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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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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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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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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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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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심부름

DUMMY

이 세계에 떨어져 처음으로 하유성이 가진 직업은 소정의 돈을 받고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해주는 심부름꾼이었다.


여차할 때 미궁에 들어갈 수도 있고, 도시가 돌아가는 상황도 좀 알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선택한 일이었다.


문제는 너무 박봉이라는 것.


물론 당장 임무를 받아 미궁에 들어간다면 한 번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겠지만, 돌아갈 장소도 없이 미궁에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행크의 조언이 있었다.


심부름 사무소의 장은 자기를 ‘탐정’이라 부르는 3레벨 개척자 에록.


“우리는 혼자 힘으로는 밝힐 수 없는 삶의 어둠을 몰아내는 거야. 그냥 심부름꾼이 아니라고.”


턱수염도 깎지 않고 사무실 의자에 눕듯 늘어져 있는 에록이 말했다.


중년 독신의 개척자였던 그는 평생 번 돈을 사무실 하나를 차리는데 모두 투자했다.


덕분에 사무실은 꽤 번듯했지만, 문제는 사업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삶의 어둠이란 게 불륜이나, 물건을 배달하는 일이오···?”


“그럼! 불륜만큼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게 어딨겠나? 그리고 어떤 이들은 위의 순간 손에 든 물건 덕에 목숨을 구하기도 하는 거야.”


“그냥 돈 되는 거면 무엇이든 한다고 솔직히 말하시오.”


고작 며칠 일했을 뿐인데도 두 사람은 꽤 허물없이 지내게 됐다.


에록은 넓은 사무실 일부를 개조해 하유성의 방으로 쓸 수 있게 해주었지만, 본인도 이미 다른 쪽 구석에 살고 있었다.


에록이 워낙 털털한 성격이기도 하고, 동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편해지기도 했다.


“나도 원래는 살인 사건 같은 걸 조사하는 일을 맡고 싶었지···근데 그놈의 정보 길드가 너무 커져서는···!!”


이 세계에서 정보 길드의 힘은 가히 압도적.


그런 단체가 체계도 잘 갖추고, 심지어 가격에서도 경쟁 상대가 되질 않으니 에록이 바라던 탐정 사무실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음 일은 무엇이오.”


“이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지. 한 작은 상단의 자제가 아카데미에서 따돌림을 당했대. 자네가 가서 아는 형인 척을 하고 위협 한 번 해줘. 좋은 일이지?”


아카데미는 중원의 학당 같은 곳이었다.


하유성이랑은 여러모로 인연이 없었지만, 다양한 학문 외에도 마법과 검술까지 가르치는 곳이라던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애들을 협박하란 말이오?”


“뭐 때리고 나쁜 짓을 하란 게 아니라 불쌍한 애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약자를 돕는 일이라니깐?”


“미궁에 들어가는 일도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 임무가 우리 사무실에 어디 흔한 줄 알아? 있으면 바로 맡길 테니까 일단 다녀와 줘. 내가 형인 척을 할 순 없잖아?”


에록이 턱수염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확실히 누가 봐도 아저씨인 그에겐 무리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애들이랑···.’

알맹이는 중년인 하유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의뢰서를 읽고 검토하며 길을 나섰다.


비록 이런 일일지라도 스스로 직업을 골라 월봉을 받으며 일을 하니 제대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어디 보자···. 보호 대상은 아슬란. 16세. 행정 학부. 괴롭히는 놈들은 같은 학년 검술 학부···.”


처음에는 자기 힘을 기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써서 또래를 위협하는 게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행정 학부와 검술 학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 끝나고 뒷골목으로 부를 계획이라···. 정해진 때 가서 위협만 해도 된다니 일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군.’


일을 의뢰한 부모가 상황을 잘 만든 건지, 애가 잘한 건진 몰랐지만 아무튼 하유성은 자신이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지켜줘야 하는 상황은 아니란 데 만족하기로 했다.


“······.”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됐을 때의 얘기.


“네가 감히 우리를 오라 가라 해?”


“뭐 함정이라도 파뒀어, 이 새끼야?”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 한쪽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한 소년.


하유성은 가까스로 용모파기를 통해 그가 의뢰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일찍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낭패를 볼 뻔했군.’


“거기, 얘들아. 잠깐 멈춰보거라.”


“뭐야? 아저씨 설마 지금 애들 일에 끼어들려는 거예요?”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개척자인 것 같은데, 설마 흉악한 마물을 죽이던 손으로 애들을 겁박하려고?”


“······.”


과연 미궁 도시의 애들이라 그런지, 놈들은 처음부터 자기들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끼어드는 어른을 바보 만들고, 가만히 놔두게 하는 화법.


만약 좀 더 개입하면 소란을 피워 하유성을 망신줄 속셈인 게 보였다.

이러면 힘으로 위협하는 하유성이 오히려 민망해질 형국.


“그래도 힘도 없는 친구를 그렇게 대해서야 되겠느냐?”


“마력도 없는 애들끼리 하는 장난인데요?”


“힘없는 애들한테 뭐라 하는 건 아저씨 아닌가? 킥킥.”


사아아아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원래 하유성의 계획은 적당히 훈계하고 기합이라도 준 다음 보내는 거였다.


그러나 척 봐도 그 정도로는 고쳐먹을 것 같지 않은 이들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뭐···. 뭐에요? 진짜 힘이라도 쓰···억!”


두 사람의 목이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구석에서 맞고 있던 소년, 아슬란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으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를 괴롭히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


“이런 씨발! 지금 친 거야?”


“어른이 이래도···억!”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두 사람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어떤 수법이었는지 볼 수 없는 건 검술 학부의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뺨이 얼얼한 데도, 눈앞의 남자는 멀뚱한 자세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장난쳐요? 지금···악!”

이번에는 좀 더 빨리 고개가 돌아갔다.


여전히 세 소년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꾸 말을 하다 말지 말고 똑바로 말하도록. 자리가 불편하면 저쪽으로 가서 천천히 얘기해 볼까?”


“누가 지금 이딴 수법에···!? ······! ·········.”


다시 한번 두 사람의 머리가 돌아갔고, 이번에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혈도를 집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잠깐 돌아봤다가, 멀뚱히 서 있는 네 사람을 보고는 제 갈 길을 갔다.


“······!” “······!”


두 사람은 뭔가에 걷어차이는 모양새로 주춤주춤 골목으로 걸어갔다.


“너도 와라. 아슬란.”


“아 설마···!”


아슬란은 그제야 하유성이 자신이 고용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이동한 후, 하유성은 두 사람의 아혈을 풀었다.


“켈록 켈록···!”

“저희한테 왜 이러세요···.”


마침내 겁에 질린 두 사람은 창백한 얼굴로 하유성을 바라봤다.


“고작 길에 있는 사람들을 믿고 그렇게 건방지게 굴었던 건가?”


“···죄송합니다.”


다시 두 사람의 따귀가 돌아갔다.

이번에는 두 사람에게도 팔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보이는 게 더 공포를 자극하기 때문.


“검을 차고 있던데, 한 번 휘둘러 볼 거야? 힘자랑 해봐.”

하유성이 검집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흰 그냥···.”


“때리고는 싶은데 맞기는 싫지? 너희들이 믿는 거,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다. 검술 학부 2학년의 헥스와 제일런. 어디 한번 계속 그따위로 굴어봐.”


하유성이 가벼운 살기를 섞어 말하자, 두 사람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자기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의문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겁에 질렸다.


“너희 말대로 나는 어른이니까, 누가 보는 데서 너흴 어쩔 수는 없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부디 선을 넘지 마라.”


궤변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이 앞으로 어떻게 지내는지는 여기 아슬란에게 듣도록 하지. 나는 아주 집요한 사람이거든.”


“···네. 알겠습니다.”


“접선 방법은 따로 이쪽에 알려줄 테니 너희 둘은 이제 꺼지도록.”


두 사람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러고 나서야 하유성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정말 못 할 짓이군.”


‘아는 형’이라는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름대로 바꿔봤는데도, 이런 연극을 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완벽했어요!”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록 탐정 사무소였습니다.”


“좋아요.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바로 잔금을 입금하도록 할 게요. 저놈들. 이제 제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겠죠? 큭큭.”


“될 수 있으면 아카데미 내부에서 손님 편을 만드시길 바라오. 외부의 힘보다는 내부에 있는 내 편이 훨씬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하유성은 나약해 보이는 소년 아슬란에게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봐.”

그러나 떠나는 그를 싸늘한 목소리의 아슬란이 붙잡았다.


“할 말이 남았소?”


“돈 받고 일하는 쪽이면 시킨 일만 해요.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재수 없게!”


오히려 그는 하유성을 밀치더니 먼저 길을 나섰다.

“퉤!”

가는 길에 침까지 뱉는 아슬란의 얼굴은 표독스러운 악의로 물들어 있었다.


“허어···.”


하유성은 이 일이 에록의 말처럼 약자를 돕는 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아슬란이 악한 심성을 가졌기에 약자가 아닌 것이 아니다.

약자는 악할 수도, 강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유성은 악한 약자를 돕는 데는 딱히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슬란은 강자였다.

하유성을 고용해 쓸 수 있을 만큼의 자금력을 가진 강자.


결국 자신도 부조리한 힘을 행사했을 뿐이란 걸 느끼고, 하유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힘을 가지기 위해 살았지만, 힘이 생길수록 그것을 쓰는 방향을 신경 쓰게 되는구나.’


힘이 별로 없을 때는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없었고, 억울한 일을 더 많이 당했기에 힘을 써야 하는 순간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러나 강해질수록, 할 수 있는 게 많아질수록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많아질 터였다.


아무리 강해져도 결국 자신의 이득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


“왔냐. 잘했다. 그래도 요즘 있는 건 중에서는 제일 돈이 되는 거였어.”


하유성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에록이 말했다.


그러나 곧 하유성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파악한 에록은 받은 돈을 들이대면서 회식을 하러 가자느니, 자기도 곧 큰 건수를 물어올 거라느니 호들갑을 떨었다.


“난 괜찮소.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 뿐이니.”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자네는 거물이 될 거잖나. 하루하루 생활에 허덕이는 이런 소시민의 마음도 좀 알아야지.”


마지막까지 아부 아닌 아부를 섞어 말하는 에록을 보고 하유성은 피식 웃었다.


“알겠소. 그놈의 거물 타령. 진짜 거물이 되면 잊지 않을 테니 그만하시오.”


“진짜지? 나중에 꼭 전속 해결사 같은 걸로 써줘야 해?”


결국 지금처럼 심부름꾼을 하겠다는 말 아닌가 싶어 쓴웃음을 지었지만, 하유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러려면 이제 정말 다시 미궁에 가야겠소.”


“그래. 이번 일로 꽤 벌었으니 한동안 다녀오도록 해. 큰 돈 벌어야지.”


“꼭 돈을 위해 가는 건 아니오만···.”


하유성에게 미궁행은 내공 증진과 전투 경험, 돈과 인맥 형성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흥, 어디로 가야 할 진 알지?”


“물론이오. 개척 길드. 통칭 ‘사무소’로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나름대로 미궁 도시에 꽤 적응한 하유성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 모든 임무는 거기 등록되니까, 가서 천천히 찾아봐. 찾는 것도 시간과 돈을 꽤 들여야 하거든.”


“알겠소. 그래서, 그 사무소가 있는 방향이 어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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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화 사무소 24.09.05 68 4 13쪽
» 36화 심부름 24.09.04 69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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