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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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작품등록일 :
2024.08.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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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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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33화 결투 (1)

DUMMY

현재 미궁도시 알레프의 기사단장은 괴물이라 불리는 8레벨의 초인.


용검(Dragon sword) 로버트 지크프리트.


용(龍)의 칭호는 하유성이 살았던 중원에서는 보통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에게 주어지는 별호였지만, 이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수호와 파괴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는 평생 기사단의 대의에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왔다.


그 대의란 바로 미궁의 완전 정복.


열다섯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미궁의 끝을 보고, 전설로만 내려오는 마신과 담판을 지어 다시는 ‘미궁 역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고대의 바르톨 대제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일한 기사단의 목표였다.


언제나 가장 처음으로 미궁 심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오는 곳.


당연히 과감한 미궁 공략 탓에 언제나 인재 부족에 시달렸고, 이번에 하유성을 영입하려고―사려고 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어이구, 거물이 오셨구먼.”

알랭이 말했다.


당연히 기사단장이 직접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거물이란 말을 들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 기사단장의 하나뿐인 손녀이자 제자, 렌 지크프리트가 알랭의 저택에 왔으니까.


“4레벨을 이겼다는 말이 자자한 초신성인데, 5레벨 정도는 와야겠죠.”

그녀는 무려 5레벨의 검사였다.


이미 기사단 내부에서는 플로베가 하유성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사냥개 플로베’에서 ‘개목줄을 찬 플로베’라는 멸칭까지 생겼을 정도.


“허허, 렌 님이 어디 보통 5레벨입니까? 열다섯 살 때부터 미궁에 들어가 십 년 만에 5레벨이 되셨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합니다그려.”


“결국 최연소는 아리아 그것에게 빼앗겨 버렸지만요. 뭐, 인사치레는 이쯤하고, 그 사람 지금 어딨죠?”


“곧 올 겁니다.”


알랭이 대답하기 무섭게 응접실 문이 열리며 학센이 하유성을 데리고 왔다.

하유성은 상품을 보여줘야 한다는 알랭의 생각 때문에 무장까지 전부 갖춘 상태였다.


“알랭 님. 데리고 왔습니다.”


“오 그래. 잘했네.”


렌 지크프리트는 대뜸 하유성의 앞에 서서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엇이오?”


“이 자식! 말을 조심해라. 그분은 우리 기사단의 간부, 렌 지크프리트 님이다.”


렌을 수행하러 온 준기사가 말했다.


“너, 3레벨에 오른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벌써 마나 블레이드를 쓸 수 있구나? 이전 세계에 있을 때부터 쓸 수 있었나? 그러면 즉시전력감인데.”

단박에 하유성의 경지를 알아본 그녀는 급기야 하유성의 몸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진 않소. 검기는 아직 익숙지 않소.”

상대가 고수임을 느낀 하유성이 긴장한 채 말했다.


“그래? 아쉽네. 낙오자들은 재능의 크기를 짐작하기 쉽지 않단 말이지. 원래 세계의 경지를 따라잡을 뿐인지, 원래 능력이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그녀의 말은 낙오자의 본질을 찌르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특출난 낙오자를 보고 특이한 능력에 눈을 빼앗겼지만, 진짜 강자들의 세계에선 어느 정도 통하지 않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


“그래도 일단 센스는 있습니다.”


학센이 대신 말했다.

알랭을 위해 하는 말인지, 하유성을 위해 하는 말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저씨는 4레벨이잖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주제넘게 나서지 마.”


“······.”


렌 지크프리트는 단박에 학센을 조롱하곤 무시했다.


거의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날 텐데도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그만큼 모든 면에서 학센이 비빌 게 없었기 때문.


속한 단체의 위상도, 본신의 레벨과 힘도, 명성도 학센과는 격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그게 렌 지크프리트였다.


“너무 그러지 마시구려. 나름 같이 수련도 하면서 정이든 모양이니.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하던 차에 기사단에게 넘기자 제안한 것도 그요.”


알랭이 말했다.

하유성은 자신을 처분한다는 말에 기가 찼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무슨 짓이긴, 네게 기사단에 들어갈 기회를 주는 거다.”

이번엔 학센이 말했다.


“누가 그런 기회를 달라고 했소?”


“허, 보자 보자 하니까 이놈이?”

학센과 하유성이 신경전을 벌였다.


“그만.”


그때 렌의 기세가 응접실 공간을 짓눌렀다.


“네 재능은 알겠다. 너 내 위협에 전부 반응하더군. 여기까지 완성되어 있다니 제법이야.”


렌은 하유성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깨, 팔, 다리, 허리 등을 조금씩 움직여 공격할 수 있는 낌새를 보였다.


그때마다 하유성은 자신도 조금씩 몸을 조정해 언제든지 기습에 대처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고, 그게 바로 렌의 시험이었던 것.


“···다 막아낼 자신은 없었소.”

하유성이 분한 듯 말하자 렌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뭐? 하하하! 어느 정도는 막을 자신이 있었단 거냐? 이거 완전 웃기는 놈이로군.”


챙!

렌은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발검해 하유성의 몸통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하유성은 검 두 개를 모두 사용해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고도 힘이 부족해 뒤로 쭉 밀려나 벽에 부딪히기까지 했지만, 후속 공격은 없었다.


“하하!! 정말 내 공격을 막아내잖아? 좋아! 이놈을 사지.”

렌이 알랭을 보며 말했다.


“훌륭한 결정이요. 내 도량이 모자란 탓에 다 담지 못했지만, 저 녀석은 분명 물건이 될 겁니다.”

알랭은 손바닥을 비비며 하인에게 하유성의 빚 내역과 계약서를 가지고 오라 지시했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하유성은 벽에 밀려난 채로 검을 잡았다.


“뭐라고?”

알랭과 학센, 그리고 렌과 그를 수행하는 이들까지 전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하유성을 바라봤다.


“부당하게 빚을 지우고 부려 먹더니, 이제는 맘대로 날 팔아? 지랄하지 마시오. 차라리 죽을 테니. 당신만 한 강자와 싸우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유성은 지금껏 눌러왔던 불만을 터트렸다.

갑자기 빚을 지우고 노예로 삼은 것, 전시장의 물건처럼 대한 것, 그리고 이제는 맘대로 팔아넘기는 것까지.


원래 힘을 모아 상단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하유성이지만, 만약 이런 식으로 팔려나가는 걸 한 번 수용해버리면 복수고 뭐고, 이젠 아무 의미도 없는 셈이었다.


“자네가 드디어 정신을 놓았구먼.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내 손에 있는 기폭 장치가 두렵지 않나? 이거면 자네가 바라는 강자와의 싸움 속에서 죽는 일 따윈 없네.”


알랭이 기폭 마법진이 걸린 종이를 흔들었다.


렌 지크프리트는 처음엔 좀 당황한 듯하더니, 곧 흥미롭다는 듯 뒤로 물러나 알랭과 하유성 사이의 갈등을 지켜봤다.


“머리통이 터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노예답게 시키는 말이나 잘 듣게나. 응? 지금까지 잘 했잖아. 이제 와 그러는 이유가 뭔가? 고작 그 알량한 힘 좀 생겼다고 왜 그렇게 까부는 거야? 허망하게 죽을 생각인가?”


“힘. 그래 힘이 맞소. 덕분에 힘을 길렀지. 이런 힘도 생겼소.”


스윽


“엇···!”

학센이 당황해 말리려는 순간, 하유성은 자신의 목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물론 진짜 목을 그은 건 아니었다.


화르륵!

칼이 스쳐 지나가자, 알랭의 손에 있던 기폭 마법진이 재가 되며 사라졌다.


하유성의 목에 있던 목걸이도 마찬가지.


“아니···! 어떻게!!”

알랭은 허망한 얼굴로 재가 된 종이를 바라봤다.

그가 불태운 건 최소 5레벨은 되는 마법사가 한참을 집중해도 풀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마도구.


권력자들이 약한 모험가를 부릴 수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기도 했다.


“뭐, 자르니까 잘린 것뿐이오. 당신이 좋아하는 힘이지. 나는 이제 홀로 설 힘을 가져야겠소.”


“이···이런 말도 안 되는. 아무리 그래도 노예인 네가 이 도시에 갈 곳이 있을 것 같으냐? 지금 학센을 비롯한 내 사병으로 너를 죽여버릴 수도 있어!”


“해 보시오. 이렇게 팔려 다니느니, 이제 내가 싸울 곳은 내가 정해야겠소.”


알랭이 눈짓하자 학센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도망치려는 노예는 사형이다. 네 처형은 공식적으로 학센이 맡도록 하지.”


알랭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금방이라도 하유성과 학센이 격돌하기 직전, 그 사이로 유유히 은빛 머리칼을 날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잠자코 지켜보던 렌이 개입한 것.


“잠깐, 거래가 개판이 된 것 같은데 상황 좀 정리하지.”


“···부끄럽지만 우리 상단의 일이오.”

알랭은 렌이 하유성을 제압하고 그의 가격을 조정하리라 생각했다.


종속의 목걸이라는 제어 수단이 사라진 지금, 하유성의 가치는 폭락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알랭의 속이 적잖이 쓰려왔다.


그러나 렌은 애초에 하유성을 제압할 생각이 없었다.


“거기, 너. 설마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 거냐?”


“···플로베에게 듣지 않았소? 나는 어디 소속될 생각이 없소.”


“그분보다는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지. 그놈은 그래봐야 유망주 취급을 해준다고 했겠지만, 내 밑으로 오면 너는 바로 팀장급이야. 준기사를 부리며 승승가도를 밟을 수 있다.”


그녀는 단순히 하유성이 조건이 안 맞아 하유성이 거절했다고 본 모양.


플로베가 보고를 허투루 한 건 아니었다.


“나는 당신들의 가치에 관심이 없소. 그저 검이나 휘두르면서 살면 족하지.”


“하, 검은 얼마든지 휘두르게 해줄 수 있어. 아마 훨씬 좋은 스승과 동료도 만날 수 있을 걸? 하지만 그래. 방금 네 대답으로 기회는 끝났다. 기사단의 가치. 확실히 그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야. 너는 와도 안 받는다.”


“이해해 주어 고맙소.”


“이보시오! 이게 무슨···!”

알랭이 당황해 말했다.


기사단은 자신들의 가치를 중시하기에, 타인의 가치를 쉽사리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될 정도로 미궁 도시에는 자신들과 같은 가치를 가진 이들이 많기도 했고, 지나치게 다양한 가치관들이 미궁 도시에 판치기도 했다.


홀로 설 힘을 가지고, 검을 휘두르고 싶다는 하유성의 가치는 적어도 렌의 시험은 통과한 셈.


“감히 기사단을 걷어찬 건 괘씸하지만, 그래도 헛걸음은 아닐 정도로 재밌었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러나 렌의 질문에 대답한 건 하유성이 아닌 알랭이었다.


“주인 된 입장에서 민망한 모습을 보여 부끄럽군요. 부디 더 부끄러운 일을 보이지 않게 해주시지요.”

완곡한 축객령이었지만, 렌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난 결말이 궁금한걸. 재판 방식은 물론 결투겠지?”


“천한 노예와 결투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알랭은 하유성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물론 학센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설령 지더라도 병사들을 이용해 죽여버릴 생각.


그러나 렌은 계속해서 어깃장을 놓았다.


“저쪽은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는 주장이잖아. 신성한 도시의 법도에 따라 재판 방식을 정해야지. 마침 나라는 공증인도 있으니, 결투가 제일이고 말이야.”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일단 여기서 이러는 것도 우스우니 밖으로 나가도록 하지요.”

알랭은 불쾌함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놓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간다면 저택의 다른 이들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것이고, 학센이 아닌 알랭의 사병들이 몰려올 시간을 벌 터였다.


“고맙소.”

그럼에도 하유성은 잠자코 밖으로 나가며, 렌에게 말했다.


그녀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최소한 비겁한 수에는 당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렌은 대답하지 않고 먼저 밖으로 나가 구경하기 좋은 위치에 섰다.


“지금이라도 다시 잘못을 빌고, 빚을 갚겠다고 해라. 너는 살아 나갈 수 없어.”


학센이 하유성을 향해 말했다.

그는 애병인 투핸디드소드를 만지작거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제 그렇게 살진 않겠소. 지금까지 여러모로 고마웠소.”


“미련한 녀석···.”

두 사람이 조용히 말하는 사이, 알랭은 뒤편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배은망덕한 네놈을 심판하겠다. 상단의 재산인 노예 주제에 상단에 피해를 끼치고, 심지어 도망치려고 한 죄. 그 죄를 물어 학센이 너를 신성한 결투로 처형할 것이다.”


“나는 노예가 아니오. 지금까지는 힘이 없고, 그래도 구해준 은혜가 있기에 그대 밑에서 일했지만 이젠 그럴 생각이 없소.”


“흥, 헛소리. 빨리 저놈을 죽이게. 저놈 때문에 낭비한 시간도 이만저만이 아니군.”


알랭의 명령에, 학센은 망설임을 지웠다.


나름대로 정도 주려고 하고,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서로 봐줄 수는 없었다.


“결국 널 내 손으로 보내는구나. 유감은 없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는 것. 피차 알지 않았소. 난 죽이지는 않겠소.”


“큭 건방진.”


두 사람은 더 말을 나누지 않고 검을 들었다.


많은 길을 돌아왔고, 이 마음 저 마음이 뒤섞이긴 했지만, 처음 미궁에 들어갈 때 하유성이 다짐했던 복수가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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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8화 하피 24.09.06 57 4 13쪽
37 37화 사무소 24.09.05 68 4 13쪽
36 36화 심부름 24.09.04 68 3 12쪽
35 35화 가치 24.09.03 77 5 13쪽
34 34화 결투 (2) 24.09.02 72 5 12쪽
» 33화 결투 (1) 24.09.01 80 5 13쪽
32 32화 반항 24.08.31 81 3 13쪽
31 31화 낙차 24.08.30 81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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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9화 추격(2) 24.08.28 97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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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마검(3) 24.08.25 98 3 12쪽
25 25화 마검(2) 24.08.24 100 4 13쪽
24 24화 마검(1) 24.08.23 112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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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화 횡재 24.08.21 111 4 14쪽
21 21화 토벌(2) 24.08.20 112 4 14쪽
20 20화 토벌(1) 24.08.19 130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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