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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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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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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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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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DUMMY

23화




정확히 언제 어느 시점에 깨달았었는지 이제는 흐릿했다. 초광(初光). 첫 번째 빛살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면서 시작된 생(生), 삶. 삶의 시작은 첫 번째 빛살 같았다. 어두컴컴한 새벽을 밀어내는 여명이었고 색색 물드는 하늘과 지평선 그 경계로 방금 막 어미의 자궁을 벗어난 갓난아이의 그것처럼 빨간 얼굴을 드러내는 태양이었다.


그 경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한줄기 긴 선으로 망막에 꽂히는 첫 번째 빛살이었다. 인지할 새도 없이 꽂히는.


그렇게 태어남과 함께 삶이라는 고통이 시작됐다. 출생의 순간 아이가 우는 까닭은 기뻐서가 아니라 무사히 산도를 통과하여 어미를 만나서가 아니라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


아무튼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마주하지 않아도 됐을 또 감당하지 않아도 됐을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오직 하나의 이유, 태어났다는 이유로.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고 고통의 연속이었다. 고된 농사일, 메뚜기 떼, 홍수, 가뭄이 망쳐버린 농사. 가족과의 이별,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버릴 것만 같은 혹한과 끝없는 행군, 기약 없는 전투와 영구적인 부상 그리고 전우의 죽음 등등. 고통이 수시로 태양과 달처럼 찾아들었다. 날마다 또 날마다.


그리하여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인지하기도 전에 거행된, 찰나에 발생한 태어남이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요 시점이라는 진실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의 이름이 초광이었다.


태양이 날마다 그 어느 순간 첫 번째 빛살을 쏘아내듯 전신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찰나에 시작하고 완료하는 것. 또한 그 빛살은 보는 이가 세상 어디에 있든 직선으로 또 최단 거리로 날아든다.


그처럼 상대가 인지하기 전에 다가서고 그 이전에 물러서며 더 이전에 베고 찌르는 것. 그리고 나와 상대의 최단 거리를 취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무예의 이치 중 하나, 빠름으로 함축되는 쾌(快)의 요체다.


물론 그러한 수축과 이완을 깨달은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전생의 이름과 육신의 특성까지 고스란히 안고 다시 태어난 주견신만이 가능한 기예다. 불가사의한 근력을 타고난 주견신만이.




그처럼 견신의 하반신 대퇴근 비복근이 일제히 수축하고 이완하면서 상반신을 다시 선실 안으로 들여놓았다. 선실 입구를 에워싼 자객들의 칼이 포위를 완성, 거리를 좁혀오기 전에.


마치 빛살처럼 다가와서 아주 짧은 순간에 소이신천의 정중 흉골을 부수고 심장을 찢어놓았듯 순식간에 다시 물러나는 견신.


[!!!!!!]


그에 자객들의 칼은 허공을 가를 뿐, 목표에 닿지 못했고 그런 허무한 몸짓의 끝은 분노와 조바심의 촉발이었다.


견신의 가공스러운 수법도 수법이지만, 일 합(合)에 지휘자를 잃은 나머지 경악한 자객들은 이성에 의한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물러서는 견신을 쫓아 선실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 조금 전의 참사를 까맣게 잊은 채로.


결과는 또 한 번의 살육이었다. 오른발 뒤꿈치를 이용, 후진을 멈춘 견신이 곧바로 허리를 바닥에 닿을 듯 접으며 돌진했다. 그의 목표는 자객들의 칼 아래 하단.


하반신을 파고드는 동시에 기여를 좌우 대각으로 휘둘렀고 이내 그물처럼 촘촘한 검격이 칼과 육신을 다시 한번 해체하고 분쇄하기 시작했다.


“커헙—”

“으그극—”


무릎부터 골반에 이르는 하반신 어딘가를 기여에게 내준 자객들이 추수 날의 수숫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견신은 직전과는 달리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는 자객들의 육신을 피하고 또 짓밟으며 순식간엔 선실 입구를 돌파했다.


선실 입구에서 반박자 뒤늦은 공세를 준비하는 자객들을 앞서 베는 동시에 복도 벽 위쪽에 횃불들을 껐다. 완전한 암흑 속에서 견신은 화살로 화했다. 대퇴 근육부터 발목 뒤꿈치 근육까지 극한의 수축 후 이완시키면서 화살처럼 쏘아졌다.


그에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법한 너비의 복도에 줄지어 있던 자객들은 한 번에 둘 혹은 넷씩 쓰러졌다. 동료의 시신을 가르고 나타나는 검 끝에 사지육신을 내주었다.


“꺼걱—”

“끄으—”


자객들은 동료 하나 혹은 둘이 앞을 막고 있는 탓에 그 뒤에서 어떤 조력도 하지 못했고, 견신의 왼손에 들린 기여는 궤적에 놓인 모든 것을 무참히 베고 부쉈다.


그렇게 복도에 있던 육신들 전부 차례차례 해체됐고 불과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쉴 시간 만에 시신 열다섯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골반이 통째로 갈려 나간 사람이나 허벅다리가 쌍으로 절단된 사람은 옆에 숙련된 의원이 대기하고 있다가 곧바로 치료를 시작한다고 해도 살 수 없다. 굵은 동맥이 여럿 잘렸고 잘린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기 때문. 늦어도 숫자 서른을 세기 전에 의식을 잃게 된다.


“흐으···”

“으···”


그저 누운 채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몸속 뜨거운 것의 흐름을 느끼며 차 한두 모금 마실 시간이 흐르면, 이내 숨이 멈추고 영원한 어둠이 찾아오는 것이다. 죽음이.


[······.]




뜬 눈으로 죽은 소이신천과 수하들의 시체 한가운데 숨소리마저 멈춰버린 암흑 속에 견신이 홀로 또 외롭게 서 있었다. 암흑 속 덩그러니 서 있는 그의 어깨 위로 더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




이윽고 선실로 돌아온 견신이 종청산의 아내를 뒤주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여인의 웃옷을 찢었다. 종청산은 얼른 횃불을 들고 왔고.


조금 전 선창에 대기 주변을 경계 중이던 자객들이 뒤늦게 선실 칸으로 올라왔으나 곧바로 도주했다. 복도에만 열 이상이 누워 있는 광경을 보고는 상황을 판단, 달아난 것.


평소 지고 다니던 목곽 안에서 더 작은 목곽을 꺼낸 견신은 주먹 크기의 병 하나를 다시 꺼내면서 뇌까렸다.


“위치가 좋지 않습니다.”


종청산의 딸아이가 듣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아이를 어쩔 시간이 없었다. 여인의 등을 뚫고 배로 삐져나온 칼날이 큰 장기나 혈관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즉, 칼날이 더 큰 출혈을 막고 있는 셈이고 이미 피를 많이 흘렸으니 지금 당장 의식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돕는다면, 여인과 주견신 모두를.


전투 중 발생한 부상의 처치를 주로 다루는 전장 의술은 전생 시절 익혔다. 17년 동안 전장을 떠돌면서 자연스럽게.


찔린 상처, 자상.

베인 상처, 창상.

그리고 골절 등 주요 부상과 일부 풍토병 등의 처치를 익혔다.


그러한 전장 의술과 운이 따라준다면 주견신은 여인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여인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얕은 숨을 가쁘게 내쉬는 여인이 응급처치를 준비하는 견신과 종청산 그리고 딸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힘겹게.


딸아이의 눈을 지아비의 손이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사로 위장한 줄만 알았던 소년. 그러나 놀랍게도 숨 몇 번 내쉴 시간에 인간 도살자처럼 자객들을 도륙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빼도 죽고 빼지 않아도 마찬가집니다. 빼고 핏줄을 막아보는 수가 있겠으나 오장육부가 다쳤다면··· 실력 좋은 의원이 여기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칼을 빼고 핏줄을 잡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인···!”

“엄마! 영아의 엄마 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엄마—아— 나도 볼래— 영아도 볼래— 아빠—아—”


눈을 가린 아비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버둥거리는 딸아이. 하나뿐인 딸의 울음을 들은 종청산과 아내의 두 눈에 큼지막한 눈물방울이 맺혔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일단 고통부터 줄여드리겠습니다. 부인, 힘드시겠지만 이것을 좀 삼키십시오.”


견신이 목곽에서 꺼낸 것은 앵속(罌粟). 양귀비의 즙을 모아 굳힌 것이었다. 그를 물에 개어 여인의 입에 넣어주자 약효가 퍼지면서 고통을 감내하던 여인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행여나 그 표정이 오해를 낳을 것을 염려한 견신이 곧바로 덧붙였다.


“앵속입니다. 앵속 덕분에 고통을 못 느끼는 겁니다. 나은 게 아닙니다.”

“부인··· 부인···”


그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사리 내릴 수 없는 결정을 앞둔 종청산이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흐느끼는데 문득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가, 흐으··· 영아··· 잘 키··· 쿨럭···”


곳곳이 구멍 난 문장이었지만 종청산은 듣는 순간 알아들었다. 지난 십수 년 살을 맞대고 이 세상의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반려가 하려는 말을, 그 애달픈 말을 지아비가 어찌 모르겠는가.


종청산의 눈에서 서글픈 눈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턱으로 바닥으로.


툭—


반려가, 아내가, 딸아이의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려 한다. 못난 사내 종청산과 하나뿐인 보물, 딸아이의 곁을 떠나려 한다.


종청산이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겠노라며, 종청산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 하자며, 물 한 잔 떠 놓고 천지신명께 맹세하며 약속한 여인이 그 길을,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길을 떠나려 한다.


아내와의 이별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이런 이별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경우에서 종청산과 아내는 정답게 늙어 있었다. 하루쯤 누가 먼저 가고 하루쯤 누가 늦게 가는 차이만 있을 따름이었다.


가엾게, 지켜보는 사람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쁜 숨을 헐떡이는 아내, 사랑하는 이의 뺨을 쓰다듬고, 힘없이 늘어진 두 손을 모아쥐었다.


“부인··· 열여섯에 못난 사내에게 시집와서 참으로 고생 많았소. 입신양명이 다 무슨 소용이라고 종일 붓만 잡고 있는 샌님에게 시집와서 이 고생 저 고생 온갖 고생을 하느라 진실로 애썼소. 내가 잘못했소, 내 잘못이오, 부인. 이리 늦게 급제한 내 잘못이오. 이 내가 다 잘못했소.”


그러는 과정에서 제 눈을 가린 손이 사라지자 아이가 얼른 뒤주 위로 기어 올라왔다.


“엄마— 엄마—아—”


그러고는 사랑하는 어미 몸을 무참히 뚫은 칼날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아아—”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선실 복도에 메아리쳤다.


“가···가··· 소첩은 가가와 영아 덕분에 행복··· 쿨럭— 이리 먼저 가서 미···”

“걱정 마시오, 부인. 내 우리 영아 잘 키워서 훌륭한 사윗감 찾아주고 가리다. 부인, 혼자 가는 것 아니오, 내 훗날 찾아갈 것이오, 반드시.”

“가가··· 손··· 영아를 만··· 흐으···”


얼른 아내의 손 하나를 우는 딸아이의 얼굴로 옮겨 주었다. 서럽고 또 아프게 미약해진 힘이 느껴졌다. 열 달 배 아파서 낳은 아이를 생애 마지막으로 만져보고자 하는 의지가.


“영아··· 엄마가 미···안··· 아빠 말씀 잘 듣고··· 나중에 멋진 사내 만나서···”


그때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칼을 뽑아봐야 한다며 생각 중이던 견신은 불현듯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


거기 선주와 선원들 그리고 그들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낮에 봤던 미남 사내와 무사로 추정했던 남녀가.


“······.”


그들이 가린다고 가렸겠지만, 감춘다고 감췄겠으나 사람들 사이사이로 병기 일부가 보였다. 그게 도검이든 창이든 뭐든.


저 셋이 북경에서 보낸 이들인가. 이 난리 통에 저들만 살아남았으니 십중팔구다. 다른 무사가 모조리 죽고 저들만 살았다면 확실이다.


저들이 머무는 객실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다. 선실 가장 첫 번째 객실. 갑판에서 올라오면 첫 번째로 보이는.


사실, 저들이 나설 거라고 믿었다. 객실의 위치상 자의든 타의든 불청객들과 엮일 거고 놈들을 처리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하면 저들 정체가 드러나겠지만 그럼에도 나설 거라며 확신했다. 동창과 금의위는 궁 밖에서 배곯던, 평범한 백성 출신이 대부분. 따라서 백성을 연민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고, 도찰원은 천하의 불의를 감찰하는 조직이므로.


그래서 당연히, 마땅히 나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성은 언제나 공(公)이고 관리의 입장은 늘 사(私)이므로. 선공후사(先公後私). 무릇 관리의 행보는 늘 공이 먼저고 사가 나중이어야만 하니까.


그러나 결과는 보다시피. 자객들이 저들을 그대로 통과해서 맨 안쪽 선실까지 밀려들었다. 아이의 어미가, 무고한 백성이 맞지 않아도 되는 칼을 맞았다.


이는 뭘 의미하는가. 저들이 나서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저들이 백성의 위기, 환난을 알고도, 짐작하고도 방치했음을 시사한다.





바로 같은 순간 세 호위는 그런 견신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짙은 분노를 머금은 눈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횃불이 마치 황룡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분노에 찬 울음을 토해낼 황룡처럼.


흠칫—


그에 저들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그때 싸늘한 얼굴의 견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겨울 서리보다 차가운 냉기를 발산하는 음성이 고막과 접촉했다.


“개살구들이군. 시체나 치우라.”


그처럼 짤막하게 말하고는 그 이상은 볼일 없다는 듯 냉정하게 고개를 돌린 견신이 다시 종청산에게 주문했다.


“늦기 전에 시도해 봐야 합니다.”


그러자 조금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눈 부부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끄덕—


둘 다 젖어서 퉁퉁 불어 있는 얼굴들을 보고 마주 고개를 끄덕여준 견신이 목곽 안에 들고 있던 병 두 개를 꺼냈다.


그중 하나는 곧바로 마개를 연 뒤 안에 든 액체를 여인의 배와 그의 손에 뿌렸고, 한순간 아주 강한 주정의 향기가 흥건한 피 냄새마저 짓누르며 피어올랐다.


곧이어서 종청산도 그의 아내도 모두가 예감한 바로 그 찰나 견신이 여인의 복부를 관통한 칼을 천천히 또 심혈을 기울여 뽑았다.


쑤—욱—


그에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긴장이 폭발한 나머지 헛바람을 집어삼킬 때, 뽑은 칼을 내던진 견신이 얼른 여인을 눕히고는 손가락을 벌어진 상처로 쑤셔 넣고 찾기 시작했다. 잘린 혈관을.


직전까지만 해도 앵속의 도움을 받아 편안했던 여인의 얼굴이 엄습하는 격통에 일그러졌다. 세차게 떨리는 그녀의 두 손을 종청산과 양쪽에서 딸아이가 나누어 쥐고 있었다.


부르르—


맞잡은 손의 핏기가 사라지도록 서로를 강하게 움켜쥔 일가족. 혈관을 찾는 와중에 그 손들을, 그 처절한 인내와 그 애타는 갈망을 확인한 견신의 가슴이 타들어 갔다.


여인의 간이 찢어졌고 그 간으로 들어가는 혈관이 잘렸음을 손의 감각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얼른 혈관을 잡은 뒤 다른 손으로 연근과 조개, 갑각류 등을 갈아서 만든 지혈제가 든 병을 거꾸로 들고 들이부었다.


천우신조, 하늘이 도왔다. 예상보다, 기대보다 일찍 찾았다. 그래서 어쩌면, 정말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치솟는 통증을 한 번 더 제압해 줄 약, 앵속이다.


“잡았습니다. 거기 앵속이라 쓰인 병이 있을 겁니다. 한 알만 꺼내주십시오. 서두르셔야 합니다.”

“······.”


그런데, 지금 몹시 급박한 상황임을 잘 알 텐데도 종청산이 답답하리만치 곧바로 반응하지 않으니 마음이 다급해진 견신이 언성을 높였다.


“어서! 물에 개서 얼른!”


그런 문책성 재촉에 대답 대신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웃으며 견신의 손을 잡아 오는 종청산.


“···무사님.”

“······?”


그를 견신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종청산이 굵은 눈물 두 방울을 떨구며 대답했다. 아니, 눈짓으로 가리켰다.


스윽—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 잠든 듯 눈을 감은 아내의 얼굴, 기어이 지아비와 아이 곁을 떠나고만 아내의 얼굴을.


그 눈짓과 고갯짓에서 여인의 죽음을 느낀 견신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고 그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


먼저 종청산과 딸아이가 잡은 손. 더는 떨리지 않는 가족의 손을 보고 다음 여인의 가슴을 보았다. 더는 율동하지 않는 가슴을.


마지막으로 목덜미를 보았다. 거기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꿈틀거려야 할 핏줄이 박동을 멈춘 모습이었다. 죽었다. 결국 죽고 말았다.


한순간에 맥이 풀려버린 견신의 손이 천천히 여인의 뱃속을 빠져나왔다. 그런 뒤 피를 닦아내기 위해 준비해 둔 천 뭉치를 돌연 집어 던졌다.


탁—


분노, 자책, 안타까움 등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폭발한 것.




종청산이 그런 견신의 속내를 이해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아주 천천히 엎드렸다.


스윽—


정중하게 또 경건하게. 선비다운 몸가짐이었다.


“무사님··· 이제 되었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못난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아내는 금일 무사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어, 엄마— 엄마—아— 아아아아—”


그를 신호로 터져버린 아이의 대성통곡 뒤로 견신이 차마 종청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나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어찌 사과하십니까. 행여 자책도 마십시오. 금일 무사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소인과 딸아이는 아내와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내의 죽음은 무사님 탓이 아니라, 소인 탓이고 또 악적의 소행입니다.”

“······.”

“종 모는 그저 무사님의 은혜가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입니다. 금일 종 모가 하늘의 도움으로 무사님 같은 강호의 협객을 뵐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고맙습니다, 대협.”


그 말을 끝으로 영원한 잠에 빠진 아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서럽게 우는 딸아이를 끌어안는 종청산. 그를 보는 견신은 이내 쓰러지듯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


잠시 그렇게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손톱 사이 더운 피가 묻은 손을 보다가 읊조리기 시작했다. 불현듯이.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요체가 되는 불타의 가르침.”


전생 시절부터 죽음을 극복해야 할 때마다 몇 번이고 외우던 경문이었다.


“!!!!!!”

“사리자여,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불현듯이 세상에 나와서 선실을 채우는 낮고 두터운 목소리, 장중한 운율과 온갖 고통을 건넌다는 대목에서 종청산의 마음속 둑이 무너졌다.


“크흑! 부인, 부이—인—!”

“무명(無命)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어찌 이리 가오, 이 나를 두고 어찌 이리 가오. 이리 어여쁜 딸아이마저 두고 어찌 이리 가오. 백년해로는 어찌하고 홀로 그리 멀리 가오. 딸아이 시집 가는 날 못난 홀아비 혼자 어찌하라고 그리 나를 떠나오. 돌아오시오, 돌아와.”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나와 어린 영아는 어찌하라고 이리 먼저 가오. 가지 마오, 제발 가지 마오. 예서 백년 기다릴 테니 어서 돌아오시오. 크흑!”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마지막 구절에 가서 견신의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아졌고, 죽음의 허무와 비탄이 파도처럼 밀려와 오래전에 지친 그의 영혼을 다시금 침식하기 시작했다.




낮에 멀미약을 준 소녀의 어미가 죽었다.

코 앞에서, 간발의 차이로.




#




잠시 후, 습격 당시 상회 소속 무사가 쏘아올린 신호 화살을 본 주변 배들이 신고했고 인근 백호소(百戶所)가 달려왔다. 일대 운하의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였고 보다시피 천진 턱 밑은 수적 입장에 어설픈 노략질을 시도할 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조운선은 임시 나루터에 멈춘 상황. 죽은 선원들과 무사들 그리고 자객들의 시체가 나란히 갑판 위에 놓였고, 그를 백호소 지휘관 정6품 백호가 확인한 뒤, 선주로부터 자초지종을 청취하는 중이었다.


상황 발생 후 선주실에 숨었던 선주가 전후 사정을 알 턱이 있나. 횡설수설 얼버무릴 따름이었다.


“···배를 노린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도 목숨을 건졌음에 안도하는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선적한 물건 중 목숨을 걸고 탈취해 갈 만한 물건은 없었다. 북쪽에서 나는 특산품들이 대부분이니까. 수레로 실어 나르면 모를까, 사람 몇이 들고 가서 천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서른 줄 젊은 백호가 목록을 접으며 물었다.


“물목은 이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천진 바로 밑에서 노략질할 물목이 아닌데.”

“소인의 말이 그 말입니다, 대인.”


결론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노리고 왔다는 건데, 생각이 거기 이르자 그들이 떠올랐다. 흑의 소년과 그의 선실에서 본 가족이.


그때 선실에서 막 나왔을 때 보았지 않은가. 자객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자빠진, 시체 절반이 선실에, 나머지 절반이 선실 앞 복도에 나자빠져 있는 광경을.


“대인, 하나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이는 필시 흑의 소년 혹은 그가 지킨 가족에게 해답이 있다는 의미일 터.


“수상한 소년 무사가 하나 있습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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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7화 +16 24.08.30 8,226 365 18쪽
37 36화 +19 24.08.29 8,539 392 21쪽
36 35화 +13 24.08.27 8,479 385 19쪽
35 34화 +9 24.08.26 8,509 356 23쪽
34 33화 +17 24.08.23 8,867 407 20쪽
33 32화 +14 24.08.21 8,803 359 20쪽
32 31화 +23 24.08.20 8,872 360 18쪽
31 30화 +21 24.08.16 9,430 412 16쪽
30 29화 +20 24.08.15 9,013 456 21쪽
29 28화 +29 24.08.13 9,356 349 21쪽
28 27화 +23 24.08.12 9,091 373 20쪽
27 26화 +25 24.08.09 9,354 422 20쪽
26 25화 +20 24.08.08 9,776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70 406 20쪽
» 23화 +19 24.08.05 9,532 369 21쪽
23 22화 +23 24.08.02 9,660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5 367 18쪽
21 20화 +15 24.07.31 10,109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4 440 18쪽
19 18화 +16 24.07.29 10,414 409 21쪽
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17 16화 +16 24.07.24 10,540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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