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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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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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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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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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2화

DUMMY

32화




아이의 성명을 듣고 내심 놀란 견신. 놀란 나머지 답례를 잊은 그 대신, 홍소화가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저희 모자가 대협의 청정을 방해한 건 아닐는지요.”


그에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견신이 뒤늦은 답례를 건넸다.


“아···! 형주 사람 고사다, 소형제.”


그러면서 홍소화에게, 눈짓으로 설명을 요구했고 그에 홍소화가 고경신을 자리에 앉히며 대답했다.


“폐행수도 며칠 전 대협의 함자를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시가(媤家) 외에 고(高)가 사람은 처음이었는지라. 대협께서 지아비와 같은 함자를 쓰시기도 하고. 아무튼, 폐행수의 시가도 고가입니다. 형주에도 고가가 있었나 봅니다.”


듣는 견신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설명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고(高)가는 드물다. 전생을 통틀어 가족 외에는 만나보질 못했고, 현생에서도 이번이, 고경신이 처음이다.


거기 더해 홍소화의 부군이 고사를 성명으로 쓰고 아들의 성명이 고경신. 경신은 전생의 두 번째 이름, 견신과 뜻이 같다. 견(堅)과 경(硬)으로 음만 다를 뿐.


즉, 부자가 전생 시절의 첫 번째, 두 번째 이름을 나눠 쓰는 것. 거기에 홍소화까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연계고 그 모든 사정을 듣고 다시 보니 아이 얼굴에서 제 아비가 물려준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그 얼굴이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고.


지나친 망상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멋대로 치달리기 시작하는 생각을 막을 수가 없다.


후손인가? 후손일까? 천하는 넓고 또 인물은 많다고 해도 아니란 법은 없잖은가? 본디 인연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잖은가? 기적이지 않았나. 인연은.


홍소화도 당산나무 서쪽 개울 건너 그 홍씨 집안의 후손인 건 아닐까? 홍소화도 그렇고, 아이도 이상하게 닮은 느낌이지 않은가. 전생의 아버지 아니, 나를!


홍소화와 고경신 그리고 주견신을 이은 인연의 끈이 검은 밤 허공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듯했고 심장이 격렬하게 박동하기 시작하면서 홀린 듯 자연스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집성촌, 본관을.


“조금 전에 소형제가 진성이라고··· 처음부터 진성이었습니까?”

“고향을 물으시는 것이라면 합비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비···”


형주가 아닌 합비. 답을 듣고 맥이 풀리는 느낌. 물론, 그 당시 사검 고사의 가족을 찾아 마을을 들쑤신 조균용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은 누군가 합비로 이주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형주와 합비는 천 리 이상 떨어져 있다.


생전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이들이 장장 천 리가 넘는 길을, 그것도 그 혼란한 전란 통에서 무사히 이동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러니 아니다. 아니었다. 이는 그저 우연이다. 우연히 닿은 인연이었다.


“폐행수 또한 진성 사람이고 양가 모두 오대조 시절 합비에서 진성으로 이주하였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처럼 짧은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안색이 몇 번씩 변하는 견신을 의아하게 여긴 홍소화가 덧붙였다.


“그간 아이와 아이 아비의 성명이 조금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금일 이리 대협을 뵙고 나니, 대협께 댈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이 이름도 검자 태대종사의 함자를 빌리려다 보니 아무래도 피휘해야 할 듯싶어서 경신으로 지었습니다.”


견신이 검회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검자를 언급함에 태대종사(太大宗師)를 붙여서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천하에 또 역사에 대종사는 여럿 있으나 태대종사는 한 명뿐. 불세출의 검사, 검자 고견신뿐이다.


또 피휘(避諱)는 군주, 왕가, 조상 등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관습. 부를 때 이름을 피해서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기본으로, 작명 시 글자를 피해서 짓기도 했다.


“검회의 눈 밖에 날 테니까요.”


검자 고견신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가는 검자를 교조에 가까운 존재로 추종하는 검사들에게 미움을 살 테니, 한 글자 음만 피휘했다는 이야기.


아무튼 견신은 홍소화에게 남은 이야기가, 들으면 다시 한번 놀라게 될 사연이 더 남아있는 줄 모르고 지나쳤다.


“홍 행수 말씀대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부자가 검자의 이름을 가졌으니.”

“고 대협께서는 태대종사와 고향까지 같으시니, 우리 고씨 부자는 대협의 상대가 아니 됩니다.”

“······.”


견신이 검자를 대수롭지 않게 언급하는 그 대목에서 홍소화는 견신의 소속이 검회가 아닐 가능성을 점쳤다.


‘십정 아니면 오의라는 뜻인데.’


검회 인물에게 검자 고견신은 가히 하늘에 비견되는, 황제 이상의 존재다. 따라서 형주 사람 고사가 검회의 인물이라면 검자를 지인 대하듯 언급할 리가 없다.


하기야 형주 사람 고사를 십정이나 오의의 인물로 생각하면 한 가지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있다. 검자를 지극히 추종한 나머지 검자 행세를 극도로 경계하던 그 검회가, 어느 날 갑자기 기조를 바꿔서 ‘형주 사람 고사’라는 문장을 소년에게 허락했을 리 없다는 대목.


소년 무사가 검자의 환생이면 또 모를까.


아무튼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는데, 형주 사람 고사가 무사치고는 예의가 아주 밝은 인물이라는 점.


‘좌우지간에 별종은 별종이야.’


십정과 오의의 무사들은 유림 명문가의 선비들 이상으로 오만한 이들. 선비는 물론 무사 아닌 이들을 천민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니까.




그처럼 홍소화가 연신 견신을 탐색 중이던 그때, 견신과 어미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고경신이 대뜸 끼어들었다.


“고 대협!”

“······?”

“혹시, 검회에서 나오신 거예요?”


그런 아들의 당돌한 물음에, 화들짝 놀란 홍소화가 얼른 나무라면서도 내심 견신의 대답을 기대했다.


“경신! 대협께 그 무슨 무례야? 얼른 사과드려. 송구합니다, 고 대협.”

“괜찮습니다, 행수. 아니다, 소형제.”

“그러면요? 십정의 대협이세요? 아니면 오의?”

“둘 다 아니다. 우형은 그저 나그네 무사다.”

“에이, 거짓말! 나그네 무사인데 섬전도를 이겨요? 섬전도 백부가 우리 산서상인에서는 유명한 고순데!”

“백부···”


말꼬리를 흐리며 돌아보는 견신에게, 홍소화가 옅은 웃음기를 띠고 대답했다.


“그리 가깝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무(武)에 관심이 많아서 아비보다 나이 많은 무사들을 백부로 부르고는 합니다. 그저 오다가다 본 사이입니다. 애초에 폐행수와 양성은 결이 조금 다른 사람인지라. 아무튼, 말씀드렸다시피 폐행수는 물론 폐상과 고 대협 사이에 은원은 조금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견신은 실제로 안도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고경신이 조규상을 연거푸 백부로 부르는 대목에서 조금이나마 부담을 느꼈었다. 백년 전 그 소녀를 빼닮은 홍소화와는 악연을 맺고 싶지 않았기에.


“엄마 말이 맞아요, 양 백부가 잘못했는데 섬전도 백부가 선공을 취했다면서요? 양 백부는 몰라도 조 백부는 그러면 아니 되는 건데, 조 백부는 무사잖아요. 모름지기 무사라면 협과 도리를 실천해야지. 근데, 대협. 그거 어떻게 하신 거예요?”

“무엇을 말이냐?”

“제가 듣기로 대협께서 조 백부의 칼을 빼앗으셨다던데.”

“그거··· 운이 좋았지.”

“에이···”


팔문 칠식 명암의 이치를 고경신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견신. 그가 대강 운이었다며 뭉뚱그리자, 홍소화가 엄격한 어조로 아이를 꾸짖었다.


“고경신, 그만. 엄마가 말했지. 무사님들께 수법을 여쭙는 건 큰 실례라고. 고 대협께서 아량이 넓으셔서 그렇지, 다른 무사님이었으면 우리 오늘 경을 치렀어. 알아?”

“치···! 나도 안다고. 고 대협은 좋으신 분 같아서 여쭤본 거라고. 근데, 엄마도 궁금하잖아. 엄마랑 지 백부랑 숙부들도 다들 궁금해했으면서.”

“거듭 송구합니다, 대협. 폐행수가 버릇없이 키웠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말씀대로 경신이 무(武)에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네, 폐행수는 상인이 되었으면 하는데 아이는 한사코 아비를 따라서 무사가 되겠다고 하니.”


토라진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 홍소화의 얼굴에 그늘이 어려 있었다. 이 밤의 어둠보다 짙고 어두운 그늘이.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데, 기구한 사연이 있겠지만 견신은 따로 묻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기 전에는 사연을 묻지 않는 것이 어른의 자세이므로.


그런 어미의 손길에 조금 풀어진 고경신이 어미 손을 잡고 어미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응.”

“나 무사 하게 해줘. 나 무사 할래. 고 대협도 봐. 진짜 젊으시잖아. 내가 왜 못해?”

“안돼.”

“아, 왜에—”

“안돼, 고경신. 엄마가 그건 안 된다고 그랬지. 너 산학 잘 하잖아. 엄마 따라서 상인 해. 아무튼, 안 돼. 절대로.”

“치! 안 해! 상인은 재미없다고! 미워! 엄마랑 이야기 안 할 거야!”


그처럼 완전히 토라져서 자리를 박차는 아이를 홍소화도, 견신도 말없이 바라보았다.


[······.]


연인도 부모도 되어 보지 못했으므로 견신은 홍소화의 속눈썹에 내려앉은 슬픔을 짐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



그러는 한편.

산서상인과 견신의 숙영지 사이에 자리 잡은 세 호위는 조경이 만든 닭고기 탕으로 낮 동안 주린 배를 달래는 중이었다.


조경이 나무 앞에서 탕을 끓이고 공손신정은 그릇에 받아다가 나무 뒤로 가서 책과 함께 곁들이는 중.


“흐··· 과연···”


무슨 책인지 종종 콧구멍을 벌름거리기도 히죽 웃기도 하다가 한 번씩 깜짝 놀라서는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누가 보면 안 된다는 듯이.




유희의 경우, 게걸스럽다는 표현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음식에 열중하는 모습이었고.


“와— 진짜 맛있어. 이건 고금제일이라고. 야, 피로유···! 사제.”

“왜, 말···! 사저. 하···! 근데, 진짜 드러워 죽겠네, 진짜. 사저, 좀 깨끗하게 먹지?”

“사제 너, 이참에 아예 이쪽으로 나가 봐. 천하제일은 따놓은 상이야. 내 장담할게.”

“그 입에 맛없는 게 있기는 하고?”

“얘 또 말에 강호의 도의가 없네. 이래 봬도 사문 제일의 미식가였다고.”

“퍽이나. 그냥 드시기나 하세요. 말씀하지 마시고, 국물 다 튀니까.”

“네네. 그러지요, 사제.”


미모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기품이 넘치는 자태를 가진 유희가 먹을 것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모습. 그에 다시금 혀를 내두른 조경이 그의 몫을 사발에 퍼담은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전까지 계속 복잡한 생각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던 그들은 뜨끈뜨끈한 탕과 함께 비로소 휴식다운 휴식에 돌입한 참.


다들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각자가 속한 조직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견신을 시해한 뒤 수급과 검을 회수해야 한다며. 반드시 나머지 두 사람을 제치고.


그랬으나 결론을 아직 마음 깊이 인정하지는 못했고, 그래서 다들 전갈을 받기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상황이었다.


조리하다가도, 게걸스레 먹다가도 한 번씩 멍해지는 조경과 유희의 모습이 그 증거. 여전히,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기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다만, 공손신정은 책의 내용 덕분인지, 종종 히죽히죽 웃곤 했고, 그 모습이 공손신정과 나머지 두 사람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탕을 먹는 세 사람. 벌써 여러 차례 사발을 싹싹 비운 유희가 마지막 남은 국물과 건더기를 긁어모으던 그때였다.


머리는 생각에 몰두한 채 손으로는 국자를 휘젓던 그녀의 뇌리에 창주에서 만난 종청산이 떠오른 것은.


“!!!!!!”


그 순간, 국자를 쥔 손이 동작을 멈췄다.


-세 분 대인께서 무슨 일로···?


그때 종청산은 분명히 대인이라고 말했다. 대협이나 대가가 아니라.


대인은 오직 관리에게만 사용하는 말이다. 날고 기는 부호, 고수, 장인, 대상 등 누구도 함부로 받을 수 없는 말이다. 관직이나 품계를 갖지 않은 자라면.


그를 산골 무지렁이가 아니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종청산은 무지렁이가 아니었고. 옷차림새도 태도도, 스스로 유생이라고 밝히기도 했고.


그 당시 종청산에게 던진 핵심 질문 두 개는 견신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는 것과 그때 자객들이 언급한 물건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종청산의 답변을 요약하면 견신과 나눈 이야기는 감사와 이런저런 신변잡기였고, 물건 이야기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자객들이 사람을 잘못 본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문제는 이쪽에서 정체를 밝힌 적이 없다는 것. 따라서 종청산이 이쪽 세 사람의 정체를 알아봤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고 그게 아니면, 미리 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크고.


아니, 그게 아니다. 설마···? 이럴 수가! 있었다. 종청산이 이쪽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그때 봤다는 말인가? 그때···?’


그날 밤, 셋 다 병기를 든 채 복도에서 종청산을 지나쳤을 때, 적어도 둘은 알아봤을 수 있다. 그가 조정의 사정을 빠삭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관리라고 가정하면!


어둠 속에서 빨갛게 빛났을 조경의 흰자위와 손에 낀 철수 그리고 공손신정이 든 철창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자라면.


맨 먼저 조경이 동집사창의 무환관임을 알아볼 거고, 그런 무환관과 동행할 만한 신분을 가진 데다가 창을 병기로 삼는 자는 금의위 위룡천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터.


게다가 헤어질 때 그 인사, 그 동작. 당시엔 엉거주춤한 줄만 알았던 그 동작이 실은 무심코 관리들의 예를 취하려다 재빨리 민간의 예로 바꾼 것이었다면?


그래, 그런 것이었다. 종청산은 관리다. 십중팔구!


‘종청산···! 관리였어···! 이런 한심한!’


그이를 그냥 지나쳤다니, 그리도 어리석었을 수가 있나.


종청산을 확보해야 한다. 그이가 관리라면 누구고, 무슨 영문으로 거기 있었는지 등 이런저런 사정과 관계없이 임무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정왕 주견신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고도 임무를 종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궁을 떠난 친왕과 관리의 접촉. 그 자체로 금기고 죄이므로.


이를 특정해서 보고하면 곧바로 황명이 하달될 것이다. 정왕 주견신은 즉시 환궁할 것이며 불응하면 추포될 것이라는 명령이.


‘저이의 피를 보지 않아도 돼.’


순간 가슴에 얹힌 것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은 실마리를 찾은 것에 불과했다. 종청산이 여기 없으니까.


‘종청산을 찾기만 하면.’


머릿속에서 온갖 정보가 명멸을 시작했다. 그와 딸 그리고 동행의 생김새, 행선지 등등 그날 그를 접했을 때 얻은 모든 정보가.




그렇게, 근방 도찰원 어사들을 총동원해야겠다며 결심한 유희가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는데, 조경이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국자를 빼앗았다.


“뜨다 말고 뭐 해? 안 먹어?”

“어? 어어. 먹어야지. 내 거야, 이리 줘.”

“참 나, 먹을 때 생각이라는 것도 하는 사람이었어?”

“생각은 무슨, 맛있어서 감탄 중이었지.”

“퍽이나. 먹고 뒤처리는 둘이 알아서 해.”

“어어, 그래야지.”

“···그래도 양심은 있네. 순순히 하겠다는 걸 보면.”


내기해서 결정하자고 할 줄 알았던 유희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자, 조경이 실소하며 자리에 가 앉았다.


피식—




#




잠시 후, 동상이몽의 밤이 깊어져 가고 있을 때 새로운 손님이 나타났다. 각각 여덟과 셋, 두 무리였다.


지청명의 유도를 받아 숙영지 가운데로 진입한 초로의 검사가 가장 우측의 견신과 가운데 세 호위, 좌측의 산서상인을 향해서 차례차례 예를 취했다.


“이 사람은 천진 정검당의 부당주, 손문이이오. 본당의 제자들과 양회의 혼란을 일소하고자 길을 나선 참이오. 금일 예서 유하고자 하오.”


보통 체구, 평범한 인상에 허옇게 머리가 센 손문이 허리에 꽂은 건 적갈색 검갑을 화려하게 치장한 검이었다.


그가 예를 취하자 그의 뒤에 나란히 선 일곱 남녀가 나란히 예를 취했다. 이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다양해 보였다.


[정검당의 ······ 이오.]


세 호위 쪽을 향해 인사할 때는 당당하다가도 견신이나 산서상인을 향해 인사할 때는 사뭇 거만해지는 태도가 저들이 전형적인 무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시각, 검을 세워 안은 채 눈을 감고 있던 견신이 살짝 고개를 주억였다.


끄덕—


그러면서 살짝 눈을 떴다.


정검당은 모르지만, 양회의 혼란을 일소하고자 길을 나섰다는 것은 지난번 종청산에게 들은 양회 지방의 혼란 즉, 회화 하류와 장강 하류 일대 왜구와 흑회의 격퇴를 돕기 위해서 왔다는 이야기. 일신 실력을 떠나서 목표와 의지는 높이 살 만 했다.


다음은 세 남녀였다. 삼사십 줄 남녀 둘은 도(刀)를 쥔 모습이 호위인 듯 보였고, 가운데 오십 줄 사내가 주군인 듯 보였다.


소개는 손문이 했다.


“여기 이분은 여정 중에 창주에서 만난 대가이시고 명가의 후예로서 선조가 역대 왕조에서 여러 관직을 지내셨다 하오.”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손 대협. 제남에서 온 보잘것없는 유생 서가 각이라 합니다. 이리 다들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콧대 높은 무사로 보이는 손문이 제 입장에는 한낱 먹물 따위에 불과할 사람을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건대, 서각이 꽤 많은 돈을 쏟아붓고 또 비위를 잘 맞춰준 모양이었다.


‘보잘것없는 유생이라···’


그렇게 잠시 심심풀이 삼아 정검당과 손문을 살피기 시작하는데 개살구들 너머에서 홍소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남 서가의 대가셨군요. 폐상 또한 제남 서가의 명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송(宋)대까지는 활발하게 출사하신 명문 명가이지요.”

“허허, 홍 행수께서 보잘것없는 가문에 금칠을 다 해주십니다그려.”


그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화답하는 서각. 날렵한 느낌의 인상에 더해 귀밑부터 턱까지 수염을 길게 두른 모습. 이목구비도 부리부리했고 눈에서는 어떤 기상이 느껴졌다. 언뜻 봐도 범부는 아니었다.


아무튼, 홍소화도 익히 아는 가문인 모양. 정검당은 몰라도 서각은 딱히 의심할 구석을 갖지 않은 듯 보였다.


한 가지만 빼면.




그처럼 견신이 정검당과 서각 일행을 살피는 눈을 가늘게 좁히는 그때, 때마침 그들이 손문의 유도를 따라 견신의 숙영지로 향하려다, 돌연 끼어든 공손신정의 제지를 받았다.


“허면, 저기 소협의 주변이 빈듯하니 그쪽으로 가···!”

“이 옆으로 오시오.”


여느 선비보다도 더 선비답고 올곧은 자세로 앉은 공손신정이 가리킨 곳은 산서상인과 세 호위의 사이였다. 새 손님들을 견신과 분리하려는 것.


대뜸 명령조로 지시하는 그의 태도에 손문과 서각이 찰나 안색을 붉히고 그를 본 홍소화와 지청명 등이 이채를 띠었으나, 그런 분위기는 금세 해소됐다.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야 할 입장인 손문과 서각으로서는 거절할 이유도 없고 또 고마운 제안이니까. 다만,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


“고맙소.”


그런 불만을 목소리에 담고 예를 생략하며 대꾸한 손문이 일행을 이끄는 그때였다.


공손신정과 그들 사이를 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니, 이쪽으로 오시오.”


검을 세워 안고 팔짱 낀 모습 그대로 서각을 직시하는 견신의 목소리였다.


“내 오른쪽을 쓰시오.”


공손신정을 비롯한 세 호위와 홍소와 일행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서서 그처럼 단호하게 매조지는 견신. 그가 어둠 속 범의 눈을 하고서 서각을 조명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시오.”


그때 마침, 걷힌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내려온 달빛이 서각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를 주시하는 견신의 시각을 돕는 듯이.


작가의말

거듭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주는 장염을 앓느라 여유를 갖고 연재하겠습니다.

그저 알림이 뜨면 ‘작가가 연재했나 보다’ 여기시고 찾아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모두, 안팎으로 호우 피해 없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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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4

  • 작성자
    Lv.32 jt*****
    작성일
    24.08.21 21:22
    No. 1

    잘 봤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89 한사
    작성일
    24.08.21 21:23
    No. 2

    좋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최고의망상
    작성일
    24.08.21 21:36
    No. 3

    즐감합니다
    빠른 쾌유를빕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세비허
    작성일
    24.08.21 22:12
    No. 4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홍곡
    작성일
    24.08.22 00:15
    No. 5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차돌초롱
    작성일
    24.08.25 17:40
    No. 6

    잘 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작은우주
    작성일
    24.08.29 22:46
    No. 7

    미망인이라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18:05
    No. 8

    친왕이 관리와 접촉하면 반역이라고?
    이마에 관리라고 써붙이고 다니면 모를까
    그걸 어찌 아나? 더군다나 위기에 처해
    도움의 손길을 바라고 먼저 접촉을 해온건데
    그걸 트집 잡겠다? 차라리 그냥 깨끗하게
    자객을 붙이지 그래.

    그리고 견신이도 참 답답하다.
    세 녀석을 모두 불러앉히고 담판을 내어
    달고 다니든지 아니면 싸그리 다 내쳐라!

    찬성: 16 | 반대: 0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9.01 19:35
    No. 9

    고경신의 5대조가 고사?
    그리고 선친의 이름도 고사?
    그건 뭐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하지만 홍소화는 다르다.
    자녀들이 모친의 성을 따르는게 아니니까.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rl****
    작성일
    24.09.09 14:49
    No. 10

    건필하세요 재미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GGJj
    작성일
    24.09.10 19:06
    No. 11

    친왕이 관리랑 접촉하면 반역이라는거 악용하면 그냥 무조건 보낼수 있는거 아닌가요?
    일부러 접촉하게하면 되잖아요?
    이건 좀 억지같네요..

    찬성: 11 | 반대: 0

  • 작성자
    Lv.73 xig
    작성일
    24.09.16 01:04
    No. 12

    친왕이 관리와 만나면 반역이라는 게 좀 와닿지 않는 내용이긴 해서 뭐 실제 사례가 있다면 그런 고사가 추가되면 좋을 거 같네요. 그리고 지주... 도 관리 아닌가?

    찬성: 4 | 반대: 0

  • 작성자
    Lv.99 djsejr
    작성일
    24.09.16 01:10
    No. 13

    세 호위에 대해서 습관부터 심상까지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아마도 특정 사건을 기화로 다들 조직을 배신하고 주견신의 고굉지신이 되는 그림이 아닐까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7 Letsbeo
    작성일
    24.09.16 08:33
    No. 14

    좀 애매하긴 하네요. 봉지에도 관리가 사방천지에 있을텐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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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7화 +16 24.08.30 8,226 365 18쪽
37 36화 +19 24.08.29 8,537 392 21쪽
36 35화 +13 24.08.27 8,478 385 19쪽
35 34화 +9 24.08.26 8,508 356 23쪽
34 33화 +17 24.08.23 8,866 407 20쪽
» 32화 +14 24.08.21 8,803 359 20쪽
32 31화 +23 24.08.20 8,871 360 18쪽
31 30화 +21 24.08.16 9,430 412 16쪽
30 29화 +20 24.08.15 9,012 456 21쪽
29 28화 +29 24.08.13 9,353 349 21쪽
28 27화 +23 24.08.12 9,088 373 20쪽
27 26화 +25 24.08.09 9,351 422 20쪽
26 25화 +20 24.08.08 9,775 363 18쪽
25 24화 +21 24.08.07 9,568 406 20쪽
24 23화 +19 24.08.05 9,530 369 21쪽
23 22화 +23 24.08.02 9,658 430 21쪽
22 21화 +14 24.08.01 9,903 367 18쪽
21 20화 +15 24.07.31 10,108 379 21쪽
20 19화 +21 24.07.30 10,054 44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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