왕 말살 시도에 반발, 난을 일으켜 용상을 빼앗은 인물이다. 당시 혜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적은 수의 군대로 승리했고.


그 후 용상에 앉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아비의 그것과 비견되는 공포 정치를 펼쳤으나 대운하 완성, 교지 복속, 북벌, 제후국 확보 등등 여러 치적을 쌓았기에 재위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많은 이의 추앙을 받는 황제다.


그런 인물이기에 자그마치 개국 태조의 유훈을 거역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러고도 아무 문제 없이 재위를 마칠 수 있었던 것. 바꿔 말하면 그 정도 인물이 아닌 이상 선황의 유훈을 거역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


애초에 유훈을 거역하는 행위 자체로 커다란 불충이고 불효인데 유훈이 병중에 내려온 것이라면 더더욱 거부할 수 없다.


선황이 죽어가는 중에 내린 유훈을, 그것도 순장과 달리 도리로 보나 이치로 보나 흠잡을 데 없는 유훈을 거스른 자의 운명은 파멸이다. 불충불효를 떠나 육사신(六邪臣) 중 망국신에 이어 두 번째로 해로운 신하인 적신(賊臣)으로 여겨질 것이므로.


“아···!”


힘을 잃고 떨어지는 새처럼 허무한 탄식은 귀비도 그런 사정을 이해했다는 뜻. 황후 한 사람 눈앞에서 치우자고 아들이자 황제를 천하의 적신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집도 절도 다 태워 먹는 격이므로.


“하오니 소신이 충심으로 간언하건대 일단 그 일은 잠시 묻어두소서. 훗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알겠습니다, 태사. 고맙습니다, 이 사람을 깨우쳐주어서.”

“소신은 이미 알고 계신 바를 짚어드렸을 뿐이옵나이다.”

“허면, 그 문제는 어찌할까요?”

“그 문제라시면···?”

“호위.”

“아아, 정왕의 호종을 말씀하시옵니까.”

“그렇지요. 논의는 어찌 되었습니까?”

“금의위, 도찰원, 동집사창에서 한 사람씩 붙이기로 하였사옵니다. 애초에 친왕의 유람이 전례가 없는 일인지라 도찰원과 동집사창을 제할 명분이 없었사옵니다.”

“하는 수 없지요. 그리될 줄 알았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때, 오고 가는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던 주견심이 끼어들었다.


“어머니.”

“말씀하세요, 태자.”

“호종 문제 또한 관여하지 않는 게 어떨는지요.”

“태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관여하지 말자니요?”

“정왕은 만인이 보는 데서 유람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이가 용상에 욕심을 내고 아니 내고를 떠나서 이미 자격 없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견심의 말은 견신이 나랏돈 써서 여행이나 다니는 풍류객이 된 셈이고 그로 인해 어떤 면에서는 용상 후보자로서의 권위를 사실상 상실한 셈이니 애써 들쑤실 필요 없이 내버려둬도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유훈 발표로 인해 분노에 잠식되고만 귀비의 생각은 달랐다.


“태자, 어찌 그리 유약해지셨습니까? 지난번 폐하께 문책을 들은 일로 위축이라도 되신 겝니까?”

“어머니···!”

“태자의 오만방자한 이복아우가 그 흉험한 가슴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그이와 하늘만이 아는 일입니다. 여태 음흉하게 모두를 속이고 저를 숨겨온 것을 그 눈으로 보시고도 모르십니까? 유람이니 어쩌니 용상에 아무 관심 없는 척 세상을 속이다 태자의 용상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이리처럼 물어뜯을 잡니다. 그자는! 어미가 태자의 선한 성품을 모르는 바 아니나, 어찌 그리 순박한 말씀만 하십니까.”

“···송구합니다, 어머니.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풀이 죽은 아들의 얼굴을 답답하다는 듯이 일별한 귀비가 다시 태사를 돌아봤다.


“호위 문제는 이 사람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 사람은 아무래도 동집사창이 염려됩니다, 태사.”


지난번 순쟁으로 인해 환관 조직이 견신의 절대적인 지지 세력이 됐기에 걱정하는 것이다. 환관 하나가 나머지를 무용으로 만들 것을, 감시나 암살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그런 증거를 잡아서 거꾸로 타고 올라오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그 또한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신과 여러 대신이 제독동창을 만나보겠사옵니다.”

“잘해주셔요, 이 사람은 태사와 우리 대신들만 믿겠습니다.”

“그이도 지금쯤 머리가 복잡할 것이옵나이다. 용상의 주인이 바뀐 뒤에도 그이와 동집사창이 자리를 보전하고 싶다면 마땅히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야지요, 마땅히 그래야지요.”

“일단 정왕도 밖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옵나이다. 황상께서 미령하시니.”


천순제 주기진이 한두 달 안에 세상을 뜰 거라는 판단은 태의원 공통의 견해였다. 즉, 견신이 며칠 뒤 궁을 떠난다고 해도 아비의 장례를 위해 환궁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


“그렇지요. 허면, 궁 밖에서 손을 쓸지, 안에서 손을 쓸지, 손익을 따져봐야겠군요.”

“그렇사옵니다.”

“흐음···”


그처럼 귀비가 생각에 잠기면서 잠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


이윽고, 차 한두 모금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 전하, 황명이 있었사옵니다.”

“들어오라. 어서!”

“예이—!”


허락을 받고 들어온 환관의 표정은 지극히 무심해서 그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무엇이냐?”

“폐하께서 명년 태묘대제까지 정왕의 환궁을 불허한다며 명하셨사옵고, 아뢰기 진실로 황망하오나, 그 사이 폐하께서 붕어하시더라도 불허한다고 이르셨사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계시니 친왕은 필요치 않다고 하셨사옵니다.”

[!!!!!!]


환관이 보고를 마치는 순간, 귀비의 손이 잡고 있던 분재의 나뭇가지를 부러트렸다.


우둑—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주견심과 태사의 눈에 부러진 분재가 마치 신음하는 듯 떠는 모습이 들어왔고 그 떨림은 줄기를 움켜쥔 귀비의 손에서 시작된 현상이었다.


부들부들—


삼백 년 수령의 해송 분재는 뽑혀서 거름 신세에 놓일 것을 두려워하는 듯 틀어 잡힌 밑동을 세차게 떨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귀비에게 분재는 순쟁 이후 사사건건 이쪽의 생각을 예측하고 훼방을 놓는 황제 주기진일지도 몰랐다.




#




무(武), 무도(武道), 무예(武藝).

보통 무사들이 세 가지 이름 중 하나로 부르는 체계, 무사들이 몸과 마음을 쓰는 법을 평범한 사람들은 무공(武功)이라고 불렀다.


무공은 본래 전장에서 쌓은 공적을 의미하는 말인지라 무사들은 무공보다는 무도나 무예를 즐겨 썼다. 그도 아니면 공부.


지금의 무도는 신체 내에 기(氣)를 축적하고 이용하는 내공 즉, 안쪽의 공부와 신체를 이용하는 외공으로 구분돼 있었고 그중 외공은 그 시작 시기를 정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옛날에 시작됐지만, 내공은 시작 시점을 비교적 정확히 헤아릴 수 있었다.


중원에서의 시작은 소림 초조 달마가 열었다고 아는 이들이 많으나 이는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夫出少林) 즉, 천하의 모든 공부가 소림에서 시작됐다며 조종을 자처하는 소림이 당대의 세를 구가하는 과정에서 주장하고 널리 퍼트린 이야기다. 보리달마가 9년 면벽 끝에 깨달은 법문 즉 선종 불교의 역근과 세수, 두 진경이 시작을 맡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달마가 9년 면벽 중일 때 숭산 소실봉의 소림사는 문호를 열기도 전이었고 나중에 소림이 그를 중원 선종과 무도의 초조, 초대 조사로 추대했다.




중원에서의 시작은 그 달마보다 4백여 년 앞선 인물이자 도교 일맥인 오두미교의 창시자, 천사(天師) 장도릉이 열었고 그는 기(氣)를 통해 병을 다스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2백여 년 뒤, 포박자 갈홍이 나타났으며 그가 바로 태식의 법 또는 토납의 법이라고 불리는 호흡법 즉 기공법의 원형을 창시했다.


그랬으나 지금 역사를 연구하는 석학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대다수 무사조차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 까닭은 훗날 출현한 대종사들의 성취가 그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소림사 육조 혜능의 나한심공.

전진교 중양자의 현문정종내공심법.

무당파 삼봉진인의 태극도결.


등은 포박자 갈홍이 창안한 토납법과는 격을 달리하는 공부다.




아무튼 시작은 도가였고, 지금도 전진교와 무당파, 화산파 등 도교 무맥이 성세를 구가하는 만큼 수많은 종사가 도가 이론을 구심점 삼아 새로운 공부를 창안 중이었다.


지금 신비의 법당에 있는 견신처럼.




본존불이 내려다보는 거기 견신이 앉아 있었다. 눈 밑이 거뭇거뭇해지고 양쪽 볼이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얼마 전 이현에게서 주해서 삼 권을 얻은 견신은 맨 먼저 도덕심의주해를 선택했고 황제내경과 곁들였다. 황제내경을 통해 인체를 이해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기를 다루는 법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


토납법으로는 신체의 강건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번역하면 무병장수 외에는 쓰임새가 없다는 뜻. 토납법으로 쌓은 기는 단전에 모였다가 전신으로 흩어진다, 스며들어서 해당 조직을 강화하는 데 쓰인다.


반면 단전에 기를 남기는 문제와 그 기를 손이나 발에 모으는 문제 등은 완전히 다른, 아주 난해한 문제고 천하 각 방문파가가 심법을 비전으로 취급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특별한 방법으로 쌓은 기를 특별한 방법으로 손에 모은 뒤 외공을 전개하면 굉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맨손으로 손바닥 너비 돌을 쪼갤 때는 극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평소 단단하게 단련한 손으로 아주 짧은 순간 최대 힘을 가능한 좁은 면적에 투사하는 이치 등을 완벽하게 발휘해야만 했으나, 기를 이용하면 훨씬 더 쉽게 쪼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러기 위해서는 쌓은 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 단전 이외의 부위로 기를 이동시키고 모으는 것. 그리고 모은 기를 원하는 시점까지 유지하는 것. 그런 여러 가지 요건의 달성이 필요했고 그 달성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당대의 심법이었다.




아무튼 지난 사흘 동안 잠도, 식사도 거른 채 도덕심의주해와 황제내경에 매달렸다.


가장 먼저 달성해야 할 요건은 뭐니 뭐니 해도 쌓은 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 필요한 만큼만 무병장수에 활용한 뒤 나머지는 외공을 보조할 기운으로 남겨두는 것이고 이는 환생 후 줄곧 고심해 온 과제였다.


일단 도덕심의주해는 진짜였다. 다른 주석서와 달리 해석이 방대하고 직관적인 언어로 쓰였다. 애매모호 혹은 두루뭉술하게 서술한 문장이 거의 없었다.


그로 인해 처음 접했을 때, 금방이라도 심법의 창안에 이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고등한 심법을 창안한 이들이 대종사로 불리고,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은 이유를 몸소 체험 중이었다.


“길을 말할 수 있으면 늘 그러한 길··· 아니고.”


해답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생각은 좀처럼 합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동이 터오는 아침 호수 위 물안개처럼 흩어졌고, 늦가을 산등성이를 지나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 이것도 아니고···”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있지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며칠 잠을 거른 탓에 머리도 무겁고 눈꺼풀을 한껏 짓누르는 졸음에 더는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르겠다, 정녕. 일단 한숨 자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볼까.”


그에 순간, 지겨워져서 책 두 권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곤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처럼 견신의 목소리가 멈추고 이내 고요해진 법당.


[······]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삭풍이 법당 한가운데 화롯불의 열기를 가른 뒤 바닥을 쓸었다.


휘—이—잉—


그 바람이 가신 뒤, 견신의 배가 규칙적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꿈의 방문이었다.


꿈속의 견신은 곯아떨어지기 직전 모습 그대로 도덕심의주해를 읽고 있었다. 조금 전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같은 부분을 읽고 있었다.


“모르겠다, 정녕. 일단 한숨 자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볼까.”


그러다 똑같이 지겨워져서 도덕심의주해를 내동댕이치기 전, 문득 망막에 맺힌 두 글자를 보고 서책을 다시 움켜쥐었다.


강해(江海). 강과 바다.


“강과 바다···? 강과 바다.”


홀린 듯 두 글자를 되새기고 그 뒤에 이어서 서술된 주해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강과 바다가 온 골짜기의 왕이 되는 까닭은 그것이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사람 위에 있으려면 반드시 말은 낮추어야만 하며 사람보다 앞에 있으려면 반드시 몸은 뒤처지게 해야만 한다.”


강은 경락 즉, 기(氣)의 길.

기의 길들이 모이는 바다는 기의 바다(海). 즉, 기해(氣海).


기해는 단전의 이름이다.


성인은 기(氣)이고 천하는 신체. 말을 낮춘다는 것은 아래로 가라앉도록 무거워야 한다는 뜻이고 몸을 뒤처지게 해야 한다는 건 느려져야 한다는 의미.


“따라서 성인이 위에 있어도 사람들은 무겁지 않고, 앞에 있어도 사람들은 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가 밀어주길 좋아하면서도 싫증 내지 않는다. 그는 싸우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싸울 수 없다.”


즉, 군자의 말과 행동이 경망스럽지 않고 진중하듯이 기 또한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 그렇게 하면 기와 신체가 서로 다투지도 않고 또 다툴 수 없게 된다는 뜻. 기가 천하로 흩어지지 않고 바다에 머물게 된다는 의미였다.




심상(心想), 깊은 의식 속 산꼭대기 한 방울 물이 아래로 또 아래로 폭포를 이루고 계곡을 이루며 산을 내려와 강을 이루었다. 이내 벌판 사이로 흐르고 논밭을 나누며 고을의 경계가 되었고 영웅호걸들의 묘와 오래된 궁궐과 성곽까지 땅 위 모든 것을 지나서 거기 바다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운명이자 필연의 조우.

거대한 앎.

세계가 감춰둔 진실의 발견과 인식.

기를 바다에 잡아두는 이치. 단전의 이름이 기해(氣海) 즉, 기의 바다인 까닭의 온전한 이해.


애초에 드러누운 적이 없었던 견신의 몸이 잘게 진동하고 미세하게 떠올랐다. 마찬가지 내동댕이쳐진 적 없었던 책도 견신의 손아귀에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깨달음이었다.




#




며칠 황궁을 에워쌌던 삭풍이 가신 밤. 신비의 침궁에 견신을 비롯한 오 남매가 모두 모였다.


신비의 너른 침상에 나란히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 그런 가족을 환관들과 궁녀들이 앉아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는 견신과 환관들 그리고 궁녀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입궁 전 자연스럽게 경험한 환관들 궁녀들과 달리 가족에겐 최초의 경험이었다. 가족 모두 같은 공간에서 자는 것이.


물론, 환관들과 궁녀들도 입궁한 이래로는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나라 그것도 황실에서 지금과 같은 풍경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두 출가 전 과거를 회상하며 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을 보며 아련한 또 따뜻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밤은 마지막 밤이다. 해가 뜨면 견신은 황궁을 떠난다. 그런 견신이 마련한 밤이다. 며칠 전부터 신비와 남매들에게 다 같이 자자고 한 것.


이 밤의 목적은 이별의 충격과 슬픔의 조기 해소였다. 친형의 이별 당시 신비가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지켜봤던 견신이 어떻게 하면 그 슬픔을 덜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수를 낸 것.


덕분에 신비도 남매들도 준비된 상태였다. 견신을 마치 여행 다녀오는 가족 대하듯 웃으면서 떠나보낼 준비가.


둘째 아들의 기발한 생각 덕분에 지난 며칠, 너무도 행복한 밤을 보내고 있는 신비가 문득 견신을 찾았다.


“정왕.”


천장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 기색이 조금 전의 그것과 다소 다른 빛이었다. 어딘가 아련한 혹은 애달픈 빛.


“예, 어머니.”

“···요즘도 꾸십니까···?”


조심스레 무엇을 꾸냐고 묻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모두가 웃던 것을 멈추고 주목했다. 신비는 견신이 출생 후 밤마다 겪어야 했던 악몽의 나날들. 그 고통의 체험이 종식되었냐고 물은 것이다.


“아닙니다, 어머니. 심려 마세요. 한참 됐습니다. 소자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잊었나 봅니다.”


견신이 대답을 마치기가 무섭게 남매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제 병이 나은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와아—]

“형님! 이제 다 나으신 거예요?”

“오라버니! 감축드려요! 어머니, 이제 걱정 놓으셔도 되겠어요. 오라버니 다 나았다잖아요.”


신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남매들과 달리 견신을 보지 않고 천장을 보는 그대로 애써 웃는 기색이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정왕.”


속 깊은 둘째 아들이 어미를 위해서 거짓을 말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매일 밤 고통을 견디며 종종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실을 어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생애 가장 즐겁고 또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신비의 눈물고랑에 투명한 방울이 영글다가 이내 꼬리를 늘이며 떨어졌다.


또르르—




이별전야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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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화 +23 24.08.20 8,871 360 18쪽
31 30화 +21 24.08.16 9,430 412 16쪽
30 29화 +20 24.08.15 9,012 456 21쪽
29 28화 +29 24.08.13 9,354 349 21쪽
28 27화 +23 24.08.12 9,090 373 20쪽
27 26화 +25 24.08.09 9,354 422 20쪽
26 25화 +20 24.08.08 9,775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68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31 369 21쪽
23 22화 +23 24.08.02 9,659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5 367 18쪽
21 20화 +15 24.07.31 10,108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4 440 18쪽
» 18화 +16 24.07.29 10,414 409 21쪽
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17 16화 +16 24.07.24 10,540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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