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슬하
작품등록일 :
2024.08.01 11:15
최근연재일 :
2024.09.13 22:41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5,795
추천수 :
216
글자수 :
267,889

작성
24.09.02 09:10
조회
72
추천
5
글자
12쪽

34화 결투 (2)

DUMMY

렌 지크프리트는 천재였다.


어쩌면 미궁 도시 알레프에서 최강을 다투는 그녀의 조부, 로버트 지크프리트보다도 재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금방 기록을 빼앗기긴 했지만, 당시 최연소로 5레벨에 올랐고 지금도 누구보다도 최연소 6레벨에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기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녀에겐 검밖에 없었고, 그녀의 주변엔 기사단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기사단의 가치가 그녀의 가치가 되고, 기사단의 목표가 그녀의 목표가 됐다.


그녀는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좇고 싶은 걸 좇았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지금, 다른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또 하나의 천재를 보고 있었다.


“저게 정말 3레벨이라고?”


아무리 본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낙오자라지만, 약한 힘으로 강자를 상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투콰아아앙!!

학센의 검술은 비록 정해진 체계 없이 갈고 닦은 야인(野人)의 것이었지만, 그 파괴력과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균형감은 엄청났다.


가고일처럼 무식하게 힘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플로베처럼 특정 기술에 치중된 것도 아니다.


한 방 한 방, 한 걸음 한 걸음이 치명적이었다.

그저 실린 힘이 강해서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바탕으로 다음 수, 또 그 다음 수를 좀 더 유리하게 가져갔다.


그걸 가만히 막다 보면 상대가 더는 밀리지 않기 위해 언젠가는 도박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더욱 큰 힘으로 그 수를 누르면서 승리를 가져가는 타입.


하유성이 대련에서 늘 패배했던 그 수순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유성의 검은 달랐다.


모든 수가 철저한 변칙과 도박, 한 수 한 수에 너무 많은 가능성이 담겨있어 상대도 자신도 다음 수를 예상할 수 없게 만드는 극악의 변검이자 환검.


물론 그 사이엔 철저하게 몸에 익은 초식이 군데군데 들어가 있었지만, 초식의 정형(定型)조차 어지러이 얽힌 미로의 한 부분처럼 함정과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싸움법이지.’


자유로운 용병의 검술에서 균형을 찾아 정석을 만들어 낸 학센의 검술.


정해진 초식에서 시작해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하유성의 검술.


전투의 구도는 박빙, 혹은 하유성이 조금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렌은 이런 싸움은 결국 자신의 방식을 더 굳건히 지키는 쪽이 이긴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학센! 고작 갓 3레벨이 된 애송이를 상대로 밀리는 건 아니겠지?”


뒤에서는 그 전투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알랭이 조급해하며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닦달은 월급쟁이인 학센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우우우웅!!


마침내 그의 검에 푸른 빛이 어렸다.


검기를 사용해, 지금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기 위한 준비.


물론 그도 하유성이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알았지만, 몸에 쌓은 마력량의 차이가 절대적인 이점을 만들 터였다.


하유성도 그걸 알았기에 결코 정면승부 하지 않았다.


파천이검의 중반부 초식은 기본적으로 어마어마한 내공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하유성은 애초에 검이 두 개이니 내공이 많이 필요하기도 했다.


가능한 한 공격을 피하고, 어쩔 수 없을 때는 한쪽에만 검기를 방출에 막았다.


심장에 생긴 중단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기예였다.


‘하지만 저건 상대의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렌이 생각했다.


공방의 완성도, 기상천외한 수법, 막대한 출력과 속도···모두 전투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것들이었지만, 그녀의 수준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다른 데 있었다.


무인에게 전투의 방식은 곧 삶의 방식.

자신의 방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고수들의 싸움이었다.


놀라운 건 그런 수준의 전투를 고작 3,4레벨이 펼치고 있다는 것.


학센은 분명 검기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하유성을 점점 자신의 방식대로 끌어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진다. 어떻게 할 거냐?’


하지만 렌이 모르고 있는 게 있다.


하유성의 삶은 단순히 자유를 향한 몸부림만이 아니라는 것.


살아남기 위해 몇 달이나 폭탄 목걸이를 감수하고,

복수를 위해 몇 번이나 참았으며,

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을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그의 자유는 순간의 억압을 참되, 잊지 않는 것이었고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날 때부터 천재이자 강자의 위치에 있었던 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하유성의 오랜 인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쉬이익!

하유성을 반으로 쪼갤 듯 내리찍는 종베기를 몸을 돌려 피하며, 하유성은 그대로 넘어질 듯 학센에게 붙어가며 거리를 좁혔다.


다른 검에 비해 좀 더 긴 투핸디드소드는 근접전에 불리한반면, 하유성은 왼손에 든 소검으로도 충분히 좁은 거리에서 싸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도로 학센이 불리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의 검술은 결국 실전에서 길러진 것.


투두두두두!!!


그는 근접 박투술에도 강했다.


하지만 그건 다시 하유성의 방식.

눈앞에서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고,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즉석으로 생각해서 반응하고, 피할 건 피하고 맞을 건 맞으며 치명타를 노리는 싸움은 변칙 그 자체였다.


“크하하!!”


학센은 밀리지 않았고, 심지어 즐기고 있었다.

알랭 밑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아슬아슬한 싸움을 한 적이 언제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런 싸움이야말로 그의 근원이었고, 고향과도 같았다.


서로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학센!!”

뒤에서 알랭이 소리쳤다.


안다.

이렇게 하유성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고, 그걸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 잠깐 이렇게 어울리는 것은 잠깐의 여흥.


학센은 여전히 자기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인정한다.

하유성이 천재라는 것을.

이미 포기해버린 자신보다, 언젠가 더 높은 곳에 가기 충분한 자라는 것을.


그러나 그런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는가?

수많은 뛰어난 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했다.

하유성에겐 자신이 불의의 사고일 뿐.


파앙!!

그의 발차기가 하유성을 밀어냈다.


다시 거리를 벌어지고, 학센의 검에 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유성이 기다린 게 바로 이 순간이었다.


하유성의 검이 순식간에 뻗어나와 중구난방처럼 보일 정도로 막무가내로 휘둘러졌다.


학센은 검기를 끌어올리느라 상식을 벗어난 하유성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손해를 보진 않았다.

막무가내라는 건 곧 그만큼 약점이 많다는 것이었으니까.


“포기한 거냐!”


학센은 익숙한 몸짓으로 괴력과 검기를 실어 하유성의 검을 쳐내고 승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잡히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휘둘러지는 줄 알았던 하유성의 검은 어느새 푸른 기운이 가득 실린 채 수많은 환상을 그리고 있었다.


파천이검(破天二劍)

제 오 식(第 五 式)

사천(詐天)


검기는 빛. 빛이 지나간 자리엔 잔상이 남는 법이다.

파천이검의 다섯 번째 초식은 그 빛으로 하늘을 속인다.


쉬시시시식!!!


허초와 실초, 공격만이 아니라 방어하는 움직임까지도 뭐가 진짜고 가짠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하유성의 검이 움직였다.


학센은 그 와중에도 하나를 선택해 움직였고, 그 선택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었다.


어느 쪽을 찍어도 하유성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잡아둘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알랭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하유성의 검술은 고도의 환상이었기 때문에 직접 상대하는 학센이 아닌 바깥에선 그저 붕붕 허공을 가르는 검에 학센이 혼란을 느끼며 얻어맞는 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걸 이해하는 건 공간을 입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렌 지크프리트 정도의 고수뿐.


휘이익!!


마침내 학센의 검이 크게 허공을 가르며 빈틈을 벌렸다.


“끝이오.”


파천이검(破天二劍)

제 사 식(第 四 式)

극천난격(據天亂擊)


파바바바밧!!!


하유성의 난격이 학센의 몸을 난자했다.


학센은 그 와중에도 몸통에 들어오는 검격을 어찌어찌 검을 들어 막아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건,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용의 형상.


“그렇군. 추락이 두려우면 날 수도 없는 법이지···.”


털썩

학센은 결국 팔다리의 근육이 잘린 채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학센은 쓰러지지 않고, 한쪽 무릎만 꿇었다.


“승자가 정해졌네.”

렌이 말했다.


“이럴 수가···.”

알랭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역시 미궁 도시에서 내로라하는 권력 중 하나.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병력을 움직였다.


“움직이지 마라!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네 놈을 이렇게 보내줄 순 없다!”


그가 이런 식으로 그의 상단에서 나간다면 상단의 이미지는 추락할 게 뻔했다.


그의 뒤로 고용된 개척자들이 무리를 이뤘다.

학센만큼 강하진 않지만 4레벨도 셋, 3레벨은 열에 달했다.


애초에 이만큼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알랭은 하유성이 잠자코 있으리라 방심하고 있던 것.


하지만 지금도 하유성은 더 이상 마력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상처 입은 상태이니, 그를 다시 묶어두는 건 쉬운 일이라고 알랭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는 그 모든 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기사단 앞에서 결투 재판을 무시하려는 건가?”

당연하게도 렌이었다.


“상단의 일이오. 그쪽이 결투의 입회인이 된다는 말도 없었으니, 그쪽에게 결투를 수호할 자격은 없네. 아무리 기사단의 위세가 높다고 한들, 정녕 이 안에서 상단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시오? 겨우 기사단이 싫다는 3레벨의 개척자 한 명 때문에?”


알랭이 명분과 실리를 내세웠지만, 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냥 3레벨이 아니지. 4레벨을 이기고, 마나 블레이드를 이용한 기술을 제 맘대로 사용하는 3레벨 아닌가. 빚을 지워둬서 나쁠 것 없겠지.”


렌이 애초에 이곳에 온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용검 로버트 지크프리트의 명령 때문이었다.


언젠가 자신과 같은 세대에서 경쟁하게 될 수도 있는 인물을 보고 오라고 했던가.


고작 3레벨짜리를 그렇게 평가하는 조부의 말에 렌은 강하게 반발심이 들었지만, 직접 결투를 보고 나니 그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가 더 강해진 후에, 검을 섞어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같은 임무를 맡고, 같이 미궁을 개척할 수도 있으리라.


그만큼 하유성의 자유로운 검은 몇 수준이나 높은 렌에게 영감을 줬다.


“도대체 왜!!”


알랭의 패인은 그저 지금 이 순간 결투의 승패에 있지 않았다.


노예라는 조건을 믿고 하유성을 방치해뒀던 것.

앙금을 풀려고 하지 않고 물건으로만 생각했던 것.

하유성의 성장이 오직 그에게 이득만 가져다 줄 것이라 방치했던 몇 달의 시간이야말로 그의 패착이었다.


“정당한 결투에 따라 하유성은 노예가 아님이 입증됐다. 신분 보증은 기사단에서 하도록 하지.”


“필요 없소.”

하유성이 헐떡이며 말했다.

“집단에 빚을 질 생각은 없소. 더는 이용당하지 않고, 내 힘으로 나가도록 하지.”


“흥, 이대로 죽겠다는 말을 잘 돌려서 하네. 기사단의 보증이 싫다면 내 개인적인 보증으로 바꿔줄게. 빚이 아니라 호의와 은혜라고 생각해.”


렌은 처음으로 기사단과 자신을 분리하면서까지 하유성의 편을 들었다.


“······.”

하유성은 그것을 받을지 말지 고민하며 침묵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알랭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 싸움을 보고도 그걸 모르는 당신이 머저리인 거지. 지금이라도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게 어때? 언젠가 그가 진짜 거물이 됐을 때가 두렵지도 않아?”


렌 정도의 인물이 하유성이 거물이 될 거란 걸 확신했다.


알랭은 비로소 자기 그릇이 모자란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데려가시오. 당장.”

마침내 그는 결국 하유성을 포기했다.


마침내 하유성이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5 45화 보상 24.09.13 30 4 13쪽
44 44화 의뢰(4) +2 24.09.12 36 4 13쪽
43 43화 의뢰(3) 24.09.11 43 3 13쪽
42 42화 의뢰(2) 24.09.10 47 3 12쪽
41 41화 의뢰(1) 24.09.09 53 2 15쪽
40 40화 문천 24.09.08 54 2 12쪽
39 39화 팀 24.09.07 55 4 13쪽
38 38화 하피 24.09.06 57 4 13쪽
37 37화 사무소 24.09.05 68 4 13쪽
36 36화 심부름 24.09.04 69 3 12쪽
35 35화 가치 24.09.03 77 5 13쪽
» 34화 결투 (2) 24.09.02 73 5 12쪽
33 33화 결투 (1) 24.09.01 80 5 13쪽
32 32화 반항 24.08.31 82 3 13쪽
31 31화 낙차 24.08.30 82 3 14쪽
30 30화 수련(1) 24.08.29 86 4 13쪽
29 29화 추격(2) 24.08.28 97 5 13쪽
28 28화 추격(1) 24.08.27 101 4 13쪽
27 27화 마검(4) 24.08.26 98 4 13쪽
26 26화 마검(3) 24.08.25 98 3 12쪽
25 25화 마검(2) 24.08.24 101 4 13쪽
24 24화 마검(1) 24.08.23 113 4 13쪽
23 23화 정산 +2 24.08.22 112 4 13쪽
22 22화 횡재 24.08.21 111 4 14쪽
21 21화 토벌(2) 24.08.20 113 4 14쪽
20 20화 토벌(1) 24.08.19 131 4 14쪽
19 19화 정보 길드 24.08.18 126 5 13쪽
18 18화 스승님···? (2) 24.08.17 138 4 14쪽
17 17화 스승님···? (1) 24.08.16 136 4 13쪽
16 16화 선의 +2 24.08.15 137 6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