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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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최근연재일 :
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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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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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DUMMY

36화




육지에서 척후 및 연락을 맡은 인자(忍者)는 이동 거리를 계산하며 목표를 찾는 중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옷과 엉겨 붙으면서 옷자락이 벨 듯이 날카로워졌고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냈다.


은밀하게 이동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나 얼어붙은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본선과의 간격을 줄여서 배가 강물을 가르는 소리로 가릴 수밖에.


‘이놈의 안개가···!’


그처럼, 척후병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달도 졌고 짙은 물안개로 인해 단 몇 걸음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정이 불량했다. 덕분에 본선과의 연락도 어려워졌고.


짙은 안개 때문에 배 자체가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 야명주를 열심히 흔들어본들 저쪽에서 보일 리가 있나.


‘뭐, 피차 마찬가지인가.’


물론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는 법이니까.


안개 덕분에 목표 대상에게 먼저 발각당할 가능성이 낮아졌고 따라서 이쪽이 목표 위치만 선제적으로 또 제대로 특정한다면 본선이 목표를 은밀하게 기습할 수 있을 것이므로.


어쨌든 2리(里)쯤 거리에 도달한 듯싶으니 지금부터는 더 주의하면서 감각을 극도로 일깨워야 한다. 곧 목표의 인기척이 포착될 테니까.




잠시 그렇게 몇 걸음쯤 더 걸었을까. 예상대로 후각이 징후를 포착했고, 그에 두 다리를 멈춰 세웠다.


우뚝—


주변 공기가 워낙에 차가워서 냄새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훈련된 인자의 후각이 구별하기에는 충분한 수준.


‘탄 냄새···! 분뇨 냄새···!’


숯이 흙과 뒤섞인 냄새, 짐승의 분뇨 냄새를 포함, 여러 가지 냄새들이 안개와 뒤섞여 콧속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청각은 후각과 견해가 다른 모양이었다. 후각은 목표에 근접했다며 주장하는데 청각은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고. 확인하라며 주장하고 있었다.


‘···이상한데. 소리가···!’


이상한 일.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이 정도 강도의 냄새라면 멀게 잡아도 대여섯 장(丈) 안쪽으로 근접했다는 이야기. 냄새가 강설이 그친 뒤 즉, 어제저녁 이후에 발생했다는 이야기고.


이 밤중에 갑자기 길을 나섰을 리 만무한 일.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기본(旗本)께서 다시 연락이나 접선을 시도하셨을 터.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 몇 걸음 더 이동해보니 녹은 땅과 나무가 나왔다. 나무는 여기가 도로라는 증거고, 녹은 땅은 얼마 전까지 사람이 여기 있었다는 증거. 그러나, 여전히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거리도 확실하고 흔적도 있는데 기척만 없다.


‘그 사이, 이동했다는 말인가? 기본께서는 왜···? 아니면, 여기가 아닌가? 거리는 분명 이 리(里)쯤 인데. 일단 보고를 해야···!’


그에 일단 본선에 알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강둑을 향해 돌아서는 그때였다.


후방 상단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진 것은.


‘새···?’


기척의 주인공이 무엇인지 어떤 구분과 판단을 마치기도 전 순식간에, 안개를 뚫고 확대되는 형상.


‘헉! 늦었···!’


그를 인지하는 순간 금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목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써—억—


그렇게 가까워지는 땅바닥.


‘제기···랄···! 우리를 알고 있었다는 말···!’


당했다. 당한 것이다. 피할 새도 없이.




이윽고 영원한 어둠을 맞이한 인자. 그 몸에서 분리된 머리가 차가운 땅바닥을 구르다 방금 착지한 무사의 발에 부딪혔다.


툭—




#




그 시각, 조운선의 선실.

조금 독특한 구조의 선실에는 의자가 없었다. 바닥에는 속을 손가락 두 마디쯤 두께의 볏짚으로 채우고 겉을 골풀로 덮은 뒤, 테두리를 무명천으로 마감한 첩(疊)이 깔려 있었다.


그 바닥에 두 사내가 저들 사이 소반을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휘하 무사 열여덟, 공력을 익히지 않은 병사 오십 명을 이끌고 물건을 회수하기 위해 운하를 거슬러 오르는 중인 과도경방과 그의 쌍둥이 동생 과도경전이었다.


둘 다 서른 줄에 사내치고 작은 축에 드는 신장. 무릎에는 날이 살짝 휜 도(刀)를 가로 얹었고 검댕을 대각으로 바른 얼굴. 각진 턱을 두른 수염이 보기 드물게 풍성했다. 서장 혹은 천축국 사내들의 그것처럼.


소반 위 반듯하게 타오르는 호롱불을 응시하던 과도경방이 잠시 멈췄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무사 스물에 족경(足輕) 오십. 신천이 천진에서 잃은 전력까지 더하면 삼 할이 넘는다.”


사내치고 조금 높은 음조의 목소리도 서로 닮았다.


“반드시 회수해야지. 강남에 넘겨줄 순 없어. 입정 셋 개화 열셋으로 실패한다면 우리 입지도 곤란해질 거고.”


손발로의 이동을 포함 병기에 공력을 투사하는 경지를 입정(入定)이라 한다. 이는 십정 중 소림사가 정한 명칭. 육조 혜능의 시대에 정하였다. 속세의 정(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 삼매경에 든다는 의미.


단전에 축기를 시작한 경지를 이르는 개화(開華)는 입정보다 훨씬 전에 생겨났다. 상청파 혹은 모산파로도 불리는 도가 종파 개조, 위화존이 혜능보다 수백 년 앞서 명명했다.




내공이 고도로 발달했고 또한 중시하는 지금 시대에 들어서는 개화무사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사를 자부할 수 있었고 입정무사는 자타 공인의 고수였다.


그보다 위로는 신체와 병기 외부로 공력을 발출할 수 있는 무사부터 절정이라는 칭호를 별도로 받았고 경지의 명칭은 초현(初現). 처음 나타났다는 뜻. 검자 이전부터 검의 조종을 자처해 온 남궁 그 시조 검성 남궁산(南宮山)이 명명했다.


그러한 초현무사는 천하를 주름잡는 건 물론 한 시대를 대표하는 고수였고, 십정과 오의도 한 세대에 아무리 많아야 한둘. 배출하지 못하는 세대도 적지 않았다.


애초에 공력을 쌓을 수 있는 사람 즉, 개화무사조차 희귀한 인재고 선비에 빗대면 과거 시험 최종 관문인 전시에 급제한 천재와 동격, 문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인물이니 입정과 초현을 포함, 상위 경지를 보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과도가의 형제가 동원한 전력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거대 방문파가만 동원이 가능한 전력인 거고.




과도경방은 목표 외에 무사가 서른 남짓이고 그중 입정은 확실하진 않지만 소이신천을 죽이고 물건을 건네받은 목표 소년 하나. 그리고 산서상인에 확실하게 하나. 총 두 명이라며 정보를 전해온 축자뇌각을 떠올렸다.


“숙부께서 잘 해주셔야 할 텐데.”

“숙부는 무슨, 변절자에 불과한 인간을.”


그처럼 축자뇌각을 숙부로 대우하는 형과 달리 과도경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 뿌리가 중원인인 축자뇌각을 괄시하는 기색이었다.


“말조심해라, 경전. 훌륭한 무사시고, 당주께서 신임하시는 분이다.”

“그래봤자 근본이 다른 사람이다. 이제 우리도 중원의 지리와 풍습에 익숙해졌으니 더는 변절자들이 필요치 않아.”

“그 입 다물어라. 그놈의 입방아를 강남에서 알게 되면 우리 둘 다 끝이다. 우리가 아무리 중원에 적응했다고 해도 협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마라.”

“알고 있으니까, 잔소리는 그쯤 해둬.”

“상륙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맨 먼저 그놈의 팔다리부터 자른다. 숙부께서 제압하셨다면 입정, 개화부터 빠르게 정리하고.”

“어이 형제, 아까부터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한참 어린놈에게.”

“그 어린놈이 신천을 일 합에 죽였다.”

“그쯤은 나도 할 수 있다.”

“또 그놈의 헛소리. 신천이 근래 올라서서 그렇지, 녀석도 입정이었다. 개화도 몇 데리고 갔었고.”

“방심했겠지. 어리디어린 놈이 입정? 죽었다가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지. 백년 전 검신의 환생이면 모를까.”

“······.”


과도경방은 동생의 답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년 검사의 정체를 다방면으로 추적해 본 결과, 결론은 방랑무사 즉, 낭인이라는 점.


처음에는 명(明) 조정에서 붙인 비밀 호위로 의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거의 거둬들였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도 나이거니와, 무엇보다 금의위와 동집사창에는 상승의 검법이 없으니까. 입정 이상 관리와 장수의 위치를 조사하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관리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자니,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최초의 운반자 종청산이 놈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사라졌다는 점이.


그처럼 중요한 물건을 관리 아닌 평민에게 야인에게 맡겼다? 몇 번이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봤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둘이 우연한 인연이라고 보기에는 상황이 과하게 공교롭고.


“형제, 긴장 풀어. 지나친 긴장은 칼을 굼뜨게 만드니까. 물건이 놈의 손에 들어간 것만 확실하면, 우리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그건 확실해. 배에서 들었다더군. 교란책일 수도 있지만, 노출된 이에게 그것도 허약한 문사에게 계속 맡기는 것은 패착이지.”


과도경방은 천진 사건을 정리한 보고를 떠올렸다.


-지금부터 물건은 이 사람이 운반합니다.


보고는 승객 중 다수가 당시 그 말을 들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최초의 운반책을 잡아서 확인했어야 했거늘···! 귀신같이 사라졌어.”

“강남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래. 그놈은 강남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하자고. 이제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인가?”

“나가보자.”




갑판으로 나간 두 형제를 자욱한 물안개가 맞이했다. 불빛 없이, 강물을 더듬듯 천천히 이동 중인 탓에 사방이 온통 암흑이었다. 돛대의 끝도 보이지 않았다.


형제를 발견한 수하 하나가 얼른 다가와서 속삭였다.


“삼 리(里)쯤 지났습니다.”


대답은 과도경방이 했다.


“삼 리?”

“그렇습니다, 기본.”


두 시진 전쯤 축자뇌각에게 전달받은 거리는 대략 2리. 그런데, 3리를 지나쳤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육지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짙은 안개로 인해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는 탓에 육지의 척후가 목표 발견 시 연락하고 이쪽은 연락받음과 동시에 기습하기로 했었다. 따라서, 아직 목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니면···


“척후가 잘못됐거나.”

“예···?”

“당장 척후를 확인해라.”

“예, 기본.”


그처럼 이상 징후를 포착한 과도경방이 수하에게 명령하는 그 순간, 돌연 무언가 상공에서 연달아 추락했고 갑판과 부딪혀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직—


[!!!!!!]


이내 갑판 곳곳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서는 희뿌연 물안개와 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화르르—




#




강둑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고함이 그곳을 내려다보는 견신 무리의 고막을 비집고 들어갔다.


“불이다!”

“기습이다!”

“돛에 불이 붙었다!”


전열을 갖추고 준비 중이었던 견신 일행은 조금 전 척후를 보냈던 무사로부터 조운선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접수했고 이후 기다렸다가 돛대를 식별하는 즉시, 준비한 기름 항아리들을 떨어트리고 불화살을 쏟아부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진 불화살이 돛과 갑판을 덮치고 앞뒤로 두 개의 돛을 먹잇감 삼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서 사방을 밝혔다.


근본이 물인 안개는 순식간에 커다란 돛의 절반을 먹어 치워가는 불길의 위세에 밀려났고.




그처럼 불시의 공격을 받고 잠시 당황했던 과도경방이 곧바로 명령했다.


“목표가 여기 있다. 상륙하라!”

[예!]


그랬으나 그도 수하들도 창졸 간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실들이 있었다. 항아리들이 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과 지금 배가 지나는 구간은 강폭이 넓어지는 구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갑판에서 안개 그 너머 육지를 예상하며 도약한 무사들을 기다리는 것은 겨울 북서풍이 냉각시킨 강물이었다. 입수하는 순간 곧바로 몸과 마음을 얼려오는 강물.


검은 강물이 사람의 동체를 삼키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고 곧바로 그 강물의 뱃속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이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육지가 멀다!”

“중지! 중지!”


그러는 사이에도 쏟아지는 화살 비가 갑판 위 무사들과 병사들을 덮쳤고 육신의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불에 타면서 형언할 수 없는 냄새를 피워올렸다.


“컥!”

“크악!”


쌍둥이 형제를 비롯한 고수들은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쳐내는 중. 막 화살 하나를 걷어낸 과도경방이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공격 중지! 격군은 노를 저어라! 배를 우측에 붙여라! 당장!”


조금 전 뛰어내린 수하들이 아우성과 헤엄치는 소리를 듣고 지금 배가 강둑과 상당히 떨어진 상황임을 깨달은 것.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으니 강둑과의 충돌을 감수하고라도 배를 강둑에 붙이려고 하는 것.


그때, 안개 너머 우측 위에서 명령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돛대를 보고! 불을 보고 쏴라! 거기 배가 있다!”


다시금 화살 비가 쏟아지면서 족경 즉, 공력을 익히지 않은 무사 다수가 쓰러졌다. 그에 형만큼이나 다급해진 과도경전이 쓰러지는 족경들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선실 측면으로 몸을 감추란 말이다!”


선실을 방패 삼아 화살을 피하라는 뜻. 그러나, 이는 악수였다. 곧바로 족경들이 선실 좌측을 향해 달려갔으나 때마침 뱃머리가 강둑과 충돌하면서 관성력에 의해 일제히 우전방으로 쓰러진 것.


쓰러진 이들의 위로 다시금 화살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고.


후두두둑—


“커헉!”

“크흑!”

“끅!”


그러니, 화살을 피하라는 명령보다는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여 우측 갑판 벽을 붙잡고 버티라는 명령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곧바로 일어서는 족경이 열댓 명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한 쌍둥이 형제가 솟구치는 분노에 치를 떠는 그 순간, 뱃머리에서 무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됐습니다!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는 분노에 이를 갈면서도 초조했던 형제가 기다리던 단 하나의 소식이었다.




#




“뱃머리로 상륙하라! 당장!”


무심한 표정의 견신이 진형 북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기억하며 동쪽 모서리를 지키는 지청명에게 주문했다.


“지 표사, 남쪽 무사들을 불러들이십시오. 이제 수세를 취해야 합니다.”

“예! 고 대협! 철수하여 합류하라!”


남쪽 강둑에서 대기 중이던 무사들은 조금 전 배가 충돌하기 전 도약했던 적이 둑을 올라오기를 기다려 하나둘씩 처치했다. 강물의 냉기를 온몸에 뒤집어쓴 무사들은 둑까지 헤엄치는 과정에서 급속도로 몸이 굳어버린 나머지 재빨리 둑을 기어오르지 못했고, 또 어두운 탓에 헤엄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다수가 그대로 강에서 얼어 죽었다.




이내 명령을 접수한 무사들이 피 묻은 칼을 들고 복귀, 불규칙하게 배치된 수레와 마차 사이로 스며들 듯 대열에 합류했다.


진형은 강둑 끄트머리에 홍소화를 비롯한 범부들을 배치하고, 동쪽으로 뾰족하게 쐐기 형태를 이뤘다.


수레와 마차를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지그재그로 배치했으며 그 뒤에 무사들을 배치했다. 이는 무사들이 다양한 방위를 관측할 수 있으면서도 충분한 공간을 갖고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진 대형이었고 그것이 중산호마전법의 요체였다.


북쪽 꼭짓점은 공손신정.

동쪽 꼭짓점은 지청명.

남쪽 꼭짓점은 유희.


조경은 손문, 서각 일행과 함께 쐐기의 정중심을 지켰다. 조경의 임무는 요격. 대형에 공백이 발생하거나 발생이 예상 시 요격하여 방지하는 것이었다.


세 호위가 할 수 없이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드는 과정에서 조경의 정체를 확신한 견신이 요격 임무를 부여한 것. 확실한 것은 대봐야 알 일이지만 셋 중 조경의 보신경이 가장 재빠를 거라며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월영신보의 장점이 은밀성과 빠름이므로.


아무튼 전투에 임하는 무사들은 발을 무명천으로 감싼 상태였다. 언 눈을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견신은 서각 일행과 홍소화를 비롯한 범부들의 사이에 서서 진형을 조율 중이었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과 공기, 냄새 그리고 대지의 떨림까지. 백여 년 전 그날의 향수를 느끼면서.


아우성과 비명, 비릿한 혈향, 피처럼 붉은 불길, 피 묻은 칼날,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목뒤와 병기를 쥔 손바닥에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키는 병사들.


그리고 바로 주변에서 차가운 혀를 날름거리는 죽음과 그 그림자까지.


어쩌면 그날의 풍경과 이리도 같을까.


‘형님, 보고 있소?’


서달은 호주성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서너 살 위였다. 주원장 녀석보다는 대여섯 살 아래였고.


전투 중에는 상우춘 못지않게 사나운 사람이었으나 본바탕이 순박한 사람이었다. 전투가 끝나면 한 명의 목동으로 돌아가는. 말에게 풀을 먹일 너른 땅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날의 중산호마전법은 서달이 형제들과 함께 천하를 누비던 당시 말과 군대, 보급을 보전하기 위해서 고안한 전법을 일부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은 어떻소? 머리는 이제 맑아졌소?’


서달은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 되어서도 말이 병을 앓으면 자기가 병을 앓는 듯 아파했고 말이 새끼를 낳을 때면 밤을 새워가며 제 새끼처럼 보살피는 목동이었다.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고 살던 그 시절 그 소년에서 몸만 자란 사람 같았다.



‘나는 아직이오.’


그처럼 순박하고 우직한 서달도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광증을 얻었고 십수 년 동안 시달린 끝에 세상을 떴다. 검자 고견신처럼.


검자가 무슨 이유로 광증을 얻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정신병이 서달을 찾아간 이유는 분명했다. 그처럼 순박한 영혼은 전쟁이라는 마귀를, 전쟁의 병폐와 폐해를 감당할 수 없는 것. 그 순박한 서달은 광증의 먹잇감이었을 터였다. 아주 좋은 먹잇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을 수 없는 병이 그 옛날 전장을 호령하던 심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맹수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사슴처럼 서서히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서달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사실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아니, 그 병마가 전쟁이라는 운명을 만난 그날에 이미 정해진 일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그 순간에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이었을까.


서글서글한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지고, 신음으로 점철됐을 말년이 너무··· 너무나도 사무친다. 이 가슴에.


가엾은 내 형제여, 이 내 전우여.


-고 아우, 말이란 짐승이 알고 보면 그렇게 영리할 수가 없어.


서달은 형제요 전우요 가족이며 은인이다. 말에 대해서는 전부 그에게서 배웠기에 그가 없었다면 오래전 그날 금릉 전투에서 죽었을 것이므로.


또 오늘날 창주에서 귀로를 알아보지 못했을 테니까.


-순 겁많은 짐승인데 주인하고 한번 통하면 그놈의 범도 그냥 들이 받아버린다고.

-거 형님. 무슨 농을 그리하시오.

-이 사람 이거 속고만 살았나? 보여줘?

-어디 가서 범을 구하실 거요?

-그건 그렇지. 쩝. 아무튼, 내 말 믿고 말한테 잘해주게, 아우. 필시 보은할 걸세.


정녕 그랬다. 그 말대로였다. 전생의 애마, 여로는 금릉 전투 당시 주인의 한쪽 팔을 자른 장수를 뒷발로 걷어차서 죽인 뒤, 온몸에 창과 칼을 맞고 죽었다.


그런 녀석의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나는 아직 낫지 않았다오. 아프다오. 종종 괴롭소, 많이. 영영 낫지 않을 듯하고.’


그러니, 아직 몸도 성치 않은 귀로를 여기 둘 수야 있나.


‘허나, 괜찮소. 견딜 수 있소. 덕분에 가끔 꿈에서 형님과 전우들을 만날 수 있으니.’


그 서글서글한 눈매로 해맑은 아이처럼 웃으며 말을 쓰다듬던 형제, 전우의 얼굴이 검고 희뿌연 허공에 달처럼 떠오르는 그때.


공손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준비.”


이어서 안개 그 너머 강둑을 치달려 오르는 무사들의 발디딤 소리.


두두두두—


이내 그들이 일제히 칼을 뽑는 소리.


촤—아—앙—


그리고···


‘가봐야겠소. 또 봅시다, 형님.’


마침내 안개를 뚫고 나타난 적들이 진형의 바로 앞 미리 물을 뿌려서 얼려둔 빙판을 밟고 그대로 미끄러져 쓰러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마주한 아군이 사전에 계획한 대로 일제히 병기를 뻗을 때 또 서각이 갈팡질팡하는 듯 이쪽을 돌아보는 그때.


하늘에서 서달의 대답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크핫하하하! 천년제일검사를 누가 있어서 당해내겠는가! 내 아우가 이겼음이네! 이미!


그의 목소리가 잠시 드러난 상공의 별빛을 타고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저들에게 보여주게! 하늘 밖에 하늘이 또 있음을!




형제여, 내 영원한 형제여.

그 잔인한 계절에, 이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여.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가을에도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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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9

  • 작성자
    Lv.89 한사
    작성일
    24.08.29 17:02
    No. 1

    좋습니다....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54 차돌초롱
    작성일
    24.08.29 20:25
    No. 2

    잘 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최고의망상
    작성일
    24.08.29 21:10
    No. 3

    즐감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홍곡
    작성일
    24.08.30 00:15
    No. 4

    재밌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6 네메시스81
    작성일
    24.08.31 04:04
    No. 5

    전개가 조금만 빠르면 금상첨화인데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19:54
    No. 6

    승객중 다수가...

    그 승객들 다 죽었다고 하더만 살아난 자가
    있었나? 흑의의 무사, 그리고 무인 3인만
    살았다고 본 것 같은데?...

    찬성: 0 | 반대: 1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19:58
    No. 7

    그리고 핸드폰이 없는 시대에 이런 설정은
    좀 무리라는 느낌... 선박을 이용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심야에 목표물을 찾아 습격한다는건.

    강 양쪽이 무슨 평야나 도로가 계속되는게
    아니라 적벽처럼 절벽이 있는 곳도 있고
    접근이 용이치 않은 곳도 많은데 굳이
    이렇게 어려운 방법을? 그냥 쉽게 뒤에서
    말을 타고 추격을 하는게 낫지.

    찬성: 1 | 반대: 2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20:06
    No. 8

    선박과 강언덕과의 거리가 멀다?
    그러면 기름항아리를 어떻게 선박에
    떨굴수 있었을까?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2 웃차
    작성일
    24.09.07 09:30
    No. 9

    와 ㅠㅠㅠㅠㅠ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k4******..
    작성일
    24.09.08 16:24
    No. 10

    재밌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0 가모프
    작성일
    24.09.08 19:28
    No. 11

    절정이 최고인 시대구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포대화상
    작성일
    24.09.08 19:45
    No. 12

    본디 자리잡고 쉬던 곳이 적들이 상륙하기 쉬운듯하여 미리 자리를옮겼잖아요 그리고 적들이왜구들이잖아요 해적들이란 말이지 그들이 배를 타겠어 익숙하지않은 말을 타겠어 배를 타야지 대운하를 따라 이동하다 바로 손쉽게 칠 수 있잖아 답답하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비류悲流
    작성일
    24.09.09 09:27
    No. 13
  • 작성자
    Lv.99 rl****
    작성일
    24.09.09 16:28
    No. 14

    오오 건필하세요 재미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1 whitefog..
    작성일
    24.09.09 18:30
    No. 15

    잔잔한 파도가 치는 바다를 보면서 부드러움과 묵직함을 느끼고있는데 바다가 좀 더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둥, 파도가 좀 더 빨랐으면 좋겠다는 둥 그런 의견은 이해해도 파도가 왜 그렇게 치냐는 의견은 이해가 안간다.. 진순 vs 진매에서도 결과가 나뉘는게 사람인데 AvsB에서 B를 택했다고 욕하는건 좀..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1 whitefog..
    작성일
    24.09.09 18:58
    No. 16

    24화, 승객들은 벌벌 떨면서.. 승객이 어디 다 죽음? 날조를 무슨..
    36화 항아리는 높은 곳 -> 낮은 곳, 사람은 낮은 곳-> 낮은 곳
    언덕을 너무 낮은곳으로 설정하면 자살행위일테니 최소 10m라 가정하고 화살맞고 일어서는 동안 큰 배를 붙였으니까 도약만으론 힘든거리 4~5m로 가정 이를 위해서 항아리는 1.4초안에 4~5m를 가야함. 대충 시속 11km.
    아오 글을 읽지도 않은 댓글에 제대로 긁혔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4 겨울바람zz
    작성일
    24.09.12 15:18
    No. 17

    눈물 함바가지 흘리고 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0 날아가다
    작성일
    24.09.12 18:22
    No. 18

    슬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EastPill..
    작성일
    24.09.15 20:41
    No. 19

    인식하지 못한 사실들이 있었다~ 라는 문장에 감동하고 갑니다. 요새 어설프게 작가 흉내내는 애들이 저런 문장을 써야하는 경우에 '간과'라는 단어를 써 버리고는 하죠. 단어 뜻도 모르면서 쓰는 것들이 작가랍시고 돈 받아 처먹기는...ㅋㅋㅋ 여튼 잘 쓰시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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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화 +25 24.08.09 9,350 422 20쪽
26 25화 +20 24.08.08 9,774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68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29 369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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