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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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작품등록일 :
2024.08.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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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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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0화 문천

DUMMY

파천이검의 중반부 초식은 사천(詐天), 문천(紊天), 망천(忘天), 고천(刳天)의 네 가지.


각각 하늘을 속이고, 어지럽히고, 잊고, 가른다는 뜻이었다.


하유성은 그중 제5식 사천은 이미 학센과의 전투 전에 완성하여 쓴 적이 있었다.


검기가 없을 땐 사용할 수 없었지만, 사천은 그 형(形)과 묘리가 비교적 하유성에게 익숙했던 덕이었다.


고도화된 환(幻)의 묘리, 그리고 검기의 파괴력보다 그 빛이라는 속성에 중점을 두어 환술을 거는 발상의 전환이 다섯 번째 초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초식인 문천(紊天)은 초식의 형을 알더라도 쉽사리 펼칠 수가 없었다.


문(紊)이란 질서를 어지럽히고 문란하게 한다는 뜻.


하유성은 그 이름답게 여섯 번째 초식 또한 변(變), 환(幻), 쾌(快)의 무리를 담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초식의 형은 우수검을 종으로 내리찍고, 좌수검을 횡으로 교차하는 단순한 십자(十字) 베기였다.


물론 단순한 움직임에도 변, 환, 쾌를 섞어낼 순 있다.

손목, 어깨, 몸짓, 시선 등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허초가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비급에는 그런 요령은 전혀 없고, 가장 빠르고 무겁게 휘두르는 구결만 존재했다.


파천이검은 비급이자 동시에 요결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책을 새로 만들었는지, 초식의 구결뿐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괴선 극라수의 첨언까지 적혀있었다.


문제는 기의 운용법이나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까지 자세히 적혀있는 다른 초식과는 달리, 제6식 문천에 대한 요결은 모호하기만 한 것.


[검기를 공간에 남겨두어라. 제대로 초식을 전개하면 일그러짐이 보일 것이다.]


극라수는 6식에 대해 그렇게만 적어두었다.


하유성은 처음엔 제5식처럼 빛을 이용해 잔상을 남기라는 뜻이라 생각해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그것도 쉽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빠르게 휘두르는 데 집중하고 나서야 하유성의 검은 충분한 속도에 다다랐다.


쉬이이잇!!

검기를 뿜은 채로, 거의 동시라고 할 만큼 빠르게 교차하는 두 칼날.


마침내 허공에 선명한 십자 모양 빛이 순간적으로 남았다 사라졌다.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상대는 둘 다 막아볼 엄두도 못 내고 2격을 허용할 것이다.


하지만 하유성은 만족할 수 없었다.


“일그러짐은···없군.”


일그러짐이란 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딱히 다섯 번째 초식과 다를 것도 없었고, 그리 위력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천천히 휘둘러봤다.


검기를 최대한 끌어내어 허공에 기를 뿌리며 초식을 전개하자, 절삭력을 가진 미세한 입자 같은 게 공중에 조금씩 남았다.


“이건가···?”


몇 번 비슷한 요령으로 휘둘러보던 하유성은, 이내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채 열 번도 해보기 전에 마력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던 것.


이제 내공량이 부족하진 않았는데도 이대로는 낭비가 너무 심했다.


잠깐 허공에 남는 줄 알았던 검기 입자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흩어졌고, 일그러짐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검이 워낙 느려 실전성도 없었다.


무겁게, 화려하게, 거칠게 휘둘러봐도 마찬가지.


각각의 무리를 적용해 보며 초식을 전개하는 데 며칠씩 걸렸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하유성은 답답함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몇십 년이나 이 초식들을 익혀왔다. 검기를 쓸 수 없음에도 동작을 따라 했고, 경공을 쓸 내공이 부족해도 기를 쥐어짜 한 걸음씩 연습했다. 그런데 왜···!”



내공 부족이라는 제약이 사라진 지금, 하유성은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너 정도면 조금 천천히 해도 된다. 이미 충분히 강한데, 뭘 그리 조급해하냐?”


수련을 마치고 돌아와 굳은 표정으로 있는 하유성에게 에록이 말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생각보다 젊지 않소. 벽에 막힐 때마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 ‘너는 애초에 검을 휘두르면 안 되는 재능이었다. 인생을 허비했구나. 네게 지금 남은 게 뭐냐?’ 그런 목소리가 들리면 참을 수가 없소.”


하유성이 한탄에 차 말하자, 에록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 세계에서 네겐 수많은 기회가 있지. 그걸 잊지 마. 지금 너를 얽매고 있는 건 너뿐이야.”


“얽매고 있는 건 나뿐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


“혼자 검만 휘두르면서 끙끙대봤자 마음의 문제만 깊어질 거다. 가끔 다른 사람도 만나고 해.”


“흠, 알겠소. 그럼 말 나온 김에 대련이라도?”

당연히, 에록은 하유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는 몇 번 대련해 봤지만, 이미 은퇴한 에록은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싫어. 너라면 내 공격은 다 막히고, 네 공격은 다 맞는 걸 또 하고 싶겠냐?”


“그러면서 느는 것이오.”


“그래. 근데 심지어 너는 나보다 빨리 늘지. 그런 사람이랑 대련하는 건 최악이라고.”


하유성은 그나마 함께 대련할 수 있었던 학센의 존재가 조금 아쉬웠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학센은 부상으로 알랭의 저택에서 해고당하고 미궁 도시를 떠난 모양이었다.


‘치명상은 입히지 않았으니, 그 정도 실력이면 어딜 가든 잘살 테지.’


하유성은 학센에게 가지고 있던 은혜와 원한의 양가감정은 그를 베고, 살려주는 것으로 풀어냈다.


단순하지만 충분한 힘 없이는 불가능한 해답이었다.


‘힘은 곧 선택의 자유이자 신념의 관철이다···. 그렇다면 파천이검의 주인은 어떤 신념으로 이 검술을 만들었는가···.’


파천이검(破天二劍)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하늘을 깨트리는 걸 목표로 한다.

모든 초식 또한 하늘을 우롱하고 이겨내려는 듯,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파천이검을 만든 사람이 깨트리고 싶었던 하늘은 무엇인가?


아마도 아주 강력하고 답이 없는 대상이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을 하유성은 검술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부수고 싶은 하늘은 무엇이지?’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갔다.


에록은 하유성을 얽매고 있는 게 하유성 자신이라고 했다.

‘나는 나를 부수고 싶은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엇을 부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날부터 하유성의 수련은 반은 명상으로, 반은 검술로 나뉘었다.


검술 수련은 검에 변화를 주다가, 이번에는 검기에 변화를 주는 연습을 했다.


머리카락처럼 얇고 가늘게 검기를 뽑아 휘두르기도 했고, 망치처럼 묵직하게 뽑아내기도 했다.


휘어지게 만들기도 했고, 한 번에 쭉 뻗어나갈 수 있도록 연습하기도 했다.


물론 하유성의 머릿속에 있는 파천이검의 비급 속에는 어떤 기맥을 따라 검기를 방출해야 하는지 나와 있었지만, 기 그 자체를 다루는 연습을 위함이었다.


절정 고수에 오르며 얻었던 깨달음.

검을 신체의 일부로 여긴다는 것은 곧 신체에 갇혀있던 마음의 형상을 바꾸는 일.


‘검은 베어내기 위한 것. 베어내고자 하는 것을 베는 것이 곧 나의 마음.’


그의 몸, 그의 검, 그의 검기는 어떤 형태를 취해서든 베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베어내어야 했다.


검기의 변형은 베어낼 대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연습이었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건 곧 검기를 변형시키는 연습이었다.


하유성은 한동안은 그걸 연습하는 재미에 빠져있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제6식 문천(紊天)은 대형 마물을 죽이는 거대한 십자가가 되기도 했고,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마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거친 발톱이 되기도 했다.


사람을 상대로 방어를 걷어내고 후속타를 날리는 비장의 일격이 되기도 했으며,

언젠가 하유성이 상대했던 가고일처럼 돌로 이루어진 마물을 깨부수고 짓이기는 강격(强擊)이 되기도 했다.


‘검술은···상대를 필요로 하는구나.’


상대에 따라 자신을 맞추고, 상대의 최선을 고려하며 나의 최선을 찾아간다.


그건 생각보다도 어려우면서···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베고 싶은 대상을 찾았다.


‘조급함. 조급함을 베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를 더 똑바로 바라보고, 강해지는 매 순간을 더 만끽할 수 있다는 걸 하유성은 깨달았다.

스스로를 얽매고 있다는 에록의 말도 같은 맥락일 터였다.


자신의 조급함을 베어낸다는 것.

그건 곧 삶의 모든 순간을 좀 더 뚜렷하게 인식하고, 세계에 새기는 것.


하유성은 명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길이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빼 들고, 이제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일신의 내공을 구결에 따라 돌렸다.


[검기를 공간에 남겨두어라.]


그 말은 곧 마음을 공간에 새기라는 것.


강함을 향한 자신의 초조함을 베어라.

상대 없이 홀로 검을 휘둘러왔던 과거를 베어라.

재능과 조건에 대한 집착을 베어내라.


하유성은 두 번의 칼질로 그 모든 마음을 베어냈다.


파천이검(破天二劍)

제 육 식(第 六 式)

문 천(紊 天)


푸른 검기를 두르고 내리찍는 일검(一劍)에, 다시 한번 검기가 피어오르며 앞에 나온 검기를 잘랐다.

횡으로 교차하며 뒤따르는 이검(二劍)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검기를 잘라냈지만, 이번에는 앞선 일검이 남긴 검기와 만나 공명하며 더욱 강한 빛을 발했다.


검이 교차한 틈새로 검기가 짙게 남으며 공간이 갈라졌다.


잠깐이지만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그의 의지가 세계에 현현(顯現)한 것.


그게 바로 파천이검의 여섯 번째 초식인 문천이었다.


‘아마 원래 검술을 만든 사람이 자르고자 했던 하늘은 나의 조급함과는 다른 것이었겠지.’


중요한 건 자기 극복과 상대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초식은 하유성만의 문천이라 볼 수 있었다.


‘무엇을 베고자 하는지에 따라 무리(武理)가 달라지는 법이구나.’


하유성은 단순히 여섯 번째 초식을 쓸 수 있게 됐을 뿐아니라, 모든 초식에 검기를 좀 더 적합한 형태로 뽑아낼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너무 조급하지 않기로 한 이후로는 사무소 일을 하거나 미궁에 들어가는 임무를 수행할 때도 더 유연하게 대처하게 됐다.


“요즘 좀 진전이 있었나 봐?”

여유로워진 하유성의 얼굴을 보고 에록이 말했다.


“많이 티가 나오?”


“아주 사람이 달라졌지. 전에는 융통성이 없어서 언제 죽을까 맨날 걱정했다고.”


“그만큼 약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이놈아. 더 강하고 독한놈을 만나면 바로 들이받고 부러질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무튼! 새로 들어온 일이나 또 받아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을 쓰는 사람이 일을 맡아야 한 대서 널 기다리고 있었지.”


“조금 이상한 조건이구려. 알겠소.”

방금 막 일하고 온 참이었지만, 하유성은 잠자코 에록이 내민 의뢰서를 받았다.


“좀 살벌해 보이는 기사가 주고 갔어. 배달 업무고, 조건은 이상해도 돈은 두둑하게 주더라고. 부탁할게~”


“금방 다녀오겠소.”


하유성은 종이로 감싼 상자 하나를 받고, 정해진 주소지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에록이 살벌해 보인다고 한 말에 딱 어울리는 기사가 나왔다.

‘본인일 리는 없겠지.’

본인이라면 굳이 이곳으로 짐을 맡길 리가 없었다.


기사는 바로 물건을 받아 들지 않고 말했다.

“이 안에 계신 분에게까지 전달하는 게 의뢰다.”


“알겠소.“

의뢰 내용을 아는 것 보니 정말로 의뢰인이랑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하유성의 머리에 스쳤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에는 은발은안의 체구 좋은 노인이 앉아있었다.


하유성은 최근에 저런 머리카락을 봤다는 생각이 났다.


”어서 오시게. 로버트 지크프리트라고 하네.“


···렌과 같은 머리색. 같은 성.


기사단의 장, 용검 로버트 지크프리트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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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문천 24.09.08 54 2 12쪽
39 39화 팀 24.09.07 55 4 13쪽
38 38화 하피 24.09.06 57 4 13쪽
37 37화 사무소 24.09.05 68 4 13쪽
36 36화 심부름 24.09.04 69 3 12쪽
35 35화 가치 24.09.03 77 5 13쪽
34 34화 결투 (2) 24.09.02 72 5 12쪽
33 33화 결투 (1) 24.09.01 80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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