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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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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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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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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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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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DUMMY

19화




저 멀리 동이 트는 중이었다. 하늘이 파랗다가 붉어지고 이내 노랗게 칠해지듯 변해가다 어느 한순간 첫 번째 빛살과 함께 태양이 빨간 얼굴을 드러냈다.


그 첫 번째 빗살의 과녁은 동화문(東華門). 자금성의 동문이었다. 어른 신장 두 배 남짓 높이의 문이 닫히면서 묵직한 진동과 소음을 과시했다.


쿵——


낮고 육중한 소리가 마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며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고, 성벽 안 그늘로 자취를 감추는 암적색 문의 마지막 모습이 경고의 섬찟한 느낌을 더했다.




견신은 배웅도 없이, 환송 행사도 없이 홀로 내정을 지나 외조를 떠났다. 이는 견신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황제 주기진과 조정이 계획한 바이기도 했다.


정식 호종 행렬과 동행하지 않은 친왕.

제국 통치에 반하는 개인과 집단 등 사특한 의도를 가진 이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므로 오늘의 출궁을 비밀에 부친 것. 하다못해 간 큰 도적무리의 목표물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런 맥락에서 견신은 화려한 비단옷 장신구 대신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흑곰 털가죽을 걸치고 안쪽에 흑색 도포를 입었다.


황궁에서는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긴 흑발을 쇄골 아래로 늘어트렸고, 등에는 사슴 가죽으로 방수 처리한 목곽을 멨다. 당가주 당벽호가 선물한 검 기여는 오른손에서 동행했고.


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볼 수 있고 빈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떠돌이 무사의 차림새. 제국 친왕이 평범한 무사로 변모한 것이다.


견신은 마치 산책하듯 천천히 동화문을 벗어났다. 지켜보는 이는 성곽 수비를 맡은 금의위 정병들뿐. 금빛 갑주로 무장한 그들은 사전 명령받은 대로 어떤 예법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볼 따름.




이윽고 해자 위 놓인 다리를 완전히 건너기 전 문득 멈춰선 견신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경건한 몸가짐으로 아주 천천히 눈밭에 엎드렸다.


한 번···


또 한 번···


그 언제 다시 찾을지는 모르지만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승을 떠났을 것이다. 어제 아침의 문안이 부자의 마지막 만남 이승에서의 마지막 조우였을 것이다.


어제 아버지는 유언으로, 길 떠나는 아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로 노파심을 선택했다.


-짐이 거듭 말하거니와 아무도 믿지 말아라.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것으로 되었으므로 너 이제 아비도 믿지 말아라. 아비의 죽음이 제국 강역을 벗어날 때까지는 절대 환궁하지 말아라. 이는 명이다. 자유롭게 살아라. 어디에도,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아버지, 견신의 두 번째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 어느 날, 아무도 모르는 밤에 가겠나이다. 달 없는 밤 칠흑처럼 어두워 눈물조차 발각지 아니할 밤에, 그리도 적적하고 외로운 밤에 찾아가겠나이다.


천하를 떠돌며 보고 들은 경물들의 이야기 이 가슴에 가득 안고 또 쌉싸름한 위로로 범부의 고되고 고된 삶을 어루만지는 술 한 병 들고 찾아가겠나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번···


“내세에는 범부의 자식으로 오셔서 흔하디흔한 복락을 누리시고 천수를 누리시기를.”




그 모습을 저 위 누각에 선 금의위 정병들이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중 몇은 무심코 무릎을 꿇으려다 상관의 제지를 받은 뒤 부동자세로 돌아갔다. 어딘가 분명 황궁을 주시 중인 눈들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 눈에 정왕이 특별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므로.


그러면서도 견신의 절이 어떤 의미를 내포한 행위인지 또 누구를 위한 전송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깨닫고 또 느끼고 있었다.


저 아래 소년이 차디찬 눈밭에서 일어서지 않고 오랫동안 엎드려 있는 까닭을. 서너 장(丈) 아래 소년의 등이 조금씩 들썩이는 듯 보이는 까닭을 어찌 모르겠는가.


정왕 주견신이여, 비운의 친왕이여.

부귀영화와 무사안일 대신 무사의 길을 선택한 황자여.

이 끝없는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 동지여.

대명제국 금의위 일동은 같은 무사로서 기원할 따름이다.


소년이여!

그대 그 가슴이 지향하는 이상에 도달하기를!

귀하! 기어이 검을 깨닫기를!




견신은 그렇게 황궁을, 집을 떠났다.

그 겨울, 동이 트는 아침에.




#




잠시 후, 황궁을 벗어난 견신은 빠르게 걸었다. 거기 성곽 너머에 남은 것들 또 존재들을 당분간 기억 속 구석에 묻어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멀어짐을 서둘렀다.


완만하게 오르고 내리는 구릉들 위로 설원이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백여 년 전 이이를 따라서 마을을 떠나던 그날 본 풍경처럼.


그런 기시감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후벼팠으나 백년이라는 세월만큼 낡고 무뎌진 마음은 생채기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저 묵묵히 견딜 따름이었다.


입술이 머리칼 사이로 뱉어낸 숨이 찬 공기와 만나서 부서졌다. 이내 입 주변에 얼어붙었다가 녹기를 반복했다. 그 숨이 미처 챙기지 못한 말을 다음 숨에 실었다.


“천··· 하···”


백십수 년 만에 만나는 천하. 막막한 세월이 흘렀으나 시선을 잡아 끌만큼 변한 건 없어 보였다. 세상은 그 시절 겨울처럼 여전히 새하얬다. 마음까지 시리도록.


굳이 변한 것을 찾자면 그때보다 번화했다는 점. 그러나 그건 태종이 남직례에서 북직례로 도읍을 옮겼고 도읍의 번성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지라 그리 대단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황궁 주변에 모여든 가택들과 수많은 굴뚝에서 쉼 없이 솟아오르는 연기.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사람의 인기척 소리가 반가운 까닭은 왜일까. 황궁에서도 늘 보고 들은 것들인데.




아무튼, 방향은 남쪽으로 잡았다.


“일단은 남쪽인가.”


동서남북 중 남쪽인 이유는 고향이 남쪽이기 때문. 어디부터 들를지는 재작년 태묘대제 그 당시 서배전을 들렀을 때, 그때 이미 정해뒀다. 전생의 나와 고(鼓). 그 둘에게 먼저 가보기로. 후손의 소식도 수소문해 보고.


산동성 제남의 덕왕부를 들리는 것은 미뤘다.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지금 유례없는 친왕이 된 정왕 주견신에게 당분간 황궁의 관심이 쏟아질 거고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고 감시할 터. 따라서 첫 번째 목적지도 특별하게 해석할 거고 단순한 형제의 상봉에 온갖 해괴한 의미 부여를 해댈 터다. 특히 이쪽을 사사건건 트집잡고 싶은 세력이라면 더더욱.


정왕이 출궁 즉시 만사를 제쳐두고 덕왕부부터 찾는다면 귀비와 태자를 추종하는 세력이 감시를 강화할 명분으로 삼을 터. 그러니 우선 고향을 들르고 사천을 거쳐서 돌아오는 길에 덕왕부를 찾는 편이 보다 안전해 보였다.


형이 알면 조금 섭섭해하겠지만 형은 이해하고 기다릴 것이다. 형은 총명하고 또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이윽고 가택들이 줄줄이 늘어선 거리에 들어선 견신은 지금 막 얼굴 혹은 뭔가를 씻은 물을 길가에 내다 버리는 중년인과 낡은 객잔을 발견, 그쪽으로 다가갔다.


“대가(大家), 말씀 좀 여쭈겠습니다.”

“음···? 못 보던 인물인데 사람이 싹싹하구···!”


잠이 덜 깬 아침에 대가라는 경칭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던 사내는 견신의 오른손에 들린 거무튀튀한 물건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기함했다.


“헛! 송구합니다, 무사님! 무, 물으십시오.”


대충 보고 눈길 헤집는 데 쓸 지팡이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검이었다. 검집도 없는, 기이한 모양새의.


무사는 역병이나 천재지변 같은, 재앙스러운 존재였다. 호환(虎患)보다 두렵고 또 공포스러운 존재. 호환은 예측할 수 있고 회피할 수도 있으며 대비할 수도 있고 쉽지는 않은 일지만, 호랑이를 처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사는 예측부터 불허하니 회피는 물론 대비도 처치도 불가능한 존재였다.


범부의 시각에는 사과 한마디로 끝낼 일을 이유로 사생결단을 내기도 하고 명예를 더럽혔다거나 모욕을 줬다는 이유로 자결을 강요하거나 몰살을 주고받는 사례가 허다했다.


그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그 풍파에 휘말려 죽은 목숨값을 보상하거나 부서진 집기를 변상하는 일은 기적처럼 드물었다.


그런 무사가 두렵고 공포스러운 존재인 이유 중 첫 번째는 그들의 능력이었다, 하늘이 부여했다는 능력. 천능(天能).


백정이 도끼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때려잡는 소나 돼지도 무사는 별다른 준비 없이 한 방에 때려잡았다. 고수만 가능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어쨌든 호랑이를 홀로 그것도 덫이나 다른 수단 없이 칼 한 자루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무사뿐이었다.




선비, 농부, 장인, 상인, 천민 순인 풍조가 무사에겐 무·사·농·공·상·천이었다. 무사가 황실을 제외한 인간의 여섯 부류 중 으뜸이라는 것. 그만큼 콧대 높고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존재였다.


특히 소림사나 무당파 같은 유명한 방문파가 소속 무사들은 지방관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만큼 세도가 당당했고 승려와 도사임에도 평범한 수행자들과 달리 백성들의 상전처럼 행동했다.




아무튼, 눈앞의 소년 검사가 위장, 그러니까 가짜 무사일 수도 있다. 무사로 위장하고 그게 먹히면 세상사 편해지는 게 한둘이 아니니까.


거기 더해 무사치고는 지나치게 정중한 말투도 그렇고 저 나이대 무사가 홀로 다니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만에 하나라도 진짜 무사라면 진짜 무사를 허투루 대했다가는 자칫 명줄이 끊어지는 수가 있으니까. 즉, 칼 든 사람을 보면 진위를 떠나서 그냥 설설 기는 게 범부의 현명한 대처다.


“항주로 가려면 운하를 타는 것이 빠르다던데 어디로 가면 배를 탈 수 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아···! 이 길로 쭉 가시다가 이만큼 큰 길이 나오면 남쪽으로 내려가셔야 합니다.”

“쭉 가다가 남쪽. 뱃삯은 얼마쯤인지도 아십니까?”

“뱃삯이요? 아···! 옳지!”


마침 얼마 전 항주에서 찾아온 손님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데, 은 석 냥을 줬다는 이야기가.


“항주가 끝인데 먹고 주무시는 것까지 은 석 냥을 넘지 않을 겁니다.”

“석 냥, 고맙습니다, 대가.”

“예? 아, 예예! 살펴 가십시오, 무사님!”


깜빡 속았다, 그 콧대 높은 무사가 고맙다니. 길 한 번 가르쳐 준 일로 무사가 사의를 표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딴에는 무사 흉내를 내고 있지만 범부의 위장에는 한계가 있는 법. 어지간히 간 큰 자가 아니고서야 근본을 완전히 감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한 열다섯쯤인가? 어린놈이 요망하기는. 하기야 저 나이에 돌아다니려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겠지.”


사내는 하얀 눈밭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흑의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이는 무슨 사연으로 저리 방랑하고 있을까나. 근데, 저 나이에 은을 석 냥이나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무사인 것 같기도 하고?”




#




물은 땅과 조금 달랐다. 겨울에 땅은 금세 도끼날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지만, 강은 달랐다. 특히 깊고 넓어서 곧잘 흐르는 강은 쉽사리 얼지 않았다. 얼어도 수면이 얼 뿐, 얼어붙은 수면을 깨고 보면 그 아래 도도한 흐름이 살아 있었다.


견신은 선착장에 서서 수면을 오가는 배들을 구경 중이었다. 항주로 출발을 앞둔 배는 사람을 싣기에 앞서 짐을 싣는 중이었다. 길이 8장쯤의 조운선(漕運船)은 인부들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뒤뚱거렸다.


행인들, 부두를 오가는 사람들은 과하지도 적지도 않은 관심을 견신에게 두곤 했다. 무사가 흔치도 드물지도 않기 때문. 물론 견신이 소년의 태가 남은 무사인지라 조금 더 이목을 끄는 건 사실이었다.




이윽고, 사람이 탈 차례가 되자 견신은 차분하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짐과 달리 사람이 타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유는 돈이었다.


“다음 오시오!”


견신이 부두에 탁자를 놓고 앉은 수금원에게 은 조각을 내밀자, 수금원이 견신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아이고, 무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어디까지 가실 요량이십니까?”

“항주까지 갑니다.”

“항주··· 보자—”


답을 듣고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수금원은 견신이 건넨 은 조각을 탁자 위 작은 등자(等子)에 올려서 무게를 쟀다.


제국의 주요 통화는 은이었고 동전이나 철전 그리고 지폐의 융통은 원활하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지폐의 경우 통용에 필요한 예치금이 없어서 신용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금세 휴지 조각이 됐다.


대신에 태종의 대항해 당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은화가 주요 화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만 동전이나 철전보다 가치가 훨씬 컸기 때문에 지금처럼 조각으로 잘라서 쓰는 것이 일반적인 거래 방식이었다. 따라서 상품이나 용역을 파는 이는 늘 은을 자를 가위와 무게를 잴 등자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석 냥이군요. 하루 두 번 요기하실 것과 물을 드리고 이 표를 가지고 계셨다가 하루 정박할 때 밖에서 유하시고 다시 타실 때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러겠습니다.”


네모난 종이 표를 받아 든 견신이 배와 부두를 연결한 다리로 걸어가는 그때, 배에서 부유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반가운 기색으로 다리를 내려왔다.


“아이고! 우리 아우님! 이제 오셨는가!”


견신은 직감으로 그 사내의 시선이 이쪽을 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찰나 의아해하는 동시에 사내의 정체를 의심했다.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

선한 자는 오지 않으며 이미 와 있는 자는 선하지 않은 법이므로.


그에 기여를 쥔 손에 힘을 주는데 중년 사내의 다음 말이 단서를 건네왔다.


“이 기여 같은 사람! 아우 만나는 날에는 꼭 단잠을 잔다니까? 신기한 일이지. 아무튼 역시 약조를 철석같이 지키는군. 딱 제때 왔어.”


기여는 들고 있는 검의 이름. 또 산해경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는 이름이다. 산해경에서도 그리 유명한 영수의 이름은 아닌지라 민간에 널리 퍼진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면 중년 사내는 당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날 당벽호가 선물한 검의 이름이 기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이자, 그가 다시 너스레를 떨며 다가왔다. 계속 눈을 맞추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지 않은 채.


“하하하! 이리 과묵한 인사를 다 봤나. 오랜만에 우형을 만났거늘, 모기 눈물만큼이라도 반가운 기색은 내줘야지! 섭섭하게. 자자, 이거 받게. 내 며칠 볼 일이 생겨서 함께 갈 수 없게 됐으이. 뱃멀미에 좋은 환인데 우형은 예서 며칠 유하게 됐으니까 아우가 다 갖게.”


사내가 너스레와 함께 주먹 크기의 주머니를 건네자, 잠시 이쪽을 주목했던 이들도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가서 관심을 끊었다.


“알겠소. 나중에 봅시다.”


견신이 받아 들면서 비로소 인사를 건네자 사내의 얼굴이 진실로 밝아졌다. 밝아져서는 낮게 속삭였다.


“내 일을 마치는 대로 따라갈 테니 먼 길 조심하시게. 다가오는 여름에 연꽃 흐드러지게 핀 호수에서 배 띄워놓고 밤새 술이나 원 없이 마셔 보세. 응?”

“그럽시다.”

“그럼, 내 얼른 일을 마치고 따라 감세.”


눈빛으로 속내를 전한 사내는 그대로 부두의 수금원을 향해 걸어갔다.


“자자, 여기. 저기 저이가 내 아우인데 내가 쓰던 선실로 주시오. 뱃삯은 내가 치르리다. 표는 직접 전해주시고. 잔돈은 술 한 잔씩들 드시고. 그럼 먼 길 가는 내 아우 부탁해도 되겠소?”


사내가 뱃삯으로 건넨 건 무려 10냥짜리 은정 한 개. 예나 지금이나 돈과 은은 진리요 불변의 공리였다. 그런 진리와 공리를 본 수금원과 선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대인! 여부가 있겠습니까? 북직례까지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불편은 무슨 최고였소. 내 돌아가는 길에도 상회 것으로 가리다.”

“고맙습니다, 대인. 또 찾아주십시오. 소인들이 극진하게 모시겠습니다. 아우님도 불편하시지 않게 잘 모시겠습니다.”

“내 거듭 부탁하리다. 그럼.”




#




노련한 선원들이 모는 조운선은 겨울 강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아무래도 물이 부족한 겨울인지라 물살도 잔잔한 편이었고, 덕분에 선실은 습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안락했다.


홀로 쓰는 선실에 앉은 견신은 사내가 건넨 주머니 입구를 열었다. 돌돌 말린 종이와 다소 무게감이 느껴지는 옥함 그리고 마찬가지 돌돌 말린 전표 다발이 들어 있었다.


조금 전 사내가 부두에서 남기고 간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내 일을 마치는 대로 따라갈 테니 먼 길 조심하시게. 다가오는 여름에 연꽃 흐드러지게 핀 호수에서 배 띄워놓고 밤새 술이나 원 없이 마셔 보세.


우선 당가가 오늘 출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두 번째, 일을 마치고 따라온다는 말은 종종 도움을 주겠다는 뜻. 마지막 세 번째, 연꽃과 뱃놀이 이야기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늦어도 여름 전에는 당가를 찾아달라는 부탁일 터였다.


“참으로 진심이다.”


기대도, 예상도, 상상도 하지 않은 배려다. 당가에서 미리 언질을 줬다면 이쪽이 사양했을 거고, 바로 곁에 따라붙는 것도 사양했을 터. 그런 사정을 헤아리고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대들은.”


전표 다발도 마찬가지. 출궁일을 정확하게 파악했으니, 연간 일만 석 봉록이 그대로 주어지는 사실도 파악했을 터다.


돈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몇 년 이상 흥청망청 놀고먹을 수 있는 거금을 준 건 가깝게는 당가를 찾아오는 데 여비로 쓰라는 의미에서 줬을 거고, 더 나아가서는 혼인 지참금 조로 줬을 것.


“또한 영리하다.”


생각할수록 사려깊으면서도 영리한 선물이었다. 이러니, 들르지 않을 수가 있나.


다음 돌돌 말린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종이를 펼쳐보았다. 거기 유연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의 필체로 눌러쓴 전언이 있었다.




그리운 정왕 전하.

연화이옵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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